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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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흥미로웠다. 이 책의 장점은 실전을 외치는 극진공수도처럼, 시중 다른 철학서들과의 차별화로 '현실 쓸모에 집중'했단다. 이는 1장 03 혁신과 성과 부분에서 최근 내가 겪은 실전과 맞닿는다. 지인의 회사에서 들려오는 썰을 듣다보면 그 회사는 원론적인 인사관리의 틀을 그대로 반영해 체계를 잡았단다. 직급호칭파괴, 연차/반차 사용시 상급자 결제가 아닌 스케줄 공유, 차등 성과급 지급 폐지 등등 들을 때마다 전형적인 블랙기업에 몸담은 전력 뿐인 나의 이해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미씽 링크들을 품고 있었는데, 비슷한 내용을 이 책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하나인 근로자의 노동/발전 동기를 보상(보상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성장의 동력으로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연구결과, 아마도 임금과 생산성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이 아닌 개인의 성장, 그를 위한 추진으로 보는 시각이다. 근로자의 입장에선 성장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건데요? 하는 의문이 든다. 매주 월요일 지난 주에 샀던 로또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커피 한 잔을 성수처럼 받들며 출근해야만 하는 직장인들에게 현실 공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 늙어서 성장같은건 됐으니까 그냥 일을 한만큼 보상을 돈으로 달라구요! ...

 

 ... 이렇게 힘차게 외치는 일개미 노동자에게 저자는 칼뱅의 예정설까지 끌어와 "천박한 합리주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베버의 주장이 궤변으로 들릴지도 모른다.(p.79)" 고 재차 강조한다. 하지만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아직도 '노동-보상의 공식'이 사회의 정설로 쓰이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근로자의 성장'이란 주제가 논의의 탁자에 오를 번호표라도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사회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개인의 의식은 변화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 원론적 구조만 끌어와봤자 기업조차 '천박한 합리주의의 피해자들'에게 인류애가 상실될만한 배신만 당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름 재밌게 읽었는데, 이 외에도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일수록 인맥이 넓지 않다'는 제목을 달아놓은 부분은 인간관계 파탄난 사람의 입장에서 읽기도 물리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를 희망차게 바라볼 여지를 준다는데서 좋았다. 하지만 나의 바스라진 인간관계는 자아실현과는 관계없었다. 현실에선 자아실현 잘 된 사람이 인맥도 잘 관리하는 걸로... "악마의 대변인(p.135)"에 대한 내용에선 기본 속성이 회의적인 탓에 회의시간에 참지 못하고 딴지걸어 쓸데없이 일이나 떠안고 정이나 맞던 모난돌이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시키지도 않은 역할을 본능이 주워담았다니 앞으로는 지양해야 할 태도다.

 

 재밌기는 해도 대부분의 내용을 반신반의 했다. 다만 "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이 사회를 이루고 영위하는데 크고 작은 부분 역할(p.4)" 중에서도 가장 작고 작은 부분에 기여하고 있는 나의 철학서 일독이야 별 쓸모 없겠지만, 저자가 역설하는 "철학을 배우지 않고 사회적 지위만 얻"은 "문명을 위협하는 존재, 한마디로 '위험한 존재'가 된(p.6)" 교양없이 천박한 정치가 사업가들이 열심히 돈과 권력을 좇아준 덕분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훌륭히 망가졌는가는 확실히 입증된 탓에 책의 신뢰도는 조금 올라갔다.

