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임볼로 음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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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정부는 코사와 마을 사람들은 참석하지 않은 베잠의 회의에서 코사와를 미국의 석유회사 펙스턴에 팔았고, 유전에서 마을 우물로 흘러드는 오염물의 독에 의해 아이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정부와 펙스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코사와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마을의 대표단이 베잠으로 향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펙스턴 본사가 코사와 사람들을 위한다는, 정부가 코사와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수도의 사람들이 코사와 사람들의 죽음에 애도를 전한다는, 펙스턴과 정부는 코사와의 친구라는, 그 모든 거짓말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코사와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은 그들의 공기와 물과 땅이 언제 다시 깨끗해질 건지 구체적이고 정확한 계획이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깨끗한 물, 깨끗한 공기, 깨끗한 음식이 전부다.







 
주인공 툴라가 열 살에 시작되는 소설은 가상의 마을 코사와를 배경으로 30년의 세월을 서술한다. 화자의 시점을 달리하는 이야기 구성은 말라보와 사헬을 비롯한 기성세대의 관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자식인 '어린이들' 관점에서 진행되는데, 그 '어린이들'이 청년 시기를 거쳐 부모의 세대가 되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독재자가 군림하는 가난한 나라에서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은 코사와뿐이 아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군인들이 소녀를 유린하고, 다른 마을에서는 벌목으로 산림과 땅이 죽어가고 있고, 또 다른 마을에서는 광산으로 주민들이 쫓겨났다. 이 마을들에 사는 사람들이 베잠에 와서 울며 도와달라고 빌었지만, 베잠에는 그들을, 그들의 요구를 기억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열 살의 아이들이 아버지가 되고, 그들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도록 코사와는 달라지지 않았다. 


코사와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고통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기름을 채굴하기 전에는 고무 채취로 고통받았고, 강간 및 인신 매매도 당했다. 독재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법치를 들어 파괴했으며, 부정부패를 넘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국토를, 국민을 외국 기업에 팔았다.  


거대 자본, 다국적기업, 내전과 전쟁, 기후변화 등 여러 이유로 우리는 살던 마을을, 나라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툴라가, 사헬이, 야야가 그랬듯이. 지구라는 행성 역시 필멸의 존재니 인류는 그 끝이 언제든 우주로 나가지 않는 이상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문명'과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약자들을 약탈하는 것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 이것이 코사와만의 일이겠는가. 경제 선진국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나. 코사와가 이해한 문명과 경제성장은 모두가 풍요로운 세상이다. 


ㅡ 


소설은 토양과 수질 오염으로 인한 코사와 마을 사람들과 투쟁에 앞장 선 툴라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부장제에서 제 삶을 본인 뜻대로 살지 못하는 여성과 공동체의 관습을 따르고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며 치유하지 못한 채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아이들,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을 부양해야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가장들, 나라와 가족 중 우선 순위를 결정해야만 하는 딜레마, 혈연과 인종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상실감 등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힌 인물들의 면면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어제까지만해도 동네를 뛰어다니며 함께 놀던 친구들이 이유도 모른 채 줄줄이 죽어나가고, 대화를 하겠다고 집을 나선 아버지가 실종되고, 재판도 없이 마을 남자들이 교수형을 당한 경험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야하는 어린이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아이들 죽음의 참담함은 말할나위 없고, 소설 초반에 나를 더욱 분노하게 했던 점은 소녀에게서 더할 수 없이 자상했던 아빠를 앗아갔다는 것보다 고작 열 살 아이에게 평생을 바쳐 복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툴라가 유학 간 미국에서 코사와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명은 '언제나 우리 중 하나, 툴라'다. 그녀가 일평생 생득권으로 삼았던 '우리'. 툴라는 서른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남은 생이 험난한 투쟁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길임 또한.  


내가 가장 애잔하게 바라본 인물은 사헬이다. 스물여덟 살 무렵에 과부가 된 그녀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는 생이 다할 때까지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애도뿐이다. 시어머니인 야야의 넋두리처럼 사헬의 곁에 누가 있어줄까? (남편과 자식을 앞세운 그녀에게 물리적 편안함이 대수일까.) 



