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다스리는 민주주의 - 정치 없는 치유, 치유 없는 정치를 넘어서
김찬호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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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교양 서적은 항상 책을 앞에 두고 긴장하게 만든다. 책장을 펼쳐봐야 아는 일이지만 짧은 생각으로 담긴 깊이를 재는 것이 벅찰 것이라는 부담이 있다. 다행이도 각 장마다 주제어가 달라지면서 교과 과목이 달라지는 수업을 듣는 듯한 기분으로 '고통을 다스리는 민주주의'를 읽을 수 있었다. 한 권을 통으로 이어낸다는 부담을 덜고 쉬는 시간을 가져가며 읽은 탓에 감상도 매끄럽지 못하지만 쉬운 접근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나눠 읽듯이 다가가도 좋겠다. 

극우가 파생되는 것의 밑바탕에 현대인의 외로움과 소외감이 있다(64)고 짚어냈는데 반면 광장과 집회의 경험은 타인과의 유대,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속감과 참석만으로도 서로 연결되었다는 감각을 남기는 체험(98)으로 새겨졌다고 보고 있다. 정확히 서로 반대되는 지점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대비되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런 대비는 증오와 적개심을 매개로 선동하는 태극기의 광장과 나눔과 연대로 서로를 묶어내는 응원봉의 광장(105)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12.3 이후 나타난 응원봉과 촛불의 연대가 저자에게 큰 인상을 남겼음이 잘 곳곳에 드러나 있지만 한편으로는 겨울밤을 지새우던 키세스와 최애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응원봉의 주체가 지워지고 혐오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실이 마음에 걸린다.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가장 탐탁지 않은 주제 안에 있었는데, 4 정치인의 내용 중 " 다른 분야에 있다가 정계에 들어가 정치인으로 몇 해 활동하고 나면 얼굴이 확 바뀌는 사람들 120" 특히 포악스러운 인상으로 바뀌는 경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내용이다. 일견 웃음이 나는 얘기이지만 실제로 '저 사람 인상이 왜 좀 바뀐 것 같지?' 하는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라 재밌기도 하고, 근거라고는 관상도 과학이다라는 말밖에는 없을 것 같은 주제가 이렇게 보니 관상도 통계라는 주장이 맞는 것 같아 웃기기도 해서 열심히 읽었다. 내면이 외양에 드러나니 좋은 마음으로 늙어가라는 듯한 내용은 '현생의 외모를 전생까지 탓하게 만들어 불교가 제일 밉다'는 말을 남긴 신부님(홍창진 신부님 SBS 3인3색 종교인 대담)의 억울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다. 

사실 가장 접근이 어려웠던 것은 5 교육의 내용이었다. 이 전의 교육 환경이 옳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요즘의 교육 환경이 그보다 더 낫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학교 안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다른 누구도 아닌 교사에게서 나오고 있다. '교실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온전한 만남을 이끌어내(156)'는 것은 교사들이 서로의 잠재력을 북돋고 상호작용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아이들은 세상의 유해함에 쉽게 노출될 수 있게 된 반면, 이에 대한 시비를 가리도록 훈육하기 위한 방편이나 필요성은 그보다 소극적으로 느리게 제시되고 있다. '두려움 시스템(197)'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존중과 내가 아닌 외부에 대한 경외가 기반된 배움이 기본되기 위한 바탕이 절실해보인다. 

지나치게 온건하고 포용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은 지점은 교육 뿐 아니라 " 계엄을 찬성하고 탄핵에 반대한 사람들을 모두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 지지하는 정당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고 공동체도 이룰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186"는 부분에 이르러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교육에서 약간의 생각이 다른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존중할 수 있었는데, 계엄과 탄핵과 관련된 내용이야말로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179)'는 기조로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172)'지만 한 계엄을 해결하기 위해서 온 국민이 필요했던 춥고 지난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보자, 2016년, 2024년 왜 자꾸만 거리로 나와야 하는 사람들이 매번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하는가. 단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른 문제와 계엄과 탄핵은 구분되었으면 했다. 