 

 하지만 회의에서 본인의 "발언으로 마치 구름 걷히듯 사안을 해결할 실마리를(p.7)" 낼 때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며 놀라고 기쁜 표정으로 물어온다고 묻지도 않은 자기자랑을 드러낸 부분에서는 조금 없던 정도 떨어졌다. 나도 종종 저런 말을 듣곤 하는데 그 경우에 보통 내가 내놓은 생각이 좀 병맛이거나 남 앞에 꺼내놓기 비열한 수를 담고 있을 때 였다. 그 외에는 별다를 것 없는 말을 사회적 립서비스로 추켜세워줄 때다. 저자 본인의 경우도 자의식 빼고 잘 생각해보시길.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저자가 철학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 과거 자행돼 온 잔인한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함을 들었는데, 문득 이 사람 일본인 아니었나? 의구심이 들었다. 그쪽 나라 초계기 그만 날리고 말합시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해도 그 말을 하는 화자가 도덕성을 의심받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없(p.71)"음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꼽았다고 했으니. 애국심으로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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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일님 설연휴 잘 보내시고 늘 건강하소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테일 2019-02-02 20:3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
 

 

 

 

 

 모처럼 영화를 보러 나갔다. 예매해두고 어떤 내용이었는지 한두번 찾아보고는 잊었다. 영화표가 하나 생겨서 무슨 영화를 볼까 하다, 누구와 함께 보기 어려울 것 같은 영화를 일부러 골랐다. 신도림으로 예매했는데 상영관은 단 하나고 겨우 23석의 자리는 금방 사라져갔다. 수많은 상영관들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영화들은, 나도 본 것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일률적이었다. 그게 보통이고 평범한 것일테다.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항상 오랜만에 나왔단 생각을 한다. 어제 나갔어도 오늘 나갈 때가 되면 집 밖 공기의 냄새가 새로우면서도 익숙하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을 오르면서 길가 건물 앞 계단, 빛이 들어선 자리에 작은 구르마를 세워두고 가만히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햇빛이 들어선 자리래도 겨울의 그것이 얼마나 따뜻하려냐마는 구르마 위에 야트막히 모아놓은 폐지를 흘긋 보고는 혼자 막막했다.

 

 버스에 앉아 오래도록 "할머니의 먼 집" 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할머니의 먼 집"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을 끝내려 아흔이 넘으신 할머니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내가 죽는 것도 누가 죽는 것도 너무나 무서운 나는, 언제 죽으려나 아침에 일어나 또 살아있음을 지긋해하는 노년의 삶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알고나는 보이는 것들은 더 무서웠다. 고통스러운 삶이 계속된다는 게 어떤 것일까.

 

 예매한 영화는 "가버나움"이었다. '자인', 출생기록 조차 없는 어쩌면 열두 살인 소년. 소년은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경멸한다. 자신을 낳고 형제들을 낳은 부모를 원망하여 고소하기에 이른다. 자인은 학교도 가지 못한 채 마른 몸을 휘청이며 가족의 생계를 돕는 도구처럼 쓰여진다. 그럼에도 자인은 살아내려 발버둥친다. 날선 눈에 불을 담고 삶이 주는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소년의 몸짓이 애처롭다.

 

 자인은 누구를 상대로도 거릴 것 없이 욕하고 달려든다. 소소한 좀도둑질 정도는 태연히 해내고, 결국엔 사람을 찔러 잡혀들어간다. 자인의 거친 행동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난간에 앉아 가래침을 뱉고 질펀히 욕을 하던 꼬마, 불완전하고 준비되지 않은 보호자 밑에서 천진히 방치되던 플로리다의 '무니'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다시 만난다.

 

 하지만 여행길 골목에서 마주쳤다면 가방 주머니를 확인하고 발걸음을 재우치게 만들 이 각다귀같은 소년도 결국은 아이다. 디즈니랜드로 도망치면 아동보호국 직원을 따돌릴 수 있을거라 믿은 무니처럼, 자인도 커피를 많이 마시면 까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스웨덴에만 가면 내 방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삶이 저절로 주어질 거라 믿는다. 살아내는데 이골이 난 아이도 그 거리에선 더 교활한 어른의 희생물일 뿐이다. 

