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예술
이선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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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의도대로 감상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처음엔 내가 이렇게 많은 예술 작품들을 알고 있었다니, 새삼스럽게 놀랐지만 바로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걷다가 예술'의 의도였음을 깨닫게 된다. 정말 말 그대로 " 일상에서,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예술'이 되 "어 등장했다.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인지도 모르게 설치되어 있던 작품들이 배경과도 같은 풍경 속에서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야, 예술작품!' 

<해머링 맨(13)>에 대한 감상은 비슷했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라 의식하지 않으면 <해머링 맨>의 움직임조차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지만, 처음 근처 영화관을 찾으며 마주한 <해머링 맨>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천천히 망치질을 하는, 사실은 다른 해머링 맨들 보다는 빠른 움직임일, 그 모습을 보려고 잠시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 첫 인상을 떠올리고 나니 잊고 있던 지나가버린 호기심과 열정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처음 시작이 <해머링 맨>인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동안 쌓아온 시간이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과정이었다면, '걷다가 예술'을 읽는 동안은 익숙함이 낯선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 가치와 의미를 다 전하지 못하고 있었을 다른 작품들에 대한 궁금함과 기대가 커졌다. 단순 재미로 굳이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왔던 <러버 덕(32)>, 전에는 솔직히 불평했던 빨강을 이제 멀리서도 저기가 여의도구나 하게 된 여의도의 <파크원(51)>, 카페 가려고 찾았던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건물(86), 지난 봄 김환기 전을 소개했던 솔올미술관(156)처럼 보고도 몰랐던 예술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특별했다. 소개된 장소들의 사진이 모두 실려있다면 바로 기억을 되살리며 읽기 더 좋았겠지만 직접 검색해서 찾아보아도 큰 어려움이 없다. 

작품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중에 신라호텔 로비에 있던 "박선기의 <조합체 130121>(111)"는 예쁘다는 이유로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어 아쉬웠다. 알고 볼 걸! 조용히 흔들리는 비즈의 반짝임이 시선을 사로잡아 갈 때마다 바라보곤 했지만 여느 샹들리에 장식물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겼는데, 이 또한 작품이라고 하니 갑자기 새삼스럽게 여겨졌다. 먼지라도 쌓이면 청소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이나 했으면서 어쩐지 예사롭지 않더라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다음에 가면 괜히 아는 척 허세도 부리고 싶어지고. 

큰 건물들이 왜 외부나 로비에 조각이나 동상을 세우고 그림을 걸어두는지, 그것들이 길을 걷고, 로비를 지나는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잠시라도 우리의 시선이 머물고 어떤 짧은 인상을 남기는 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술과 문화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남긴다. 바쁘고 무심한 시간 속에서 작품을 알아보고 감상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배경처럼 놓여진 예술작품들이 부재했다면 우리의 도시는 더 삭막할 것은 분명하다. 길에서 마주하는 한국 사람들은 무표정한 굳은 얼굴로 서둘러 경쟁하듯 걷는다고들 하는데, 앞으로는 조금 더 여유로운 태도로 우리 주위의 예술에 한 번 더 시선을 두고 걷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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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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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게 아주 중요하다. 171-택시"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앞에서 당혹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이 사람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어쩌면 그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고 공감이라도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는 있을까 막막했다. 여느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와는 달리 일단 읽어나가기로 했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시, 몇 차례 앞뒤로 돌아가는 동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여러 번 겹을 쌓아올려 만드는 섬세한 결의 디저트를 맛보는 것처럼 '바바라 몰리나르'의 세계도 여러 겹으로 쌓아 보이는 것을 의미로 이어내는 과정을 겪었다. 

이야기 속의 세계는 적대적이다. '적대적이고 불친절한 도시(70)'는 내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세계이다. 나는 그 안에서 헤매고 다른 이들 안에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특히 타인의 시선을 강조하고 하고 있는데 벽에 난 구멍(159), 자신을 엿보는 수천 개의 눈들(92),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느낌(51), 백미러 속 나를 살피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172)처럼 외부 세계를 '나'를 감시하고 적대하는 위협으로 묘사한다. 대부분의 글들에서 보이는 이 외부의 위협, 사람들 뿐 아니라 사물들까지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한다(181)는 고백은 불안정한 심리, 피해의식과 망상의 그늘을 느끼게 한다. 

