브링 미 백
B. A. 패리스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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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확실히 계속 그 다음장을 향해 손이 넘어가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비밀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나중에는 어떤 식으로 끝날지 궁금해서 계속 읽게된다. 사건이 12년 전 여자친구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과거와 현재를 바쁘게 오가며 주인공인 핀의 숨을 조여오는 전개는 꽤 흥미롭다. 핀이 숨기고 있는 12년 전 실종사건의 비밀,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실종된 여자친구 레일라, 레일라의 언니이자 핀의 새 여자친구 엘런의 복잡한 관계도 모두를 의심하게 만드는데에 한몫을 한다. 간단한 소개글에 "네가 망가져버렸으면 좋겠어. 내가 원하는 대로 다시 조립할 수 있게." 라는 문구를 본 뒤로 '브링 미 백'이 눈에 띌 때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에프엑스의 피노키오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따라따라따따따 짜릿짜릿 할꺼다 궁금투성이의 너 딱 꼼짝마라너 조각조각 따따따 부셔보고 따따따 맘에 들게 널 다시 조립할거야' 갑자기 왜 이 노래가 튀어나오나 싶겠지만 여기서 이걸 본 사람들도 아마 흥얼거리게 될거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넉넉한 시간대를 잡아 흥미롭게 읽기 시작했지만 중간부터는 아쉬운 점이 좀 생겨났다. 핀과 엘런에게 레일라의 실마리를 가지고 협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 많은 부분을 드러내놓은건 아닌지 싶었다. 특히 자매의 어린시절에 대한 부분에서는 거의 대놓고 숨겨진 비밀이 뭔지 알려주는 부분이라 읽는 입장에서는 더이상 혹시나 하고 망설이는 일이 없어졌다. 거기에 마트료시카의 역할은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섬찟한 느낌을 주는 소재로 이용한 것 같아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러시아의 전통인형이긴한데 생김새나 특징이 때에 따라서는 괜히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 점이 '엄마가 섬그늘에-'하는 동요가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나올때 괜히 무섭게 들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섬집아기가 거의 클리셰처럼 쓰이듯이 안에 여러 크기의 인형들이 잔뜩 채워져있는 마트료시카도 전형적인 상징성을 보여준다.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레일라와 엘런의 과거를 보면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너무나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녀들이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핀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핀 역시도 큰 틀에서 보면 과연 레일라를 " 진심으로 사랑했 "던 것이 맞나 싶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엘런을 레일라 대신 만난 것은 분명하지만 핀이 사랑했다고 하는 레일라의 육감적인 몸매, 빨간 머리카락, 녹색이 섞인 갈색 눈동자 같은 것들 말고 그녀의 본질을 바라보았던 건지 궁금하다. 시종일관 핀과 레일라, 엘런이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사랑보다는 굴절된 상처, 고통, 욕망 같은 것들에 더 가깝게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를 떠올린다. '너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하는 가사를.

 

