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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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28>이 나오자마자 단박에 화제에 올랐다. 이미 2년 여전 <7년의 밤>을 통해서 "한 남자는 딸의 복수를 꿈꾸고, 한 남자는 아들의 목숨을 지키려 한다"는 플롯 아래, 스릴러 구도로 풀어나가며 인간 군상과 본질에 대해서 통찰하는 이야기를 전해준 바 있다. 이번엔 좀 더 심화시켜 우울과 절망이 지배하는 인간의 구원과 잔혹한 리얼리티를 구사하는 장기를 발휘하며 또 한번 주목을 끈다. 잔혹은 감염 바이러스로 인해 '재난'의 요소로 만들어지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리얼리티를 구현하며 독자들을 생생한 화양의 현장으로 인도한다. 그 속엔 사람들만의 사투가 있는 게 아니다. '개'들도 나온다. 목숨을 앗아가는 '빨간 눈'의 괴질은 '인수공통전염병'으로 귀결되고,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온 개들이 살처분돼 가축처럼 생매장 당한다. 그리고 개들의 우두머리 늑대개 '링고'는 인간들을 향해 가열한 '하울링'을 울부짖는다.

장편소설 <28>은 '재난'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흔한 설정이면서도 어김없이 '바이러스' 코드가 들어가 있다.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나 인재가 아닌, 감염체에 의한 재난으로 잔혹한 리얼리티를 구사한다. 주요 인물은 5명 정도다. 과거에 알래스카에서 개썰매 경주를 하다가 화이트아웃에 갇혀서 썰매개들을 잃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유기동물센터 '드림랜드'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서재형, 사회부 여기자로 익명의 제보를 받고 드림랜드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가 재조사 과정에서 서재형의 진심을 알고 사랑하게 된 김윤주, '빨간 눈'의 괴질이 휩쓸고간 고도 화양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간호사 노수진과 소방구조대원 한기준, 그리고 감염내과 과장 박남철과 그의 아들 싸이코패스 살인마 박동해까지, 이런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층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펼친다. 여기에 서재형이 아끼던 '스타와 쿠키'라는 커다란 반려견과 늑대개 '링고'가 의인화돼 1인의 시점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바이러스 재난의 표피와 개와 인간의 내피를 갖춘 '28', 결국 구원 뿐인가..

사실 이야기 자체는 전체적으로 '바이러스 재난'이 관통하고 있지만, 여기선 감염체에 대한 어떤 정보나 발원지 색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전염병의 역학관계 분석이나 백신의 개발과 같은 '구원투수로서의 과학'이 아닌,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가는 삶의 폐허를 어떤 휴머니즘적 기대도 없이, 처절한 리얼리티 시선으로 그려낼 뿐이다. 재난의 한복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방도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예기치 못하게 주인공을 죽이면서까지 참혹함을 보인다. 5명 중 누가 죽고 살아 남았을까. 또 늑대개 '링고'는 누구를 조준하며 인간들에게 흉포한 이빨을 드러냈을까. (신간인 점을 감안해 내용 및 스포일러는 자제한다.)

'28'이 다소 독특한 건, 바이러스 재난의 흔한 양태를 띄면서 인간의 사투를 그리고 있지만, '개들'이 은근히 많이 나와서 색다른 분위기를 전달한다. 400여 페이지가 훌쩍 넘는 전체 텍스트에서 1/3 정도를 개 이야기에 할애할 정도로, 작가 정유정은 반려동물에 대한 애착을 은연 중에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개들의 이야기에 스토리는 잠시 멈추듯 침잠되고 쭉쭉 나가질 못한다. 초반부터 잘 안 읽히는 것도 이것 때문일지도. 누가 주인공인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특히 과거 썰매개를 잃었던 서재형의 트라우마엔 이런 개들이 자리잡고 있어 그의 이야기에서 더욱 심화된다. 개들의 이야기만 아니라면, '인수공통전염병'으로 전면 통제되고 무간지옥이 되버린 고도 화양시의 묘사는 영화를 보듯 생생 그 자체다. 일종의 이종배합으로 바이러스 재난의 표피에 개와 인간의 내피가 결합된 조우 및 사투인 것이다.

책 표지 뒷면에 "잔혹한 리얼리티 속에 숨겨진 구원의 상징과 생존을 향한 뜨거운 갈망"이라는 문학적 수사로 이 소설을 빛내고 있다. 크게 이견은 없다. 잔혹한 리얼리티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발현된 ‘빨간 눈’ 괴질의 창궐이 가져다주는 재난적인 요소이며, 숨겨진 구원은 자신이 증오하고 혐오하던 대상에 대한 역설로 다가오며, 생존을 향한 갈망은 말 그대로 무간지옥이 돼버린 그 곳 ‘화양’에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투로써, 소설 ‘28’이 그리고자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이거고, 이 핵심은 한 번도 끈을 놓지 못하고 관류하고 있다. 하지만 텍스트가 부여하는 의미로써 종국엔 '한 인간의 절실한 생의 의미'라는 아젠다는 다소 부풀려진 느낌이다. 가장 증오했던 대상을 구원하고, 가장 혐오했던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역설이라는 표현 조차도 일종의 수사적 관점으로 다가온다.

재난의 리얼리티에서 무엇을 구원하고 바라는가. 오로지 살고자 바둥되는 사투만이 있을 뿐이다. '우울과 절망'이 내재된 코드로 천착해온 정유정 작가 특유의 소설관이 들어가면서 '28'은 인간애에 대한 담론처럼 변모되는 것이다. 결국 재난을 해결하는 자는 없고, 그냥 속절없이 당하는 참혹한 죽음으로 답보된 구원에 대한 갈망이었나. 다시 한 번 숙고할 대목이다. 그렇다고 어려운 소설은 아니다. 분명 재난의 요소로 인해 대중취합적인 코드가 다분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특유의 스타일을 놓치 않았다. '7년의 밤'처럼. 그것이 이 소설의 호불호 지점이 아닐까. 어느 게 호에 속할지는 각자 독자들의 몫이다. 

ps : 왜 제목이 '28'인가? 현대적 감각의 좀비물 <28일 후>와 <28주 후>에서 제목만 따온 것일까?!
정유정 작가에게 가장 궁금하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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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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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때 전설의 무술배우이자 스타였던 '이소룡'을 닮고자 무던히도 애쓴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짝퉁인생으로 점철돼 희비극이 교차하는 극적 요소를 가미해 기적 같은 일대기로 그렸으니 장편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다. 2004년 <고래>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최근 동명의 영화 개봉을 앞둔 <고령화 가족>의 작가 천명관의 최신작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식 근대화의 압축 성장을 거치며 평범한 개인들이 고달픈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천명관 특유의 흡인력 있는 화법으로 담아내며 영화 같은 재미까지 선사한다. 색다른 점은 보통의 3인칭 시점이 아닌, 작중 화자인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삼촌 '권도운'의 이야기로써 70년대 영웅의 상징 '이소룡'에 대한 추억으로 명징되며 풀어나간다. 그것이 이 소설의 플롯이자 관통하는 핵심이다. 