 

 제대로 된 방도, 음식도, 옷도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자인의 부모는 지독히 가난하다. 남은 식구들을 위해 초경이 시작된 자인의 여동생을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낸다. 그 거리의 많은 소녀들이 그렇게 팔려가 비슷한 삶을 살거나 목숨을 잃는다. 고작 한두살 터울의 오빠만큼도 가족을 챙기려하지 않는 부모는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주시는' 뜻에 따라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한다.

 

 '나를 왜 낳았나, 또 태어날 동생의 삶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자인의 물음이 법정에 퍼질때, 그 아버지는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고 한탄하고 그 어머니는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 입장에 서보지 않은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다. 나를 비난 할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며 눈물 흘린다. 이쯤되면 빈익빈부익부의 구조를 착실히 따르는 세상과 믿지 않는 신의 존재 마저 끌어들여 한숨을 내쉰다.

 

 아이없는 삶을 살려는 이유가 예전엔 아이보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 였다면, 요즘은 아이를 온전히 책임질 수 없다면 아이를 위해서 낳지 않겠다는 선택이 많다. 아이를 좋아하고 가족의 근간을 부부와 그 2세로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해가지 않을 이유겠지만 '가버나움'을 보며 절감했다. 자인의 아빠는 세상에 자신이 태어났다는 증거 -출생신고서류-를 찾는 자인을 때리며 세상에 아무 기록도 없는 유령/기생충과 같은 삶이라 소리지른다.

 

 이는 비단 가난한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처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늘진 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반지하 쪽방촌에서 수급과 반찬 봉사로 삶을 연명하는 독거 노년의 삶도 그러하다. 당장 네이버 포털만 들어가도 노인, 아동, 해외, 동물 카테고리별로 정리된 빈곤 포르노가 개인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기에 충분히 전시되어 있다.

 

 자인의 삶이 특별히 더 고단할 것도 없는 베이루트 거리를 내밀하게 파고들때도 부감하여 조망할때도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차마 울 수 조차 없었다. 영화관 안의 어둠이 사라지고 나면 지금 나를 채운 이 괴로움도 함께 사라질 것을 안다. 당장 내 마음이 아파 눈물이나 조금 흘리고 마는 것이 악어의 눈물과 다를 것 없었다. 실제로 영화가 끝나고 짧은 통로를 걸어나오니 백화점, 호텔과 연결된 나의 세계였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눈물 흘리지 않기를 차라리 잘했다. 이 쾌적하고 풍요로운 배경 안에서 울고 난 얼굴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으니. 그럼에도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영화를 추천한다. 적어도 밖으로 흘러보내지 못한 수분이 한 사람분의 얼룩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더 많은 얼룩이 남으면 언젠가 얼룩을 못 보거나, 그저 가리려하지 않고, 지워야만 될 때가 올테다.   

 

 

 

  할머니의 먼 집 / 아무도 모른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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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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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겹게 얻어먹은 욕과 날려 버린 샷들이 악몽이 되어 찾아왔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라켓을 잡고 코트로 나가야 했다. 라켓을 잡는게 미친 듯이 싫은 날조차 코트 위에 서야 했다. 원치 않는 실패도 있었고 원치 않던 우승도 있었다. 서브가 잘 풀려 넣는 족족 에이스가 되는 날도 있었고, 죽어라 더블 폴트만 하는 날도 있었고, 경기가 꼬이는 날도, 더럽게 운이 나쁜 상대 선수의 불운을 밟고 올라서는 날도 있었다. 그런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사이 어쩌면 앞으로의 삶도 이렇게 허무하지 않을까, 스쳐가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p.50 "

 

 꽤 괜찮은 소설이다. 번역을 거치지 않은 장편을 읽은 것이 오랜만인데 테니스 세계가 낯설지라도 근간이 되는 배경과 심리가 익숙하다보니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읽었다. 한국문학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가끔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다보면 안으로 파고들기만 하는 작은 틀에 지쳐 한국문학은 잘 읽지 않는다는 평이 있었다. 어떤 뜻으로 말하는지 알 것 같지만, 익숙하고 안정적인 배경을 잡힐 듯이 그리며 한 권을 읽고 나니 그래도 한국문학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맛?을 다른 것에서는 보기 어렵다. 누군가는 이 말도 어떤 뜻으로 말한건지 알아주겠지.