펙스턴은 장학재단을 설립해 코사와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코사와 마을 자리에 새로운 유전을 개발하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은 펙스턴이 후원하는 돈으로 학업을 이어갔고, 새로운 삶을 위해 유럽과 미국으로 떠났다. 서른 해가 지나 코사와의 아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기업이나 베잠의 정부에서 일자리를 얻어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 이 기막힌 모순을 어떻게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 말라보가 베잠으로 가지 않았다면, 마을 사람들이 펙스턴 대표단을 가둬놓지 않았다면, 봉고가 또다시 베잠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그들이 살았다면 코사와 사람들의 고통의 무게가 줄어들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스틴의 말처럼 때가 되면 변화가 올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저항해야하는 까닭은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뿐이기 때문이니까.


소설의 인물 설정상 굳이 따지자면 툴라가 저자와 가장 가까워 보일 수 있겠으나 나는 오스틴과 툴라 두 사람 모두에게서 저자가 느껴진다. 대화와 행동. 변화를 꿰하는 노력에는 오스틴의 방식, 툴라의 방식으로 나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했음이 아닐런지. 마치 독백처럼 읽혔던 툴라의 편지에서 전해지는 고뇌와 숙고의 과정을 통한 확신과 결의가 참... 진하게 와닿는다.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고 긴 숨을 내뱉었다.
너무나 애처롭고 아름다웠던 툴라를 어떻게 잊을까.
이 먹먹함이 가시려면 또 며칠의 시간이 걸릴 듯 하다. 


나의 '올해의 소설'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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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 지음, 오숙은 옮김 / 반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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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눈멂은 내게 완전한 불행은 아니었다. 삶의 한 방식, 삶의 스타일일 뿐이다. 
(보르헤스) 
 

열 살 무렵 망막색소변성증(정확한 진단명은 원뿔세포-막대세포이상증)을 진단받은 저자는 열여섯 살 즈음에는 보통 크기의 글자도 읽을 수 없게 됐고, 첫 진단 후 40년이 지난 현재는 완전한 실명은 아니지만 앞을 보지 못한다. 이 책은 시각장애인의 위대한 인간 승리 성공담이나 장애인 관점에서 비시각장애인 중심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일방적 비판의 글이 아닌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밀턴, 보르헤스, 샬럿 브론테, 주제 사라마구, 프랭크 허버트,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등 분야를 불문한 고대 및 현대의 인물과 그들의 문헌을 데려와 문학과 철학을 비롯해 스티비 원더 등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눈멂이 갖는 피상성, 죄악, 진실과 거짓, 시각 중심주의 등을 서술한 문화 및 예술 비평서에 가깝다.  









 
온전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게 되리라는 눈멂의 은유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저자는 젠더가 눈멂을 굴절시킨다고 쓰면서 여성과 눈먼 남성을 같은 선상에 놓으며 그들이 비주류 바라봄의 대상임을 짚는다. 동시에 인간 존재의 가변성이 젠더 유동성으로 나타남을 지적하며 눈멂이 곧 여성성과 동일시됨을 얘기한다(그러니 시각장애인이 여성일 경우는 어떻겠는가).


시력이 아주 완벽하다고 믿을 때조차도 우리의 시력은 근본적으로 어둡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멂이 우리 인간성의 한 양상임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문헌들에서 혹은 고정관념적으로 보통 인간의 내면적 깊이와 관련해 눈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 눈은 물질로 구성된 몸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저자는 뿌리깊은 시각 중심적 편견 때문에 시각장애 작가가 자신의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야기가 초반부터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무척 공감했다. 많은 비시각장애인 작가들이 마치 시각장애인의 세계를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쓴 글들과 이를 위화감없이 받아들이는 독자들에 대해, 그리고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기도 했다. 평소 궁금했던, 영아기에 시각을 잃은 시각장애인의 경우, 비시각장애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시각 세계가 암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경험적 비교 대상이 없기에 적절하지 않음 또한 새삼 인지했고.   