" 행복에만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는 고통을 회피하기에 급급하고, 고통의 의미를 무시하게 된다.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욱 깊게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좁아진다. 고통은 각성, 창조, 저항의 원천이다. 예술, 철학, 혁명, 연대는 고통에서는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 경험이 제거된 세계에서는 현실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색도 이뤄지지 않는다. 208" 

고통의 부재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젊은 세대는 너무나 많은 압박과 좌절을 통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사실 고통에 대한 예방, 학습이 없이 성장해온 탓에 자신이 받게 되는 고통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안으로 파고들어 단절을 선택하거나 고통의 원인을 외부로 돌려 타인과 세상에 불만을 표출하는 사건이 생겨나고 있다. 미래 세대에게 태어나 겪게 될 고통, 경쟁과 결핍 등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사유가 저출생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낳음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마음의 병(209)마저 취약점이 될까 드러내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고통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회피는 마땅히 겪어가며 극복해나갈 성숙의 과정마저 제거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 정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고통을 줄이는 것이 아닐까. 14" 하는 문장을 떠올린다. 인간사의 필수불가결한 고통을 의미있는 경험과 성장으로 이어 사회 안에서 순기능하도록 다스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방향성이라 본 것이 아닐까.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정치가 그 궁극적 목표에 닿으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민주주의가 자리잡기 위해 '성인을 향해 정진(19)'하려한 시대의 흐름은 분명히 존재해왔다. 이 과정을 지켜본 저자의 솔직한, 그러나 세상을 향한 온기를 잃지 않은 시선이 담긴 '고통을 다스리는 민주주의'를 통해 지난 10여년 간의 세상을 정리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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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예술
이선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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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의도대로 감상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처음엔 내가 이렇게 많은 예술 작품들을 알고 있었다니, 새삼스럽게 놀랐지만 바로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걷다가 예술'의 의도였음을 깨닫게 된다. 정말 말 그대로 " 일상에서,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예술'이 되 "어 등장했다.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인지도 모르게 설치되어 있던 작품들이 배경과도 같은 풍경 속에서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야, 예술작품!' 

<해머링 맨(13)>에 대한 감상은 비슷했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라 의식하지 않으면 <해머링 맨>의 움직임조차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지만, 처음 근처 영화관을 찾으며 마주한 <해머링 맨>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천천히 망치질을 하는, 사실은 다른 해머링 맨들 보다는 빠른 움직임일, 그 모습을 보려고 잠시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 첫 인상을 떠올리고 나니 잊고 있던 지나가버린 호기심과 열정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처음 시작이 <해머링 맨>인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동안 쌓아온 시간이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과정이었다면, '걷다가 예술'을 읽는 동안은 익숙함이 낯선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 가치와 의미를 다 전하지 못하고 있었을 다른 작품들에 대한 궁금함과 기대가 커졌다. 단순 재미로 굳이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왔던 <러버 덕(32)>, 전에는 솔직히 불평했던 빨강을 이제 멀리서도 저기가 여의도구나 하게 된 여의도의 <파크원(51)>, 카페 가려고 찾았던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건물(86), 지난 봄 김환기 전을 소개했던 솔올미술관(156)처럼 보고도 몰랐던 예술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특별했다. 소개된 장소들의 사진이 모두 실려있다면 바로 기억을 되살리며 읽기 더 좋았겠지만 직접 검색해서 찾아보아도 큰 어려움이 없다. 

작품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중에 신라호텔 로비에 있던 "박선기의 <조합체 130121>(111)"는 예쁘다는 이유로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어 아쉬웠다. 알고 볼 걸! 조용히 흔들리는 비즈의 반짝임이 시선을 사로잡아 갈 때마다 바라보곤 했지만 여느 샹들리에 장식물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겼는데, 이 또한 작품이라고 하니 갑자기 새삼스럽게 여겨졌다. 먼지라도 쌓이면 청소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이나 했으면서 어쩐지 예사롭지 않더라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다음에 가면 괜히 아는 척 허세도 부리고 싶어지고. 

