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시간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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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도덕. 도덕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을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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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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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께서 책마다 쓰신 서문과 발문 모음집.
어느새 9주기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던 감정이 떠오르면서 책을 펼치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전작을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작품을 읽었기에 글을 읽고 있으니 새록새록 내용들이 생각난다. 
 
자식들을 다 키워놓고 마흔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어떻게 그토록 많이 쓸수 있을까 싶을 만큼 다작을 해오셨다. 서민과 여성의 삶, 성차별에 대한 시선, 산업화로 접어들면서 사그라드는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길게 혹은 짧은 꽁트로 담아내셨다.
(불현듯 글쓰기를 늦게 시작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으셨던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39.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집 밖에서의 일이 더 많이 있고, 그 일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데, 나는 그들을 보살피고 기다리는 게 전부고 그 일이나마 하루하루놓쳐가고 있다는 깨달음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나도 뭔가 나만의 일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같이 열정적인 여자가 계속 그 일정을 가족에게만 쏟는가면 종당엔 가족관계를 지옥으로 만들 것이 뻔했다. 
('장밖은 봄' 서문에서}

 
 
<휘청거리는 오후>로 처음 신문연재를 하셨을 때 당신은, '나에게 집요한 간섭이 되어 작용한 것은 신문소설이란 형식이었다. 다음 회를 기다리게 끝은 맺는다는 잔꾀 같은 건 처음부터 염두에도 두지 않았지만, 어떻든 8장 미만에서 딱딱 호흡을 끊어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당한 괴로움이었다. 이런 고통은 나의 체질과 역량과 다분히 관계가 있는 개인적인 고통일 뿐이지 신문소설 작가의 보편적인 고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생경한 경험을 토로하기도 하고, 자신의 글이 '또 하나의 책을 내면서도 이것이 이 땅의 문학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활자 공해에 보탬이 되지나 않을까 싶어 이리저리 눈치 보인다 ('배반의 여름' 서문에서)'는 걱정을 하시기도 했다. 서문 혹은 발문에 자신의 글이 활자 공해가 되는 것을 자주 언급하시는 것을 보아서 쓰신 작품이 세상에 어떻게 보여질까, 어떤 영향을 미칠까에 대한 우려를 계속하셨던 것 같다.  
 
소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 등을 통해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억압 관계, 결혼 제도에 있어서 남녀 평등에 대한, 당시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문제들을 짚어내고 계신다. 
 
52-53.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이런 억압의 관계만은 별로 문학의 도전은 안 받으면서 보호 조장돼왔던 것 같다. 도전은 커녕 그런 관계롤 비호하고 미화하는 것들 편에섰다는 혐의조차 짙다. 그렇다고 그 까닭은 문학하는 사람이 남자가 여자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것들은 자기가 두둔하고 있는 쪽뿐 아니라 억누르고 있는 쪽한테까지 자기편이란 착각을 일으키게 할 만큼 아름답고 낯익은 미풍양속이란 탈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내가 감히 그런 것들에게 싸움을 걸어보려 했던 것은 내가 여자라는 것과 무관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언제고 꼭 써보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이것으로 끝난 얘기는 아니다. 집요하게 되풀이 시도해볼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회성을 무시할 수 없는 신문소설에 담기에는 너무 줄기찬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는 동안 내가 접할 수 있는 독자의 반응이란 목청 높은 비난 아니면 냉랭한 무관심이었다. 고독한 작업이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발문에서) 
 
68.
내가 이 소설을 통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혼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나 없나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평등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결혼이 과연행복할 수 있나 없나라는 내 딴엔 좀 새로운 문제였다. 

 
'고독한 작업이었다'라는 말씀이 콱 박힌다. 어떤 심정이었고, 쓰는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늠이 된다. 지금도 맘충을 미롯한 혐오 발언이 빗발치는데, 1980년대에야 말해 무엇할까. 
 
인상적인 서문(발문)을 꼽아본다. 
 
