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7.
천재가 아니라면 나는 끝장이다! 




평전이 소설 이상으로 재밌다면 얼토당토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읽어보면 알게 된다. 그런 평전이 있다는 것을. 발자크의 삶 자체가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을 능가하고, 여기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필력까지 보태져 드라마틱한 평전이라고 단언한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작품은 모두경험에서 나왔다고 얘기했는데, 발자크 역시 그렇지않나 싶다. 그의 역작 <인간희극>을 순서대로 읽으면 발자크의 인생 행로를 함께 걸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단행본 한 작품 한 작품마다 각각 다양한 사회 계층과 현상을 드러내고 있어 한 시대를 망라하는 사회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츠바이크는 오노레 발자크의 작품들을 비롯해 그가 쓴 편지, 그의 주변인들이 남긴 글과 사진 자료 등과 연계해 그의 일생을 톺아본다. 책을 읽노라면 츠바이크가 발자크의 삶과 그의 작품에 대해 굉장히 열정적으로 탐구했음을 알 수 있다.



오노레의 어린 시절을 읽어보면 그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어느 정도는 허풍꾼이면서 재치를 겸비했고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까지, 거기다 동생 프랑스와까지 몇 권의 작은 책을 썼다는 걸 보면 필력 또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다. 까다롭고 예민하며 우울감이 높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냉대와 정서적 학대, 그리고 너무 어린 나이에 겪은 기숙학교에서의 강압은 오노레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듯 하다. 그럼에도 인생 전반에 걸친 그의 낙천주의를 보면 그런 면은 타고나는 게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는.  


발자크가 문학적 천재성을 가졌음에도 문학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츠바이크는 이 부분에 대해서 고티에의 말을 인용하며 어쩌면 발자크가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글을 쓰는 것에 대해 필연성 혹은 사명감을 가졌다기보다는 글쓰기를 통해서 돈과 명예를 얻는 열쇠로 여겼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더불어 발자크의 천재성은 의지력에 기인한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발자크 생애는 문학을 제외하면 여자와 사업 실패, 빚으로 점철되어 있다. 거기다 병적으로 귀족을 숭배해 어느 부유한 부인이 정통성 있는 귀족 출신이라는 말만 들리면 바로 사랑이 샘솟을 정도여서 한때는 희대의 카사노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문어발식 연애를 감행했으니 그야말로 못말리는 철부지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천재성과 출신의 괴리가 크다고 여겨 귀족에 대한 동경이 큰데다, 애초에 자본도 없으면서 사업을 벌이고 망하고를 반복하다보니 돈 많은 연상의 귀족 유부녀에게만 매달린다. 만약 발자크가 벌어들인 돈을 관리만 제대로 했다면 그토록 비굴하게 한스카 부인한테 결혼을 구걸하지 않았을 것 같다. 발자크의 내면에는 공상가와 교활한 현실주의자가 공존했다는 츠바이크의 표현이 적절하다.  


발자크는 끊임없이 자극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바람하지만 굳이 일을, 그것도 썩 여러모로 긍정적이지도 않고 즉흥적이다시피 일을 벌이고 스스로 그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리고는 누가 피해를 입든 말든 혼자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읽으면서 나 혼자 얼마나 부아가 나고 한숨을 쉬어댔는지... . 


ㅡ 


츠바이크는 발자크를 세계 문학사상 알려진 가장 지치지 않는 노동의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발자크는 적어도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꼼꼼하고 예민하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휴식이나 중단 없이 빠른 속도로 가차없이 대여섯 시간을 써내려갔고 커피 마시는 것을 제외하면 하루에 열다섯 시간 작업을 했다. 발자크는 교정쇄도 꼼꼼하게 살폈고 본인이 정해준대로 인쇄되어야 했다. 속물적이고 허영심이 가득한 발자크였지만 작품의 완성과 자신의 예술적인 명예에 있어서는 현대문학사상 가장 양심바르고 끈질긴 열정적인 작가였다. 


이렇듯 과도한 노동이 20년도 채 안 되어 <인간희극>을 만들어냈다. 거기도 일로서의 글쓰기뿐 아니라 개인적인 편지나 일기 쓰기까지 포함한다면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글쓰기 양이다. 죽을 무렵 손으로 펜을 잡지 못해 부인의 손으로 쓰인 마지막 한 줄의 기록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의 모든 페이지와 편지의 구절은 그가 직접 손으로 쓴 것이다. 글만 썼다면 좋았을 것을... . 


