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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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렬한 기세로 창문을 뒤흔드는 바람이 불어올 때면 마음 한 쪽이 아려온다. 마음에 생긴 상실의 구멍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상처로 후유증을 남긴다.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던 1970년대 초 농촌에서의 삶은 육체적 노동에 의존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할머니와 남동생, 실질적 가장인 어머니, 맏딸로 구성된 가족은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지내야 했다. 맏딸이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가중된 집안일은 늘어났다. 밤낮으로 일해야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으며 십 리 밖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던 시절의 고충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어머니의 질책이었다.


  삶이 팍팍하고 고단하여 쉬어야 하는데 집에서도 일이 있으니 쉴 수도 없다며 탄식하는 어머니의 소리는 맏이를 향해 내뱉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별일 아닌데도 호되게 뭐라 하면서 딸을 다그치던 표정의 어머니는 지금도 서늘한 그림자로 남아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상처의 농도는 조금씩 옅어졌지만 여전히 어머니와의 관계는 살갑지 못한 편이다. 걸음이 시원찮은 70대 중반의 어머니를 뵐 때마다 안쓰러움은 일지만 먼저 다가가 곰살궂게 대하지 못하는 못난 자식의 마음에 자리한 상처는 쉽게 아물어지지 않는다. 상대를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서로의 입장만을 내세워 이해해주기를 바라다보니 서운함은 배가 되고 공감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작품을 재해석하고 평가하여 독자들에게 앎의 지평을 열어주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저자 역시 딸만 셋인 집안의 맏딸로 짊어지고 가야 할 일상의 무게가 컸다.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주문을 걸고 마음 다치지 않은 척 견디어 왔던 시간을 반추하며 트라우마로 자리한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는 주체로 나설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의 원인을 바깥에서만 찾으려 말고 자기 내부의 치유 능력을 회복하여 갈 때 슬픔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작가의 길로 들어선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불행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위해 슬픔과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이야기 소재로 복원하였다.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거짓된 페르소나를 벗어 버리는 부활과 정화의 공간인 무진을 떠나며 윤희중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헤매던 방랑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무진에서 만난 세 여인에게서 발견했던 알터에고의 모습과 만났지만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아가는 소시민의 전형을 보인다. 내면의 소리를 잠재워서라도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길을 택한 일반인들의 선택은 내 안의 상처를 보살피며 살아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들 하지만 나이 들수록 건강·금전·인간관계 등의 불안 요소에 짓눌려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푸념의 소리가 늘어난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꿈꾸며 갈망하는 노년의 삶은 현재적 삶에서 가능한 것들과 멀어져 고통을 더한다. 나이 들어도 품위를 잃지 않는 노년을 바란다면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 노쇠한 어부로 팔딱거리는 생명을 건져 올리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주변의 멸시 속에서도 집념어린 태도로 낚싯대를 드리워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던 노인은 사자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육신은 쇠락하여가더라도 영혼의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은 숭고한 의지로 드러난다.


  정해진 수순을 밟아 장애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돌발적인 변수들이 작용해 우연을 필연으로 이끄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때에 외출을 안 했더라면 일이 안 생겼을 텐데 괜히 전화를 받고 가다 사고를 당했다며 후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어난 일은 어떻게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때 내가 성공한 남자였다면..........’

  가정을 이루고 사는 데이지와의 재결합을 현실화하기 위해 가망 없는 노력을 쏟아 부으며 자기 파멸을 초래한 개츠비의 불운한 삶을 보면서 꼬여버린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이를수록 나아 보인다. 타인을 포함한 사회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고민하기보다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여 내면의 형상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살면서 겪는 상처를 치유하여 가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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