먼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 책은 물론 읽었고, 발문 역시 토막토막 기억이 난다.
선생은 전쟁의 비극이 아닌 풍요의 비극을 쓰고 싶다하셨다. 급속도로 수직상승을 한 경제성장의 안정과 풍요가 얼마나 냉혹한 이기심과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래서 수지가 특별한 악인이 아닌 자칭 중산층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악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또한 가족이란 혈연관계인 동시에 오랫동안 공들인 관계라는 것, 그러므로 같이 산다고 해도 서로에게 공들인 경험이 없다면 결속은 불가하는 것을, 그리하여 이데올로기 못지 않게 우리를 갈라높고 있는 풍요의 몫이니 그것을 넘어서 정말 있어야 할 삶의 모습을 꿈꾸기를 바란다고.
(쓰면서 또 울컥한다. ) 
 
61.
오목이가 너무 불쌍해서 상심한 독자가 있다면, 오목이를 우리 모두가 그동안 좀 더 잘살기 위해, 좀 더 안일하기 위해 짐짓 외면하고 망각한 것들의 편린으로 봐주기 바란다고.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어 썼다는 <부숭이는 힘이 세다>.  
'기승전입시'인 요즘 아이들. 초등부터 고등까지 학교를, 학원을 왜 다니냐고 물어보면 대학가기 위해서라는 답이 대다수이다. 다섯 살 아이를 두고 사립초등학교 입학설명회를 다녀와 볼까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배움의 기쁨 따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걸까싶어 종종 우울하다.
 
117.
스포츠보다는 일(노동)으로 터특한 힘, 교과서보다는 자연에서 배운 폭넓은 앎의 힘, 경쟁에 이겼을 때의 교만함보다는 화합했을 때의 겸손한 기뿜의 힘, 허세가 아닌 진정한 자존심의 힘, 사랑과 우정의 힘 등 경쟁사회에서 잊혀진 근원적이고 소박한 힘을 깨우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개정 증보판 2002)> 서문에서 초판본에 썼던 "원태 간직하거라. 엄마가"라는 당신의 필적으로 보고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는 선생. 이제는 죽어 세상에 없는 당시 열다섯 아들에게 보냈던 마음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25년의 세월, 이렇게 선생은 글을 쓰며 버텼던가 싶다. 
 
 
가장 기억에 남는 <창밖은 봄> 서문. 
1977년 썩 늙지도 않은 나이에 작가 자신이 쓴 박완서 연보를 서문으로 썼다. 서문 말미에 대작을 쓸 자신은 없고, 늙을수록 더 나은 작품을 쓸 자신은 있으며, 티 안나게 조촐하고 다소곳이 늙을 자신도 있다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나이들어 갈 것이며, 내가 자신할 수 있는 나의 늙음은 무엇일까.
한참을 그저 창 밖만 바라봤다.
 
 
이렇듯 세상을 통찰하는 눈이 있었기에 여러 사회 문제들을 짚어낼 수 있었을테고, 용기가 있었기에 글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힘을 더 낼 수 있지 않았을까. 
 
159.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처음 쓴 작품이 당선되어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괜히 잘난 척 하는 것 같고, 집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마음 상태이건만 그것조차 없었다고 하면 꼭 거짓말을 시키고 난 것처럼 떳떳지 못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집념하곤 달랐다. 그럼 그건 뭐였을까.
(‘목마른 계절‘ 발문에서) - P46

욕심이란 조만간 부끄러움을 맞게 돼 있다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지만(후략).
(‘목마른 계절‘ 발문에서) - P48

전쟁과 굶주림의 공포처럼 지긋지긋한 건 없다. 그때 인간성이 이만큼이라도 덜 파괴된 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피비린내가 휩쓸고 간 들판에서도 부드러운 미풍은 들꽃을 피우고, 짓더미가 된 마을에도 장독대는 의연히 남아 있다는 걸 눈여겨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목에 핀 꽃‘ 서문에서)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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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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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탄광 마을, 앨버트 가족의 우물에 한 여성이 아기를 버렸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아홉 살 소녀 테스. 그녀는 언니와 부모에게 사실을 알지만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며칠 후 아기의 시신이 발견되고, 테스는 이 사건으로 악몽을 꾸고, 엄마 리타는 매번 물을 끓여 사용하는 등 평범한 일상에 작은 균열이 일어난다. 
 
먼저 출간된 작가의 <밤의 동물원>을 읽은 터였고, 임팩트 있는 사건의 시작으로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여겼지만 이 소설은 가족과 이웃, 차별, 공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설의 구성은 꼭지마다 앨버트, 리타, 버지, 테스, 잭이 화자가 되어 현재와 과거를 회상하며 풀어나간다. 
 


1.
공간적 배경인 탄광 마을은 탄광 뿐만 아니라 목화 농사도 짓는다. 시대 배경은 1930년대로써 흑인 차별이 극심하다. 검은 탄을 캐고 갱도 밖으로 나와 새까만 얼굴만 보면 누가 흑인이고, 백인인지 알아 볼 수 없다. 그리고 하는 일 또한 다르지 않으며 갱도 안에서는 똑같이 목숨을 걸고  일한다. 귀천을 따질 상황이 아닌거다. 하지만 그들은 피부색에 따라 보수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백인들은 흑인들을 향한 근거없는 우월의식에 빠져 있다.  
 