올리버 색스는 사물을 보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선천적인 능력 같지만, 실은 전반적인 기능의 위계가 필요한 인지적 성과에 해당한다고 했다. 즉 읽는 법을 배우듯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해당 장에서 시각을 복구하는 것이 우울한 어둠에서 기쁨 넘치는 빛으로 나아간다는 안일한 은유를 피해야한다고 얘기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올리버 색스의 저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생각났다. 비장애인이 장애에 대해 갖고 있는 섣부른 고정관념과 왜곡된 인식을 깨달았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 당시 느끼고 배웠던 점을 다시 각성할 수 있었다.  


저자는 점자가 하나의 문자 체계임을 분명히 하면서 점자의 읽고 쓰기를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비시각장애인도 배울 수 있는데, 문제는 동기에 있다고 말한다. 각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배우는 것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 점자 역시 마찬가지임을 주지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비시각장애인에게 점자를 배울 동기는 많지 않다. 거기다 시중에 점자책도 쉽게 구할 수 없어서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11장에는 헬렌 켈러를 들어 장애 행동주의에 대해 서술한다. 예술 창작 및 공연에 있어서 시각장애인이 만든 역할을 그들이 연기하는 것은 장애 행동주의를 위한 중요한 수단임을 밝히며 비시각장애 작가와 배우가 연극과 영화 속의 시각장애인을 창조하는 것은 포용과 다양성에 있어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작년에 시청했던 한 드라마에서 다운증후군 장애인이 직접 배역을 맡아 연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익광고를 비롯해 이러한 추세로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듯한데 점점 더 확대되기를 바람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영감 포르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저자는 장애가 영감을 준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며 장애를 영감과 연관 짓는 것은 장애가 단지 인간성의 한 양상이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인권에 반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 부분은 1장의 호메로스와도 연결되는데 이러한 점은 현대의 대중문화에서도 수시로 활용 및 은유된다는 점에서 나 역시 불편하다. 


ㅡ 


시각장애인은 평생의 파트너에게 보살핌을 받아야한다는 인식, (시각)장애인의 지적 수준이 비(시각)장애인보다 낮다는 편견, 성적 지향의 결정조차 시각의 있고 없고에 달려있는 듯한 태도 등 우리는 여전히 많은 편견을 갖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15장에서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무시되는 눈먼 자들에 대해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데, 이 부분에서 저자의 의견을 더 듣고 싶은 점이 있었다. 소설은 우의적인 설정이고 정황상 눈먼 자들이 갑자기 실명해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여길 수 있음을 저자도 짚는다. 그럼에도 사라마구가 소설 속에서 묘사는 '눈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소설에서 인물들은 목숨을 잃을수도 있고 그안에서도 절대 악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과연 '눈먼' 사람들은 어떻게 그려져야 했으며, 유일하게 시각을 잃지 않은 여성과 눈이 멀게 된 사람들은 어떤 구조를 가져야했을까. (이 부분은 계속 생각 중이다.) 



"장애는 유동적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시각)장애인으로서 주류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위의 짧은 문장은 장애와 비장애의 장벽이 얼마나 낮은지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비장애 중심주의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저자는 통찰하며 일갈한다. 


이 책을 펼치고 서너쪽을 넘길 즈음 내가 갖고 있는 비시각장애인으로서의 한계를 또다시 깨달았다. 책의 표지에 점자가 있는 것까지는 납득을 했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든 생각은 '폰트가 왜 이렇게 커?'였다. 그순간 나는 여전히 비시각장애인 관점에서 사물을 우선해 판단하고 있구나라고 새삼... . 산산히 쪼개져있는 의식의 조각들을 모으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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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에디터스 컬렉션 1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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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왔다고. 

 


1947년, 스물아홉 살 가즈코는 6년 전에 아이를 사산한 후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고, 그녀의 동생 나오지는 대학교에 다니다가 징집된 후 종전 후에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해부터 집안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외삼촌의 권유로 시골 이즈로 이사온 모녀. 몇 달 후, 아편 중독자가 되어버린 나오지가 돌아온다.  