삼촌은 이소룡을 단순히 좋아하는 차원이 아닌 그를 신으로 섬길 정도로 집착하고 애착했다. 그런 이소룡이 73년 7월에 돌연 죽었다.(사인에 대해선 아직도 설들이 많다)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 깡촌의 두메산골 학촌까지 타전된 부고에 삼촌은 모든 활력을 잃고 말았다. 나름의 추모제를 지낸다며 ‘나’와 형, 그리고 나의 친구 종태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가 이소룡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사인은 무엇인지 중요치 않았다. 삼촌은 이젠 이소룡을 신으로 모시게 될 터니까.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됐고, 이런 이소룡의 죽음으로 시발된 삼촌의 짝퉁인생은 그렇게 펼쳐졌으니, 이소룡에 의해 탄생된 삼촌만의 인생유랑극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하겠다. 즉, 소설 속 이소룡과 삼촌 권도운은 불가분의 관계로 둘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유랑전 파노라마는 어떠했을까. 작중 화자인 ‘나’를 통해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래, 책 줄거리엔 마지막 스포일러까지 모두 포함돼 있으니 주의)



이소룡 추모제를 나름 의미 있게 치른 삼촌은 동촌 읍내에서 ‘씹새’를 입에 달고 사는 동천의 진정한 건달이 되고자 하는 ‘도치’와 용쟁호투식 한판을 벌이며 강호의 숨은 고수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나서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니 어쩔 수가 없다. 농고를 다녔지만 농사일엔 크게 관심도 없이 형님(나의 아버지) 일이나 도우며 조용히 산 그에게 ‘도치’가 또 도전해 오고, 두 번째 맞대결을 갖게 되면서 그를 아예 묵사발을 만들어 놓는다. 100개나 먹은 호떡을 다 게워내고 도치가 신처럼 따라 모시던 건달 ‘토끼’까지 가세해 그 자리에서 같이 수모를 겪자, 둘은 앙앙불락되며 삼촌을 평생 발라버리겠다는 각오로 살아간다. 이런 삼촌의 실력에 나와 종태는 사부님으로 모시며 의기양양해졌고, 삼촌에게 인생의 변혁기가 찾아온다. 읍내 어느 허름한 곳에서 영화촬영을 하는 곳을 지나가다가 ‘으악새’(주인공이 한번 툭 치면 ‘으악’하고 죽는다 해서) 액션배우로 잠신 발탁된 삼촌. 그곳에서 자신만의 장기였던 공중삼회전 멋진 쇼를 선보이고, 순식간에 스쳐간 여배우 ‘최정원’을 보고서 한 눈에 반하고 말았으니, 이 여자는 삼촌 권도운에게 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운명처럼 그렇게 다가오고 만 것이다. 한마디로 필이 제대로 꽂힌 거라는.

한편, 그날 도치 건달패들에게 구해준 답례로 호떡장수 여동생 오순이가 찰싹 달라붙는 통에 삼촌은 마지못해 그녀를 받아들여 덜컥 임신까지 해 난감해지자 아기를 포기하자며 그녀를 얼러댔다. 그런데 이미 오순은 각오를 한 듯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자고 덤벼들며 미리 찻잔에 타둔 청산가리를 마신 상태였으니, 어릴 적부터 독극물에 도가 튼 독극물의 여왕의 선택지는 바로 이런 방식이었다. 그곳 다방에서 그렇게 생을 마감할 것처럼 둘이 대치한 가운데, 밖에선 도치와 도끼 일당이 동천 바닥에서 아는 동생의 동생을 대동하고, 그 아는 동생의 또 아는 동생을 끌어 모은 오합지졸의 건달패거리들이 진을 치며 삼촌을 공격하기 일보 직전의 풍전등화가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안에서 청산거리를 먹고 피를 토하고 쓰러진 삼촌과 오순 때문에 서로가 뒤엉켜 난리브루스를 는 바람에 그날의 다방습격사건은 해프닝처럼 그치고 말았다. 웃긴 건,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이런 살벌한 상황이 미리 무섭게 다가오자, 사리분별을 못한 어느 중삐리가 무시무시한 요괴인간으로 둔갑한 토끼에게 달려들어 각목으로 머리통을 내려치면서 스스로 와해 모드. 결국 토끼는 쓰러지고 난리법석에 짓밟히면서 병원 신세를 졌다는 점이다.(읽다가 순간 뿜었다) 그곳 병원에서 오순이를 만나 배를 맞추며 그녀를 버리고 도망간 그 남자를 반드시 죽여주겠다며 각오를 다진다. 그 남자는 바로 삼촌이었고, 이날 이후로 삼촌은 동천을 떠나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형님이 사주신 귀하고도 귀한 빨간 오토바이를 끌고서..

시골 촌놈에게 생경했던 서울 바닥은 낯선 지옥과도 같았다. 돈은 없고 배고프고 말 그대로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에, 우연찮게 발견한 중국집 ‘북경반점’에 들렀다. 주머니에 보니 남은 돈이 딱 자장면 값 밖에 안 돼 그것만 시켜먹었는데, 옆테이블에 남겨둔 군만두를 보고선 군침이 돌아 훔쳐서 나오다가 걸린 삼촌. 폼 안 나게 쪽팔렸지만, 배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며 선처(?)를 부탁. 그렇게 북경반점에서 삼촌은 배달부로 전격 일하게 되었다. 칼판장이라는 인물이 북경반점의 실세처럼 다가와 삼촌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포스로 무장한 화교출신의 치파오 차림의 여자 마사장(마표범, 마지랄)이 버티는 이곳은 그들만의 요새처럼 공고하게 영업을 하며 충무로 바닥에서 버티고 있었다. 삼촌의 배달원 생활도 익숙해진 가운데, 계속 이소룡 꿈을 꾸며 동시상영관 싸구려극장에서 무술영화나 보며 일상을 지내던 날, 스크린 속에서 우연찮게 자신이 지나가다 찍었던 그 영화에서 자신의 모습은 물론, 여배우 최정원도 나오자 삼촌은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사고를 쳐버렸다. 어느 날, 배달 간 집이 바로 그 여배우의 집이었고 운 좋게도 목욕 수건을 두른 정원씨를 보고선 참지 못해 버럭 안았다가 치한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마사장에게 미친 놈 소리를 들으며 된통 혼나고 사장 선에서 수습. 그렇게 북경반점에서 평생 배달부로 썩을 줄 알았던 삼촌은, 또 우연찮게 칼판장이 가게 뒤뜰에서 남몰래 무술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선 깜놀, 그가 혹시 영춘권의 창시자 엽문의 제자가 아닌가 물어보고, 자신도 이소룡을 흠모한다며 그를 스승으로 삼고 함께 무술 연마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칼판장은 삼촌이 존경하리만큼 무술의 고수였을까?

그런 북경반점의 일상이 진행되는 동안, 우연찮게 과거 그 촬영장의 으악새 배우를 만나고선 이소룡이 남긴 유작 <사망유희> 작품 소식을 듣게 됐다. 바로 못다 찍은 분량 때문에 이소룡 대역을 구한다는 정보를 입수, 삼촌은 그날부터 진정한 액션배우로서 제2의 이소룡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일약 스타급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것 보다는, 자신이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는 이소룡을 위해서 바치는 헌사처럼 어떻게든 홍콩으로 건너가 오디션을 보기로 마음을 먹지만, 땡전 한 푼 없는 삼촌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그간 배달부로 열심히 일 하면서 모았던 쥐꼬리만한 돈을 칼판장의 대 사기행각으로 날려 버리고 만 것이다. 피해자는 삼촌 뿐 만이 아니다. 여타 종업원은 물론, 마사장 돈까지 또 그녀의 사랑까지 배신해 날라버렸으니, 칼판장은 정말 대단한 놈이자 죽일 놈이다. 나중에 삼촌 손에 걸리면 ‘너 죽고 나 죽자’ 모드가 따로 없다.

그렇게 <사망유희> 이소룡 대역 오디션이 물 건너 갈 것을 우려한 삼촌은 정말 오랜만에 고향 시골로 내려와 권씨네 문중들 앞에서 자신을 무술실력을 보여주며 지원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런데 무술까진 좋았지만 왜 먼 팔굽혀펴기까지 하는 바람에 자세가 마치 요상한 거시기 자세처럼 비춰져 불경스럽다며, 문중 어르신들에게 도리어 호되게 혼나고 ‘문중장학생’으로 발탁돼서 가려던 홍콩행은 단번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오디션은 못 보고 마는 것일까? 하지만 북경반점 마사장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한 삼촌을 보고선 제안을 했다. 삼촌에게 밀항선을 타고 홍콩에 갈 수 있게 손을 써주는 대신에 그 사기꾼 칼판장을 내 눈 앞에 반드시 데려다만 주면 도와주겠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홍콩행은 이뤄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홍콩까지 갈 수 있었을까? 무사히 잘 가고 오디션까지 봤다면 그게 바로 해프닝이 아니였을까. 꿈은 원래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니다. 이소룡의 대역이 어디 일개 짱개집 배달부에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홍콩 밀항선은 바다 태풍을 만나 해역에서 표류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으니, 삼촌은 속으로 외친다. “아, 씨발 내 꿈이여..”

