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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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을 포함해 체호프의 열일곱 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우리가 손으로 꼽는 불굴의 현대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체호프의 소설은 냉철함과 유머, 그리고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소시민으로서 당시 러시아 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더불어 체호프는 사회 구조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권력 앞에서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가면을 뒤집어쓴 비열한 관리, 외모 지상주의, 인간의 존엄마저 내려놓게 만드는 극단의 가난, 자식을 잃은 비통함 앞에서도 부재한 공감과 위로, 집에서만 왕으로 군림하는 비굴한 가장, 고된 노동이 불러온 비극적 참사, 어긋나는 사랑,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는 지성인의 위치와 무력함, 기대와는 다른 결혼 등 그들의 모습에서 현재의 우리를 반추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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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서 놓치면 안 될 작품을 꼽자면 <6호 병동>과 <농부들>.
체호프는 <6호 병동>을 통해 진정한 지식인들의 소외와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의 허영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는 모순을 두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법정에서 판사에게 피의자에 대한 진실 규명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형식주의를 준수하고 정해진 시간에 판결을 내리고 봉급을 받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온갖 폭력이 정의 구현을 위한 정당한 필연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진정한 정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안드레이는 의사로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방관자적 입장을 고수한다.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해로운 일을 하면서 봉급을 받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시대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그의 변명(이 도시가 큰 도시에 비해 낙후되고 지적 활동이 침체되어 있기 때문에 달라질 수 없다)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명분이 되어준다.  


6호 병동에 수감된 이반의 광기 어린 연설의 내용은 인간의 비겁함, 정의를 유린하는 폭력, 폭력의 잔인함을 성토하면서 대다수 지성인과 권력자들이 더 미치광이라고 외친다. 이반의 말을 곱씹어 보면, 결국 진정한 지성인은 부재 혹은 소외된 상태고, 이 세상은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란 말이지. 안드레이는 인생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유롭고 심오한 사유, 세상의 어리석은 소란을 아주 무시할 줄 아는 것이 지성인으로서의 최상의 축복이라고 얘기하지만, 세상의 어리석은 소란을 무시하는 것과 방관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안드레이는 이반에게 내적 사유를 얘기하지만 이반의 입장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힐 뿐이다. 무엇보다 안드레이 본인이 내적 사유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반은 안드레이에게 실질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면서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삶에 대해 말로만 떠들 뿐이라고 일갈한다. 


불명예스럽게 강제 퇴직을 당하고, 연금도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가난해진 삶, 즉 이반이 말한 실질적인 삶의 터널에 들어선 안드레이는 6호 병동으로 강제 입원 조치되고, 환자복을 받아든 안드레이는 체념과 현실 부정을 오간다. 니끼따에게 얻어맞고는 다시 얻어맞을까봐 공포에 떨며 숨죽이고 누워있는 안드레이는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러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고, 고통도 몰랐고, 고통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6호 병동 안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이, 안드레이가 삶의 마지막에 마주한 실질적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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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은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돈이 없어서 체납금을 내지 못하는, 빈민에 가까운 농부들에게 왜 체납금을 내지 않냐고 독촉하는 지방감독관을 보면서 서로 귀를 막고 대화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와 유사한 몇몇 장면들과 농부를 정의하는 대목은 당시 빈농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땠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원인과 과정 없이 가난한 농부들은 무식하고, 탐욕스럽고, 천박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존재들이며, 그렇기에 지주의 하인조차 그들을 하대하고 모욕하고 강탈하고 혐오해도 되는 대상으로 낙인 찍혀있다.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 (p284)'
우리는 소위 '잃을 게 없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현세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평온한 내세를 기대하지만,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운 자들은 증명되지 않은 내세는 두려운 차원일 것이다.  


도시에서 와 노동을 하지 않으며 성경만 읽고 있는 올가에게 시골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고된 노동에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고, 그저 술로써 고달픔을 달래는 남자들과 술에 취한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며 시달리면서도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는 여자들에게 낙후된 시골은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장이다. 


남편이 죽고 다시 모스끄바로 돌아가 하녀로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올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 타령만 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는 부분과 이어진다. 결국 현세에서는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는 가난한 자들이 기댈 곳은 하느님의 품뿐이다. 이러한 올가의 모습은 단편 소설 <새로운 별장>의 엘레나로 이어진다. 가난의 고통을 호소하는 늙은 대장장이 부부에게 위로랍시고 전하는 말이,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지만, 저세상에서는 행복할 거예요"이다. 한때 가난을 겪었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고작 이렇다. 그들이 바라는 건 '저세상'에서의 안식이 아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올가가 자신도 농부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이면서도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애처롭게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농부들과 자신은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리고 혼자 기도하듯 읊조리면서 '정교도'를 콕 짚어 지칭하는데, 평등하게 안식을 가질 하느님의 세상조차 주류와 비주류는 나뉜다. 그들 자신이 소외된 존재임에도 말이다. 


