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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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넘치는 감정이 고통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사소한 생채기에도 장미 가시에 찔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고, 얼어붙을 것만 같은 겨울밤 옥상에 올라 먼 곳에 켜진 조명등의 점멸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안타까워서 여름의 더위도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것만 못했고, 어느 날 달이 짙게 뜨면 달이 떴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보곤 했다. 내 방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체 책을 펴놓고 아무것도 아닐 감정에 휩싸여 행복했다가 멍하니 울었다. 벌써 이십여년 전이다. 지금은 편하고 좋다. 어느 샌가 생각이 줄고 하루가 너무 짧아 감정안에 잠겨있을 시간도 없어졌다. 많은 것을 잃고 잊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무쳤던 일이 가무룩하니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은 그랬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차마 보내지 못할 밤에 쓴 편지를 서슴없이 보내게 되는 곳이 라디오라는 매체인것 같다. 학생 때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항상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열두시쯤 되어 가는 시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고 사연들은 무엇하나 가볍거나 무례한 것이 없었다. 섬세하고 깊었다. 어떤 날은 내리기 아쉬울만큼 빠져 듣고 어떤 날은 흘려 들으며 창 밖을 바라봤다. 그런데도 그 즈음의 시간을 떠올리면 그때 들었던 디제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를만큼 깊게 남아있다. 늦은 시간의 라디오는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집에 내려가려다 차표를 잘 못 사는 바람에 취소 수수료도 물고 집에 못가고 그저 접시에 코 박고 있다(p.25)"는 사연은 얼마 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짧게 일본을 다녀오는 길에 공항 버스 대기 줄을 잘못 서서 눈 앞에서 버스를 놓친 일이 있다. 내 표를 몇번이나 검수했던 안내 기사분도 나를 제대로 된 줄로 보내주지 않았기에 접수처로 가서 다음 시간으로 표를 바꿔달라 요청해야 했다. 다행이 다음 차 표를 얻었지만 비는 시간동안 허망히 앉아 내 탓인가 자책했던 시간이었다. 내 경우엔 단 한시간 정도의 손해였지만, 엄마를 보러 가려했던 사연자의 심정은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 생각지도 못한 실수와 실망이 점철된 순간들이 공감되면서 사람 사는 일 다 똑같구나 싶었다.

 

 또 하나 공감되는 것은 '혼자'에 대한 부분이었다. (p.88)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혼자 따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눈에 띄었다. 전공 수업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청하지 않았더니 선배, 동기들이 돌아가며 말렸던 일, 혼자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더니 마주치는 지인들마다 왜 혼자 먹냐며 같이 먹겠느냐 물어왔던 일, 보고픈 영화를 기다리다 식당에 들어갔더니 옆 테이블 커플이 혼자 밥을 먹는 것을 보며 수근거렸던 일이 종종 있었다. 지금은 혼자라는 것이 조금 더 유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그때만 해도 혼자 떨어진다는건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였다. 남들과 다르면 '혼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덜 번거롭고 조금 더 자신의 상황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음에도.

 

 이런 것들은 그때는 정말 예민하고 중요한 것 같아도,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혼자해도 괜찮은 일들이 하나씩 늘어나게 되어 익숙해진다. 다만 그때 혼자가 되면 안된다는 남들의 만류에 수업 선택도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 주변의 만류가 날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수업에서 낙제했기 때문에. 그 일을 계기로 내가 하고 싶은 건 내 마음대로 해버리자고 확고히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의 학교생활에서도 그 뒤에도 그 선택은 날 혼자로 만들지 않았다. 혼자는 나의 시간과 취향을 아주 합리적으로 조율할 수 있다. 다만 맛있고 재밌고 좋았고 화났던 부분을 누군가와 나눌 수는 없을테다. 그래 어쩌면 누군가들은 나와 그 시간을 나누고 싶어 나의 혼자를 만류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혼자를 말리는 거추장스러움도 조금은 사랑스럽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저절로 내 할말도 많아진다. 내게도 이런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죄 적어내고 싶다가도 금방 지워버리곤 했다. 떠들고 싶다가도 타인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듣고 싶어졌다. 책장을 다 넘겼을 땐 남은 이야기가 없어 아쉬웠다. 마치 저녁 어스름에 여기저기 불이 켜지는 집들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불빛이 새나오는 창가를 보며 누군가의 삶이 그 안에 담겨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사람으로 가득찬 대중교통 안에서 괴롭다가도 문득 인류에 대한 온기가 잠시간 살아난다. 이 사람들이 다 저 따스한 불빛이 되려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우리가 함께 듣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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