외부의 적대는 가장 가까운 인물들마저 부정하도록 만든다. 자신 곁의 사람, 아내/남편의 존재가 갑자기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연인이라고 믿었던 이가 낯설어지고, 사랑이 벼락처럼 내리쳐 완벽했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욕실 커튼 뒤에서, 문 틈 사이로 지켜보는 중상과 적의를 향한 저항은 폭력과 자기 파괴의 형태로 대상의 상실, 나의 죽음을 낳는다. 이 적대적인 세계를 피해 인물들은 자신을 찾는 부름, "와줘(70)" 에 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계속해서 늦을까 봐, 혹은 가는 방편을 놓치게 될까봐, 기회를 잃을까봐, 기다리게 만들까봐 초조한 두려움 속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언제?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중(170)"인지 모르지만 인물들은 어디론가 가려하고, 가고 있다. 이 편집증적인 지향점은 '죽음(223)'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 안에서 세계를 상대로 저항한 반격은 실패와 좌절로 반복되는데 독특하게도 '행복' 안에서는 이 결말이 부정적이지만은 않게 그려진다. 그래서 '행복'을 '짐승 우리'와 함께 가장 친절한, 먼저 읽어보도록 권해주고 싶은 단편으로 꼽는다. '짐승 우리'는 느끼기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단편이다. 작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읽는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 있다. 다른 글들을 거쳐오며 이 독특한 서술 방식에 익숙해진 덕분에 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모호함, 난해함이 적고 기승전결이 담겨 있다. 초반 글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짐승 우리'를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독특하다'는 말이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감상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이 독특함을 이기는 매혹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를 읽고 어떤 것들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떤 감각을 공유하고 감응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을테고, 그러니 거의 잊혀져가던 바바라 몰리나르의 글이 다시 출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게 나는 아니어서 약간은 아쉽고 궁금한 마음이다. 자신의 독특함, 남다른 취향이 어디까지 뻗어나가는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 많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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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이는 음의 밤
최지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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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의 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탐한다. 한 시인이 어느 대담에서 시인으로서의 자기 수명이 다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생애 주기처럼 창작에도 시작과 끝이 있는 거였다.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나 휴지기를 맞는 것이다. 10여 년 전 나는 자신만만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빛나는 것들을 쏟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수백 명의 신인이 등장했고 수백 권의 새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예술의 세계는 숲과 같다. 예술가와 예술가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태계를 이룬다. 내가 욕심내는 것은 내게 없는 것들이다. 이제는 그 시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67" 

이제는 다른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문장을 통해 나 역시 저자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 전 굴드에 대한 평전*이 새로 나온 것을 보고 한동안 마음이 술렁였다. 요즘 책을 읽을 때면 샤콘느를 반복해서 듣곤 하는데, 책의 앞머리에 저자는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해 혼자만의 공감대를 쌓았다. 전기를 즐겨 읽는다고 하니 저자에게도 신간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일렁이는 음의 밤'은 최근 읽었던 음악에 대한 에세이 '음악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만'**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감각을 전달하는 점이 특별했다. 음악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소리는 부수적인 배경으로 옅어지고 좀 더 감성적인 시선으로 곡에서 이어지는 삶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점은 소개되는 노래마다 큐알로 직접 노래를 들어볼 수 있게 배려해놓은 것이었다.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소개가 있는 글을 읽을 때면 이해를 위해 찾아보려는 과정에서 집중이 흐트러지는 때가 있어 종종 아쉬웠다. 검색을 하다 메세지를 확인하고, SNS를 들어가보고, 뉴스를 클릭하다 보면 갑자기 한두시간이 지나버리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흐름이 끊기지 않아 좋았다. 가장 먼저 소개된 이승윤의 <폐허가 된다 해도>라는 곡을 들어본 적이 없어 들으면서 읽고 싶단 마음에 굳이 검색해서 첫 곡을 찾아봤었는데, 마지막 장에서 큐알을 발견하고 다음 곡인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부터는 편하게 들으며 읽을 수 있었다. 다른분들도 꼭 각 장의 마지막 큐알을 먼저 찾아 음악과 함께 감상하시길. 