모두 사람이 다 자신의 자리가 있고, 피상적인 모습만 보고 타인을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리고 좋은 옷을 걸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엘라나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계조차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녀의 말이 받아들여질까?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진정성과 간절함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엘레나를 보면서 '가난의 정도'에 대해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로 이어진다. <새로운 별장>에서 보여지듯 가난한 주민들에게 필요했던 건 다리가 아니라 그들을 존엄하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마지막에 위치한 표제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발랄한 느낌의 제목과는 다르게 제법 묵직한 치정소설(?)이다. 울고 있는 안나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간 구로프는 거울 속에 비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여자들은 남자의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평생 간절히 원하던 그런 사람으로 상대를 사랑했고, 나중에 자신들의 실수를 알아차리고도 사랑을 이어간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관계에서는 행복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과연 여자만 그럴까? 어쩌면 사랑이라는 속성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콩깍지 씌였다는말이 딱 맞는거지.) 



<검은 수사> <문학 교사>를 비롯한 실린 소설들은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 <갈매기> <세 자매> 등을 떠올리게 하는데, 앞선 소설들이 그가 인생 후반에 쓴 희곡의 바탕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몇 편은 읽었던, 또 몇 편은 처음 읽었다. 아무튼, 역시 체호프 읽기는 늘 뿌듯함을 남긴다. 


이 판본이 처음인 독자라면 앞에 실린 아주 짧은 단편들을 꼭 읽으시라. 러시아 문학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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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동품 상점
찰스 디킨스 지음, 이창호 옮김 / B612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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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아주 긴 한 편의 동화같은 소설. 개정판 표지에 푸른색을 입혀 그 느낌이 더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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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1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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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작품은 대체로 적은 분량임에도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 그러나 한장 한장 허투로 읽을 수 없는 그의 문장들을 읽으면 묘하게 집중하게 되는데, 이 소설 역시 그렇게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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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마지막 한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2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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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을 흠뻑 빠져들어 읽었더랬다. 그들의 시대 이후 역시 혼란의 시기였을 터. 이야기꾼 살만 루슈대는 또 어떤 인물들과 스토리를 창조해냈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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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이올린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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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요하네스 카렐스키의 영혼은 광기에 가까워지곤 하는 이상한 성향이 있었다. 그 성향으로 인해 그는 단 하나의 존재 이유만을 갖게 됐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生인 영혼을 음악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미완성 악보인 자신의 영혼을 매일 조금씩 더 천재적으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 바이올린 장인 에라스무스.
악기를 만드는 사람과 연주하는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 이들의 만남에 '운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바이올린이라는 공통점을 넘어서 음악이 인생의 전부이며 그들의 영혼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악기에 담으려했고, 다른 한 사람은 오페라 작곡에 일평생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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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가 오페라 작곡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영혼과 광기를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그리고 있는데, 나는 그의 집착이 외로움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 살부터 10년 동안 천재 소년이라는 유명세를 타고 마음 한조각 나눌 친구도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유럽 곳곳으로 순회 연주 공연을 다니고, 화려한 연주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밤이면 늘 외로웠던 요하네스가 어머니가 죽은 후 대중으로부터 빠르게 잊혀진 허허로움이 어땠을까를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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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의 초대로 참석한 작은 모임에서 에라스무스는 몇몇 귀족 청년들과 논쟁을 벌인다. 카를라는 에라스무스에게 그녀의 음색을 재현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들 수 있는지 묻는다. 카를라의 재촉에 그녀를 위해 그녀의 목소리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겠다고 장담하는데, 그순간 그의 마음은 카를라를 향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객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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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 잃어버려야했던 것들.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을 악보 안에, 혹은 악기 안에 그들의 것으로 가두어놓을 수 있을 것라는 오만함에 대한 비극적인 대가가 아니었을까.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프랑스군이 베네치아를 점령했을 당시 산마르코 광장에서 열린 성령강림대축일 축제에서 이탈리아 장교들과 프랑스 장교들이 한데 어울린 부분이었다. 축제 동안 춤과 노래가 적군과 아군을 가르지 않았던 것처럼 예술은 어느 개인에게 종속될 수 없음을, 세 남녀를 통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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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요하네스와 에라스무스의 서사를 구구절절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절제되고 시적이며 함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 감정이 오롯이 빠져들었더랬다. 읽는 내내 니콜로 파가니니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영혼이 담긴 바이올린이 부숴졌든, 불후의 명작이 됐을지도 모를 오페라가 소멸됐든, 그들에게 안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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