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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온도 - 조진국 산문집
조진국 지음 / 해냄 / 2012년 6월
평점 :
내 생애의 드라마 중 하나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소울메이트'의 작가 조진국의 에세이집이다. 소울메이트라는 드라마는 사실 인기있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하지만 매니아 층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임은 틀림없다. 어떤 매니아 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매니아 층의 사랑을 말이다. 처음부터 이 드라마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가 할 무렵 지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별로인데, 니가 보면 분명 좋아할 드라마가 있다"고. 그래서 속으로 어떻게 니가 내 취향에 대해 확신하냐'고 생각하면서 반신반의 이 드라마를 봤다. 그리고 나는 그 지인의 말대로 분명 그 드라마를 좋아하게 되었다. 빈말로라도 별로였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게다가 그 드라마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음악들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음악 마저도 작가 조진국의 선곡이었다고 한다. 세상에 대체, 이런, 남자가, 또!
"당신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얼굴에 싫고 좋은 티가 금방 나고, 하고 싶은 말도 잘하는 편입니다. 농담도 잘하고 입맛도 까다롭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릅니다. 당신이 실은 외로움에 자주 뒤척인다는 것을."
마치 별자리나 혈액형 성격같은 두루뭉실한 얘기다. 누구나 공감할만한 얘기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문자로 마치 번역이라도 해놓은 듯한 이 감정의 색깔은 너무나 쉽게 사람의 마음에 파고든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이 부분을 읽을때, 그 첫 순간 내 코끝 어디선가 초콜렛 냄새가 느껴졌다. 매우 달큰하면서도 씁쓸한 뒷 기운이 빠지지 않은 것 같은 초콜렛 냄새가 느껴지다니. 과장하는 것 같겠지만 진짜여서 달리 할 말이 없다. 덧붙여 내가 그렇게 감성적인 독자도 아님을 밝혀둔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그랬다. 그의 글은 마치 딱 이런 분위기다. 당신 일상의 이런 사소함이 아플거야라고 알아주는 듯한, 사실은 나도 이래. 라고 꺼내놓는 듯한 조곤한 털어놓음. 그가 가진 외로움의 온도를 손을 통해 직접 느끼는 듯한 기분이다.
"그녀는 남편이 간절하게 보고 싶을 때는 무엇보다 그 사람의 냄새가 생각난다고 했다. 평소에 이렇게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똑같이 생활하다가도 그 사람이 문득, 보고 싶다고 했다. 갑자기 툭, 그립다고 했다. 그 사람의 냄새가 너무 그리워서 누군가 푹 하고 가슴을 찌르듯이 아프다고 했다."
깊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냄새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그 첫번째 부분이다. 누군가가 보고싶을때 사진도 분명 그 사람을 추억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사람의 냄새가 주는 힘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마치 그 사람이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냄새를 맡으면서 그 사람이 내 뒤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곁에 없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데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않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나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진다. 상실감이 조금은 상쇄된다. 슬픔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움, 상실감, 상처처럼 남은 슬픔은 일상 곳곳에 숨겨놓은 보물쪽지처럼 의외의 곳에서 툭툭 터져나온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이 발견하지 않으려고 돌아갈수록 더 많은 곳에서 찾게 된다. 그 아픔을 견뎌내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그녀는 알뜨랑 비누 냄새가 좋다고 했다. 옛날에 자기 하나밖에 모르는 잘생기고 우직한 남자가 있었다는 회상으로 이야기는 시작됐다. 그 사람에게선 늘 알뜨랑 냄새가 났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알뜨랑이었어. 샴푸가 뭔지, 린스가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남자였지. 그래서 더 그 사람이 좋았어. 겨울에는 꼭 내 손을 깍지 끼고 외투에 넣고 다녔는데 그러면 집에 돌아와서도 내 손에 그 냄새가 배어 있었어."
마치, '젊은 느티나무'를 떠오르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하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그 풋풋하고 아름다운 소설. 사랑해마지 않는 그 소설. 사랑하는 대상의 냄새란 것은 이렇게도 각별한 것인가보다. 상대방의 냄새가 배어들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상대방의 냄새 면면을 맡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만의 냄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역시나, 아름답다. 차마 풀어내기 아까울 정도로. 누구에게나 자기만 살며시 음미할 생의 가장 달콤한 부분이 있다. 공유하기 조차 아까운.
"지금껏 내가 맺어온 관계도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이 변한 거 같아, 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내 감정이 먼저 퇴색되고 식어버렸던 것이다. 다만 나쁜 인간이 되는 게 싫어서 빠져나갈 변명 거리를 상대에게 찾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친구 A와의 일과도 비슷한 것 같아 죄책감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녀는 굉장히, 깨어질 듯한, 약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감성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초저녁 하늘 끝에 뜬 달빛이 너무나 예쁘다며 나를 찾아오는 소녀였고, 약간 들뜬 허스킨한 목소리로 조잘거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너무 좋고, 싫어하는 것은 너무 싫다고 표현하곤 하는 소녀였다. 그런 그녀가 가진 감성과 약간의 고집스러움,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에 내가 속해있다는 안정감을 나도 매우 좋아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더이상 소녀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녀와 오랫만에 다시 만나게 된 일이 있었는데, 달빛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내 말에 전처럼 달뜬 목소리로 화답하는 그녀가 예전의 그녀가 아니게 된 것만 같아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가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은 아닐까.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진국의 에세이는 내밀하다면 내밀하고, 뭔가가 잔뜩 숨겨져 있는 것 같다면 또 그런 것 같은 느낌이다. 전부 다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것은 삼켜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전해주는 감성의 색채나 온도만은 어째서인지 제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그의 글도 좋지만, 그가 선보일 드라마도 기대된다. 소울메이트 시즌 2를 애타게 기다렸으나, 아직 소식이 없음이 안타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앞으로 좋은 소식이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