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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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신이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당신이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라마나 마하르쉬

  되돌리고 싶은 일이 일어나 상실의 아픔과 고통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때면 그 때 그곳을 가지 않았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반문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어떤 말로도 전하기 힘든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등을 토닥거리며 침묵한다. 죽음으로 연인과 함께 했던 시간까지 멈춰버린 때 살아남은 자의 상실감은 극에 달한다.


  수천 년이 지난 나무들의 정령이 묘한 기운을 발산하는 캄보디아로 의료 봉사를 나간 엘리엇이 구루 같은 노인이 건네 준 알약 10개를 받아들면서부터 330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은 시작된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가장 이루고 싶은 그의 소원은 사랑하는 일리나의 목숨을 살려내는 일이다. 30년 전 수의사로 오션월드에서 돌보던 범고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닿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내를 살리면 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엘리엇의 고민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그녀를 가슴에 품고 사는 외과의사 엘리엇은 지금껏 딸 앤지를 돌보며 진정한 아버지로 자리할 수 있었다. 아버지로 태어난 게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체득하는 삶의 통찰이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환자와의 거리를 두지 않고 인술을 펴는 의사였기에 훌륭한 의사로 불리는 엘리엇은 사랑하는 여인을 살려냄으로써 연인을 구하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을 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면 끝까지 지켜주고 보듬어주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에게도 인간 영역 밖의 일은 감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리나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결정은 예상치 못한 일들에 매여 가늠키 어려운 상황으로 내몬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되는 소설 속 구성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과제로 전한다. 알약 한 알을 삼킬 때마다 과거의 인물들과 만나며 현재의 시간과 교차하는 사이 초로에 접어든 엘리엇은 그 역시 암환자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딸이 태어나고 아버지로서 양육에 대한 부담을 느낄 새도 없이 앤지를 돌보며 이전에 느끼지 못하였던 혈육의 정을 확인한다. 딸이 살아갈 소비 중심의 세상을 비판하면서 딸의 미소를 떠올리며 딸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모습은 내리사랑을 실천하는 사랑꾼으로 비춰진다. 아버지가 이승을 뜨면 언젠가는 세상에 혼자 남을 딸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살아갈 힘을 얻기를 바라며 딸에게 남긴 메시지는 책무를 넘어서는 부성애로 앤지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의 선물이다.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고 사랑하는 대상들을 떠나보내는 삶의 과정은 유한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각인시킨다. 무엇을 바라며 살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며 공공의 선을 실현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나설 때 우리 삶의 윤기는 더할 것이다. 엘리엇이 의료기술이 낙후한 곳을 찾아 인술을 펴서 생명의 불꽃을 피우고 아내를 잃고 선물처럼 남은 딸을 사랑하며 죽음으로 이승을 떠나더라도 딸이 살아갈 수 있는 양분을 여러 방법으로 전하는 모습에서 사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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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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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내야 더 좋은 사람이 오는 법이여.’

  이삐 할매의 말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이별은 본인의 죽음으로 갈무리된다. 얽히고설킨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만남과 이별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헤어나기 힘든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고단한 일상을 낳기도 한다.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누군가와 이별하고 비통해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사후에 알 수 있다는 말이 폐부 깊숙이 자리하는 것을 보니 어쩔 수 없는 중년이라는 생각에 서글픔이 밀려든다.


  가슴에 품고 사는 누군가에게 마음자리 하나 내어주고 사는 게 쉽지 않음은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이 본인 중심으로 흐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아낌없는 사랑을 전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기도 쉽지 않음은 인간의 이기심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어서이다. 존재감 있는 개체로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을 주입하며 성취를 높이는 일에 골몰하느라 지쳐가는 이들에게 외딴 섬은 서식처를 찾아 깃드는 철새들의 안식처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기 힘든 섬에서 나고 자란 연수는 섬 생활을 청산이라도 하듯 서둘러 도시 한복판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그녀는 섬의 유지로 재력 있는 집안의 아들 태원과 사랑했지만 사랑은 성취될 수 없었다. 수전노로 부를 축적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영도의 눈에 비친 연수는 내세울 게 없는 하찮은 인물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며 힘을 냈던 기억이 없는 이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며 사는 방법을 익히기는 힘들다. 학습 면에서 정모에게 뒤처진 태원을 위로하기는커녕 질책하며 힐난하던 그의 아버지 영도는 태원의 마음에 좌절감과 모멸감을 심어줬다.