한편, 삼촌의 이야기에서 잠시 돌아온 ‘나’의 중학생활이 그려지는데, 여기선 그 내용은 생략. 그래도 간략히 언급하자면 한마디로 영화 <몽정기> 같은 일상이다. 영어 선생님 올리비아에 대한 사춘기적 욕망의 환상과 그로 인한 사고들이 낯설지 않게 펼쳐진다. 그 여선생님 때문에 종태와 다툼이 일 정도로 사이까지 잠시 멀어지게 됐다. 종태와 대판 싸우고 얻어 터져서 내려오다가, 화딱지가 너무 나는 바람에 종태네가 아끼던 소와 송아지 고삐를 풀어버려 두 마리가 떠돌다가 동네 수렁배지에 빠져 죽는 사고가 벌어지고, 또 이 사고로 충격 먹은 종태 아버지가 농약까지 먹고 자살하는 참극까지 낳고 말았으니 이런 도미노적 아이러니 참극도 없었다. 그때 ‘나’의 인생에 있어서 사춘기는 최악의 시즌이기도 한 것이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종태에게 말도 못한 채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홍콩 땅은 밟지도 못하고 돌아온 삼촌과 나는 <사망유희>를 극장 맨 앞에서 보면서 엉엉 울고 말았다. 액션영화임에도, 그게 그렇게 슬프더라. 나는 종태 때문에 삼촌은 불발된 홍콩행 때문이라도.



삼촌에게 입대영장이 나와 군대를 가게 됐고 제대 하면서 세월은 몇 년으로 거슬러 박정희가 암살되던 그때를 배경으로 올라간다.(1979년) 나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일련의 사건들을 반추하며 혼돈처럼 다가왔고, 나의 형 동구는 대학생이 됐지만 당시 시류대로 데모를 하다가 잡혀서 훈방 조치로 풀려나고, 삼촌은 시골에 내려와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거들게 됐다. 삼촌이 꿈꿔온 진정한 이소룡되기 프로젝트를 포기하나 싶었는데, 1980년 신군부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혼미한 정국 속에서 지지리 운도 없게 길거리에서 불심검문에 걸려 삼촌은 나쁜 놈들 순화교육 일환으로 거행됐다는 ‘삼청교육대’ 끌려가 사선의 문턱에서 개고생을 하게 됐다. 그곳에서 동천 읍내의 두 왈패 건달 도치와 토끼와 재회해 그간에 앙금을 풀면서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만을 학수고대 했던 삼촌. 그곳은 말 그대로 아귀도이자 지옥도가 따로 없을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과정이 리얼하게 펼쳐진 그곳에서 도치는 개밥을 훔쳐 먹다가 걸려 개 패듯 맞다가 마지막에 “나는 개가 아니다. 인간이다”로 다구빨을 세우다 죽게 되고, 토끼는 그 과정에서 말리다가 소요 사태를 일으켜 총상을 입고 절름발이가 되고, 삼촌은 반인사정치범 정기자를 지인처럼 대하다가 죽을 위기에서 그를 구해주는 등, 그곳의 생지옥도는 그렇게 펼쳐졌다. 결국, 살아서 돌아왔지만 역전의 용사도 아닌 삼촌은 만신창이가 돼서 다시 근로봉사대 6개월 코스를 이수하고 돌아왔으니, 삼촌 일생일대의 크나큰 사투적 이슈였던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내건 산업화 개발 붐이 깡촌인 동촌 읍내까지 뻗치며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아끼던 후배 도치는 삼청교육대에서 죽었지만, 토끼는 이곳에서 새로운 실세로 자리매김 하기로 마음먹고, 각종 위락과 유흥시설이 들어선 이곳에서 이권을 챙기는 정치깡패로 자랐다. 그 과정에서 할 일 없이 겉돌던 삼촌을 끌어들여 각종 조직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삼촌은 동천의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게 이소룡이 되기를 원하며 진정한 무도인답게 함부로 주먹을 쓰지 않겠다는 삼촌의 결기는 사라진 것인지, 결국 그의 꿈은 포기한 것인지, 삼촌은 시류대로 자의반타의반 편승해 변질돼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동천파의 반대파 라이거파의 신예 종태가 나서서 이들과 맞대결을 펼쳤으니, 과거 사부님이라 불렀던 수제자 절곤이 종태가 삼촌과 일대일 맞짱을 뜬 이른바 ‘동천나이트의결’ 사건이었다. 그렇게 아끼던 제자의 일취월장한 모습에 기분이 좋아서 아량인지 몰라도 한 수 져주면서 삼촌은 물러났고, 토끼는 사태가 위급해지자 종태를 포섭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라이거파 보스를 사시미로 찔러 동천파가 조직을 모두 접수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종태의 모습은 마치 영화 <넘버3>의 한석규의 막둥이를 보는 듯 오마주. 그렇게 이들의 흔한 조폭 얘기는 영화처럼 그려진 것이다.

‘나’는 어느 덧 대학에 입학에 군대에 들어갔고, 데모를 통해 알게 된 첫사랑 경희와의 사랑은 이루지 못한 채, 상병시절 면회를 통해서 추억을 곱씹고, 제대하자마자 교도소에 복역 중인 종태를 면회해 그간에 쌓인 회한을 풀었다. 한편, 본격적인 80년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그 시기에 이소룡이 점거하며 아류작들로 풍성했던 권격영화 시대가 끝나고, 성애영화가 중심에 서며 삼촌은 단역배우로 연명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 과정에 이젠 퇴물이 된 가슴만 유독 큰 여배우 최원정을 만나 삼촌은 다시 설렜다. 일적으로 그녀와 영화 촬영장에서 강간 씬을 찍으며 가깝게 지내게 됐고, 이들의 불나비 같은 사랑 얘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와는 대비되게 씁쓸하게 남겨진 북경반점의 마사장 또한 퇴물로 전락했지만, 마치 죽음을 앞둔 여자처럼 간간히 찾아온 삼촌과 인생의 회한을 곱씹는다. “도운아, 넌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니” 삼촌의 꿈은 과연 이루는 과정일까 아니면 포기한 것일까. 그깟 액션 단역배우 삶으로 마치고 말 것인가. 그래도 삼촌은 행복해했다. 원정과 점차적으로 가까워지면서 그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내세워 그녀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기로 한 것.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마수가 서서히 펼쳐지며 죽음의 문턱까지 가고 말았으니, 삼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한편, 종태가 출소하자마자 작업한 건 바로 토끼에 대한 복수였다. 자신이 빵에 있는 동안 집안 가족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토끼는 약속을 저버렸다. 이에 종태는 당시 선거열풍을 틈타 정치깡패로 나서고, 토끼도 마찬가지로 삼선의 중진의원 뒷배를 업고 맞대결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토끼는 납치돼 며칠간 감금되고,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도망치다가 그만 도로에서 염산트럭에 받쳐 염산통에 풍덩, 염산말이로 뼈다귀만 남긴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나름의 가혹한 최후가 아닐 수 없는데, 이에 좌절한 부인 오순은 그 원흉이 종태인 걸 간파하고 독극물의 여왕답게 종태 마저 독으로 죽여 버리고 말았다. (정말 무서운 여자다) 북경반점의 마사장 마저 세상을 등지며 그 북경반점은 삼촌에게 유산으로 넘겨지고, 그곳에서 원정과 달콤한 새 출발을 약속하는데, 하지만 원정을 여배우로 키워내고 수많은 여배우들을 농락했던 스폰서 대부 유회장의 새끼사장(혹은 사장새끼)인 아들 유사장이 엄청난 문제였다. 