 

 초반 사건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인물과 틀을 잡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사건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독자도 함께 시작한다. 쏟아지듯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고만고만한 급식들인데, 특출나게 사건을 추리해나갈만한 인물이 주인공인 것도 아니고 사건의 규모나 동기가 원대한 것도 아니다. 이것이 '안으로 파고드는 작은 틀'로 표현될만한 설정인가 싶은 부분이다. '검은개'는 결국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고, 맞물린 인물들 사이에서 욕망이 이리저리 네트를 옮겨다닌 궤적을 좇아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 면회실의 문이 열리고 감청색 옷들이 어깨를 드밀며 쏟아진다. 일찍 들어와 봤자 제 부모에게 질펀히 욕이나 먹을 것들이 자신을 기다리는 무언가에 들떠 두리번거렸다. 어른 뺨치는 흉악무도한 사고를 치고도 그 속에 젖니도 여물지 못한 애가 들어 있음을 임 변은 이곳에서 확인했다. 장기가 파열될 때까지 급우를 때린 강심장이 제가 기르는 강아지 안부를 묻는가 하면 시멘트를 그대로 굳힌 듯한 근육 덩이가 제 엄마의 가슴에 파묻혀 소리 내어 우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p.180 "

 

 테니스 유망주 소년이 약물과 술에 취해 교통사고 상해 사건을 일으켰다. 피해자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사건은 벌어져있었고 자신의 미래가 송두리채 망가져버린 그 날 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소년의 발버둥을 담고 있다. 감방이나 다름 없는 감별소안에서 소년은 왜 누가 어떻게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을까 생각한다. 무심히 지나보냈던 수많은 신호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무엇 때문이었을지 제 주변에서 들끓고 있던 타인들의 욕망을 찬찬히 돌이켜본다. 이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사건의 진실도 알게 되겠지만, 소년도 어른이 되어버리리라. 

 

 책을 읽고 난 뒤에 '가버나움'이란 영화를 봤다. 감별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에게서 자신을 낳은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 말하는 12살 소년 자인을 겹쳐본다.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의 어림을 수단으로 '처벌 받지 않을 혹은 처벌의 수위가 약할' 범죄를 계산하여 저지른다고 한다. 계산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성년이라는 보호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의지할 것이다. 이런 악의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날 때부터 버려졌다는 '해골'이나 석민우 같은 감별소의 아이들에게서 선악의 구분 앞에 자신을 둔 이기심과 태어나 보고 가진 세상의 악순환을 본다.

 

 그애들이 자연스럽게 임석을 의식하는 것은 본인들은 가져본 적 없는 미래를 손에 잡아본 사람을 무의식 중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지금 한 공간 안에 있더라도 어찌되었든 시작점부터 달랐을 가능성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맡았다. 이 부분에서 주인공인 임석이라는 인물에 반감을 느꼈는데, 지나치게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했던 본인의 탓으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었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그 존재 때문에 불거진 다툼에서 의도가 없었을지언정 임석이라는 인물이 무구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사람의 밑바닥에 두 갈래 길이 있더라. 그것은 아버지의 고해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바닷속처럼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점점 낄낄대던 웃음이 잦아들자 깊은 곳에서 퍼 올린 다음 말이 이어졌다. 두 길 중 하나는 심연이고 다른 하나는 나락이다. 상처를 껴안으면 심연으로 내려가는 거고 발버둥 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지. 빛이 없기는 매한가지나 한쪽은 상처가 벗이 되고 또 다른 한쪽은 어둠이 그 자체로 얼음송곳이 되어 나를 찌른다. 아비는 제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p.167 "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중간에 어릴 적 키우던 황구에 대한 부분이나, 아버지 몰래 투견을 풀어주고 떠나려했던 성구의 행동에서 문득 1미터의 삶을 사는 개들에 대한 연민이 일었다. 우리 대부분의 삶도 자유롭지 못한 채 던지듯 놓아주는 눈 앞의 밥그릇만 핥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계속되는 경기에서 쏟아져오는 공을 받아치며 "앞으로의 삶도 이렇게 허무하지 않을까, 스쳐가듯 그런 생각이 들었" 던 한 소년의 생각처럼. 어떤 분류로 들어갈지 모르겠는데 청소년 소설처럼 느껴졌다. 제 나이의 학생들이 읽는다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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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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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은 딱 세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아주 중요한 세 가지. 그가 말을 하면서 자세를 바꾸고는 아주 단호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첫째, 잠을 잔다. 제대로 자지 않으면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둘째, 먹는다. 먹는 걸 잊어버리면 기운을 낼 수 없습니다. 셋째, 최대한 자주 병원을 벗어난다. 그러지 않으면 점차 머리가 이상해질 겁니다. _ p.49 "