  실패한 사랑의 쓰라린 기억으로 들끓는 연수의 냄비는 냉각되어 온기로 채울 마음까지 앗아 가버렸다. 자신의 삶도 책임지기 힘든 스무 살, 아이를 길러낼 능력도 없이 엄마가 된 연수는 딸 이우와의 만남이 버겁기만 했다. 엄마의 정을 쏟으며 딸을 살뜰히 키우기보다는 이상을 실현하며 사는 예술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무한 경쟁 시대에 다수의 경쟁자를 짓밟고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고독한 경주에 나서야 했던 고등학교 생활에 마음이 통하는 태이가 있어 이우는 구멍 난 마음을 붙들어 안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운동장 한쪽 귀퉁이에 앉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이우는 태이의 호응에 기대어 안정을 찾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둘이 떠나는 여행길 돌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태이를 가슴에 묻고 방황하는 이우를 보다 못한 연수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섬으로 딸을 보낸다. 접점을 찾기 힘든 대척 상황에 놓인 모녀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갈라서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때 어울려 지내며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 정모가 깃들어 살고 있는 섬에 딸을 유폐시키고 싶은 연수는 자기중심으로 기울었다.


  정모는 방치된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들어 누구든 도서관을 찾아 책과 뒹구는 모습을 그리며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연결망으로 삼으려 했다. 말문을 닫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공생하는 삶을 잇는 판도는 이삐할매와 정모를 연결하는 시냅스로 사랑을 전한다. 머리를 무지개 색깔로 물들이고 나타난 이우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태이가 줬던 희망의 메시지를 무지개빛으로 투사했다. 상실감으로 휑한 마음을 부여안고 살아온 이우에게 섬 생활은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갈 방법을 일깨워주었다. 가공되지 않은 순수함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반응하는 판도와 정모 덕분에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마음이 통하는 이우를 두고 고통 속에 스러져 간 태이

  아버지 그늘에 기를 펴보지도 못한 채 사인 규명도 분명치 않은 태원

  두 사람의 죽음을 봤던 이우는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뱃속에 깃든 생명을 품고 살아갈 운명에 놓였다. 짠 내 나는 소금밭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일할 때 소금 꽃은 슬프고도 찬란한 빛으로 피어나는 것처럼 생명이 다한 자리에 깃든 새 생명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살아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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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소녀 혹은 키스 사계절 1318 문고 109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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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선택할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난 이들은 우연적 상황이 빚은 필연적 시간을 살아내느라 고단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진다. 위협적인 파장이 무탈한 삶을 지배하며 파고를 넘나듦은 자립하여 살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사는 이들의 상흔은 살아온 만큼 가슴속에 자리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본능대로 움직이며 학교 밖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아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하소연하는 친구를 보면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의 방황이 멈추기를 바라며 많은 것을 내려놓고 사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니 마음이 타들어간다.