자기 엄마의 치졸한 원한을 갚는다는 핑계로 원정을 유학파 김실장과 함께 폭행하고 겁탈하며 얼굴에 난도질까지 하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게 만 것이다. 이에 원정은 모든 걸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 삼촌과의 생의 마지막 이별을 감행하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스너프필름 같은 초현실적인 폭행이 자행된 걸 알게 된 삼촌은 이글거리는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드디어 자신을 그동안 억눌러왔던 갈고리를 처단할 때가 왔다며 유사장과 김실장 두 ‘사이먼 앤 가펑클’을 죽이러 저택에 잠입. 그 자리에서 가열한 절권도로 죽지 않을 만큼 패주고, 유회장을 불러들여 이들의 진상을 알리려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이코패스 유사장이 자신의 아버지를 엽총으로 쏴 존속살해를 저지르고, 그 죄상을 삼촌에게 덮어씌우면서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원정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계속 도망만 칠 수는 없어 자수해 15년을 언도받고 교도소에 복역한 삼촌. 그곳에서 그는 원정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그간의 인생유전을 곱씹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새천년이 도래한 그 즈음에 원정을 극적으로 만났다. 아! 님이시여, 왜 이제야 오셨나요. 저는 이제 이소룡도 아니요, 짝퉁 이소룡이 아닌 권도운으로 당신과 함께 남은 여생을 살겠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이소룡에게 올인한 한 남자의 욕망 같은 인생유랑전(傳)이다. 그 인생유랑극에 이소룡(1940~1973)이 멘토처럼 환생해 시대적 향수를 마구 자극한다. 그것이 삼촌 '권도운'에게 투영되며 비록 짝퉁으로 출발했으나, 긴 세월을 거쳐 스스로 인생유전의 고유한 스토리를 완성하며 우리네 삶을 반추케 만들었다. 속도감 있는 전개가 돋보이는 이야기였다. 다만, 1,2권으로 나뉜 장편소설상 스토리 배분에 있어서 2권 후반부로 갈수록 반복된 이야기 전개의 구도로 신선함이 떨어지는 기시감까지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결은 생생히 살아 움직였고, 각 캐릭터로 묘사된 일종의 군상극은 생동감 있게 묘사돼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활동사진으로 펼쳐졌다. 시대성으로 과거의 향수를 자아내면서도 캐릭터 심화를 위한 위트가 간간히 심어져 있고, 저마다 사연들이 적시적소에 배치돼 희극적 요소까지 띄며, 이것은 한편의 희비극이 교차하며 맞물리는 이야기로 그려낸 한 남자의 일대기인 것이다. 결국엔 오리지널이 되고 싶었지만 될 수가 없었던 비극까지 맞물린 한마디로 "짝퉁인생의 희비극 파노라마". 그렇다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갈망과 열망 그리고 욕망스러운 결기까지 보이긴 해도 '서자' 출신이라는 멍에와 견실하게 살아가려는 소시민적 캐릭터의 모습은 우리네 삼촌과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런 과정들이 비록 진정한 무도인 이소룡을 닮고자 무던히도 애쓴 삼촌의 짝퉁인생 일지라도 좋다. 어차피 짝퉁이 판치는 세상이다. 자신의 꿈과 욕망을 위해 달려가는 군상들이 판을 짜고 그 속에서 아직도 허우적댄다. 그 무언가를 향해 무엇이 되기 위해서.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바로 그런 인생 유전이자 유랑극이다. 시대가 있었기에 울림은 더 커지고 이야기는 살아 움직였다. 다시 한 번 삼촌 권도운의 건승을 빈다. 우리시대 이 땅의 모든 삼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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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사부 - 제1회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작
정재민 지음 / 고즈윈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소설과 역사의 만남은 픽션과 팩트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것을 우선시 하더라도,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상상의 픽션을 가미시킨 역사 이야기는 재미까지 선사하며 '역사소설'의 한 장르로 나선다. 여기 소설 <이사부>가 딱 그런 케이스다. 그냥 이사부가 아닌, '소설'이라 밝힌 것은 그만큼 이 이야기가 소설적 재미를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얘기. 자칫 진중하지 못하게 가볍거나 혹은 역사 왜곡이 있지 않을까 우려가 있지만, 역사적 기록의 바탕 위에 실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상황에 맞게 픽션으로 전개시켜 한 편의 잘 짜인 역사 드라마다운 면모를 보인다. 그래서 <소설 이사부>는 상당히 재밌다. 순간 '이사부'가 누구지 하다가도.. 가수 정광태의 노래 "울릉도 동남쪽..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에 나오는 그 신라장군 이사부를 떠올리면 맞다. 김유신으로 각인된 신라장군 이미지에, 앞서서 '이사부'가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책 뒷면에 성석제의 추천사가 이 소설의 성격을 단박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 이사부>는 한 편의 잘 짜인 역사소설이다. 이사부가 누구인가? 가수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에서 익히 들어 온 ‘신라장군’이 아닌가. 이사부를 신라 장군으로만 기억하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이사부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소설적으로 보여 준다. 삼국통일의 밑그림을 그리고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이사부는 매력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캐릭터다. 이사부를 문학적, 역사적으로 복원시킨 신진 작가의 탄생에 축하를 보낸다." 이사부는 그런 인물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라시대 중기를 관통하며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나름 임팩트한 인물.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그를 잘 알지 못한다. 어떻게 나고 자랐으며, 중간에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었고 장수로서 전공은 어떠했는지, 종국엔 그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소설 이사부는 그런 인물의 생과사를 팩션으로써 조망한다. 그것도 잘 짜여진 한 편의 역사극처럼 말이다.



첫 장부터 소설다운 시퀀스로 이사부 속 이야기는 포문을 연다. 신라 21대 임금 소지마립간(소지왕)이 예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열네 살짜리 소녀랑 정사를 나눈다. 달거리도 하지 않은 홍상미판(첫 월경을 하지 않는 여자아이를 일컫는 사자성어) 소녀 ‘벽아’는 최고 권력자 앞에서 능욕을 당한다. 나름 낯뜨거운 장면이 아닐 수 없는데, 이 부분에서 출생의 씨앗은 바로 감지된다. 14살짜리 소녀가 낳은 아이가 누가 될 것이며, 그가 주인공인가? 아니면 다른 놈과 또 바뀌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단박에 유발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키포인트 ‘마복자’(摩腹子)가 전면에 나선다. 마복자는 또 무엇인가? 각주의 설명엔, 배를 맞춘 아들로서 <화랑세기>에 의하면 당시 신라에서는 어떤 집단의 우두머리가 자신이 총애하는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정을 통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렇게 관계 맺은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마복자라 했다. 그렇다. 마복자는 왕의 씨를 잉태한 아들, 혹은 남편과 임신한 상태에서 왕에게 진상돼 정을 통해서 얻게 된 남자아이. 이것은 왕족 직계 출신으로 갈 수 있는 든든한 뒷배와 같은 것이다.

바로 여기서 두 주인공의 출생이 그려진다. 이사부와 위화랑이다. 이사부는 소지왕의 친딸 보옥공주와 아진공 사이에서 태어났고, 위화랑은 벽아와 파로 사이에 태어나 둘다 정치적 아들 '마복자'로 성장한다. 그중에서도 알아준다는 '마복칠성' 7명의 라인업으로 구성된 낭도에 들기 위해서 십대 시절 입회 시험을 보며, 본격적으로 둘의 우정담이 펼쳐진다. 그러면서 이들을 견제하고 방해하는 세력으로 지증왕의 태자 원종(모즉지, 후에 법흥왕)이 전면에 나선다. 내물마리한계의 직계 혈통인 이사부쪽 탁부 계열과 지증왕계 방계 혈통인 사탁부가 세력 싸움을 벌이는데.. 이미 지증왕이 집권하던 시절이라 태자 원종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다. 왜? 아비인 지대로가 60이 넘어서 집권한 탓에 젊은 태자 원종에게 초점이 맞춰지며 전개된다. 한마디로 그는 악역을 맡은 군주로, 이사부의 아버지 아진종을 소지왕 붕어시 순장시키고 어머니마저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 등, 이사부에게 있어서 복수의 대상이자 원흉이다.