소설에는 가즈코, 나오지, 우에하라를 중심으로 가즈코를 1인칭 화자로 삼아 서술한다. 종전 후 몰락해가는 귀족과 패전 이후 황폐해진 사회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내적 갈등, 혁명이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혼란, 그리고 구차한 삶이라도 살아내겠다는 생명력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허울뿐인 귀족에서 벗어나 평민으로 살아보고자 발버둥첬던 나오지. 그의 일기에는 전쟁터에서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이런 삶이 계속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음을 통탄하며,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쓰여 있다. 자신이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강인한 민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으며, 귀족 사회에서도, 민중 사이에서도 이방인이었던 나오지는 끝까지 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쾌락과 타락을 선택했으나 매순간 불행했다.  


나오지가 방황과 고뇌를 보여준다면 우에하라는 무기력함을 나타낸다. 집에서는 사흘이 지나도록 전구를 갈지 못해 아내와 딸이 해가 지면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각혈을 하도록 술을 마신다. 가즈코의 열렬한 구애가 담긴 편지를 읽었으면서도 답장 한 통 없다가 6년 만에 찾아온 그녀를 하룻밤 받아들인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일상에 도저히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가즈코는 6년 전에 한 번 만나 입맞춤을 한 게 전부인 우에하라에게 자신을 받아달라는 세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바라는 것은 아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그의 첩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랑을, 아이를 원할 뿐이다.   


가즈코는 자신의 편지를 비웃는 사람이라면 여자가 살아가려는 노력과 여자의 생명을 조롱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심정이 갇혀 있는 듯한 현실에 숨쉬기조차 어려워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항구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호소한다. 또한 자신은 정박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물 위에 떠있기만 하는 배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당장의 상황을 가장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누군가의 쑥덕거림 따위는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다.  



가즈코와 우에하라의 재회. 애초에 우에하라에게 의탁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혁명할 계기가 필요했고, 도전적으로 나서서 뭇사람들의 시선과 낡은 도덕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해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우에하라에게 멋지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전투를 치르라고. 어머니와 살던 시절의 귀족적 명예와 평온이라는 꾸며식 허식에서 벗어나 사생아와 그 어미라는 도덕적 허물을 걷어내고 혁명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꿋꿋하게 살아갈 것을 선언하는 그녀. 어쩌면 가즈코의 강인한 삶에 대한 욕구와 생명력 자체가 혁명이 아닐까. 그리고 혁명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우에하라에게 보내는 편지는 가즈코의 결연한 의지를 대변한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가즈코의 변화다. 소설 초반에 유약하게 느껴졌던 그녀의 모습은 어머니의 병세를 기점으로 달라지더니 우에하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상당히 도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내면에 숨어있던 기질이 위기를 맞아 발현된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부딪치면서 단단해진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나 진흙탕 속에서도 살아남겠다는 가즈코의 강인함은 나오지와 우에하라, 두 남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내 아이를 낳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아이를 낳아주겠다니. 그야말로 시대의 전복이 아닐 수 없다.




138.
나는 살아나가야 한다. 어린애일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어머니처럼, 사람과 다투지 않고, 증오도 원망도 없이 아름답고 가련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우리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너무나 추찹하고 생피 냄새 나는, 더럽기 그지없는 일이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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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 신과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
필리프 르셰르메이에르 지음, 레베카 도트르메르 그림,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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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읽다가 중간에 살포시 덮고, 신약성서는 말그대로 읽기만 했다. 그래서 성경이라면 뒷걸음질 치는 부류인데,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내용도, 그림도 신박하다. 신과 인간의 서사라는 소개글에 걸음질은 점점 앞으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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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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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천재가 아니라면 나는 끝장이다! 