큰 건물들이 왜 외부나 로비에 조각이나 동상을 세우고 그림을 걸어두는지, 그것들이 길을 걷고, 로비를 지나는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잠시라도 우리의 시선이 머물고 어떤 짧은 인상을 남기는 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술과 문화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남긴다. 바쁘고 무심한 시간 속에서 작품을 알아보고 감상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배경처럼 놓여진 예술작품들이 부재했다면 우리의 도시는 더 삭막할 것은 분명하다. 길에서 마주하는 한국 사람들은 무표정한 굳은 얼굴로 서둘러 경쟁하듯 걷는다고들 하는데, 앞으로는 조금 더 여유로운 태도로 우리 주위의 예술에 한 번 더 시선을 두고 걷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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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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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게 아주 중요하다. 171-택시"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앞에서 당혹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이 사람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어쩌면 그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고 공감이라도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는 있을까 막막했다. 여느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와는 달리 일단 읽어나가기로 했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시, 몇 차례 앞뒤로 돌아가는 동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여러 번 겹을 쌓아올려 만드는 섬세한 결의 디저트를 맛보는 것처럼 '바바라 몰리나르'의 세계도 여러 겹으로 쌓아 보이는 것을 의미로 이어내는 과정을 겪었다. 

이야기 속의 세계는 적대적이다. '적대적이고 불친절한 도시(70)'는 내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세계이다. 나는 그 안에서 헤매고 다른 이들 안에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특히 타인의 시선을 강조하고 하고 있는데 벽에 난 구멍(159), 자신을 엿보는 수천 개의 눈들(92),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느낌(51), 백미러 속 나를 살피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172)처럼 외부 세계를 '나'를 감시하고 적대하는 위협으로 묘사한다. 대부분의 글들에서 보이는 이 외부의 위협, 사람들 뿐 아니라 사물들까지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한다(181)는 고백은 불안정한 심리, 피해의식과 망상의 그늘을 느끼게 한다. 

외부의 적대는 가장 가까운 인물들마저 부정하도록 만든다. 자신 곁의 사람, 아내/남편의 존재가 갑자기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연인이라고 믿었던 이가 낯설어지고, 사랑이 벼락처럼 내리쳐 완벽했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욕실 커튼 뒤에서, 문 틈 사이로 지켜보는 중상과 적의를 향한 저항은 폭력과 자기 파괴의 형태로 대상의 상실, 나의 죽음을 낳는다. 이 적대적인 세계를 피해 인물들은 자신을 찾는 부름, "와줘(70)" 에 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계속해서 늦을까 봐, 혹은 가는 방편을 놓치게 될까봐, 기회를 잃을까봐, 기다리게 만들까봐 초조한 두려움 속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언제?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중(170)"인지 모르지만 인물들은 어디론가 가려하고, 가고 있다. 이 편집증적인 지향점은 '죽음(223)'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 안에서 세계를 상대로 저항한 반격은 실패와 좌절로 반복되는데 독특하게도 '행복' 안에서는 이 결말이 부정적이지만은 않게 그려진다. 그래서 '행복'을 '짐승 우리'와 함께 가장 친절한, 먼저 읽어보도록 권해주고 싶은 단편으로 꼽는다. '짐승 우리'는 느끼기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단편이다. 작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읽는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 있다. 다른 글들을 거쳐오며 이 독특한 서술 방식에 익숙해진 덕분에 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모호함, 난해함이 적고 기승전결이 담겨 있다. 초반 글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짐승 우리'를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독특하다'는 말이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감상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이 독특함을 이기는 매혹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를 읽고 어떤 것들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떤 감각을 공유하고 감응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을테고, 그러니 거의 잊혀져가던 바바라 몰리나르의 글이 다시 출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게 나는 아니어서 약간은 아쉽고 궁금한 마음이다. 자신의 독특함, 남다른 취향이 어디까지 뻗어나가는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 많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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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이는 음의 밤
최지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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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의 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탐한다. 한 시인이 어느 대담에서 시인으로서의 자기 수명이 다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생애 주기처럼 창작에도 시작과 끝이 있는 거였다.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나 휴지기를 맞는 것이다. 10여 년 전 나는 자신만만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빛나는 것들을 쏟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수백 명의 신인이 등장했고 수백 권의 새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예술의 세계는 숲과 같다. 예술가와 예술가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태계를 이룬다. 내가 욕심내는 것은 내게 없는 것들이다. 이제는 그 시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67" 