 재밌는 점은 지나고보면 다들 분명하게 레일라 혹은 레일라의 납치범을 두고 미친사람이라고 단언한다는 것이다. 핀과 엘런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특히 루비가 바로 제정신 아닌 사람이라고 하는 부분이 뜻밖에 일반적 반응이라 소설 안에서 갑자기 현실로 확 돌아오게 된다. 핀의 시점에서 누가 무슨 의도로 레일라의 흔적을 남겨두며 접근하는 건지 한참 궁금해하다가 왜 핀은 주변에 알려서 도움받을 생각을 안하고 혼자 나서는 것인가 하고 거리를 두고 읽게 된다. 알고보니 핀의 마음에 걸리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알고보면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물이었던 루비를 사건과 엮는 내용이 많은데 오히려 루비보다 문제 많은 세명의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고서 핀의 친한 형 래리가 더 이상해보였다. 핀이 가진 이상 행동들을 " 무슨 일이야, 인마? " 같은 말로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줄 수 있는걸까. 레일라는 탐탁치 않아하고 엘런은 받아들였다는 것도 찜찜한데 루비와 여행을 떠났다는 것도 의아한 조합이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조금 끼워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남은 듯해서 아쉬웠다. 소재도 파격적이라기 보다는 이정도면 흔하지 않은가 싶고. 다만 계속 궁금하게 남는 것이, 만나는 사람이 갑자기 실종되어 버렸다면 혹은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면 그 사람과 닮은 형제자매와 사랑에 빠지거나 대신해서 만나고 싶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비슷한 타입을 또 찾을 필요가 있을까, 찾더라도 같은 사람이 아니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싶은데 '너 말고 니 언니' 처럼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한사람의 취향이 소나무라 같이 자라고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형제자매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과 같은 성장배경으로 취향도 비슷해서 둘이 한 사람을 똑같이 좋아하게 되는 일 역시 삼각관계의 전통적 공식 중 하나긴 하지만, 실종된 상대 대신 이라는 설정이 쉽게 이해가능한 범위인지 역시나 핀도 제정신 아닌 면이 있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이쯤되면 '조각조각 따따따' 하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조각나는건 네가 아니라 나의 입장이었고, '너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게 과연 사랑 때문이란 말인가, 이게 사랑이냐 하고 묻고싶은 내용이었다. 뒤로 갈수록 아쉽지만 초반에 놓아둔 여러 설정들이 중반까지는 재밌게 이어지므로 여름을 맞아 읽어볼만한 스릴러 물이다. 브링 미 백을 읽고나니 어쩐지 여름엔 러시아로 휴가를 떠나고 싶어진다. 마트료시카를 기념품으로 사오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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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의 방 - 2019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진유라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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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삶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들어갔을 대 그리고 그 삶이 고통스러울 때 그 고통을 준 사람이 개인이 아니라 체제나 거대한 국가일 때, 힘없는 개인은 국가에 대한 분노를 자기 자신으로 돌린다는 사실을 무해는 뒤늦게 깨달았다. 분노의 대상으로 국가는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자기 학대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다. (p.107) "

 

 백반집에 가면 식사 손님들 쪽으로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탈북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나올때가 있다. 아마 주로 노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프로이리라. 언젠가 어떤 테이블에서 혼잣말인듯 들으라고 하는 말인듯 큰소리로 떠들어댔던 말이 문득 머리속에 박혀있다 떠올랐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을 당해낼 수가 없어. 북한 사람들 눈에는 독한 기가 있어.' 특히나 목숨을 내걸고 북한을 벗어나 남한까지 내려온 사람들은 다른 체제나 문화 속에서 어수룩해보일지라도 그 근본에는 더 강하고 굳은 의지가 있어서 쉽게 보면 안된다는 그런 내용의 말이었다. 그래서 북한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남한 젊은이들은 그래서 안된다고 혼을 내기도 하는 말을 두서없이 더 늘어놓았다. 확실히 어색한 방송용 화장과 차림을 하고 앉아있는 그들은 어설퍼보여도 카메라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해보였다. 목숨을 건 저마다의 탈북기도 따라할 엄두가 안나는 내용이어서 노인의 말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었다.

 

 '무해의 방'을 읽고 한동안 멍하니 있다 문득 떠올린 것이 그때의 기억이었다. 바로 저 일이 내 안에서 무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속물적이고 직설적인 경험이었다. 무해는 어떤 사람인가. 책 한 권을 그녀에 대해 읽고서도 무해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삶의 어떤 큰 결단을 내려서 남한으로 온 그녀의 삶에는 확실히 커다란 굴곡이 존재했다. 그녀가 쫑의 죽음을 가장 큰 고통으로 꼽은 남편의 상실과, 소설가가 되겠다는 아들의 선언이 가장 큰 위기로 다가온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삶이 있고 나의 상처와 남의 티끌을 비교해서 판단하여서도 안되지만 내가 보기에도 무해와 무해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는 확연히 다른 뭔가가 존재했다. 그것은 무해의 삶을 읽어낸 나와도 너무나 먼 거리가 존재해 나는 굵고 진한 글씨로 드러날 몇가지 사실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그저 몇번이고 무해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말 밖에 할 것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해의 내면과 과거가 항상 이질적으로 느껴졌는데, 치매라는 병이 그녀를 무너뜨리는 과정만큼은 너무나 남들과 같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각 품고있는 과거가 개인의 삶의 모든 과정을 무차별적으로 지우고 선별하여 재생시키는 병과 만나자 오히려 옅어진다. 법이 아니라 병 앞에서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일까. 무해는 탈북 과거를 가진 여자가 아니라 주전자를 태우고 동네에서 길을 잃고 강아지 밥 주는 일을 잊는 보통의 초로기 치매 환자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무해를 조금은 가깝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자주 떠올렸다. '파과'의 주인공인 할머니 킬러 조각 역시 저항할 수 없는 노화를 겪으며 삶을 바라보는 눈과 태도가 점점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치매를 앓는 소설의 주인공이라 하면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유명하지만 어쩐지 그보다는 '파과'의 조각이 무해와 더 비슷하게 느껴졌다. 비록 무해는 조금 젊은 편이지만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등장하는 것은 반가웠다.