요즘 자주 찾아 들었던 너드 커넥션(61)에 대한 소개도 있는데, 너드 커넥션 곡의 가사는 어쩐지 내 안의 바닥 낮고 깊은 곳에 밀접하게 닿아오려 하는 것만 같다. 그런 점이 좋아서 노래방에 갔을 때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라는 노래를 불렀더니 그 가사를 한동안 조용히 읽어내던 동행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일이 있다. 가사도 가사지만 너무 음이 낮아 잘 못 부르는 실력이 오히려 목이 멘 것처럼 보여 오해를 산 것도 같았다. 오해도 풀리고 <좋은 밤 좋은 꿈>, <그대만 있다면> 같은 노래들이 동행의 재생목록에도 옮겨졌지만 미심쩍은 시선을 풀기 위해 '그런거 아니야' 해야 했던 작은 사건 이후로 그 노래는 혼자서만 흥얼거리게 되었던 일이 있다. 

가족, 오래된 친구, 선배, 기억 속의 후배처럼 저자 개인의 내면에 맺힌 관계들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이태원 참사나 123계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같이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를 찌르는 글들도 있다. 돌아보니 " 지나가버린 시간이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기억이 밀려올 때가 있다. 누군가 살아냈다는 것, 그것은 가끔 커다란 위로가 된다. 136" 는 말이 '일렁이는 음의 밤'들을 관통하고 있는 파장이 아니었나 싶다. 저자의 예민함은 세상과 기민하게 연결되어 있다. " 자주 아픈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을 잘 이해하고 감각한다. 47" 는 시선에서도 느껴졌는데 제 손끝의 거스러미를 더 크게 보게 되는 나와는 다른 면이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연말이 되면 지난 시간들을 갈무리하며 조용한 정리가 필요한 성향의 독자들 마음에 잘 맞는 책이 아닐까 싶다. 올해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각종 시상식이나 음악 프로그램을 틀어두는 대신, 블루투스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시간을 늘렸는데 '일렁이는 음의 밤'은 양쪽 모두를 꽉 채우는 구성이라 좋았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여운에 가장 많이 들었던 곡과 가장 마음에 남는 어떤 날에 놓아두고 싶었던 곡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요즘은 어플이 알아서 가장 많이 들었던 곡들을 묶어서 정리해주고 좋아할만한 곡들을 모아 추천해주곤 하지만 적어두고 보니 내 마음과는 또 달랐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만이 가장 잘 할 수 있음에 음악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렁이는 음의 밤'을 추천한다. 


* [글렌 굴드] 을유문화사 
** [음악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만]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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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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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다 보면 찾아오는 한순간이 있다. 아마도 운명적인, 피할 수 없는 순간. 그때가 그런 순간이었음을 나는 몰랐다. 운명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인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82" 

 솔직하자면 글적인 재미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인권의 길'이라는 다소 무거운 부제 앞에서 재미를 찾는 것도 좀 그렇다 싶지만, 어쨌든 내가 뭔가를 읽는다는 행위에서 기대하는 요소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대학을 보내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인권 운동의 길로 들어선 아들을 만류해보고자 하는 아버지 앞에서 '래군이라는 제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냐며 무리와 어울려서 데모하면서 살라고 이름 지어준 아버지 뜻대로 사는 거(20)'라며 냅다 데모하던 실력을 살려 줄행랑을 놓아버리는 모습에 굳어있던 얼굴이 풀렸다. 무거운 이야기도 고통스러운 이야기도 그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며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풀어내는 실력이, 글빨이 느껴졌다. 원래는 소설가가 되려고 했었다는 스무살 배추장사 청년이 아직 거기 있었다. 