어처구니 없는 에피소드 하나. 벌이는 족족 실패하는 사업도 모자라 오로지 돈벌이를 위해 연극계에 진출한다. 1년에 약 30편의 희곡을 쓰겠다는 그의 계산을 보더라도 발자크가 자신의 희곡에 얼마나 공을 들이지 않으려고 하는지,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 분명하다고 분석한다. 츠바이크는 이 부분에서 고티에의 <초상화> 일부를 발췌하는데 읽다가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 발자크가 고티에게 시간이 촉박하니 희곡을 지인들과 나눠쓰자는 것. (아이구야...)


그럼에도 발자크를 미워할 수 없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이미 작가로서 정점에 있던 발자크가 무명에 가까운 스탕달을 한눈에 알아봤고, 자신이 쓰고자 했던 글감을 그가 쓴 것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원고가 정식으로 출간 되기 전에 해적판이 돌아다녀 작가들의 작품이 제 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발자크는 작가연합을 통한 문학작품 보호를 생각해낸, 작가들이 힘을 합치고 자기들의 소명을 의식한다면 권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렇듯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글에서 드러나는 예리한 풍자와 비판의식을 보자면 어떻게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ㅡ 


발자크의 인생에는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한스카 부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츠바이크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한스카 부인의 다소 무리한 요구와 발자크의 지속적인 거짓말을 두고 많은 점에서 한스카 부인이 옳지만, 그럼에도 그많은 거짓말들 중에 작은 진실을 들어 발자크의 편에 서 있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츠바이크의 의견과는 다르다. 과정 자체야 어쨌든 발자크가 한스카 부인에게 접근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글을 읽어보면 츠바이크는 자의식과 우월감이 강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폭력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듯 보이는 한스카 부인이 마뜩치 않았던 것 같다. 천재이자 한 시대의 위대한 문필가인 발자크가 대단하지 않은 직위의 시골 귀족 여인 앞에서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떨어뜨린 것, 그리고 이 대단한 작가가 그렇게까지 몸을 낮추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욕을 준 것에 대해, 두 사람 모두에게 화가 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한스카 부인이 자신만을 사랑하는, 발자크가 자기애의 비위를 맞춰주는 한도 안에서만 그를 사랑했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점에서는 발자크도 마찬가지 아닐까. 만약 한스카 부인이 자신의 천재성과 위대한 필력을 알아주지만 가난한 귀족 부인이었다면 눈길이나 주었을까? 츠바이크의 답답함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공감도, 동의도 하기 어렵다.  



나에게 있어 발자크는 남자로서는 비호감이다. 한편으로는 정상이 아니다싶을만큼 해맑고 천진하기만한 못말리는 이 사람이 인간적으로 끌리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쓰다보니 이래서 한스카 부인이 매몰차게 돌아서지 않은 이유가 납득이 되기도 하네). 너무나 많은 실수와 뻔뻔스러움과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낙천성과 해맑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자크를, 그의 작품을 애정한다. 


걸작 <고리오 영감>, 모든 시대의 모범작 <잃어버린 환상>, 발자크 최고작 <사촌 퐁스>까지. <인간희극>에는 2천 명의 인물이 담겨있다.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발자크의 머릿속에는 3,4천명의 인물들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가 살아서 계획대로 작품을 출간했다면 적어도 50개 정도의 작품이 더 완성됐을 것이라고.


발자크가 <인간희극>을 완성하지 못한 츠바이크의 아쉬움이 더 짙게 와닿는 이유는 아마 이 평전이 그의 유작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발자크에 대한 존경과 비판, 마치 친구인양 한편이 되어 그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은 친근하기까지 하다. 츠바이크와 발자크가 동시대에 살았다면 그들은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라는 상상도 사이사이 들곤 했다. 


역자 서문에 쓰여 있듯 나 역시 이 평전이 츠바이크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거라는 문구에 동의하는 바다. 위대한 문필가의 일생을 이토록 면밀하고 내밀하게, 그러면서 동시에 엄청난 분량의 글감들을 발췌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이 책에 존경을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