 

 " 되돌아가봤자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이미 혜산에는 없었다. (p.118) "

 

 '무해의 방'에서 가장 눈을 끌었던 문장이다. 무해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할 때 나온 문장이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의 시인의 유명한 시처럼 어떤 의미가 된다는 것이기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어지자 무해가 떠날 수 있는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일까. 혜산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다면 무해가 떠나가는 곳 어디에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다. 무해는 그녀가 탈북자이기 때문에 이방인인것처럼 느낀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어디에서도 심지어 혜산에 남아있었어도 뿌리없는 흔들림을 느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중국 어딘가의 콩과 카스테라 냄새가 나는 아이 페이도 느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쯔와 두 다리가 없는 그녀의 아들이 페이의 뿌리가 되어줄 수 있었을까. 무해가 떠난 곳에서 여자로 태어난 페이는 카스테라 대신 할머니가 사온 색색의 사탕과 초콜릿을 먹으며 무사히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없었을 것 같다.

 

 남겨진 페이를 떠올리면서 무해가 모래에게 하는 말들, 특히 차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잔소리가 한참 애틋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무해의 기억이 더 깊고 복잡하게 뒤섞이면서 모래대신 '페이'하고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해의 방은 그녀의 세계를 축소시킨 모습으로, 또 기억의 여러 부분들을 각기 따로 나누어 둔 내면의 공간으로 해석되었다. 굳게 닫아 잠가두었던 수많은 방 중 어떤 방이 열릴 것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다가, 그녀의 세계가 한칸짜리 방 안에 집어넣어진 듯 갇힌 기분으로 머물기도 했다. 모든 방을 열어본 들 또 한 방에 오래도록 머문 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무해와 그녀 뿐 아닌 그 누구라도 영영 이해할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방이 행성처럼 멀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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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서귤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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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나오기 전에 어떤 제목과 표지로 나왔으면 좋겠을지 설문을 본 적이 있다. 표지야 어피치스러운 분홍분홍한 분위기가 다 비슷했는데, 제목이 후보 중에 하나였던 '너무 많이 사랑하는 습관이 있어' 였으면 했다. 아무래도 심정적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한 서정적인 느낌이길래. 결과적으로는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로 나왔지만 소제목으로 책을 읽다 다시 마주한 문구를 보고 문득 아쉬웠다. 내가 픽한 제목으로 나왔어야 했는데. 나와 같은 마음으로 투표한 국민 프로듀서 여러분들이 함께 아쉬워하고 있으리라. 어쩌면 편집부의 픽이 엉덩이 쪽이어서 편집픽 버프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을 떠올려본다.

 

 이런 류의 책들-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보노보노나 곰돌이 푸의 캐릭터들이 한참 유행으로 나왔던 이 책들의 장르? 구분이 뭘까- 중에서도 어피치는 좀 늦게 나온 편이라 독자들이 서가에서 느낄 피로감에 엉덩이 제목의 더해지면 안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책의 표지 사진과 함께 부정적인 댓글이 써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찜찜했다. 아, 힐링에세이.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이런 힐링에세이 류의 책은 보노보노 뒤로는 딱히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지독했던 싸이월드 시기를 지나며 감성글과는 좀 거리를 두고 있는데,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를 반은 염려되는 마음 반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어피치가 쓴 것은 아니지만 왜 어피치를 달고 나왔는지 알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귤 작가가 인간 어피치로 빙의라도 한 모양인지 어피치스러운 글이었다. 적당히 감성적이고, 또 적당히 유쾌하다. 일상적인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진부하게 흐르는 것 같아도 경쾌한 감칠맛을 묻혀낸다. 유기농으로 차려낸 건강해지는 맛은 아닌데 msg 들어간 분식이나 불량식품을 먹는 느낌으로 은근히 손이 가는 책이다. 어피치의 귀여운 캐릭터들을 곳곳에서 발견하며 한장한장 가볍게 읽다보면 금방 한 권을 다 읽게 된다. 한 꼭지당 분량도 많지 않아서 짬짬이 시간내어 읽기 편했다.