그곳에 나름대로 공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앨버트가 있다. 흑인 노동자에게 친절했고, 그들의 노동을  존중했으며, 선입견과 차별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읽다보면 앨버트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난한 백인들과 백인 기득권 층에 대한 차별과 무시에 대해서는 인지하지만, 왜 인종차별이 존재하는지, 업무 능력이 뛰어난 그들이 왜 보수를 적게 받아야 하는지, 어떠한 근거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지 말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공정하다고 믿는 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한계를 앨버트를 통해서 꼬집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또한 이는 테스의 남매가 목화밭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는 장면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목화밭에서 아빠의 제안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삼남매. 테스의 가정도 가난하다. 하지만 땅이 있어 농사를 짓는 덕분에 경기가 어려워도 밥을 굶지는 않는다. 짧은 시간 동안 일을 하다가 지쳐버린 삼남매의 앞에 함께 목화 솜을 따던 흑인 꼬마들이 나타난다. 남매에게는 잠시 지나가는 목화 따기가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점심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일상이다. 삼남매는 점심을 먹는 동안 편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게끔 흑인 아이들이 자리를 떠나주면 좋겠다. 하지만 점심 식사를 끝낸 후 뭔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한다. 만약 점심을 먹는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백인이었다면 삼남매의 반응은 어땠을까? 
 
120.
하지만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 탄광 소유의 건물이나 빌린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대비책이 없었다. 탄광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그들에겐 당장 먹을 것이 없어졌다. 다른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실직한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기댈 곳은 없었다. 어쩌다가 교회에서 지원품을 주거나 친척들이 음식을 제공해주는 일이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하루가 몇 주가 되고, 그 몇 주가 몇 달이 될 때까지 무작정 굶주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배고픔이 어떤 건지 잘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배가 고픈 느낌 말이다. 농사를 지을 땅이 있어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들인 우리가 배를 곯았던 적은 없다. 엄마와 아빠가 땀 흘려 키워낸 땅속의 채소를 깨끗하게 씻고 절이고 요리해 내주면 우리는 무엇이든 먹으면 되었다. 비록 고기는 없었지만 엄마의 요리 솜씨 덕분에 그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1. 
사건을 목격한 테스가 악몽에 시달리자 버지는 동생을 위해 범인을 직접 색출하고자 한다. 범인을 잡는다면 테스가 악몽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믿으면서. 범인은 마을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고 확신한 자매는 갓난아기가 있는 집을 일일이 방문해 그들 중 갑자기 아기가 사라진 집 주인이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이웃들과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갓난아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방문한 롤라 아줌마의 집. 알고보니 롤라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고, 롤라의 딸은 테스의 (친하지 않은)학교 친구다. 두 남편이 먼저 죽고, 지금의 남편도 멀리 떠나 있는 가난한 롤라 아즘마는 열세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무척 사랑한다는 것과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테스와 버지는 가난때문에 자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한다. 이렇듯 선입견으로 사람을 단정하고 그것이 사실인 양 매도하는 경우가 현재도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185.
그녀의 아버지는 늘 술에 절어 있었고,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최선을 아했지만 롤라는 늘 팔다리 곳곳이 퉁퉁 부은 채 학교에 왔다. 그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과연 다른 곳은 멀쩡한지 알 수 없었다. 비슷한 사연을 가진 여자아이들이 수없이 많았기에 딱히 새로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

부모로서 앨버트는 아이들에게 다른 삶을 보여주고 싶다. 목숨을 건 갱도에서의 삶이 아닌, 뙤약볕에서 목화 솜을 따야하는 고된 삶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의 몸이 바스러지도록 일을 하면서 잭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당시에 온전한 몸으로 되돌아오도록  비싼 병원비를 감당하고, 버지와 잭을 대학에 보낸다. 앨버트를 보면서 세상의 모든 부모는 다르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하지만 요즘에는 그것이 너무 과해서 본인과 자식의 인생이 하나라고 여기는 부모들이 많은 것도 우려스럽다. 
 