  겉으로는 별 일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각자 살아온 인생의 그림자가 삶의 영역을 지배하며 뜻밖의 인생으로 몰아갈 때도 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 살아내야 했던 절박함은 부족함과 외로움에 짓눌리면서도 같은 처지에 놓인 이와 정을 나누며 사는 이들이 있다.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들을 떨쳐내고 싶지만 쉽사리 떨쳐내기 힘들어하면서도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고 들려오는 바닷소리의 울림에 마음을 달래며 사는 무나와 이를 지켜주고 싶은 주인공은 흉포해진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를 발견했다. 끔찍한 상황에서 살아남았기에 곁에 있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존재로 남아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터득되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다양한 재능을 쌓아야 한다고 다그치며 살아왔지만 결실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지 못해도 세상 살아가는데 별 무리가 없는 것처럼 양팔 없이 태어난 아이에게 물고기처럼 유영하기를 바라며 수영 강습을 할 필요도 없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주인공의 후회는 수영장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갈비찜이 먹고 싶다는 식구의 말에 재료를 사러 갔다 돌풍에 떨어진 간판은 엄마의 머리를 가격하였고 목숨을 잃은 엄마는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가족을 잃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할 상처를 남겨 음울함을 더하였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망연자실하여 무심하게 지내던 남편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뒤 할 수 있는 일이 대홍수에도 가족들을 살려낸 방주를 만들어 재해를 대비할 뿐이었다. 뭇사람들이 미쳤다고 소리 질러도 자기 방어로 아들과 자신을 지키고 싶은 삶의 희망이자 은신처로 지하 벙크를 떠올렸다. 불안감을 숨기려 웃으면서 다른 공간으로 소풍 온 것처럼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처연함이 더한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들은 상대의 이름만 되뇌어도 가슴이 뛰고 설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머릿속에는 그 사람으로 채워지고 그 사람이 있는 공간으로 마음은 향한다. 책을 좋아하는 동아리 선배를 좋아하여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며 그가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선배 역시 밤거리를 헤매며 공원 벤치에 앉아 상념의 파고를 넘나들며 침잠하는 시간 서로의 사랑은 한 방향으로 향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비껴가는 사랑에 외로움은 녹아들어 상실의 슬픔을 더한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 쭈뼛거리며 용기를 내어 첫사랑에게 고백하던 시절의 추억은 몇 날 며칠을 뒤척거리며 썼다 지웠다 반복하던 사랑한다는 한마디의 헛헛함을 알아차린 뒤라도 따스함을 준다.


  잇따라 부모를 여의고 일찍 철이 든 전학생 오란디는 절망 속에서도 꿋꿋하게 생존하는 표본처럼 낙담과 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학생이 오기 전 줄곧 1등을 도맡았던 주인공은 그녀에게 1등을 내주고 그녀를 향한 증오는 지키려는 것을 빼앗긴 자의 비굴한 감정이었음을 알아차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한 사고는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할 기회마저 빼앗아버렸고 진통제에 의지하여 지내는 투병 생활에 길들여진 침묵은 이전의 자신과는 대별되는 모습으로 바꾸어버렸다. 겸손함과 배려로 자신을 무장해온 전학생은 정해진 시간 병실을 찾아 책을 읽다 가기를 반복하며 주인공의 마음에 자리한 증오를 조금씩 덜어주었다. 주인공이 건강을 회복하고 함께 그녀와 학교생활을 잇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미움 저편에 자리한 사랑은 소리 없이 가슴 속에 들어앉아 생활에 활기를 더한다.


  이성 교제와는 거리가 먼 4명의 동성 친구들은 청소년시기 성에 대한 호기심은 한 문장의 홍보 문구에 끌리게 했고 급기야는 여체 인형 지나를 주문시키게 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틈을 타 배달된 인형을 한곳에 두고 친구 넷이 돌아가면서 외로움을 달래보려 했던 일이 변태로 내몰려 정학 처분까지 받아야 했다. 성장 시기마다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제어하기 힘든 때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고 생각한 바를 감행하는 십대들의 모습에 가식 없는 용기를 읽는다. 표출하지 않고 음지에 숨어 갖은 욕망을 쏟고 배출하는 일보다 경험으로 자신을 바로 세워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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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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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렬한 기세로 창문을 뒤흔드는 바람이 불어올 때면 마음 한 쪽이 아려온다. 마음에 생긴 상실의 구멍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상처로 후유증을 남긴다.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던 1970년대 초 농촌에서의 삶은 육체적 노동에 의존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할머니와 남동생, 실질적 가장인 어머니, 맏딸로 구성된 가족은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지내야 했다. 맏딸이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가중된 집안일은 늘어났다. 밤낮으로 일해야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으며 십 리 밖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던 시절의 고충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어머니의 질책이었다.


