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스테이 - 세계 18개국 56명 대표 시인의 코로나 프로젝트 시집
김혜순 외 지음, 김태성 외 옮김 / &(앤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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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등의 아랫부분쪽으로 깊은 칼집같은 손상이 나 있는 책을 받았다. 약간의 구겨짐말고는 대체적으로 손상이 있는 책을 받아본 적은 드문데, 하필이면 이 책은 작지만 치명적이고 가려지지 않는 모습을 한 채로 도착한 것이다. 마음이 조금 울적했지만 어쩌겠나 싶었다. 이건 어쩌다 생긴 일이지 대체로 누구의 악의도 잘못도 아니다. 우한폐렴은 몰라도 코로나의 전파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조심조심 손상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책장을 넘기면서 어쩌면 이 책은 그 자체로구나 싶었다.

 

 코로나의 흔적이 너무나 깊고 뚜렷해서 이와 관련된 컨텐츠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코로나 프로젝트 시집'이라는 어색한 말들이 하나로 나란히 늘어서있는 책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18개국 56명의 '전 지구적 연대'를 통한 한 권이라니. 코로나로 인해 외국엘 가지 못하게 된 탓에 한국 바깥의 소식은 뉴스로만 접했는데, 화면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누군가의 문장이 더욱 실감나는 현실로 다가온다. 개인의 삶으로 경험한 디테일과 감정이 녹아들어서 그런걸까.

 

 김소연의 '거짓말처럼'(24)이나 윤일현의 '거리 좁히기'(26)는 같은 경험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지 즉각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스크를 사러 약국에 들렀던 봄과 여름, 혹시 몰라 하는 마음에 가족에게 보내 둔 누룽지 소포까지 어쩜 꼭 같은 사람 사는 모습에 그때 우린 다 불안했고 서로를 염려했구나 기억을 되살렸다. 반면 에드거 바서의 '히포콘더'(74)같은 시들은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아시아를 향한 차별적 시선이 어떤 식으로 드러났던가 민낯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던 모습에 전 지구적 연대라는 말에 냉담해진다.

 

 타미 라이밍 호의 열 가지 질문(153)의 내용이 가장 좋았다. 어떤 것들은 조금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고 어떤 것들은 전혀 상관없이 자신에 대해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몰입이 계속되는 우울이나 불안과 감정을 조금 분리시킬 수 있도록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인생의 마지막 60년을 서른살의 몸이나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은 통속적이면서 매번 흥미로운 선택이다. 저마다의 선택에 확고한 이유도 있을테고. 또 의미심장한 10번 질문도 독특했다.

 

 계속되는 확진자 발생과 연말임에도 더욱 강화되는 거리두기 단계로 피로감이 느껴지는 때다.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때에 읽었다면 위로의 의미가 더욱 컸겠지만, 현상황에서 '지구에서 스테이'는 위로도 되고 부담도 되는 내용이었다. 그때의 불안과 문제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상황으로 20년이 마감되고 21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현실이 새삼 느껴진다. 언젠가 이들이 다시 모여 회고 시집을 내는 날이 서둘러온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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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숙제 - 남들처럼 살면 내 인생도 행복해지는 걸까요?
백원달 지음 / FIKA(피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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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아서 아쉬웠다. 사실 조금 크고 두툼한 책을 실제로 본다면 분량이 적다는 말이 나오는게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읽어보면 짧다. 만화로 되어 있어서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는 점도 이 아쉬움에 한 몫을 한다. '인생의 숙제'에서는 아마 이십대 후반에서 삼심대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한번쯤 느껴봤을 법한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 서른셋 유나의 고민들이 너무나 전형적이라 많은 공감을 사겠지만 그래서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유나의 직장상사인 진숙은 차갑고 무례한 태도로 다른 직원들의 반감을 산다. 유나 역시 그녀에게 폭언을 듣기도 하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강도높은 업무에 치여 여유가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린시절에는 좋아하는 것이, 하고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현실은 그떄와 너무나 멀어져 있다. 진숙만이 아니라 유나가 그동안 만나온 무례하고 자존감을 깎는 타인들은 다르지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삼년쯤 사귄 동갑내기 남자친구 철민과의 사이는 예전같지 않다. 함께 데이트를 하는 동안 철민의 손에서는 핸드폰이 떨어질 줄 모른다. 예전에 두 사람이 좋아했던 것들, 좋았던 감정들도 자꾸만 희석되고 그게 태도와 말에서도 드러날때 이 연애가 이대로 가도 괜찮은가 싶어진다. 그런데 이런 불안감을 해소시키기도 전에 연애가 곧 결혼이 되려는 시기인 두 사람의 현실이 날 것으로 들이밀어진다.
 