이제는 다른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문장을 통해 나 역시 저자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 전 굴드에 대한 평전*이 새로 나온 것을 보고 한동안 마음이 술렁였다. 요즘 책을 읽을 때면 샤콘느를 반복해서 듣곤 하는데, 책의 앞머리에 저자는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해 혼자만의 공감대를 쌓았다. 전기를 즐겨 읽는다고 하니 저자에게도 신간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일렁이는 음의 밤'은 최근 읽었던 음악에 대한 에세이 '음악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만'**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감각을 전달하는 점이 특별했다. 음악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소리는 부수적인 배경으로 옅어지고 좀 더 감성적인 시선으로 곡에서 이어지는 삶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점은 소개되는 노래마다 큐알로 직접 노래를 들어볼 수 있게 배려해놓은 것이었다.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소개가 있는 글을 읽을 때면 이해를 위해 찾아보려는 과정에서 집중이 흐트러지는 때가 있어 종종 아쉬웠다. 검색을 하다 메세지를 확인하고, SNS를 들어가보고, 뉴스를 클릭하다 보면 갑자기 한두시간이 지나버리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흐름이 끊기지 않아 좋았다. 가장 먼저 소개된 이승윤의 <폐허가 된다 해도>라는 곡을 들어본 적이 없어 들으면서 읽고 싶단 마음에 굳이 검색해서 첫 곡을 찾아봤었는데, 마지막 장에서 큐알을 발견하고 다음 곡인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부터는 편하게 들으며 읽을 수 있었다. 다른분들도 꼭 각 장의 마지막 큐알을 먼저 찾아 음악과 함께 감상하시길. 

요즘 자주 찾아 들었던 너드 커넥션(61)에 대한 소개도 있는데, 너드 커넥션 곡의 가사는 어쩐지 내 안의 바닥 낮고 깊은 곳에 밀접하게 닿아오려 하는 것만 같다. 그런 점이 좋아서 노래방에 갔을 때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라는 노래를 불렀더니 그 가사를 한동안 조용히 읽어내던 동행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일이 있다. 가사도 가사지만 너무 음이 낮아 잘 못 부르는 실력이 오히려 목이 멘 것처럼 보여 오해를 산 것도 같았다. 오해도 풀리고 <좋은 밤 좋은 꿈>, <그대만 있다면> 같은 노래들이 동행의 재생목록에도 옮겨졌지만 미심쩍은 시선을 풀기 위해 '그런거 아니야' 해야 했던 작은 사건 이후로 그 노래는 혼자서만 흥얼거리게 되었던 일이 있다. 

가족, 오래된 친구, 선배, 기억 속의 후배처럼 저자 개인의 내면에 맺힌 관계들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이태원 참사나 123계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같이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를 찌르는 글들도 있다. 돌아보니 " 지나가버린 시간이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기억이 밀려올 때가 있다. 누군가 살아냈다는 것, 그것은 가끔 커다란 위로가 된다. 136" 는 말이 '일렁이는 음의 밤'들을 관통하고 있는 파장이 아니었나 싶다. 저자의 예민함은 세상과 기민하게 연결되어 있다. " 자주 아픈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을 잘 이해하고 감각한다. 47" 는 시선에서도 느껴졌는데 제 손끝의 거스러미를 더 크게 보게 되는 나와는 다른 면이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연말이 되면 지난 시간들을 갈무리하며 조용한 정리가 필요한 성향의 독자들 마음에 잘 맞는 책이 아닐까 싶다. 올해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각종 시상식이나 음악 프로그램을 틀어두는 대신, 블루투스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시간을 늘렸는데 '일렁이는 음의 밤'은 양쪽 모두를 꽉 채우는 구성이라 좋았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여운에 가장 많이 들었던 곡과 가장 마음에 남는 어떤 날에 놓아두고 싶었던 곡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요즘은 어플이 알아서 가장 많이 들었던 곡들을 묶어서 정리해주고 좋아할만한 곡들을 모아 추천해주곤 하지만 적어두고 보니 내 마음과는 또 달랐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만이 가장 잘 할 수 있음에 음악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렁이는 음의 밤'을 추천한다. 