평전이 소설 이상으로 재밌다면 얼토당토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읽어보면 알게 된다. 그런 평전이 있다는 것을. 발자크의 삶 자체가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을 능가하고, 여기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필력까지 보태져 드라마틱한 평전이라고 단언한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작품은 모두경험에서 나왔다고 얘기했는데, 발자크 역시 그렇지않나 싶다. 그의 역작 <인간희극>을 순서대로 읽으면 발자크의 인생 행로를 함께 걸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단행본 한 작품 한 작품마다 각각 다양한 사회 계층과 현상을 드러내고 있어 한 시대를 망라하는 사회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츠바이크는 오노레 발자크의 작품들을 비롯해 그가 쓴 편지, 그의 주변인들이 남긴 글과 사진 자료 등과 연계해 그의 일생을 톺아본다. 책을 읽노라면 츠바이크가 발자크의 삶과 그의 작품에 대해 굉장히 열정적으로 탐구했음을 알 수 있다.



오노레의 어린 시절을 읽어보면 그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어느 정도는 허풍꾼이면서 재치를 겸비했고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까지, 거기다 동생 프랑스와까지 몇 권의 작은 책을 썼다는 걸 보면 필력 또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다. 까다롭고 예민하며 우울감이 높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냉대와 정서적 학대, 그리고 너무 어린 나이에 겪은 기숙학교에서의 강압은 오노레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듯 하다. 그럼에도 인생 전반에 걸친 그의 낙천주의를 보면 그런 면은 타고나는 게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는.  


발자크가 문학적 천재성을 가졌음에도 문학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츠바이크는 이 부분에 대해서 고티에의 말을 인용하며 어쩌면 발자크가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글을 쓰는 것에 대해 필연성 혹은 사명감을 가졌다기보다는 글쓰기를 통해서 돈과 명예를 얻는 열쇠로 여겼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더불어 발자크의 천재성은 의지력에 기인한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발자크 생애는 문학을 제외하면 여자와 사업 실패, 빚으로 점철되어 있다. 거기다 병적으로 귀족을 숭배해 어느 부유한 부인이 정통성 있는 귀족 출신이라는 말만 들리면 바로 사랑이 샘솟을 정도여서 한때는 희대의 카사노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문어발식 연애를 감행했으니 그야말로 못말리는 철부지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천재성과 출신의 괴리가 크다고 여겨 귀족에 대한 동경이 큰데다, 애초에 자본도 없으면서 사업을 벌이고 망하고를 반복하다보니 돈 많은 연상의 귀족 유부녀에게만 매달린다. 만약 발자크가 벌어들인 돈을 관리만 제대로 했다면 그토록 비굴하게 한스카 부인한테 결혼을 구걸하지 않았을 것 같다. 발자크의 내면에는 공상가와 교활한 현실주의자가 공존했다는 츠바이크의 표현이 적절하다.  


발자크는 끊임없이 자극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바람하지만 굳이 일을, 그것도 썩 여러모로 긍정적이지도 않고 즉흥적이다시피 일을 벌이고 스스로 그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리고는 누가 피해를 입든 말든 혼자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읽으면서 나 혼자 얼마나 부아가 나고 한숨을 쉬어댔는지... . 


ㅡ 


츠바이크는 발자크를 세계 문학사상 알려진 가장 지치지 않는 노동의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발자크는 적어도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꼼꼼하고 예민하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휴식이나 중단 없이 빠른 속도로 가차없이 대여섯 시간을 써내려갔고 커피 마시는 것을 제외하면 하루에 열다섯 시간 작업을 했다. 발자크는 교정쇄도 꼼꼼하게 살폈고 본인이 정해준대로 인쇄되어야 했다. 속물적이고 허영심이 가득한 발자크였지만 작품의 완성과 자신의 예술적인 명예에 있어서는 현대문학사상 가장 양심바르고 끈질긴 열정적인 작가였다. 


이렇듯 과도한 노동이 20년도 채 안 되어 <인간희극>을 만들어냈다. 거기도 일로서의 글쓰기뿐 아니라 개인적인 편지나 일기 쓰기까지 포함한다면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글쓰기 양이다. 죽을 무렵 손으로 펜을 잡지 못해 부인의 손으로 쓰인 마지막 한 줄의 기록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의 모든 페이지와 편지의 구절은 그가 직접 손으로 쓴 것이다. 글만 썼다면 좋았을 것을... . 


