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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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다 보면 찾아오는 한순간이 있다. 아마도 운명적인, 피할 수 없는 순간. 그때가 그런 순간이었음을 나는 몰랐다. 운명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인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82" 

 솔직하자면 글적인 재미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인권의 길'이라는 다소 무거운 부제 앞에서 재미를 찾는 것도 좀 그렇다 싶지만, 어쨌든 내가 뭔가를 읽는다는 행위에서 기대하는 요소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대학을 보내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인권 운동의 길로 들어선 아들을 만류해보고자 하는 아버지 앞에서 '래군이라는 제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냐며 무리와 어울려서 데모하면서 살라고 이름 지어준 아버지 뜻대로 사는 거(20)'라며 냅다 데모하던 실력을 살려 줄행랑을 놓아버리는 모습에 굳어있던 얼굴이 풀렸다. 무거운 이야기도 고통스러운 이야기도 그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며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풀어내는 실력이, 글빨이 느껴졌다. 원래는 소설가가 되려고 했었다는 스무살 배추장사 청년이 아직 거기 있었다. 

 국에서 쥐꼬리가 나왔다는 소문, 두부조림으로 촉발된 대규모 투쟁(56)은 웃음이 다 나왔다. 부실한 급식에 대한 괴소문은 중학교 때도 비슷하게 있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아무렴 교도소와 비할 것은 아니지만 먹을 것으로 인심을 잃으니 양심수 뿐 아니라 모든 재소자가 투쟁에 합세하게 됐다는 것이 애나 어른이나 싶기도 하고 한국인다운 사유다 싶기도 했다. 더불어 3일 동안 잠 안 재우기 고문 정도는 비일비재했던 한국인의 입장에서 국제 인권 기준을 오히려 당혹스러워 했던 내용(133)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분위기는 2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달라진다. 이끌어가는 힘은 그대로지만 운동권의 길로 들어서는 젊은 청년의 거친 기세는 깊은 상실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의문사 유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웃음이 있던 자리를 눈물이 채운다. 고문 피해자들의 후유증을 볼 때면 실내의 따뜻한 훈기마저 소용없이 어디서든 추위가 느껴졌다. 인권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이 어째서 늘 도망치고 잡히고 맞고 갇혀야하는 것일까, 담을 타고 여장을 하며(302) 경찰을 피해다녔다는 기록을 볼 때면 왜라는 의문이 자꾸만 따라 붙었다. 

 책에는 뉴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던 사건과 이름들, 이런 일이 있었나 싶게 무관심했던 사건과 이름들이 가득했다. 그 모든 흐름 안에 저자가 함께 해왔다는 것이 놀랍고, 차가운 무관심의 편에 자신이 서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모든 희생이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지만 5장에 들어서 마주한 세월호 이야기는 솔직히 더 읽고싶지 않을만큼 충격과 고통이 가라앉지 않아 괴로웠다. 멋모르던 시절 보아온 다른 사건들보다 나이가 찬 뒤에 너무나 어린 수많은 학생들의 참사를 무력히 보기만해야 했던 시간들은 지나치게 또렷하다. 처음 속보를 보았던 날마저 생생한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유가족을 향한 혐오와 매도(344)는 이런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이 진저리나게 만든다.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왜'라는 질문이었다. 결국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은 양쪽 모두에게 오가곤 했다. 그리고 매번 비겁하고 무력하나마 사람의 편에 함께 서는 사람이 되자고 바랐다. 나는 늘 항상 그런 사람이 좋았다. 할 수 있는데 누구나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 자신이 가볍고, 용기가 없으니 그런 사람은 항상 달리 보였다. 교육이라는 이름의 군대 내 기합과 구타를 없앤 박주재 병장(43)같은 사람이 그렇고, 비전향장기수들의 단정하고 말끔한 태도(61)도, 이소선 어머니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저자의 이름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서로서로 무리를 이뤄 사람답게 살자는 群 안에 같은 길 위를 걷자는 앞선 걸음 뒤를 쫓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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