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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이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당신이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라마나 마하르쉬
되돌리고 싶은 일이 일어나 상실의 아픔과 고통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때면 그 때 그곳을 가지 않았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반문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어떤 말로도 전하기 힘든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등을 토닥거리며 침묵한다. 죽음으로 연인과 함께 했던 시간까지 멈춰버린 때 살아남은 자의 상실감은 극에 달한다.
수천 년이 지난 나무들의 정령이 묘한 기운을 발산하는 캄보디아로 의료 봉사를 나간 엘리엇이 구루 같은 노인이 건네 준 알약 10개를 받아들면서부터 330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은 시작된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가장 이루고 싶은 그의 소원은 사랑하는 일리나의 목숨을 살려내는 일이다. 30년 전 수의사로 오션월드에서 돌보던 범고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닿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내를 살리면 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엘리엇의 고민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그녀를 가슴에 품고 사는 외과의사 엘리엇은 지금껏 딸 앤지를 돌보며 진정한 아버지로 자리할 수 있었다. 아버지로 태어난 게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체득하는 삶의 통찰이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환자와의 거리를 두지 않고 인술을 펴는 의사였기에 훌륭한 의사로 불리는 엘리엇은 사랑하는 여인을 살려냄으로써 연인을 구하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을 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면 끝까지 지켜주고 보듬어주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에게도 인간 영역 밖의 일은 감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리나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결정은 예상치 못한 일들에 매여 가늠키 어려운 상황으로 내몬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되는 소설 속 구성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과제로 전한다. 알약 한 알을 삼킬 때마다 과거의 인물들과 만나며 현재의 시간과 교차하는 사이 초로에 접어든 엘리엇은 그 역시 암환자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딸이 태어나고 아버지로서 양육에 대한 부담을 느낄 새도 없이 앤지를 돌보며 이전에 느끼지 못하였던 혈육의 정을 확인한다. 딸이 살아갈 소비 중심의 세상을 비판하면서 딸의 미소를 떠올리며 딸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모습은 내리사랑을 실천하는 사랑꾼으로 비춰진다. 아버지가 이승을 뜨면 언젠가는 세상에 혼자 남을 딸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살아갈 힘을 얻기를 바라며 딸에게 남긴 메시지는 책무를 넘어서는 부성애로 앤지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의 선물이다.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고 사랑하는 대상들을 떠나보내는 삶의 과정은 유한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각인시킨다. 무엇을 바라며 살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며 공공의 선을 실현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나설 때 우리 삶의 윤기는 더할 것이다. 엘리엇이 의료기술이 낙후한 곳을 찾아 인술을 펴서 생명의 불꽃을 피우고 아내를 잃고 선물처럼 남은 딸을 사랑하며 죽음으로 이승을 떠나더라도 딸이 살아갈 수 있는 양분을 여러 방법으로 전하는 모습에서 사랑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