어처구니 없는 에피소드 하나. 벌이는 족족 실패하는 사업도 모자라 오로지 돈벌이를 위해 연극계에 진출한다. 1년에 약 30편의 희곡을 쓰겠다는 그의 계산을 보더라도 발자크가 자신의 희곡에 얼마나 공을 들이지 않으려고 하는지,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 분명하다고 분석한다. 츠바이크는 이 부분에서 고티에의 <초상화> 일부를 발췌하는데 읽다가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 발자크가 고티에게 시간이 촉박하니 희곡을 지인들과 나눠쓰자는 것. (아이구야...)


그럼에도 발자크를 미워할 수 없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이미 작가로서 정점에 있던 발자크가 무명에 가까운 스탕달을 한눈에 알아봤고, 자신이 쓰고자 했던 글감을 그가 쓴 것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원고가 정식으로 출간 되기 전에 해적판이 돌아다녀 작가들의 작품이 제 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발자크는 작가연합을 통한 문학작품 보호를 생각해낸, 작가들이 힘을 합치고 자기들의 소명을 의식한다면 권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렇듯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글에서 드러나는 예리한 풍자와 비판의식을 보자면 어떻게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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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인생에는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한스카 부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츠바이크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한스카 부인의 다소 무리한 요구와 발자크의 지속적인 거짓말을 두고 많은 점에서 한스카 부인이 옳지만, 그럼에도 그많은 거짓말들 중에 작은 진실을 들어 발자크의 편에 서 있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츠바이크의 의견과는 다르다. 과정 자체야 어쨌든 발자크가 한스카 부인에게 접근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글을 읽어보면 츠바이크는 자의식과 우월감이 강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폭력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듯 보이는 한스카 부인이 마뜩치 않았던 것 같다. 천재이자 한 시대의 위대한 문필가인 발자크가 대단하지 않은 직위의 시골 귀족 여인 앞에서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떨어뜨린 것, 그리고 이 대단한 작가가 그렇게까지 몸을 낮추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욕을 준 것에 대해, 두 사람 모두에게 화가 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한스카 부인이 자신만을 사랑하는, 발자크가 자기애의 비위를 맞춰주는 한도 안에서만 그를 사랑했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점에서는 발자크도 마찬가지 아닐까. 만약 한스카 부인이 자신의 천재성과 위대한 필력을 알아주지만 가난한 귀족 부인이었다면 눈길이나 주었을까? 츠바이크의 답답함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공감도, 동의도 하기 어렵다.  



나에게 있어 발자크는 남자로서는 비호감이다. 한편으로는 정상이 아니다싶을만큼 해맑고 천진하기만한 못말리는 이 사람이 인간적으로 끌리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쓰다보니 이래서 한스카 부인이 매몰차게 돌아서지 않은 이유가 납득이 되기도 하네). 너무나 많은 실수와 뻔뻔스러움과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낙천성과 해맑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자크를, 그의 작품을 애정한다. 


걸작 <고리오 영감>, 모든 시대의 모범작 <잃어버린 환상>, 발자크 최고작 <사촌 퐁스>까지. <인간희극>에는 2천 명의 인물이 담겨있다.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발자크의 머릿속에는 3,4천명의 인물들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가 살아서 계획대로 작품을 출간했다면 적어도 50개 정도의 작품이 더 완성됐을 것이라고.


발자크가 <인간희극>을 완성하지 못한 츠바이크의 아쉬움이 더 짙게 와닿는 이유는 아마 이 평전이 그의 유작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발자크에 대한 존경과 비판, 마치 친구인양 한편이 되어 그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은 친근하기까지 하다. 츠바이크와 발자크가 동시대에 살았다면 그들은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라는 상상도 사이사이 들곤 했다. 


역자 서문에 쓰여 있듯 나 역시 이 평전이 츠바이크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거라는 문구에 동의하는 바다. 위대한 문필가의 일생을 이토록 면밀하고 내밀하게, 그러면서 동시에 엄청난 분량의 글감들을 발췌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이 책에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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