* [글렌 굴드] 을유문화사 
** [음악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만]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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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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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다 보면 찾아오는 한순간이 있다. 아마도 운명적인, 피할 수 없는 순간. 그때가 그런 순간이었음을 나는 몰랐다. 운명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인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82" 

 솔직하자면 글적인 재미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인권의 길'이라는 다소 무거운 부제 앞에서 재미를 찾는 것도 좀 그렇다 싶지만, 어쨌든 내가 뭔가를 읽는다는 행위에서 기대하는 요소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대학을 보내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인권 운동의 길로 들어선 아들을 만류해보고자 하는 아버지 앞에서 '래군이라는 제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냐며 무리와 어울려서 데모하면서 살라고 이름 지어준 아버지 뜻대로 사는 거(20)'라며 냅다 데모하던 실력을 살려 줄행랑을 놓아버리는 모습에 굳어있던 얼굴이 풀렸다. 무거운 이야기도 고통스러운 이야기도 그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며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풀어내는 실력이, 글빨이 느껴졌다. 원래는 소설가가 되려고 했었다는 스무살 배추장사 청년이 아직 거기 있었다. 

 국에서 쥐꼬리가 나왔다는 소문, 두부조림으로 촉발된 대규모 투쟁(56)은 웃음이 다 나왔다. 부실한 급식에 대한 괴소문은 중학교 때도 비슷하게 있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아무렴 교도소와 비할 것은 아니지만 먹을 것으로 인심을 잃으니 양심수 뿐 아니라 모든 재소자가 투쟁에 합세하게 됐다는 것이 애나 어른이나 싶기도 하고 한국인다운 사유다 싶기도 했다. 더불어 3일 동안 잠 안 재우기 고문 정도는 비일비재했던 한국인의 입장에서 국제 인권 기준을 오히려 당혹스러워 했던 내용(133)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분위기는 2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달라진다. 이끌어가는 힘은 그대로지만 운동권의 길로 들어서는 젊은 청년의 거친 기세는 깊은 상실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의문사 유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웃음이 있던 자리를 눈물이 채운다. 고문 피해자들의 후유증을 볼 때면 실내의 따뜻한 훈기마저 소용없이 어디서든 추위가 느껴졌다. 인권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이 어째서 늘 도망치고 잡히고 맞고 갇혀야하는 것일까, 담을 타고 여장을 하며(302) 경찰을 피해다녔다는 기록을 볼 때면 왜라는 의문이 자꾸만 따라 붙었다. 

 책에는 뉴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던 사건과 이름들, 이런 일이 있었나 싶게 무관심했던 사건과 이름들이 가득했다. 그 모든 흐름 안에 저자가 함께 해왔다는 것이 놀랍고, 차가운 무관심의 편에 자신이 서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모든 희생이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지만 5장에 들어서 마주한 세월호 이야기는 솔직히 더 읽고싶지 않을만큼 충격과 고통이 가라앉지 않아 괴로웠다. 멋모르던 시절 보아온 다른 사건들보다 나이가 찬 뒤에 너무나 어린 수많은 학생들의 참사를 무력히 보기만해야 했던 시간들은 지나치게 또렷하다. 처음 속보를 보았던 날마저 생생한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유가족을 향한 혐오와 매도(344)는 이런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이 진저리나게 만든다.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왜'라는 질문이었다. 결국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은 양쪽 모두에게 오가곤 했다. 그리고 매번 비겁하고 무력하나마 사람의 편에 함께 서는 사람이 되자고 바랐다. 나는 늘 항상 그런 사람이 좋았다. 할 수 있는데 누구나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 자신이 가볍고, 용기가 없으니 그런 사람은 항상 달리 보였다. 교육이라는 이름의 군대 내 기합과 구타를 없앤 박주재 병장(43)같은 사람이 그렇고, 비전향장기수들의 단정하고 말끔한 태도(61)도, 이소선 어머니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저자의 이름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서로서로 무리를 이뤄 사람답게 살자는 群 안에 같은 길 위를 걷자는 앞선 걸음 뒤를 쫓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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