 
결론.
부검 결과 우물에 던져진 아기는 이미 죽은 상태에서 버려졌다. 아이들은 범인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녀에게 누구도 비난이 담긴 손가락질을 할 수 없었다. 죽은 아이를 가장 깊고 슬프게 애도한 사람은 엄마였으니까, 그리고 차라리 미쳐버리면 좋을만큼 그 슬픔은 영원할테니까.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이 없는 현실이다. 다만 방식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가 놓치고 살면 안되는 것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회사의 높으신 분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가정부와 정원사를 부리는 저택에서 원할 때면 언제든 크림을 넣은 커피와 구운 닭고기를 즐길 수 있는 그분들은 자기 주머니에서 잔돈만 조금 털면 불구가 된 직원에게 일년치 급여를 줄 수 있었지만 절대 그러지 않았다. 돈이 혈관 소겡 퍼진 병균 같은 것이라 해도 그들은 아마 더 많은 돈을 원할 테다. 누군가 열악한 탄광 현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어도,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굶어죽을 상황에 놓여도 그들은 관에다 한두 푼 던져주는 게 다였다. 그야말로 심장이 꽉 막혀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들 같았다. 자기 아이를 죽일 수 있었던 우물의 여자처럼. - P75

나는 늘 실제로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점박이든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법이나 다른 규율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다. 법이나 규율은 울타리를 치고 선을 규정하는데, 왜 그런 선 긋기가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 선 안으로 떨어졌다. 결국 그 선 안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셈이었다. (...) 내가 스스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흑인과 선을 그어놓고 서로 다른 교회를 다니며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 선들이 스카츠보로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소년들에겐 아주 중요한 문제였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 P221

우리는 각자 빵을 한 덩이씩만 가졌지만 그걸 반으로 잘라 나눠먹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애들이 밥도 먹지 못하고 일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내가 이 빵을 먹으면서 죄책감까지 맛보지 않도록 사라줘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애들이 눈앞에서 없어지자 죄책감도 금방 사라졌다. "반가웠어"라는 말도 없이 그애들은 일하던 목화밭으로 돌아갔다. 그런뒤 우리 중 누구도 그애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한입까지 먹어치우고 손가락에 묻은 부스러기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함께 묻어 있던 약간의 피와 먼지, 그리고 목화솜까지. 나는 축축한 손가락으로 치마에 붙어 있는 부스러기까지 전부 찍어 먹었고 언니는 치마를 풀밭에 털어버렀다. 그렇게 다 먹어치우고 나자 마치 속쓰림처럼 죄책감이 다시 밀려왔다. - P217

"그런 일을 한 여자라면 슬픔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감독관님. 못된 여자가 아니고요. 죽은 자식을 데려가 착한 사람들이 사는 집의 우물에 던져버린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 사건이 말해주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감도관님 말씀대로 그 여자가 미쳤을지도 모르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에 비하면 미친 건 아무것도 아니죠."
(조나) - P170

"사람은 뺏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 살아가는 거야."
(앨버트) - P161

"최악의 상황은 모르겠다만 아기가 혼자 남겨지는 것, 아무도 없이 완전히 혼자 남겨지는 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겠지.(...)"
(마셜 선생) - P190

잭은 나보다 더 일찍 그 사살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정답이 동시에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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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속의 월든
서머 레인 오크스 지음, 김윤경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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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실내 가드닝이 인기다. 봄에만 극성이던 황사는 옛말이고 계절과 상관없이 (초)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는 어느새 일상용품이 되었다. 이와같은 환경적인 요인과 더불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에 녹색 환경이 안정을 준다는 과학적 사실까지 보태져 많은 이들이 실내 정원을 가꾸고 있다. 그만큼 자연, 즉 흙과 식물의 필요성은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도시가, 그리고 도시인들에게 식물이 필요한 이유와 실제로 식물을 가까이 한 후 정서적,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고 달라진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들고 있다. 또한 자연 파괴와 그로 인한 복구가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를 성토하며 호소한다.

 

107.

파괴된 환경을 복구하는 데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연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의 노력을 쏟아붓고 많은 자원을 투입했지만, 우리는 대자연의 생태계를 조금도 복원할 수 없었다. 생태계는 겨우 예닐곱 세대가 아닌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기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공감하는 몇 군데가 있었는데, 먼저 '생명 공포증'을 앓는 아이들의 사례가 보고 되었다는 부분이다. 자연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이 야외에 나갔을 때 거리낌이 들고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손에 흙이 닿는 것조차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등산 혹은 숲으로 여행을 하다보면 흙이 더럽다고 바닥에 앉지 못하는 사람, 지렁이나 곤충을 보면 징그럽다고(혹은 무섭다고) 기겁을 하는 아이들을 꽤 많이 보았다. 하지만 평소에 도시 밖으로 나오는 경험이 거의 없으니 그들을 탓할 수도 없다(설사 나온다고 하더라도 대체로 시설이 갖춰진 호텔에 투숙하고 정비가 된 관광지만 일주하니 흙을 제대로 딛을 기회도 많지 않다).