 

 " 내가 너무 많이 사랑하는 건, 말랑말랑 고양이 뱃살, ...중략... 그리고 너의 전부. (p.52)" 

 "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건데, 계속 모른 척하기야? (p.61)"

 이 책의 가장 감성적인 부분이 이런 느낌이라면 알려나. 옮겨 적으면서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볼과 턱의 이음부가 멀어지는 느낌이다. 학생시절 러브장 만들때라면 아마 한 페이지에 어피를 가득 그려넣고 따라 썼을만한 귀한 자료가 되어줬으리라. 요즘 애들은 러브장 같은 거 안 만들겠지. 러브장 아는 사람들 있으려나, 있으면 할매. 이 정도 감성만 잘 넘기면 다른 부분은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거다.

 

 '재회'나 '커피의 마약화에 대한 연구'는 깔끔하게 재밌다. '호그와트 예비 번호 받을 사람들'같은 어색한 느낌이 덜하다. 초반보다 뒤로 갈수록 내용이 더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피치의 세계에 내가 더 익숙해져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은 모르겠고, 맨 뒤에 나와있는 카카오 프렌즈들의 소개를 읽으면서 제이지도 책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들어온 라이언이 왕위계승자 배경까지 달고 센터하는 것도 억울한데 '라이언, 내 곁에 있어줘' 책도 내고, 원년멤버 제이지가 비인기멤이라고 천대받는 사회는 이제 화가 난다 이거에요. 두더지라 무시당하는 건가 싶고. 

 

 누군가에게 러브장 만들어주고 싶을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엉덩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위해서는 사양하겠지만 그래도 귀여운 맛은 있다. 칼퇴하고 집에 와서 샤워한 다음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를 하나 깠을 때 볼만한 것 없는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기보다 '엉덩이'를 집어들어도 좋겠다. 몰입하거나 심각해질 필요없이 몇개씩 조금씩 읽고싶은 만큼만 가볍게 기분 플듯이 읽고 다음날 또 읽을 부분을 남겨두듯이 읽고 싶은 책이다. 책 안의 내용처럼 귀엽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 힐링에세이는 그저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어피치가 귀여웠으니까, 라이언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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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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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 책이었을까. 어디선가 지난해 가장 인기있었던 소설 순위에 올라 있는 것을 봤었던가, 아니면 누군가 동성애를 다룬 소설들 목록을 만들어놓은 것에서 봤었던가. 짐작컨데 전자에 가까울 것이고, 그 뒤로는 어디서 봤다 기억해둔 것인지 잊어버린 채 바닷가에서 수영이나 하는 장면이 있는 소설집인가 하고 집어든 것 같다. 표지가 그렇길래. 그런데 막상 책을 들고 볼일을 보러 나가는 지하철에서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하자 어라, 옆사람의 시선이 좀 신경쓰이는 내용이었다. 귀여운 개불이나 러브주스, 환장하것네, 이거 내거지, 박타는 얘기는 웃기긴한데 아무래도 혼자 있을 때 웃고 싶은 부류라. 찾아보니 2018 교보문고에서 진행한 올해의 소설 1위라는 차트에서 봤나보다.

 

 동성애. 동성애자.가 있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다만 이것이 트렌디함이 된 것은 어딘가 물린다. 오늘 보고 온 공연이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내용인데 의사 역으로 흑인배우가 분하여 공연하는 것을 보며 여러 명도 아니고 단 한 명의 존재가 보란듯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이 영 떨떠름했다. 대관절 피씨하다는 것이 뭐길래. 그동안 소설 안에서 동성애자의 존재가 보통 친구의 위치에 있었다면 이제 화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요즘을 반영하기 위한 도구에서 주체가 되어버린다. 한참 요란한 '~자이툰 파스타'나 '우럭 한 점~' 같은 소설 뿐 아니라 '여름, 스피드'를 채운 것도 동성애다. 이것은 필연적인 등장일까 흐름의 큰 너울일까.   