  삶이 팍팍하고 고단하여 쉬어야 하는데 집에서도 일이 있으니 쉴 수도 없다며 탄식하는 어머니의 소리는 맏이를 향해 내뱉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별일 아닌데도 호되게 뭐라 하면서 딸을 다그치던 표정의 어머니는 지금도 서늘한 그림자로 남아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상처의 농도는 조금씩 옅어졌지만 여전히 어머니와의 관계는 살갑지 못한 편이다. 걸음이 시원찮은 70대 중반의 어머니를 뵐 때마다 안쓰러움은 일지만 먼저 다가가 곰살궂게 대하지 못하는 못난 자식의 마음에 자리한 상처는 쉽게 아물어지지 않는다. 상대를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서로의 입장만을 내세워 이해해주기를 바라다보니 서운함은 배가 되고 공감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작품을 재해석하고 평가하여 독자들에게 앎의 지평을 열어주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저자 역시 딸만 셋인 집안의 맏딸로 짊어지고 가야 할 일상의 무게가 컸다.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주문을 걸고 마음 다치지 않은 척 견디어 왔던 시간을 반추하며 트라우마로 자리한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는 주체로 나설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의 원인을 바깥에서만 찾으려 말고 자기 내부의 치유 능력을 회복하여 갈 때 슬픔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작가의 길로 들어선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불행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위해 슬픔과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이야기 소재로 복원하였다.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거짓된 페르소나를 벗어 버리는 부활과 정화의 공간인 무진을 떠나며 윤희중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헤매던 방랑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무진에서 만난 세 여인에게서 발견했던 알터에고의 모습과 만났지만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아가는 소시민의 전형을 보인다. 내면의 소리를 잠재워서라도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길을 택한 일반인들의 선택은 내 안의 상처를 보살피며 살아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들 하지만 나이 들수록 건강·금전·인간관계 등의 불안 요소에 짓눌려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푸념의 소리가 늘어난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꿈꾸며 갈망하는 노년의 삶은 현재적 삶에서 가능한 것들과 멀어져 고통을 더한다. 나이 들어도 품위를 잃지 않는 노년을 바란다면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 노쇠한 어부로 팔딱거리는 생명을 건져 올리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주변의 멸시 속에서도 집념어린 태도로 낚싯대를 드리워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던 노인은 사자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육신은 쇠락하여가더라도 영혼의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은 숭고한 의지로 드러난다.


  정해진 수순을 밟아 장애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돌발적인 변수들이 작용해 우연을 필연으로 이끄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때에 외출을 안 했더라면 일이 안 생겼을 텐데 괜히 전화를 받고 가다 사고를 당했다며 후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어난 일은 어떻게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때 내가 성공한 남자였다면..........’

  가정을 이루고 사는 데이지와의 재결합을 현실화하기 위해 가망 없는 노력을 쏟아 부으며 자기 파멸을 초래한 개츠비의 불운한 삶을 보면서 꼬여버린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이를수록 나아 보인다. 타인을 포함한 사회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고민하기보다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여 내면의 형상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살면서 겪는 상처를 치유하여 가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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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지음, 김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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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처한 상황에서 각기 살아온 시간이 다른 이들이 만나 사랑할 때만 해도 이성을 잃고 상대를 미화하여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받아들이며 현실적 삶과는 멀어진다. 연인이 갈구하며 사랑하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다 보면 현실이 녹록하지 않음을 느끼며 살 때가 늘어난다. 인연을 맺고 지내는 이들이 결혼을 앞두고 조언을 구할 때면 결혼은 미룰 수 있으면 미루다 철이 들어서 결혼하기를 권한다.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지 못하고 결혼하여 철없이 시작됐던 결혼 생활은 현실의 벽과 부딪혀 깨질 때마다 후회는 쌓인다. 다른 우주에서 지내다 온 남편과 그의 세계를 구축하는 환경을 오롯이 받아들이기에는 역량이 부족하고 아량이 넓지 못하여서일 것이다.


  직장 동료로 만나 짧은 연애를 끝으로 결혼 생활 25년째이지만 여전히 결혼에 대한 생각은 비관적이다. 자식 역시 품 안에 자식이라고 커갈수록 부모의 마음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모습이 보이고 있어 씁쓸해질 때가 있다. 미성년 아들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가정불화의 씨앗으로 자리하여 슬픈 다툼이 종종 일어난다. 자정 무렵까지 이어진 다툼은 잠을 자야 할 시간이라는 이유로 적정선에서 타협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워보지만 쉽게 잠들 수 없어 뒤척거리다 잠을 깼다. 굳어진 표정으로 가족의 얼굴을 보면서 데면데면한 채로 씻고 말없이 앉아 아침을 먹는다.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는 모습에서 가까이 사는 식구들이 타인처럼 여겨질 때 서글퍼진다.