하지만 이사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역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겠는가. 그냥 변방으로 쫓겨나 그렇게 살다가 갔으면 좋으련만.. 실직주(지금의 삼척) 태수로 있으면서 그곳과 아슬라주(지금의 강릉)를 위화랑 군대와 합심해 고구려군을 격퇴시키고, 후세에게 잘 알려진 설화적 영웅담 중 하나인 나무사자를 이용해 우산국까지 복속시키며 신라장군 이사부의 위세를 드높이는 전공을 세운다. 이것이 모두 지증왕 시절에 이뤄진 것이다. 태자 원종은 지시만 내리고 전장터에서 이사부가 죽기 만을 바랬지만, 그는 진흥왕 시절까지 나름 천수를 누린 인물이다. 쉽게 죽을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난봉꾼에 호색한 원종은 태자 시절부터 위화랑의 누나 벽화는 물론, 위화랑과 잠시 스쳤던 연인 오도 그리고 오도가 낳은 옥진궁주까지 애첩을 삼으며 궁궐 내 암투를 본의 아니게 자연스럽게 조장한다. 역시 이런 궁궐 내 여인네들의 암투는 언제봐도 재미가 쏠쏠하다. 베개 밑 송사나 치맛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

여기에 원종의 유일한 친딸 지소(지몰혜)가 등장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원종과 이사부가 사촌형제 지간이니까 지소에겐 당숙뻘 이사부였다. 그런데도 정인으로 삼고 발랄하게도 그와 혼인하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노란싹수를 보인다. 실제 나중에 둘 사이에서 숙명공주와 세종(미실의 남편)을 낳은 기록 때문인지, 이 둘을 영원불멸의 정인으로 그리며 멜로라인을 부각시킨다. 원수의 딸과 사랑하다니 이사부에게 운명은 너무도 가혹하게 다가온 것. 이러다가 복수나 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가슴 한켠에선 무언가 끓어오르지만, 그때마다 스승님 아도선사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다 잡으며 지내왔던 이사부. 태자 원종이 법흥왕으로 즉위하면서 이미 시기는 지나갔다. 원종의 두 책사 박영실과 군사 아시공이 좌청룡 우백호처럼 버티고 있어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 더군다나 위화랑과 그의 아비 파로가 암살까지 감행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면서 이사부 복수의 완성은 못하고 지나가나 싶었는데.. 이차돈의 순교로 인해 불심에 심취한 법흥왕이 말년에 '법운'의 법명으로 입적하자, 삿갓스님 '태종'으로 그에 앞에 나타난 이사부. 과연, 그의 복수는 완성됐을까?

이렇게 소설 <이사부>는 한 편의 역사 드라마다. 물론 '복수'라는 코드 때문에 픽션이 상당히 가미돼 있다. 원종 때문에 아버지 아진종을 잃었다는 설정을 통해서 이사부의 복수심을 근저에 깔고 가면서, 당시 시대적 사건사고들을 씨날로 연결시켜 역사극처럼 전개시켰다. 위화랑과 마복자 출신으로 태어나 승승장구할 줄 알았지만, 원종으로 인해 변방으로 쫓겨나고 그곳에선 오히려 전공을 세우며 신라장군으로서 이사부를 알린다. 여기에다 벽화와 오도, 그리고 옥진궁주로 이어지는 여인네들의 궁궐 암투를 드라미틱하게 재현해냈으며, 끝내 이사부가 복수의 깔을 갈고는 있었지만 원수의 딸 지소를 사랑한 나머지 괴로워하는 이사부의 내면까지 다루는 등, 드라마적 요소를 상당히 부각시킨 역사소설 <이사부>인 것이다. 다만, 앞서서 읽었던 이도흠 저 <이사부>의 역사소설보다 짧다는 게 흠이다. 거기선 진흥왕 대까지 나아가 이사부가 지소태후와 섭정을 통해 신라를 어떻게 운영하며 반석에 올렸는지 또 생을 풍류랑처럼 마감했는지 고스란히 담아냈다.

여기 소설 <이사부>는 법흥왕 말년까지 그리고 한 장으로 정리한 '그 이후의 이야기'로 대신하며 이사부 이야기를 마쳤다. 역사극으로 치자면 완성되지 못하고 다소 열린 결말식으로 마무리한 느낌이랄까. (복수라는 코드가 원래 그럴지도) 그럼에도 소설 <이사부> 상당히 재밌다. 간결하고 심플하니 군더더기가 없다. 마치 사극 드라마 한 편을 보듯이 상당한 몰입감과 함께 팩션의 재미를 선사했다. 제1회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훈장이 아깝지가 않은 역사소설답게 나름의 책무를 다한 셈이다. 아직도 노랫말처럼 지하에서 웃고 있는 신라장군 이사부로 기억을 하고 있다면, 소설 <이사부>를 통해서 짧게나마 그의 생애를 드라마틱하게 조우하자. 좀더 깊히 알게 되는 이사부가 될 터. 그리고 결국에 이런 것들이 이미지로 구현되고 형상화된다면 어떨까. 지금껏 여러 역사적 인물들을 조망하는 사극들은 많았다. 이젠 생경하던 '이사부'를 널리 알려줄 사극을 만나고 싶다.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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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이도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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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하나의 역사적 인물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고증과 상상의 소설화 작업을 통해서 다가올 때, 역사소설은 재미는 물론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가치라 해서 무언가 거창할 것 같지만 의외로 소소하다. 개인적인 단상이긴 해도, 여기서 가치란 해당 인물에 대한 깊이알기로 얻게 되는 그 어떤 '뿌듯함' 같은 거다. 물론 저마다 역사적 지식의 간극 때문이라도, 이 가치는 천양지차로 나눌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역사소설은 얽히코설킨 위인들이 사건들을 펼쳐내며 우리네 인생사를 투영시킨다는 점에서 참 '교훈적'이다. 그런 교훈과 어떤 울림으로 다가온 한 권의 역사소설이 있으니 <이사부>다. 이사부? 순간 누구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울릉도 동남쪽...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그 유명한 노래가사를 생각해 본다면, 그 우산국을 정복했다는 이사부가 맞다. 그렇다. 바로 신라장군 이사부의 일대기를 그려낸 역사소설인게다. 그러면서 아직은 소설가라 하기엔 부끄럽다며 자신을 인문학자로 소개한 저자 '이도흠' 문학박사의 머리말이 이 역사소설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이사부! 평생을 풍류에 몸을 담고 달밤에 춤을 추듯 땅따먹기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과 한 여인을 사랑하여 지극하게 섬긴 이다. 그이는 광개토대왕보다 더 너른 땅을 사람을 죽이지 않고 아우른 대장군이었으며, 장보고에 앞서서 동해를 다스린 해상왕이었으며, 백성과 부하들을 신바람 나서 일하고 싸우고 어울리게 하는 이상적인 한국형 지도자였으며, 신라 최고의 꽃미남이었으면서도 오로지 지소태후하고만 천년에 남을 사랑을 한 정절남(貞節男)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보름달이 떠오르면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여 몸이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풍류를 즐겼고 자신에 철저했고 자신이 믿은 바를 끝까지 밀고 갔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 몸 안의 신과 밖의 신이 하나로 어우러져 지극한 흥(興)에 이르는 풍류랑이었다.