 

나의 감성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혹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생각해본다. 제목부터 감상적인 이 책을 내내 건조한 시선으로 훑어내리면서 조금 답답했다. 두서없이 적혀 내려가는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느낌은 받았지만 깊이 공감하며 몰입하기 어려웠다. 서사에서 상황 전달만이 뚜렷하고 살을 붙여나가는 흐름이 부족했다. 글의 성향으로 본다면 남성독자에게 더 공감을 얻을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아버지'라는 소설이 그러했듯, 부성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어필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마음이 감동으로 물들지 못한 것은 한국식 신파에 지나치게 익숙해서 일지도.

 

 모두의 상황과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결혼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며 연인을 잃고 난 뒤에 발생한 문제를 보니 문득 예전에 어딘가에서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로맨틱한 표현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필요성을 어필한 문구를 본 기억이 났다. 그때는 제법 로맨틱하고 또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표현을 현실적 상황에 대입시킨 결과물이 이 책이겠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작년말 기사로는 우리나라도 동거내지는 사실혼 관계도 법적 가족 인정하는 법제화를 추진시킨다고 하니, 이 책을 읽고서도 결혼이 더 메리트있다고 여겨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나마 조금 마음을 움직인 것은 따로 옮겨온 저 세 가지 주의사항이 주는 현실감이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입맛도 없어지는 병원 생활을 하면서 지키기 어렵지만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 인상적이었다. 머리가 이상해지기 보다는 우울감이 커지거나 알게모르게 체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다. 그나마도 아픈 사람 앞에서 티낼수도 없는 변화이고. 누군가 간병 생활을 하고 있다면 때때로 찾아가 병원밖으로 데리고 나와 바람을 쐬이고 먹을 것을 사주시라. 병원으로 찾아와 위로와 격려를 건네주는 것도 고맙지만 그를 환기시키기엔 조금 부족할 것이다. '환기'는 설령 그가 원치 않더라도 그에게 필요한 일이다. 

 