 

 작가가 커밍아웃한 줄은 모르고 너무 현실적인 것 같아 읽으면서 이건 찐이다, 찐. 하고 생각했었다. 찐이라서 찐내가 풀풀 난 것을. 덩치 있는 타입을 선호하는 것도 일관된 취향으로 몇 편에 걸쳐 나오는데 말로만 듣고 설마했던 취향의 문제라는게 정말이었단 말인가 싶었다. 그 밖에도 어플이나 다니는 동네 길목, 모텔 방 구하기 같은 디테일이 흥미로웠다. 그렇다더니 그런가보네, 하고. 어찌보면 내가 모르는 타인들의 삶과 연애라 낯설수도 있겠지만 읽다보면 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보여질 수 있는 현실성을 구현했나보다 싶은 정도다. 언젠가 아마 결혼한 게이의 이야기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다만 이성애고 동성애고 인기없는 사람의 연애는 참으로 고달프고나 싶은 구질하고 짜잔한 단편들이 이어져서 조금 울적했다. 나는 동성애자고 절연했고 벽장속에 있고 세상 혼자고 스트레이트를 사랑해버렸고, 뭐 이런 내용의 청승이 아니라는 점은 괜찮았는데 박만 타지말고 연애 좀 해라 싶으면 유야무야 끝나버리고, 간만 보지말고 뭣 좀 해봐라 싶으면 아무것도 없이 끝나는 통에 인생 여러모로 쉽지 않구만 하고 덮어지는 요즘의 소설들과 비슷했다. 하긴, 남자도 잘꼬시고 연애도 잘하고 섹스도 잘하는 꽃밭같은 내용만 있다면 그건 야설이 되지 소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연이나 시련없는 소설은 못 본 것 같다.

 

 전체적으로 좋은 인상도 아니었는데 특히나 이곳저곳에서 브레이크를 잡은 건 여기저기 안끼는 곳이 없도록 튀어나오는 일본이다. 안그래도 홍대, 종로 번화가 한복판에 일본풍의 건물을 짓고 술을 팔고, 일본 가정식이니 뭐니 음식이 유행하고, 멀쩡한 우리말 놔두고 모찌니 산도를 쓰면서, 명란이나 덮밥 제대로 된 표현이 있는데도 여기저기 갖다붙이는 일본어에 짜증이 나 있는 중이다. 거기에 쇼와시대 운운하는 바람에 내 안에 숨겨진 독립투사의 피가 끓어 읽으면서 아 정말 꼴보기 싫은 부분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노래 한 곡이 나와도 일본노래가 나오니 공감도 안되고 들어볼 의지도 안생기고 짜게 식었다. 이 부분은 진짜 아쉬웠다.     

 

 가볍게 읽고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길어졌다. 아무래도 이런 점 때문에 그만큼 많이 읽혔겠지 싶다. 다음에 할 얘기는 뭘까, 또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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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의 심리학 -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의 기쁨
가야마 리카 지음, 조찬희 옮김 / 수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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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어느새 나도 나이 들어가고 있고, 한창의 젊음보다 나이듦의 과정에 더 가깝다는 것이 사실이다. '나이듦'. 인간으로서 나이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그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생의 소멸에 가까워지는 과정이기에 그 과정의 결과값이 떠올라 문득 걱정이 앞섰다. 우리의 삶이 지나온 과정들은 그동안 몸집이 더 커지고 기력이 세지고 이치에 밝아지는 미래만을 약속했다. 하지만 젊음의 절정이 지나고 나면 그것들을 서서히 잃게 되는 나의듦이 남는다. 이를테면 지하철의 계단을 오르다 문득 한참을 느린 걸음으로 계단참에 서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을 의식하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는 이 계단이 쉬어갈만큼 힘들어질 시기가 인생의 언젠가 올 것이라는 묘하고 씁쓸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이듦을 두려워만 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아쉽다. 거기엔 내가 놓친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만났다. 