자, 그렇다면 이사부 이야기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보자~



이사부는 처음부터 '이사부'로 나오질 않는다. 그는 지대로왕(지증왕)의 동생 아진종과 어머니 보옥공주에서 태어난 김상종이다. 즉, 지증왕이 큰아버지인 셈. 그런데 김이종과 김태종, 종국엔 내물마리한을 잇는 우두머리 '잇마로'라는 인물로 대변되며 그가 신라 왕권을 잇는 직계 혈통임을 강조한다. 감이 온다. 그런 걸출한 신분임에도 모든 걸 내던지며 권력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왕들을 보필하고 한 여자 지몰혜(지소태후)만을 진심으로 사랑한 신라 중기를 관통했던 초절정의 풍류남. 이런 역사적 설정이 이 소설에 지배적으로 깔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소설이 그러하듯이, 역사적 씨날들을 끼어 맞추듯 사건과 사고를 전개시키며 주인공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이사부 스무살 시절, 신라 변방의 실직성 군주 아진종과 어머니가 말갈족의 장수 마골타에게 죽게 되면서, 이사부는 야밤에 몰래 잠입하여 마골타의 목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나머지 군사들에게는 투항할 것을 권유하고 그대로 살려 돌려보낸다. 여기서 이사부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전쟁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게 된다.

"정녕 사람을 죽이지 않고 이기는 전쟁은 불가능한 꿈일까"하는 다소 이상적인 사상이 깔리게 되고, 실직군의 군주가 된 이사부는 1대 풍월주였던 위화랑의 딸 옥진궁주와 사랑에 빠진다. 이들의 운치있는 운우지정이 정통 멜로극을 연상시키듯 펼쳐진다. 비서격인 미해를 주조장으로 과힐부절은 장사로 승격시켜 실직성의 백성들을 위무해 7년 여간 잘 다스리고 정비해 군주다운 면모를 보인다. 이후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까지 통치하고, 그 과정에서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복시킨 설화가 재밌게 그려진다. 사자 두마리를 풀어서 사자탈을 쓰고 우혜왕을 굴복시켜 우산국을 정복한 신라장군 그 이사부였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진다. 거시기가 지대로 컸다는 지대로 지증왕은 60살이 넘어서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거머쥔 인물이다. 그만큼 늦게나마 야심이 많은 인물인데, 내물왕계의 직계정통을 잇는 비춰마리한(소지마립간, 소지왕)계가 지증왕으로 인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으니, 바로 방계인 지증왕이 전면에 나서고부터 지증왕계가 법흥왕(원종, 모즉지태왕), 진흥왕(심맥부지), 진평왕으로 이어지며 계속 왕위에 오르게 된다. 물론 이사부도 원종과 마찬가지로 습보 갈문왕의 후손이지만, 내물마립간의 직계인 소지마립간의 정치적 아들로 발탁된 '마복자'로 마복칠성의 수장격이었다. 그렇게 강력한 권력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사촌형 원종과의 왕위 다툼이 벌이는 과정에서 화백회의 결정에 따라서 스스로 왕권을 포기하는 대인배 기질을 보인다. 원종이 즉위한 법흥왕은 재위 7년차에 자신의 지증왕계를 성골로, 비춰마리한계를 진골로 선포하며 왕권계승의 지도를 바꾼다. 그러면서 그의 시호대로 불교에 심취해 제대로 불심를 심는데 올인. 이때 이사부의 동생 길승의 아들 이차돈이 나서서 불심을 작렬하며 순교한다. (돈의 화신 이차돈 말고..) 하지만 이사부는 풍류도를 고수하는 입장에서 법흥왕과 불교 전파 논쟁을 펼치며, 그의 외교력으로 백제 등과 화친을 맺고 금관가야의 구혜왕까지 포섭하는 활약을 펼친다. 고구려 안장대왕과 한주부인의 눈물없이 못보는 설화적 애절함까지..

신라 중대를 관통하며 시대를 풍미한 진정한 풍류랑 '이사부', 그를 만난다.

법흥왕의 장녀이자 정비 보도왕후 사이에서 낳은 지몰혜(지소태후)의 등장으로 이사부와의 멜로가 본격 펼쳐진다. 지몰혜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영특하면서도 나름 발칙했다. 서른살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당숙인 이사부를 정인으로 삼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이게 가능한 것일까 싶지만, 저자가 언급한 여러 역사적 기록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여하튼 '이사부' 속 새로운 주인공격인 지소태후가 중반 이후 전면에 나선다. 그렇게 이사부와 평생을 같이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대왕마마의 분부대로 아비의 동생인 입종갈문왕과 혼인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진흥대제 진흥왕(심맥부지)이다. 또 하나는 숙흘종이고. 하지만 당숙 이사부와도 결국 통정해서 낳은 자식이 둘 있었으니, 딸 숙명과 아들 세종(의종)이다. 이 세종은 미실의 남편이기도 하다. 즉 이사부는 미실의 시아아버지로서 미실은 이사부가 한때 스치며 사랑했던 옥진궁주의 손녀이자 며느리가 된 것이다. 법흥왕이 말년에 불법에 귀화해 '법운'스님으로 법명해 죽음을 맞이하면서 7살 밖에 안 된 손자 심맥부지 진흥왕이 정권을 이양한다. 이때 모후인 지몰혜가 섭정을 하고 이사부가 보좌하는 하는 식으로 정권을 유지해간다. 상대등은 끝내 고사하고 병부령 자리만 제수받고, 국사편찬에 '거칠부'를 파진찬 직책으로 모시고 신라 재건에 박차를 가한다.

이때부터 진흥왕은 대왕다운 면모로 바뀌고 스무살이 된 재위 14년차에 아리수(지금의 한강) 일대를 경략하며, 15년차엔 백제와 전투를 벌이던 중 아끼던 장수 '비차부'가 죽자, 백제 성왕을 잡아서 목을 베는 살벌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이듬해엔 너른 영토를 자랑코자 국경지대에 네가지 비석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진흥왕 순수비다. 위화랑 때부터 이어져온 풍월주 모랑이 객사하자, 4대 이화랑(위화랑의 아들)이 자리를 물려받고, 이사부는 풍월도를 대표하는 관록의 최고 수장격으로 계속 버티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한마디로 최고의 어르신 같은 거?! 옥진의 손녀이자 이사부의 며느리 '미실'이 짧고도 강렬하게 등장하며 인상을 남긴다. 진흥태왕의 색공지신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녀는 말 그대로 색기충만의 색실공. 그런 와중에 지소태후는 태자 자리에 욕심에 나서, 이사부 사이에서 낳은 숙명을 진흥제에게 바치고 둘 사이에 낳은 '정숙'을 태자로 책봉해 달라는 권력욕을 드러낸다. 왜냐? 진흥왕의 정비였던 사도왕후가 대원신통의 출신이라 그 미천함에 평생 정인이자 진골정통 이사부의 자식을 앉히고 싶었던 것. 하지만 미실의 이모이기도 한 사도왕후도 만만치 않았다. 숙명이 진흥왕 보다는 이화랑과 사통해 출궁 당하면서 사도가 뒤늦게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진평왕의 형 '동륜'이다.

진흥왕 재위 23년 562년, 이사부는 일흔이 넘긴 나이에 대가야 정벌에 나서며 16살 꽃다운 나이에 전투에 참가한 사다함의 그 용맹과 기상에 한껏 고무되며 그를 새긴다. 귀당비장 사다함이라.. 하지만 그는 바로 요절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한편 출궁당한 숙명이 이화랑과 원광과 보리를 낳고, 세종은 미실 사이에서 하종을 낳으면서 가계도가 나름 풍성해지고 이사부는 서서히 역사 뒤켠으로 물러난다. 진흥27년에 동륜을 왕태자로 책봉하지만, 몇 년 뒤 동륜이 개에 물려서 죽는 어이없는 변고가 생긴다. 그 내막에는 미실과 미생이 연루됐으니, 미실은 바로 출궁당해 풍월주 남편 세종도 물러나 둘은 촌가로 쫓겨난다. 결국 이래저래 가족사의 우환 속에서 아흔이 다 되가는 이사부, 그리고 환갑 즈음에 역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지소태후는 그렇게도 평생 그리던 정인 이사부 품안에서 죽고, 이사부 또한 모든 걸 내려놓고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가 인생을 갈무리한다. 바람처럼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지니..