 간만에 감동적인 책을 읽고 눈과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후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다른 리뷰를 보니 좀 더 깊이 공감하며 감동적으로 읽은 사람들이 많아 이 책을 감상하는데는 그 글들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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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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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넘치는 감정이 고통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사소한 생채기에도 장미 가시에 찔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고, 얼어붙을 것만 같은 겨울밤 옥상에 올라 먼 곳에 켜진 조명등의 점멸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안타까워서 여름의 더위도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것만 못했고, 어느 날 달이 짙게 뜨면 달이 떴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보곤 했다. 내 방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체 책을 펴놓고 아무것도 아닐 감정에 휩싸여 행복했다가 멍하니 울었다. 벌써 이십여년 전이다. 지금은 편하고 좋다. 어느 샌가 생각이 줄고 하루가 너무 짧아 감정안에 잠겨있을 시간도 없어졌다. 많은 것을 잃고 잊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무쳤던 일이 가무룩하니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은 그랬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차마 보내지 못할 밤에 쓴 편지를 서슴없이 보내게 되는 곳이 라디오라는 매체인것 같다. 학생 때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항상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열두시쯤 되어 가는 시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고 사연들은 무엇하나 가볍거나 무례한 것이 없었다. 섬세하고 깊었다. 어떤 날은 내리기 아쉬울만큼 빠져 듣고 어떤 날은 흘려 들으며 창 밖을 바라봤다. 그런데도 그 즈음의 시간을 떠올리면 그때 들었던 디제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를만큼 깊게 남아있다. 늦은 시간의 라디오는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집에 내려가려다 차표를 잘 못 사는 바람에 취소 수수료도 물고 집에 못가고 그저 접시에 코 박고 있다(p.25)"는 사연은 얼마 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짧게 일본을 다녀오는 길에 공항 버스 대기 줄을 잘못 서서 눈 앞에서 버스를 놓친 일이 있다. 내 표를 몇번이나 검수했던 안내 기사분도 나를 제대로 된 줄로 보내주지 않았기에 접수처로 가서 다음 시간으로 표를 바꿔달라 요청해야 했다. 다행이 다음 차 표를 얻었지만 비는 시간동안 허망히 앉아 내 탓인가 자책했던 시간이었다. 내 경우엔 단 한시간 정도의 손해였지만, 엄마를 보러 가려했던 사연자의 심정은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 생각지도 못한 실수와 실망이 점철된 순간들이 공감되면서 사람 사는 일 다 똑같구나 싶었다.

 

 또 하나 공감되는 것은 '혼자'에 대한 부분이었다. (p.88)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혼자 따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눈에 띄었다. 전공 수업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청하지 않았더니 선배, 동기들이 돌아가며 말렸던 일, 혼자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더니 마주치는 지인들마다 왜 혼자 먹냐며 같이 먹겠느냐 물어왔던 일, 보고픈 영화를 기다리다 식당에 들어갔더니 옆 테이블 커플이 혼자 밥을 먹는 것을 보며 수근거렸던 일이 종종 있었다. 지금은 혼자라는 것이 조금 더 유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그때만 해도 혼자 떨어진다는건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였다. 남들과 다르면 '혼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덜 번거롭고 조금 더 자신의 상황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음에도.

 

 이런 것들은 그때는 정말 예민하고 중요한 것 같아도,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혼자해도 괜찮은 일들이 하나씩 늘어나게 되어 익숙해진다. 다만 그때 혼자가 되면 안된다는 남들의 만류에 수업 선택도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 주변의 만류가 날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수업에서 낙제했기 때문에. 그 일을 계기로 내가 하고 싶은 건 내 마음대로 해버리자고 확고히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의 학교생활에서도 그 뒤에도 그 선택은 날 혼자로 만들지 않았다. 혼자는 나의 시간과 취향을 아주 합리적으로 조율할 수 있다. 다만 맛있고 재밌고 좋았고 화났던 부분을 누군가와 나눌 수는 없을테다. 그래 어쩌면 누군가들은 나와 그 시간을 나누고 싶어 나의 혼자를 만류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혼자를 말리는 거추장스러움도 조금은 사랑스럽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저절로 내 할말도 많아진다. 내게도 이런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죄 적어내고 싶다가도 금방 지워버리곤 했다. 떠들고 싶다가도 타인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듣고 싶어졌다. 책장을 다 넘겼을 땐 남은 이야기가 없어 아쉬웠다. 마치 저녁 어스름에 여기저기 불이 켜지는 집들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불빛이 새나오는 창가를 보며 누군가의 삶이 그 안에 담겨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사람으로 가득찬 대중교통 안에서 괴롭다가도 문득 인류에 대한 온기가 잠시간 살아난다. 이 사람들이 다 저 따스한 불빛이 되려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우리가 함께 듣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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