다음으로는 식물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얼마나 따끔따끔 찔리던지..... .

도시의 거주자들이 식물을 들일 때 자주하는 질문이, "쉽게 죽지 않는 식물은 어떤 건가요?"란다(그게 나다). 하지만 식물을 잘 키우려면 다른 질문을 해야한다고 한다. 내가 어떤 식물과 살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떤 식물이 우리 집에 살고 싶은지 물어야한다고. 이 부분을 처음 읽을 때에는 "어째서?"라고 생각했는데, 곰곰 따져보니 그 말이 맞다. 식물마다 적절한 환경이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주거 환경을 식물에 맞춰 바꿀수 없으니 환경에 적응이 가능한 식물을 데려오는 게 현명하다는.

 

180.

먼저 식물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난 뒤, 그 대답이 내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는지, 내가 식물의 행복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인지 확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제목, '식물에게 사랑받는 법'.

 내가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이 아닌 식물에게 사랑을 받는다니, 참 기분좋은 말이다.

 

190.

식물에게 사랑받으려면 대자연이 하는 일을 대신 해줘야한다. 반려식물은 대부분 화분에 있기 때문에 숲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엽, 균류와의 공생, 또는 미생물과 기타 유익한 토양과 다양한 결합이 가져오는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최적의 햇빛을 찾는 것부터 젓가락으로 흙 속에 공기가 통하게 하는 것까지 식물이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챙겨줘야 한다.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가 짧게나마 일본 정원에 대한 예찬이 나온다. 기회가 된다면 저자가 우리나라 담양의 소쇄원을 다녀갔으면하는 바램이 있다. 그녀가 소쇄원을 둘러본 후 소회가 어떨지 궁금하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식물을 키우는데 있어서 금손인데, 나는 ㄸ손을 넘어 저주받은 손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식물을 제대로 키워낸 적이 없다. 오래 전, 아빠가 오죽했으면 나한테 돈은 맡겨도 식물은 못 맡긴다고. 엄마도 "네가 얘들한테 관심을 안가져서 그래"라고 훈계를 하셨는데, 이 책에도 보면 관찰이 중요하다고 나온다. 그래서 올해에는 맘먹고 식물 몇 가지를 키워보려고 한다. 마침 책에 나온 몇 가지 팁을 이용해보기로.

아래는 제시한 조건 중에 나에게 맞는 것들 중에 몇 가지.

 

창턱 햇빛이 강하다 / 방임주의 : 에케베리아

창턱 햇빛이 강하다 / 신경을 쓰는 편 : 다육식물

창가가 밝지만 상대적으로 햇빛이 안든다 / 커다란 식물을 수용할 공간이 있다 : 몬스테라

창가가 밝지만 상대적으로 햇빛이 안든다 / 중간 식물을 수용할 공간이 있다 : 스파티필룸

간접광선이 들어온다 / 방임한다 : 엽란

가능한 주의를 기울여 관심을 갖도록 노력해보련다.

책을 덮고 나니 마음은 이미 화원으로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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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 - 스탠딩에그 커피에세이
에그 2호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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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딩에그에서 노래하는 에그2호가 쓴 커피 에세이.

음악을 하고, 글을 쓰고, 커피를 사랑하는 남자가 참 담백하고 정감있게도 썼다. 툭툭 던지는 물음에 책에다 대답을 하고 있는 나. 그가 가봤다는 카페는 한번쯤은 들러봐야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카뮈의 철학 에세이를 읽다가 머릿속을 환기시키기 위해 커피 한 잔 하는 마음으로 펼쳐 든 책.  

 

커피를 언제 처음 마셔봤냐고? 글쎄...... 기억이 없다.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인 것은 확실하다. 그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는 착한(?) 청소년이었으니까(고딩 시절에 나에게 있어 커피는 술과 동격이었다). 커피를 처음 마신 때는 기억이 없지만 커피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계기는 기억이 난다.

