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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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를 한두권 접하면서 조금씩 신뢰가 쌓이고 있다. 늘 꼽는 장점으로는 읽기 편하다는 것. 이전에 읽었던 시리즈들보다 공리주의를 읽는 것이 조금은 더 어려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묘하게 읽기 좋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을 실생활에서 쓸 때는 다수결로 뭔가를 정할 때 밖에 없었다. 예를들면 점심 메뉴나 모임 날짜 정하는 사소하지만 이상하게 열올리게 되는 문제들. 개인의 만족과 모임 전체의 행복을 연결짓는다는 점은 비슷한데 이 말을 이렇게 써도 되는가는 의문이다. 이런 이유로, 공리주의가 무엇이냐 하면 입이 턱 막히길래 한번 읽어보자고 마음 먹었다. 염려보다 책이 얇아서 다행이었다.

 

 " 반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그가 찾고 있는 행복은, 현재 세상이 돌아가는 꼴로 보아, 절대 온전한 행복이 될 수 없고 불완전한 행복이 되고 말 거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그는 그 불완전함이 참을 만한 것이라면 그것을 참는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재능의 사람은 그런 불완전함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해서 욕망에 충실한 저급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저급한 사람은 그런 불완전함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의식하는 데서 나오는 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약 그 바보 혹은 돼지가 이런 주장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문제를 자기들의 입장이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반면 비교의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은 문제의 양쪽을 본다.(27) "

 

 인간의 쾌락과 행복 기여도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책에서는 그런 경계를 파하기 위한 반박이 이어진다. 돼지와 바보, 인간과 소크라테스로 이분화 된다면 소수의 인간과 소크라테스가 다수의 돼지와 바보들을 이끄는 모양새가 아닐까.* 이런 구조에서 공리주의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사상일까 의문스러웠다. 실제로 '인간'이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는 점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기준으로 지금껏 거쳐온 지구의 모습을 보면 반드시 '지성인이 그가 보기에 낮은 등급의 존재로 추락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26)'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때 생각했던 파레토 법칙과 비슷한 우려가 5장의 '사회적 갈등의 조정자(113)'의 내용에 나온다. 실제적으로 우리 생활에서 논의되고 있는 세금문제같은 예를 들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다.

 

 읽으면서 가장 기대됐던 부분은 3장의 '도덕적 의무감은 선천적인 것인가?(66)'의 내용이었다. 도덕적 의무감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으로 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초등학교 토론 시간에도 주제로 나올만큼 익숙하고 의견이 많이 나뉘는 주제라 여기서는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었다. 책에서는 후천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이라고 해서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고, 공리주의는 동일한 효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놓았다.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주제도 공리주의 도덕을 위한 하나의 길로 묶여있는 점이 아쉬웠다.

 

 분량은 짧아도 내용이 만만하지는 않았는데 작품해설이 아주 재밌었다.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듯이 구성되어 있고 이 상황극을 통해 독자가 품었을만한 생각과 질문을 대변해주면서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준다. 공리주의가 행복과 쾌락을 말하는만큼 그 안의 선과 도덕에 대해 너무 이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돈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도 과연 돈이 '질'로 구분되는 행복에 속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기준을 상회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했다. 얕게 일독해서 생각을 다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공리주의에 대해서 기본을 잡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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