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지금쯤 기분좋게 취해있을것이다. 새로운 날로 바뀐지 1시간 30분정도 지났으니 취중에도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택시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도착하면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것을 서너번만에야 성공해서 들어올것이고, 아무리 취한 상태라도 욕실에 들어가 샤워는 꼭 하고 잠이 들겠지...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다. 아니...자상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성격이 섬세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여자와 아이들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라서 나와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대부분 흔쾌히, 그리고 빠르게 들어주었다. 결혼 후 10여년간을 죽 그렇게...
하지만 남편의 자상함은 2년전 큰 회사로 옮기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회사에 빼앗기고 있다.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서서 일찍 와야 밤 9시, 대부분은 밤 12시가 넘어서 퇴근하기 일쑤고 오늘처럼 심의가 있는 날은 통과해도 술, 못해도 술이니 새벽 2시나 3시는 돼야 들어올 것이다.
큰 회사로 옮길 기회가 왔을 때 옮기는게 좋겠다고 간절히 원했던것은 바로 나였다.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1년 동안 못 받은 적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때는 주말이면 늘 우리 가족 넷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회사에서 매일 안부전화하고, 주말에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함께 볼 영화를 고르고, 2주에 한 번은 시댁에 가서 저녁을 먹고 오곤 하는 소소한 일상이 지금 생각해 보니 다 월급은 제 때 못 주지만 퇴근시간은 칼같은 회사에 다녀서 가능한 일이었던것이다.
지금은 월급때문에 마음 졸이는 일은 없다. 하지만 남편은 이제 나에게 자주 전화하지 않는다. 오늘 같은 날이면 술취한 남편이 언제나 들어올 것인가...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볼 때나 전시회를 갈 때, 심지어는 시댁에 갈 때조차 나와 아이들 이렇게 셋만 함께 할 때가 잦아졌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자상하다. 그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상하게 해 줄 수 있는 시간이 없을 뿐... 월급 걱정 없는 회사에서 몸이 부서져라 돈을 벌면서도 자신의 여자와 아이들에게 내어줄 시간 없음에 늘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사는 남편의 자상함이 나는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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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속마음 :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몇 신데 아직도 안 들어오고...현관 문 못 열면 그냥 문고리를 확~ 걸어버릴까보다... 핸드폰은 놔뒀다 뭐하는거야... 걱정안하게 전화라도 해주지...아님, 전활 잘 받던가! 이번 주에도 시댁에 셋만 가게 하면 가만 안 놔 둔다... 우띠.....아~~월급도 많이 주고 퇴근도 칼같이 하게 하는 회사 어디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