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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백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백영옥 작가의 전작들 이름을 들어봤다. 들어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트렌디한 느낌의 유명한 책들이었다. 그런데 읽어보지는 못했다. 백영옥 작가의 글을 처음 본 것이라 생각 외의 부분들을 많이 발견했다. 제목만으로는, 꽤 무거운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가볍고 또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아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라는 제목과 소재가 매우 개성있어 인상적이다. 겉표지가 매우 화려해서 속도 그런 느낌일거라 생각했는데 속은 또 단정한 모습이라 의외였다. 책의 내적으로 외적으로 생각 외의 면을 발견하게 되는 책이다.
제목이 곧 내용이 되는 책이다. 실연한 남녀들이 잔뜩 나오는 책이다. 마치 이 책의 등장인물로 이름이라도 한 번 나오기 위한 서류전형에 최근 실연했을 것. 이라는 목록이라도 한 줄 들어가 있는 듯이 말이다. 아마, 이 책을 선택하는 독자 자격에도 한번쯤은 실연해보았을 것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을 것만 같은 책이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무려 일곱시의 조찬 모임에 굳이 실연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려는 사디스틱한 마음이 아니고서야. 하지만, 우리의 독자들은 아마 모두 실연을 해봤을 것이다.
"실연의 흔적이 남긴 것들은 어째서 이토록 반짝이는 걸까. 이미 죽어버린 후에도 이 빛들은 왜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걸까. 죽어가는 역에 몰입한 발레리나의 눈빛에서 가장 큰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과 비슷한 걸까."
연인과 반짝임에 대한 명구절이 있는 드라마는 '내 이름은 김삼순'일 것이다. 한 번 보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드라마. 거기서 려원이 마음이 변한 현빈에게 이런 말을 한다. 지금 그 사람이 반짝여보일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와 나 사이의 반짝거림이 사라졌듯이 그 사람도 반짝임이 없어질거라고. 그래도 그 사람에게 갈거냐고. 이 책에서도 반짝임을 말한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반짝임이 아니라, 사랑이 끝남의 반짝임을 말한다. 마치, 죽기 전에 한 번 낸다는 백조의 울음처럼, 스러지기 직전 그 마지막 반짝임이 어째서 그토록 반짝이며 상처입은 가슴을 비추고 있는 것인지 묻는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 말고는 큰 공감은 하지 못했다. 실연의 흔적은 반짝이지 않고 시뻘건 생채기를 그냥 내보인 채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상처같은 느낌이다. 너무 크고, 또 흉이 남을까봐 나로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누군가 전문적인 사람에게 가서 보이고 수술이라도 받아야 나을 수 있는 상처처럼 느껴지는 실연을, 죽어버린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반짝임으로 표현한 것이 나와 다른 점이라 인상적이다. 모두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 단면 중 하나를 서로 맞대어 본 기분이다.
" "전 그냥 애인을 잃은 게 아니에요. 지훈이는 저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이었고, 우린 같은 학번 친구이기도 해요.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MT를 갔고, 취업 준비를 했어요. 함께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죠. 지훈이는 제가 가장 힘들 때 아빠나 엄마처럼 늘 제 곁에 있었어요. ...중략... 퇴근길에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가판대 앞에 서서 잡지를 팔고 있는 나이 든 아저씨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걸 알게 됐어요. 지훈이를 통과하지 않고 제 청춘을 이해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전 정말 고아가 된 거예요. " "
한 사람과 오래도록 만나다보면 그런 일이 생긴다. 마치 한 사람 몫의 추억을 그 사람과 나눠가진 것처럼, 반쪽을 떼어내면 온전치 못하게 되는 물건을 서로 한쪽씩 맡아두고 있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이별이 더 아프단 구절을 본 것 같다. 오랜 시간을 두고 만나면 여러 감정이 겹겹이 쌓인다. 겹겹이 쌓인 감정은 선명하지도 않고, 어느 한 가지 감정만이 도드라지지도 않는다. 대신 더 무겁고, 여러가지 빛과 형태를 가지고 의미를 달리하게 된다. 이 부분을 읽고나니, 오래도록 만난 사람과는 헤어지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잃었다는 것만으로 고아가 된 기분이 되어버린다니. 시간이 참 무섭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트렌드한 글을 쓰기도 하고, 가벼우면서도 재미있는 톡톡 튀는 문장들도 많았고, 사강에 대해 언급한 감성은 약간 8,90년대 분위기도 났는데, 사진으로 보니 꽤 미인이다. 작가의 신작을 읽고 오후 일곱시의 모임이 있다고 해서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됐다.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