이렇게 <이사부>는 그가 살았던 신라시대 중기를 대표하고 관통하는 중심자로 내세우며 그려낸 역사소설이다. 5~6세기에 걸친 신라의 변혁기가 아닌, 아직은 고구려와 백제의 위세에 눌린 상태에서 왕위 계승의 지형 변화가 시도된 지증왕때부터 법흥왕-진흥왕까지 지증왕계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며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의 전투 보다는 신라 내 미묘했던 왕위 계승 문제와 불교 전파, 그리고 진흥왕의 신라제국 초석 다지기 등이 역사적 사실 위에 얹혀지고, 이사부가 그 중심에서 관여하며 나선 모양새로 그려내고 있다. 옥진궁주와 질풍노도와 같았던 애정행각과 영원불멸의 모토로 지소태후와 사랑 얘기 등이 상상으로 입혀져 가공적으로 살을 붙였다. 물론 이사부를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풍류도'가 이 소설 근저에 깔려있다. 풍월도 혹은 선도(仙道)라고도 하며 고대 한국의 전통사상으로서 삼국시대 특히 신라에서 지배적 세계관으로 자리잡은 걸 중간마다 언급하며 인문역사서의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종국엔 신라 중대 사회의 기반 사상이었던 풍류도와 신라의 역사와 사회문화를 '이사부' 인물을 중심으로 한데 아우르는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독특한 제목의 인문역사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를 썼던 작가 이도흠은, 역사소설 <이사부>에선 스스로 창안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은 일반인들에겐 너무 낯선 화쟁기호학(간단히 말해 원효의 화쟁사상을 통해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통합하여 하나의 사상으로 아우른 이론)을 바탕으로 해 신라 중대의 사회문화, 정치, 이데올로기, 세계관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면서 신라 중대 역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런가, 본 역사소설은 다소 어려운 측면도 있다. 재미를 부각시키기 보다는 때론 '이사부 평전'에 가까울 정도로 인문학적인 냄새가 곳곳에 배여있다. 센치한 척 운치를 떠는 문학적 수사 또한 서슴지 않는 등,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도 책 말미에 부록으로 <삼국유사>, <삼국사기>, <신라본기>, <화랑세기> 등 문헌참고는 물론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화의 역사적 근거'를 제시한 장만 보더라도 이건 날림으로 쓴 게 아니라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주목받지 못한 인물의 일대기라 더욱 그러했을지도..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사부를 단순히 신라장군에 그치는 게 아닌 그 시대를 관통하며 진정한 풍류랑으로서 풍미했음을 각인시킨다. 그것이 본 역사소설의 특색이자 강점이 아닐까. 하드하면서도 한편으론 소프트한 몽롱함 속에 이사부는 그렇게 흥미롭게 그려졌으니, 다 읽고 나면 '이사부'가 매력적인 인물임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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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주테이의 박쥐들 - 국회에 기생하는 변절자와 기회주의자
이동형 지음 / 왕의서재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여기 쿨하게 우리시대 정치판에 직격탄을 날린 책이 한 권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른바 정치비평 인문서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고상한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소설도 아니다. 이건 레알 작금의 정치적 이야기다. 그러면서 한국 정치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또 미래까지 바라보며 작가 '김형수'는 자신의 정치색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자신과 같은 '경남좌파'가 들고 일어서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며 다소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지면을 넘나들며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된다.

바로 우리시대 정치인들의 행적을 낱낱히 고발하며 왜 그렇게 변절을 했고 또 기회주의자가 됐는지 등, 무덤까지 가지고 갈 그들의 거시기한 이력을 소개하며 제대로 꼬집는다. 그래서 이건 팩트가 전제된 리얼이다. 정치에 대해 빠삭한 사람이라면 아는 내용이 태반일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 식견에선 분명 흥미로운 것들도 꽤 된다. 이에 오래만에 이 책을 읽고 열이 나면서도 후련했던 서평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그전에 눈길이 가는 책 제목에서 언급한 '와주테이'는 무슨 뜻일까? 얼핏 느낌이 오듯이 이건 일본어다. 그 기원은 원래 이러하단다.

"1968년, 여의도에 물막이 공사가 끝나자 '윤중제(輪中堤)'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태령로에 있던 국회의사당이 옮겨졌고, 윤중제의 이름을 따 윤중로를 만들어 일본 국화신 사쿠라(벚꽃)을 흐드러지게 심었다. '운중'이라는 단어는 우리말에도 한자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わ-じゅう(輪中, 와주)’라는 일본어가 그 기원이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 비만 오면 물이 넘치는 저지대에 거주하는 농민들을 위해 인공 제방을 쌓았고, 이를 와주테이(輪中堤)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것을 해방 후 20년도 넘은 시점에서 우리 정부는 새로운 제방을 쌓으며 ‘둘레 둑’, ‘섬둑’, ‘방죽’ 등의 좋은 우리말을 두고 ‘윤중제’라는 뜻도 애매모호한 일본말을 끌어온 셈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나라의 치욕적 상징물이다. "

그렇다. 이 소개에 보듯이 한국정치를 상징하는 여의도는 이렇듯 치욕적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니 변절과 기회주의를 일삼아 승승장구하는 정치적 인간들이 ‘와주테이(윤중)’의 심장에 기생한다며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과제로 던진다. 자, 그럼 그들은 왜 변절을 했고, 기회주의자가 됐는지 이들의 이력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1. 극좌에서 극으로, 이념과 사상마저 바꾼 위대한 엘리트 김문수

김문수가 과거 한 때 노동운동에 빠진 전력을 아는 이는 많을까? 적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념 같은 건, 개처럼 차버리고 변절의 대명사로 자리잡는다. 소상히 언급하긴 뭐해도, 명문고-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의식이 저간에 깊이 박혀있는 이 인물은 삼성빠에다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느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정치인이다. 그러다 보니, 잊을만하면 망언망발을 쏟아내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정치인으로서 자질 부족은 물론 변절 이후에 가진 기회주의 이념의 강박에 사로잡힌 위대한 엘리트 김문수가 아닐 수 없다. 본 책의 첫장을 화려하게 수놓은 위인이시다. 개인적으로 난, 김문수가 이 정도일 줄 몰랐다. 헐...

2. 변절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는 대운하, 4대강의 최전방 전도사가 된 이재오

MB 정권의 나팔수 아니 선봉장으로서 MB를 지근에서 모셨던 이재오.. 이분 또한 과거 민주화 운동으로 별을 다섯 개나 단 화려한 전력의 소유자였단다. 사실 놀랬다. 이재오옹께서 설마.. 그런데 그가 과거 민중당을 해체시키고 민자당 입성 후 밟아온 정치행태를 보면 그런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당위도 없이 변절의 변조차 무색하게 그는 탈바꿈했다. 이후 김대중 저격수로 활동하며, 막말의 향연을 보이시며, 노무현 정권 때는 탄핵 집사로써 현 정권에서는 4대강 전도사로써 전방위적 활동을 펼쳤다. 그에게 변절은 그냥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과거일 뿐이다. 내가 언제 그랬었나..



3. 대여투쟁의 선봉장이 된 좌파학생운동가 심재철

이분 페이지를 읽고 있자니, 나름 열불이 퍼진다. 대충 알고 있는 소스였지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도 아니고 1980년 10만명이 운집한 대학생들에게 서울역에서 회군을 주도하며 전장군에게 군사 쿠데타의 빌미를 완벽하게 열어준 장본인.. 당시 유시민과 신계륜 학생위 출신들이 밀고 나가자 했지만 그는 돌아섰다. 결국 김대중 내란 음모 반란 사건 때 법정에 서서 모든 걸 시인하고, 떳떳하게 형집행 면제로 풀려난 인물 심재철.. 이후에도 낯짝도 두껍게 과거 그 일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그렇게 과거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려했던 심재철은 이후 그 정권이 세운 당에 들어와 나팔수 노릇을 한다. 참여정부 시절, 재미난(?) 망발은 물론 해괴한 역사의식으로 주목을 받으며, 그는 아직도 헤매고 있다. 이분 나름 4차원이 아닌가 싶다.