 

 책은 기대보다 좁았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서 흥미로웠다. 노년의 삶은 가을과 같아서 풍요롭게 무르익은 인생을 추수하는- 같은 말로 정리할 수 있는 좀 상투적인 내용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여성의 정년에 대한 주제가 불쑥 나온다. 여성의 정년이라니, 누가 그런 걸 걱정하지? 지금껏 여성의 일이라면 고용불평등, 임금격차, 유리천장, 출산휴가, 경력단절 같은 것이 문제였다. 이 모든 것들을 다 뚫고 나서도 정년마저 걱정하게 된다니. 배신감이 드는 것도 잠시 실제로 조직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50대의 직장 상사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자신이 맡은 업무를 해왔던 그녀지만 조직의 리더가 교체되자 업데이트 되는 업무 프로그램, 달라진 소통방식, 사내 분위기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은근히 소외되고 결국 노골적인 압박에 퇴사하였다. 무심했던, 잊고있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책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어떻게 입을 것인가, 아픈 부모님을 간병하게 되는 상황, 아줌마이지만 아줌마로 보이기 싫은 마음, 사랑과 결혼생활, 노후준비 같은 실제적인 삶을 집어낸다. 어느새 인터넷으로 옷을 구경할때면 티셔츠, 원피스 같은 키워드가 아닌 20대 30대 같은 연령별 키워드를 구분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에 맞는 옷차림에 대한 부분도 내가 나도 모르게 사회적 체면이란 것을 의식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책의 기준에서 아직 젊은 축인 나도 이런데 더 나이든 여성들은 얼마나 더 염두에 두고 자신의 차림을 제한하고 있을까. 아마 조금만 기분을 내어 밝은 색감이거나 유행하는 아이템을 착용했을때 너무 젊게 입은 것 아니야? 나 그런건 젊은애들이나 하는거지 같는 말을 한마디쯤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상적으로는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면 된다고들하지만 조금만 튀는 차림을 하면 시선을 모으는 사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압박을 준다.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수긍하게 되는 문제들도 있었지만 어느 부분은 왜 이런 내용까지 나올까 싶은 것도 있다. 문화차이 때문에 더 그런가 싶은데 연애에 대한 내용 대부분이 거부감 들었다. 유명 소설가가 늙은 남자가 어린 소녀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 글(p.97)을 썼다는 내용을 끌어들여 여성도 나이 상관없이 연애를 꿈꿀 수 있다는 연관을 내리는 것은 의아스럽다. 책에 있는 자세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나이를 한계로 삼지 말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역겹고 제정신 아닌 내용이다. 뒤이어 젊은 남자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 정도로 정리해놓긴 했지만, 남성들이 꿈꾸기 때문에 여성도 욕망할 수 있다고 생각할 내용이 아니었다. 이런 불편함은 또 발견되는데 여자로서의 가치 등을 말하며 동창회 불륜이나 SNS만남 사이트 등을 언급하는 것도 이 책을 찾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정신과 전문의가 쓴 글이기 때문에 실제로 상담받은 사례들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를 만나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그런데 저자가 실제로 엘리트의 길을 걸었고 그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타인의 사례는 비교적 쉽게 말하지만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은 방어적으로 구는 느낌을 받았다. "이 세상에 이성과 섹스만 하고 싶어 하는 여성은 없을 것이다.(p.131)"고 단언하는 문장 역시 갑자기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여성을 제한하는 시선 변화가 어색했다. 여성의 욕구와 욕망을 인정하는 입장을 강조하던 흐름에서 갑자기 돌출된 문장이라 더욱 그랬다. 그동안의 태도라면 여성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자신과 남자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미묘한 느낌을 주는 점이 있어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 것이 있는가 짐작하게 만들었다.

 

 좋은 기회가 닿아 출간 전에 미리 읽어볼 수 있었던 책이라 한 권의 오롯한 책으로 다시 만났을때 계속해서 시선을 끌었었다. 가급적 솔직한 시선으로 책을 소개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책의 다양한 면을 가린 것은 아닌가 싶다. 책의 주제가 신선한 면이 좋았지만 불만족스럽거나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좀 이른 책이었을까, 더 나이들고 난 뒤에 그런 것들도 상쇄될만큼 공감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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