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렁이는 음의 밤
최지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 현대인의 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탐한다. 한 시인이 어느 대담에서 시인으로서의 자기 수명이 다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생애 주기처럼 창작에도 시작과 끝이 있는 거였다.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나 휴지기를 맞는 것이다. 10여 년 전 나는 자신만만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빛나는 것들을 쏟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수백 명의 신인이 등장했고 수백 권의 새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예술의 세계는 숲과 같다. 예술가와 예술가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태계를 이룬다. 내가 욕심내는 것은 내게 없는 것들이다. 이제는 그 시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67"
이제는 다른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문장을 통해 나 역시 저자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 전 굴드에 대한 평전*이 새로 나온 것을 보고 한동안 마음이 술렁였다. 요즘 책을 읽을 때면 샤콘느를 반복해서 듣곤 하는데, 책의 앞머리에 저자는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해 혼자만의 공감대를 쌓았다. 전기를 즐겨 읽는다고 하니 저자에게도 신간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일렁이는 음의 밤'은 최근 읽었던 음악에 대한 에세이 '음악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만'**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감각을 전달하는 점이 특별했다. 음악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소리는 부수적인 배경으로 옅어지고 좀 더 감성적인 시선으로 곡에서 이어지는 삶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점은 소개되는 노래마다 큐알로 직접 노래를 들어볼 수 있게 배려해놓은 것이었다.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소개가 있는 글을 읽을 때면 이해를 위해 찾아보려는 과정에서 집중이 흐트러지는 때가 있어 종종 아쉬웠다. 검색을 하다 메세지를 확인하고, SNS를 들어가보고, 뉴스를 클릭하다 보면 갑자기 한두시간이 지나버리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흐름이 끊기지 않아 좋았다. 가장 먼저 소개된 이승윤의 <폐허가 된다 해도>라는 곡을 들어본 적이 없어 들으면서 읽고 싶단 마음에 굳이 검색해서 첫 곡을 찾아봤었는데, 마지막 장에서 큐알을 발견하고 다음 곡인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부터는 편하게 들으며 읽을 수 있었다. 다른분들도 꼭 각 장의 마지막 큐알을 먼저 찾아 음악과 함께 감상하시길.
요즘 자주 찾아 들었던 너드 커넥션(61)에 대한 소개도 있는데, 너드 커넥션 곡의 가사는 어쩐지 내 안의 바닥 낮고 깊은 곳에 밀접하게 닿아오려 하는 것만 같다. 그런 점이 좋아서 노래방에 갔을 때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라는 노래를 불렀더니 그 가사를 한동안 조용히 읽어내던 동행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일이 있다. 가사도 가사지만 너무 음이 낮아 잘 못 부르는 실력이 오히려 목이 멘 것처럼 보여 오해를 산 것도 같았다. 오해도 풀리고 <좋은 밤 좋은 꿈>, <그대만 있다면> 같은 노래들이 동행의 재생목록에도 옮겨졌지만 미심쩍은 시선을 풀기 위해 '그런거 아니야' 해야 했던 작은 사건 이후로 그 노래는 혼자서만 흥얼거리게 되었던 일이 있다.
가족, 오래된 친구, 선배, 기억 속의 후배처럼 저자 개인의 내면에 맺힌 관계들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이태원 참사나 123계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같이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를 찌르는 글들도 있다. 돌아보니 " 지나가버린 시간이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기억이 밀려올 때가 있다. 누군가 살아냈다는 것, 그것은 가끔 커다란 위로가 된다. 136" 는 말이 '일렁이는 음의 밤'들을 관통하고 있는 파장이 아니었나 싶다. 저자의 예민함은 세상과 기민하게 연결되어 있다. " 자주 아픈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을 잘 이해하고 감각한다. 47" 는 시선에서도 느껴졌는데 제 손끝의 거스러미를 더 크게 보게 되는 나와는 다른 면이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연말이 되면 지난 시간들을 갈무리하며 조용한 정리가 필요한 성향의 독자들 마음에 잘 맞는 책이 아닐까 싶다. 올해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각종 시상식이나 음악 프로그램을 틀어두는 대신, 블루투스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시간을 늘렸는데 '일렁이는 음의 밤'은 양쪽 모두를 꽉 채우는 구성이라 좋았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여운에 가장 많이 들었던 곡과 가장 마음에 남는 어떤 날에 놓아두고 싶었던 곡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요즘은 어플이 알아서 가장 많이 들었던 곡들을 묶어서 정리해주고 좋아할만한 곡들을 모아 추천해주곤 하지만 적어두고 보니 내 마음과는 또 달랐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만이 가장 잘 할 수 있음에 음악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렁이는 음의 밤'을 추천한다.
* [글렌 굴드] 을유문화사
** [음악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만]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