 오래된 친구들은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다. SNS로 보는 주변사람들의 일상은 다 괜찮아보이기만 한다.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도 생활과 관심사가 달라지니 대화가 어긋나는 것이 느껴진다. 유나는 사랑을 말하는데 친구들은 조건을 따져 물질적인 것에만 가치를 두는 것 같고, 결혼생활에 대해 불평하다가도 '너도 결혼해'하고 말을 끝맺기도 한다. 함께 시간을 보내도 뭔가를 나눈 것 같지 않다.
 
 이런 짧은 상황들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어릴 적에는 몰랐는데 사회물을 먹다보면 어느새 이런 균열들이 조금씩 그러나 점점 크게 느껴지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인물들이 너무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게 아닌가 싶은데 유나의 시점으로만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조금씩 드러나있어서 그런 모습들이 옳다는 것은 아니어도 사람에게는 다 각자의 삶과 사정이 있는거지 싶어진다.
 
 시를 쓰고 싶다는 어린시절의 꿈에 한걸음 다가가는 유나의 발전과 옆에서 힘이 되주는 미경의 도전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희망적이다. 하지만 함께 돌아보게 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여기서 조금 더 가지를 친 내용이 없이 마무리 된 것은 아쉬웠다. 조금 더 넉넉한 분량으로 다른 인물들의 마음도 다독여주고 끝냈으면 좋았을텐데.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한권으로만 끝내기에는 너무 짧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특히 본인이 상처받은만큼 남에게 상처주는 일을 반복했던 진숙이 미경과의 시간을 통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수아는 어떻게 자신을 돌아보고 일상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할지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마음에 걸리는 인물들이 있었다. 거기에 결혼한 친구들이 하나같이 배려없어 보이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수아만 결혼 앞에서 진지한 감정과 가치를 두고 고민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도 다양한 모습을 가진 인물을 그려내지 못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책을 읽고 이 작품으로 못 다 풀어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작가의 소개를 다시 살펴봤다. 여행기를 담은 작품들이나 연재중이라고 소개된 '작심삼일 운동툰'도 찾아볼까 싶다. 이것들에게선 곳곳에 실어놓은 시를 통해 자신만의 감성을 한껏 담아낸 작가의 이번 책 '인생의 숙제'와는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 같다. 부담없이 재밌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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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
임현주 지음 / 유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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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를 볼 때도 그렇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볼 때 진행자가 남녀의 조합으로 있으면 가끔 물끄러미 기울기를 가늠해볼때가 있다. 주요한 흐름을 전달하는 역할은 누가 하는지,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경력은 어떤지, 그들 사이의 비언어적 신호는 어떤지, 외모는 어떤지, 심지어 안경을 썼는지 아닌지 같은 것들도. 예민한가?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당신의 무심함을 자각해보면 어떨까. 몇번만 살펴봐도 은근하고 확연한 불균형을 감지할 수 있다. 에세이에서 가장 처음 마주치게 된 "잘 버텼어."(26)라는 말과 "언제까지 선택받아야 할까?(37)"의 내용을 읽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읽었다.

 

 틀에 박힌 역할을 사양(243)하는 것처럼 책의 내용은 다소 덜 정리된 분위기였다.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운 부분이지만 어찌보면 그때그때의 솔직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으로도 느껴진다. 책을 읽기 전과 초반부에 아나운서로 생활하면서 풀어내고 싶었던 경험과 생각을 차분한 흐름으로 묶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또 달랐다.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이 내용이 바뀌면서 글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개성이 묻어났다. 콩국수 한 입 때문에도 화내는 면(107)이 있는, 팬 앞에서 어색해하는(222), 여성주의(194)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 싶으면서도 하나같이 매력있었다.

 

 그의 다양한 면모는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아는 지인처럼도 느껴지고, 라오스나 순천 다녀온 내용을 읽다보면 살짝 아쉬운 여행 에세이 속의 젊은 여행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고, '안경'에 대한 얘기를 꺼내들었을때는 또 한동안 매체에서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조명했던 소문의 그 아나운서의 소신을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계속해서 평가하는 눈을 하고 있었던가 싶어 스스로도 그에게 '예쁜 여자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선입견으로 바라본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읽다가 잠깐 멈추고 내 안의 선입견을 찾아내는 시간도 가졌다.