4.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 뉴라이트재단 상임 이사가 된 신지호

위의 심재철과 함께 참으로 쌍으로 잘 어울립법한 인물이 신지호가 아닐 수 없다. 그들만의 이익보수를 자처한 '뉴라이트'의 핵심인물 중 하나로, 과거 그는 좌파 이념에 푹 빠져 살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동구권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그런 헤게모니는 진즉에 버리고 말을 갈아 탄다. 그리고 극우보수 연합체 뉴라이트 사상의 극치와 궁극을 보여주는 경제정책과 이념적 언사로써 전방위적 활동을 한다. 그러면서 작가 '김형수'는 과거 일제시대 때 친일행각을 벌였던 인물들의 역사를 나열한다. 경찰과 군인들까지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데.. 여기 신지호가 과거 그 시절에 있었다면 다 그 짝이 아니었을까.. 저자 김형수는 단언한다. 그는 의원될 자격이 없다고.. 그가 18대 때 故김근태 의원을 누르고 당선된 건 아직도 미스터리이자 치욕이다.

5. 좌우 우를 넘나드는 폭넓은 사상의 소유자 손학규

모처럼 야당 인사를 까는 인물이 나왔으니 손학규다. 하지만 그는 야당으로 오기 전, 과거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자신이 학자로써 나름 견지해온 진보적 성향을 통해서 그 안에서 개혁을 택했다지만.. 그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뉴라이트 창립1주년 기념사를 멋지게 뽑아내며 주목을 받았지만 그곳에서 대권투쟁 등에 밀리다 보니 말을 갈아탄 것일 뿐.. 그만의 운신의 폭은 그렇게 왔다리갔다리 했다. 그러니 그가 민주당에서 대권주자로 나서는 건, 개나 소나 웃을 일이라며 자제를 간곡히 부탁한다. 그냥 대권을 포기하고 다른 후보를 물심양면으로 밀어주는 지원군으로 활동하길 바라마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게 변절자 손학규의 지금 포지션이다.



6. 자칭 한국판 피에트로 검사로 스타가 된 추악한 이중성의 홍준표

여기부터는 변절이 아닌, 바로 2막 기회주의적인 정치인들 얘기다. 변절이 나름의 추억거리(?)가 있다면, 여기 기회주의자들은 시세를 판단할 줄 아는 명철한 두뇌를 가졌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치켜세운다. 그 대표적 인물이 '홍준표'다. 정치 문외한이라도, 홍준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왜 ? 그는 언론과 방송이 만들언 낸 '모래시계' 검사였으니까.. 그렇지 않는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드라마 속 인물처럼 강직한 스타일의 인물은 아니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를 뜨게 해준 과거 조직폭력배 검거와 슬롯머신 사건은 과장된 수사로 보도된 전형적인 언플로써, 그 속에서 홍준표는 운 좋게 또 포장된 활약이 있었다는 점을 명시한다. 이른바 정의로운 검사의 실체를 까발리는데.. 이후 김영삼의 추천(?)으로 YS키즈로 신한국당에 입성 후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21세기 때부터 당내에서 안해 본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는 인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이중잣대 문제와 '아니면 말고'식의 폭로 전문가의 이미지는 씻지 못할 오명 중 하나다. 과거 그런 검사여서 그랬을까..

7. 망언과 말 갈아타기의 여왕인 전여옥

아.. 전여옥.. 무슨 말을 먼저해야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전여오크를 지지하는 자가 있다면 이 페이지는 폐부를 찢는다. 아니 이 여성정치인 만큼 화려한 기회주의자도 없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내뱉은 그 유명한 격언 '정치는 생물이다'처럼, 그는 말 갈아타기의 여왕이다. 정몽준을 그렇게 사모하더니, 박근혜에서 이명박으로 다시 박근혜에서 팽당하자 국민생각 '박세일'에 몸을 위탁한 전여옥.. 삼국지의 여포도 아니고 그렇게 이리저리 몸을 위탁하며 그는 그렇게 정치인생을 이어왔다. 과거 엄청난 베스트셀러 <일본은 없다> 표절 의혹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전여옥.. 기회주의 정치철학으로 살아온 그에게 저자는 이제 정계를 떠나서 그간에 못 돌본 아이을 챙기며 주부로써 살기를 권고한다.

8. 엑스맨이라 불리는 김진표

사실 개인적으로도 민주당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거치적거리는 대표적 인물이 있으니 '김진표'가 아닌가 싶다. 무언가 당의 색깔과도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새누리당쪽의 친여적인 성향이 짙다. 그렇다. 저자도 그런 김진표를 '엑스맨'이라 부르며 그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니 의문이 아니라, 그의 성향이 그렇다면 그건 한나라당 쪽이라는 거다. 참여정부 시절 경제수장을 지내면서 감세정책 등을 펼치며 그는 재벌 쪽에 손을 들어줬다. 그러니 지금 민주당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것을 안다면 그를 과감히 내차라고 한다. 엑스맨은 키워봤자, 당내 분란만 가중시킬 뿐 도움이 되질 않는다.

9. 포장된 7막 7장의 주인공 홍정욱

영화배우 같은 외모에다 젠틀할 것 같은 매너에 세계적 명문 하버드대를 수석졸업한 재원으로 노회찬을 누르고 정치계에 입문한 홍정욱.. 그는 과거 <7막 7장>이라는 책 한 권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혜성같이 나타나 젊은이들의 어떤 표상이었다. 하지만 이게 다 포장된 이미지라면 어떨까.. 하버드대 수석졸업은커녕 6개월짜리 병역의무도 문제가 있는 등, 그가 이후에 승승장구해 <헤럴드미디어> 인수한 과정 또한 석연치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때 잘나갔던 서울시장 오세훈 코스프레도 아니고, 만들어지고 재생산된 이미지 정치인 '홍정욱'.. 스스로 작년 말 정치계를 떠난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그렇게 외국물을 많이 드셨으니, 그만 한국에서 자랑질 그만 하시고 아예 외국에서 그냥 사시길 저자는 당부한다.

10. 까따리 변희재.

언급할 가치가 없는 듣보잡이라며 책에서도 언급이 없다. 이런.. 왜? 그는 관심을 주면 안 되니까..

그리고 마지막 3장에서는 이들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점 아니 고한다며 저자는 쓴소리의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그러면서 야권 대권승리의 요인을 언급하며 갈무리 짓는다. 이렇게 살펴봤다시피, 본 정치비평서는 '경남좌파'답게 색깔에 치우쳐 이른바 보수우파를 까고 있다. 민족과 나라 발전의 영달이 아닌, 이념마저 저버리고 변절한 작태와 기회주의적 행태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다소 의외의 인물이 있는 게 아니라 정치에 조금만 관심 있어도 알 법한 인물들이고, 또 그들이 살아온 정치적 행적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적엔 변절과 기회주의 코드가 근저에 깔리며 국회에서 아직도 기생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래서 그런 그들의 작태를 보고 있자니 열불이 나지만서도 후련한 맛도 있다. 그것이 바로 까는 맛이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우리시대 정치사회를 좌지우지했던 대권 후보는 물론 당 대표와 다선 의원들, 그리고 이미지 정치로 먹고 사는 스타 정치인들까지 그들의 과거 불편했던 진실을 논하며, 이 책은 변절과 기회주의로 점철된 대한민국 정치역사의 청산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무한반복되는 '와주테이의 박쥐들'은 아직도 기생하며,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점을 소상히 상기시킨 일종의 보고서적 성격을 띈다. 그러니 그들 과거의 지나온 일을 반추해 보면서.. 왜 변절자가 됐는지 혹은 그 과정에서 기회주의자로 전락했는지, 그들의 사정과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며 불공정한 한국정치사를 다시금 되짚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갈 길이 먼 한국정치.. 아직은 요원하지만 이런 박쥐들이 정치판에 기생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의 눈과 귀는 언제든 쫑긋이 세우며, 이들을 박멸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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