  우연한 시간과 공간이 직조하는 인연의 날실과 씨실은 두 사람의 만남을 필연적인 사랑으로 엮는다. 도시 공간을 구획하여 시민 공간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건축가 라비는 건축 현장에서 지성과 친절함, 유머와 아름다움을 겸비하였다고 판단한 커스틴을 만나 그녀의 마음을 얻고 사랑에 빠졌다. 커스틴은 결핍과 사랑의 부재로 외로웠던 유년기의 상처를 토로하는 라비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에 공유의 폭을 넓혀갔다. 비밀을 함께 알고 있는 동반자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상황에서 둘은 에로틱한 자극으로 두려움을 해소하여갔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직관적으로 서로에게 압도되어 사랑에 빠진 이들은 결혼으로 부부가 살아보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가는 길에 선다.


  한 방향을 보고 생활하는 부부가 화합하여 조화롭게 사는 시간보다 소소한 쟁점으로 불화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상대한 대한 강한 분노를 토라짐으로 드러내며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지만 내면의 아이를 만나고 용서해주는 과정이 쉽지가 않다. 떼쓰는 아기를 토닥거리며 달래주는 일이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호의라는 말에 공감하며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 결혼 생활의 현실적인 도덕률을 담고 있다. 상대가 바라는 이상형에 일치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생각의 차이를 용기 있게 말하여 대화로 풀어가는 일은 비단 부부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혼 3주년 기념 여행을 앞두고 아내의 의견에 따르면서 회의하면서도 라비는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인 커스틴에게 더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잘못된 희망을 걸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랑받기를 바라는데 초점이 맞춰진 낭만적 사랑이 인색한 낭만적 사랑임을 깨달을 때 성숙한 인간으로 자리한다는 작가의 말은 사랑을 주는 것보다는 받기를 갈구하며 지내온 것은 아닌지 반문한다.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양육하며 자리하는 사랑은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임을 발견하고 부부만의 방식대로 자식들을 사랑하였지만 양육과정에서 아이들과의 마찰로 배우자에게 불만이 쌓이기도 한다.


  만사가 시계추처럼 정확히 움직인다면 단조로울 수 있지만 무탈하게 지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늘어난다. 가족 중 어느 누구가 아파 투병하게 되었을 때 가정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건강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지내느라 무탈하게 지내온 시간이 생기 없는 생활에도 감사하게 된다. 합리적이고 너무 체계적이고 계획적이어서 갑갑하다고 아내에게 항변하는 라비를 보면서 맞벌이 부부로 어느 한쪽의 희생 아래 가정이 꾸려진다면 그것도 개선해야 할 점일 것이다. 혼외의 성적 욕망을 충족하려는 생각과 도덕적인 부부 생활로 신뢰를 지켜가는 결혼 생활은 양립하기 힘든 만큼 외도의 여파를 겪으며 라비는 결혼을 사랑의 감정을 토대로 쌓은 축성에서 제도화된 규약까지 포함하였다.


  어린 시절 겪은 부당한 경험의 상처는 자기 방어를 위한 전략을 구축하고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는 전략을 세우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서로의 약점과 슬픔을 인정할 때 오는 불안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상충하여 다툼으로 비화하는 경우 라비는 불안해하면서 공격하고, 커스틴은 회피하면서 퇴각하여 합일점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의견 차이로 간극이 컸던 부부는 전문가의 조력으로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상대를 받아들이며 통찰적인 안목으로 새로운 결혼 생활의 활기를 찾아가는 길에 섰다.


  열정으로 만난 연인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이들이 화합하며 지낼 때보다 불화하는 경우가 더 많아 상처를 주고받으며 지내는 삶이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한눈에 알아보았던 미래의 배우자라고 여겼던 직관이 맞지 않았다고 푸념하기보다는 스스로 중첩된 위험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점을 반성하며 다양한 삶에서 발견하는 인생의 지혜를 일깨우는 시간이 결혼 생활이 아닌가 싶다. 상대의 허물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여과하여 상대의 마음을 해하지 않는 소소한 실천이 취향이 다른 상대를 인정하며 조화를 찾아갈 수가 있다. 사랑의 정점이라 여겼던 결혼이 흐르는 시간에 따라 감정이 퇴색하더라도 사랑을 지속시켜주기 위한 장치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낭만적 사랑을 넘어 성숙한 사랑으로 부부가 동반성장하는 질적인 삶을 지향하며 지나온 시간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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