 

 솔직히 최근에 읽은 몇몇 에세이들만큼 피부에 와닿는 공감을 하기는 어려웠다. 슬프게도 세대차이로 오는 엇갈림같았다. 그의 지금을 현재로 같이 나눈다면 좋겠지만 요즘은 중년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자꾸 궁금해진다. 다만 나랑 좀 다르면서도 같다고 생각하며 읽은 것 중 가장 공감을 많이 한 것이 '브래지어 없는 날(177)'의 내용이었다. 겨울이 반가운 이유 중 하나는 노브라여도 크게 불편함이 없다는 것에도 있다. 아무래도 여름처럼 옷이 얇을 때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바깥을 나서기는 어색하다. 누가 뭐래지 않더라도 시선이 달갑지 않은 탓도 크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서기로 마음먹고 실천했다는 것이 또 한층 달라보였다. 대단했다.

 

 솔직히 임현주 아나운서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일화와 이미지만을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좀 가까워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텔레비전에서 만나게 될 때는 어떤 생각을 어떤 태도로 드러내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볼 것 같다. 책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깔끔함을 담아내지는 않았지만 아주 솔직하고 기대 이상으로 거침없는 공개였다는 점은 좋았다. 첫번째 에세이라는 말이 처음엔 어색했는데, 다음을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지로 느껴졌다. 아마 그는 자신의 성장과 원숙해짐을 특유의 솔직함으로 담아낼 것이라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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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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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를 한두권 접하면서 조금씩 신뢰가 쌓이고 있다. 늘 꼽는 장점으로는 읽기 편하다는 것. 이전에 읽었던 시리즈들보다 공리주의를 읽는 것이 조금은 더 어려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묘하게 읽기 좋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을 실생활에서 쓸 때는 다수결로 뭔가를 정할 때 밖에 없었다. 예를들면 점심 메뉴나 모임 날짜 정하는 사소하지만 이상하게 열올리게 되는 문제들. 개인의 만족과 모임 전체의 행복을 연결짓는다는 점은 비슷한데 이 말을 이렇게 써도 되는가는 의문이다. 이런 이유로, 공리주의가 무엇이냐 하면 입이 턱 막히길래 한번 읽어보자고 마음 먹었다. 염려보다 책이 얇아서 다행이었다.

 

 " 반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그가 찾고 있는 행복은, 현재 세상이 돌아가는 꼴로 보아, 절대 온전한 행복이 될 수 없고 불완전한 행복이 되고 말 거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그는 그 불완전함이 참을 만한 것이라면 그것을 참는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재능의 사람은 그런 불완전함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해서 욕망에 충실한 저급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저급한 사람은 그런 불완전함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의식하는 데서 나오는 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약 그 바보 혹은 돼지가 이런 주장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문제를 자기들의 입장이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반면 비교의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은 문제의 양쪽을 본다.(27) "

 

 인간의 쾌락과 행복 기여도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책에서는 그런 경계를 파하기 위한 반박이 이어진다. 돼지와 바보, 인간과 소크라테스로 이분화 된다면 소수의 인간과 소크라테스가 다수의 돼지와 바보들을 이끄는 모양새가 아닐까.* 이런 구조에서 공리주의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사상일까 의문스러웠다. 실제로 '인간'이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는 점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기준으로 지금껏 거쳐온 지구의 모습을 보면 반드시 '지성인이 그가 보기에 낮은 등급의 존재로 추락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26)'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때 생각했던 파레토 법칙과 비슷한 우려가 5장의 '사회적 갈등의 조정자(113)'의 내용에 나온다. 실제적으로 우리 생활에서 논의되고 있는 세금문제같은 예를 들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다.

 

 읽으면서 가장 기대됐던 부분은 3장의 '도덕적 의무감은 선천적인 것인가?(66)'의 내용이었다. 도덕적 의무감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으로 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초등학교 토론 시간에도 주제로 나올만큼 익숙하고 의견이 많이 나뉘는 주제라 여기서는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었다. 책에서는 후천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이라고 해서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고, 공리주의는 동일한 효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놓았다.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주제도 공리주의 도덕을 위한 하나의 길로 묶여있는 점이 아쉬웠다.