 국에서 쥐꼬리가 나왔다는 소문, 두부조림으로 촉발된 대규모 투쟁(56)은 웃음이 다 나왔다. 부실한 급식에 대한 괴소문은 중학교 때도 비슷하게 있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아무렴 교도소와 비할 것은 아니지만 먹을 것으로 인심을 잃으니 양심수 뿐 아니라 모든 재소자가 투쟁에 합세하게 됐다는 것이 애나 어른이나 싶기도 하고 한국인다운 사유다 싶기도 했다. 더불어 3일 동안 잠 안 재우기 고문 정도는 비일비재했던 한국인의 입장에서 국제 인권 기준을 오히려 당혹스러워 했던 내용(133)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분위기는 2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달라진다. 이끌어가는 힘은 그대로지만 운동권의 길로 들어서는 젊은 청년의 거친 기세는 깊은 상실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의문사 유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웃음이 있던 자리를 눈물이 채운다. 고문 피해자들의 후유증을 볼 때면 실내의 따뜻한 훈기마저 소용없이 어디서든 추위가 느껴졌다. 인권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이 어째서 늘 도망치고 잡히고 맞고 갇혀야하는 것일까, 담을 타고 여장을 하며(302) 경찰을 피해다녔다는 기록을 볼 때면 왜라는 의문이 자꾸만 따라 붙었다. 

 책에는 뉴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던 사건과 이름들, 이런 일이 있었나 싶게 무관심했던 사건과 이름들이 가득했다. 그 모든 흐름 안에 저자가 함께 해왔다는 것이 놀랍고, 차가운 무관심의 편에 자신이 서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모든 희생이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지만 5장에 들어서 마주한 세월호 이야기는 솔직히 더 읽고싶지 않을만큼 충격과 고통이 가라앉지 않아 괴로웠다. 멋모르던 시절 보아온 다른 사건들보다 나이가 찬 뒤에 너무나 어린 수많은 학생들의 참사를 무력히 보기만해야 했던 시간들은 지나치게 또렷하다. 처음 속보를 보았던 날마저 생생한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유가족을 향한 혐오와 매도(344)는 이런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이 진저리나게 만든다.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왜'라는 질문이었다. 결국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은 양쪽 모두에게 오가곤 했다. 그리고 매번 비겁하고 무력하나마 사람의 편에 함께 서는 사람이 되자고 바랐다. 나는 늘 항상 그런 사람이 좋았다. 할 수 있는데 누구나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 자신이 가볍고, 용기가 없으니 그런 사람은 항상 달리 보였다. 교육이라는 이름의 군대 내 기합과 구타를 없앤 박주재 병장(43)같은 사람이 그렇고, 비전향장기수들의 단정하고 말끔한 태도(61)도, 이소선 어머니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저자의 이름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서로서로 무리를 이뤄 사람답게 살자는 群 안에 같은 길 위를 걷자는 앞선 걸음 뒤를 쫓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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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레벨에 잠이 오니?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94
이지은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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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로맨, 너 레이싱 레벨 몇이야?" 198" 