사실 난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커피 뿐만 아니라 차tea 종류를 좋아하지 않는다(지금도 남들 다 좋다는 허브차 혹은 달달한 레몬청같은 음료는 그닥...). 그러다 7년여전쯤 우연찮게 주변에서 커피 강의가 있었는데, 나야 당연히 관심이 없었지만 가까운 후배가 함께 들어보자고(혼자는 못 간다고) 떼를 쓰다시피 해서 함께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커피 공부가 재밌고, 신기하고, 쓰기만 했던 커피의 다양한 맛을 조금씩 구별해 낼 줄 알게 되고, 로스팅이 뭔지 커핑이 뭔지 하나둘 호기심이 채워져 강의 이후 자격증까지 손에 쥔 걸 보면 우연이 우연으로 끝나지 않은게 다행인 듯 하다. 

 

나의 인생 커피? 

이것도 글쎄......다. 사실 커피를 배우는 게 즐겁기는 했지만, 작가처럼 곳곳을 다니며 다양하게 커피를 맛 본 경험은 많지 않아서...... 굳이 따지자면 '과테말라 안티구아'. 단맛과 신맛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고소하고 부드러우며 맛이 도드라지지 않는 커피를 좋아한다. 주변에서는 과일향이 나는 원두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서 집에 누군가 올 때는 블렌딩 한 커피를 주로 내놓게 된다.

애정하는 카페? 

음...... 카페를 잘 안 간다(카페를 운영하는 작가가 들으면 반갑지 않은 말일테지만). 동네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카페에 선택의 폭이 넓어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책 한 권 들고 가 커피 한 잔과 독서에 집중할 만한 카페가, 집과 가까운 곳에는 애석하게도 없다. 대체로 오전 시간에 카페를 독식하는 분들은 삼삼오오 함께 오는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이 소리가 클 수 밖에 없다. 작가가 (운영하는 카페를 포함해) 다녀본 카페같은 장소가 없기도 하거니와 집에서 직접 내려 마시는 커피가 내 입에 제일 잘 맞기도 하다. 그래도 집 근처에 애정하는 카페가 한 곳은 있으면 좋겠다.

(친구는 직접 창업해 보라는데 돈도 없고, 사업은 새가슴이라 못한다, 지금하는 일에 만족하는 걸로.)

 

나에게 있어서 커피를 내리는 시간의 의미? 

뭐 신성하다거나 참선하는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커피를 드립하는 시간은 머릿속을 잠시나마 정리하는 시간이다. 이런저런 일로 생각이 뒤죽박죽일 때(이럴 때는 음악도 올리면 안된다) 커피를 내리고 있으면 그 따뜻함과 커피향이 생각을 좀 가라앉혀준다. 차를 즐기는 사람이 찻물을 우릴 때와 비슷하겠다. 이런 잠깐의 시간이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할 때가 많다.

 

나는 어떤 커피를 마시고 싶은가? 

사실 많은 커피를 마셔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니 더 그렇다. 작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플랫화이트는 언젠가는 꼭 마셔보련다.

플랫화이트flat white : 에스프레 샷 두 잔에 따뜻한 우유를 넣고 그 위에 아주 약간의 우유 거품을 올린 커피 메뉴.

(에스프레소 샷이 한 잔이면 피콜로라테picolo latte) 

 

책을 읽고는 만들어보고 싶은 커피가 생겼다. '얼음 커피 우유' (p110)

연남동 모 카페의 메뉴라는데, 얼린 커피에 달콤한 무언가를 섞은 우유를 부어 내놓는 음료. 관건은 우유에 섞는 달콤한 그 '무언가'가 관건일 듯한데, 그게 뭔지 궁금하다는. 시럽과는 차원이 다른 달달함이라는데 뭘까......?

 

로마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커피의 끝에 도달해 봤다는 작가. 한국에서 먹는 에스프레소와는 많이 다를까? 이것도 궁금하다는. 

 

언제부터인가 마시던 커피만 마시고, 내리던 커피만 내리고, 사던 원두만 샀었는데, 책을 덮고 나니 용기를내서(용기까지...) 모험심을 키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채로운 것이 늘 좋은 건 아니지만, 때로는 다른 세계를 경험해 볼 필요도 있으니까.

 

 

'사람과의 관계도

그가 말한 아메리카노처럼 '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이

필요한 것일 텐데

나는 왜 그리 성급하게 그를 놓아버렸을까?'

 

(p142)

 

 

 

 

이 겨울, 책 제목처럼 마주한 사람과 커피 향을 맡으며 섞이고 녹아들 시간을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기다려 주자.

 

 

 

 

사람과의 관계도 그가 말한 아메리카노처럼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이 필요한 것일 텐데 나는 왜 그리 성급하게 그를 놓아버렸을까?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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