 

 분량은 짧아도 내용이 만만하지는 않았는데 작품해설이 아주 재밌었다.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듯이 구성되어 있고 이 상황극을 통해 독자가 품었을만한 생각과 질문을 대변해주면서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준다. 공리주의가 행복과 쾌락을 말하는만큼 그 안의 선과 도덕에 대해 너무 이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돈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도 과연 돈이 '질'로 구분되는 행복에 속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기준을 상회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했다. 얕게 일독해서 생각을 다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공리주의에 대해서 기본을 잡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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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슬픔엔 영양가가 많아요
강지윤 지음 / 봄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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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음이 부족한 어느 벽 너머로 들려오는 옆집의 소음이 가끔 신경 거슬리지 않는 날이 있다. 집이 너무 조용해서 이따금 냉장고 소리가 크게 웅, 울리는 것에도 고개를 돌리게 되는 날이나 늦은 시간 자다가 혼자 깨어 있을 때 그렇다. 서로 다른 높낮이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들려오면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얘기를 나누고 있는걸까 싶기도 하다. '그대의 슬픔엔 영양가가 많아요'를 읽는 시간도 그랬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오히려 내게로 보내지는 신호처럼 느끼지게 만드는 책이다. 이리저리 글자만큼의 빈공간이 있는 느슨한 책은 그게 쉴 곳 같고 숨통같다. 상처와 상실이 빼곡한 것보다야 비워져있는 것이 낫다.

 

 어린시절의 상처, 친구를 잃은 상실 그리고 '이렇게 슬픈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책은 제법 무겁다. 날이 추워지고, 연말이 되고, 밤이 길어지면서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읽으면 공감을 많이 할 것 같은데 혹시나 그 우울이 증폭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감성적인 면도 많고 희망으로 보듬고 있지만 상처와 우울에 대한 내용도 많아서 어쩔 때는 그런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니까 조심스럽다. 나 역시 흐름은 다르더라도 책 안의 키워드가 최근 겪은 개인적인 일과 겹쳐 오랜시간 내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한번 실망을 안겨준 사람을 다시 믿을 수 있을까. 당연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실망을 한번 안겨준 사람 역시 같은 패턴을 바꾸기 어려울 것이고, 바뀌기 힘든 상대의 본질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경계하고 의심할 것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알아온 친구에게 실망을 느끼게 된 일이 있었던 탓에 이 부분에서 한동안 머물러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내가 느끼는 실망이 정당할까, 이런 생각의 변화를 상대방도 느끼고 있을까.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만들어 온 관계에서 실망을 느끼니 회복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아니면 영영 이렇게 망가지게 되는걸까.

 

 이런 고민들 속에서 사람을 믿어 사기를 당한 이야기(157)를 읽으며 사람을 믿을수도 믿지 않을수도 없이 살아가는게 참 어렵구나 싶었다. 저자는 사람을 쉽게 믿는다고 했는데 내심 나는 그렇지 않아,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걸까, 믿지 않기 위해 곁을 두지 않는걸까. 한번 상처받은 일 때문에 '불안을 가진 채 관계를 이어(159)'는 것은 마찬가지였나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 하나 인상깊었던 것은 '왜 종소리가 그리울까요(180)'였는데 어린시절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집에서 바라보는 오르막길쪽으로 아주 오래된 작은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의 첨탑이 집 옥상에서 잘 보이는데 어린시절 저녁무렵이면 교회에서 틀어주는 종소리-멜로디-가 좋아 소리가 들려오면 하던 일도 멈추고 옥상에 올라가 그 소리를 귀기울여 듣다가 내려오곤 했었다. 이맘때면 그 교회에서 첨탑에 색색의 전구를 달아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서 밤이면 한참 추위를 참으며 그 불빛을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그 기억이 떠오르는 내용이었다. 책 사진을 올려두니 지인이 책 표지가 꼭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킨다고 해주었는데 이런 생각을 들여다본듯한 말이라 어쩐지 더욱 호감이 갔다.

 

 빈 곳이 많은 책은 어쩐지 아쉬운데 이 책의 빈곳은 이해가 갔다. 시간이 갈수록 나랑 공감의 폭이 비슷한 사람들의 글을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라고 지나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심리상담전문가의 치유에세이'라는 말이 판에 박힌 것 같을지 모르지만, 공감도 치유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저 공감하고 이해하며 읽어도 좋을 책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드러낸 자신의 조각들을 조금씩 나와 맞춰보는 일이 싫지 않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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