 게임을 해본 적은 별로 없다. 솔직하자면 철봉이의 게임 용어보다 할머니의 고스돕 용어가 더 쉽다. 아정이라는 줄임말에서 아이디 대신 생각이 잠시 정지했다. 아정이 뭐야, 게임하는데 스킨은 왜 필요하지? 새로운 세계는 마치 다른 나라와 같아서 언어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지도 못했다. 언뜻 인터넷에서 보았던 단어들이 이게 다 게임에서 쓰는 말이었다고 싶게 튀어나왔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새삼스러웠다. 그 안에 어떤 매력이 있는지 솟아나는 궁금함을 품고 '그 레벨에 잠이 오니?'를 손에 들고나니 이게 어른의 입장인가 싶었다.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 더 보람되는 활동을 하고 의미있는 관계를 맺자는 다소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예상해봤는데, '렐크 게임 중독 학생을 위한 위플러스 캠프'는 뭔가 수상했다. 교훈은 모르겠고 스릴, 쇼크, 서스펜스가 반겨준다. 캠프는 게임 중독에서 벗어날만한 규정이 아니라 게임에서 해골, 천사, 무사같은 이름을 따오기도 하고 오히려 보상으로 컴퓨터를 할 수 있다는 조건(29)을 내밀기도 했다. 거기다 미션의 보상으로 코코콜라라는 음료를 사서 마실 수 있는 이용권을 주면서 미심쩍음이 점점 더해져만 간다. 이 캠프의 목적은 뭘까, 각자의 이유로 벗어날 수 없는 캠프에 갇혀버린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진실을 알기 위해선 아이들과 함께 캠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각자 이름 대신 닉네임을 정하는 동안 철봉이 차례에서 갑자기 맥이 풀리는 듯 섭섭했다. 철봉이는 왜 철봉이일 수 밖에 없는가. 심지어 초면이나 다름없는 애들이 '너는 특징이 없다(25)'고 말하는 순간 같이 상처 받았다. 사실 나도 학교 다닐 적에 딱히 별명이 없었다. 가끔 이름 대신, 이름보다 더 자주 별명으로 불리는 친구들이 부러웠을 정도로 딱히 별명이랄게 없이 늘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그걸 성인이 되고 나서 어느날 어렸을 때 별명이 뭐였는지 대화하다가 깨달았다. 별명이 없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 자리에서 모인 사람들이 별명을 지어줄까 하다가 결국 딱히 어떤 별명을 붙여야할지 모르겠단 결론을 냈었다. 그때 느꼈던 가벼운 충격이 '나는 존재감이 없다.'는 철봉이의 말과 맞물려 되살아났다. 철봉아, 힘내. 

 없는 존재감을 딛고 전학 간 학교에서 무리수를 던진 철봉이의 사정도, 학대나 다름없이 방치된 알거지의 환경도, 관리와 보호라는 이름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요셉슈타인도, 형과 비교 당하며 엄마에게 잉여라는 말을 듣던 엄크도. 캠프에 온 아이들이 저마다의 사정이 있어 마음이 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카더라'의 이야기는 속을 할퀴는 것만 같았다. 이미 한번 그 앞에 섰는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의 문을 닫아야 하는 아이라니, 근육이 다칠까봐 자세가 나빠질까봐(100) 무용을 위해 해본 적 없던 게임으로 도피한 카더라에게만은 차라리 게임이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게임에 깊이 빠지고,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 전적이 있는 아이들이지만 하나씩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당연히 게임에 중독된 생활은 좋지 않고, 그 안의 폭력성과 선정성에 아이들이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것은 문제적이다. '그 레벨에 잠이 오니?'에서도 현실보다는 가볍지만 패드립이라고 하는 혐오표현/욕설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을 왜 좋아할까, 그 안에서 어떤 것을 발견했기에 몰입하는 것일까, 그게 정말 어른들의 선입견처럼 부정적인 면이 크기만 할까 하는 방향으로도 생각이 뻗어나갔다. 정말 게임을 즐겨하는 청소년에게 '그 레벨에 잠이 오니?'는 어떻게 보일까 공감되는 부분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각자의 이야기와 캠프의 숨겨진 비밀같이 확장된 소재들의 마무리가 조금은 급히 터져나온 탄산의 거품처럼 확 쏟아졌다 사그라들어버린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 폭발을 위해 열심히 캔을 흔들던 전개 과정은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순간을 앞둔 것처럼 흥미롭고 조마조마한 면이 있었다. 어쩌면 결국은 이렇게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끝맺음일지 모른다. 14번 수련원의 슬로 섬 파티원들이 그 이후의 성장이 궁금해졌다. 7년동안 잠들어있었던 이야기가 이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언젠가 이 아이들이 어떤 시간을 거쳐 어른이 되었는지 다시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도 게임을 좋아하는 어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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