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아로새겨진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7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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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기후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일본이 물에 잠겨 사라진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 놓고 있다. 덴마크 오덴세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은 트리어, 오슬로까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언어와 만남이 더해진다. 





 



유럽에서 유학 중 나고 자란 나라가 소멸해버려 하루 아침에 난민 신세로 전락한 Hiruko, 산업 재해로 살던 고향이 폐허가 된 텐조, 남성 신체를 가진 트랜스젠더 아카슈, 인생의 지도에서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아 무기력해진 노라, 말을 잃고 부유하듯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Susanoo. 기후온난화, 기후난민, 극지방 원주민, 불법체류자 등 물리적 혹은 정서적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현대의 디아스포라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다각도로 펼쳐진다. 
Hiruko의 언어 판스카는 스칸디나비아 일대를 아우르지만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고 이질적인 기운을 담고 있다. 저자는 판스카가 Hiruko를 북유럽 사회에 완전히 동화시켜 드러나지 않게 만들어버릴 언어가 아니라고 썼다. 우리는 이주민을 수용할 때 '동화'를 염두에 둔다. 왜 '존중'이 아닌 동화에 초점을 맞춰야할까. 강압적인 동화는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판스카를 쓰는 한, Hiruko는 어디까지나 자유롭고, 자기 마음대로 존재할 수 있다.(p328)'. 한 단어에 여러 뜻이 담겨 있어 때와 상황에 맞게 쓸 수 있어 소통에 큰 무리가 없는 소통의 창발성이 필요한 시대가 점점 다가오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누트는 네이티브와 비네이티브 중 어느 쪽이 더 픙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이는  Hiruko가 말한 '언어의 실'과는 다른 관점이다. 내 생각을 보태자면 언어는 언어 그 자체 외에도 함께 공유하는 역사, 정서, 문화, 시대성을 내포한다. 그런 측면에서  Hiruko가 말한 '언어의 실', 그리고 '모어를 말하는 사람이 모국인은 아니다'가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근래에 '통화공포증'이라는 말을 알게됐다. 모든 의사소통을 문자화하고 있다보니 대화를 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모티콘이나 부호들로 감정을 나타낼 수 있지만, 음성에서 전해져 오는 뉘앙스나 세밀한 감정을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아무리 아름다운 어휘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사어가 될 수 밖에 없다. 음성 언어가 사라진 세상. 상상만으로도 참 별로다.  


Susanoo의 아버지는 로봇이 하는 말은 말이 아니라 수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모어든 모어가 아니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의 말을 하고 있는가의 여부가 아닐까.   


마침내 말을 시작한 Susanoo.
이들의 여행은 오슬로에서 끝나지 않는다. 


합연기연合緣奇緣.
어쩌면 이 여행과 여행을 함께한 그들을 일컫는 것이겠다. 




283.
"너는 말하지 않는다. 너는 입을 다물고 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것일까. 강요할 마음은 없어. 비난할 생각도 없고. 어째서 인간은 말을 해야 하느냐고 거꾸로 나에게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하지만 너의 그 침묵은, 그대로 두면 죽음으로 이어질 것만 같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몇만 명이나 사는 섬을 상상해봐. 먹을 것도 있고, 입을 옷도 있어. 게임도 있고, 포르노 비디오도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언어를 잃고, 흐슬부슬 죽어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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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모닝의 힘 - 놀라운 기적을 만드는
김프리 지음 / 원앤원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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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시간을 조급하게 허겁지겁 보낸 적은 없지만, 야무지게 꽉꽉 채운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요즘의 아침은 운동과 커피만 내리면 어느새 책상 앞에 앉아야할 시간. 사실 일찍 일어나도 내 몫의 시간이 아니라는 핑계로 미라클모닝을 저 멀리 제쳐놓았데, 이제는 아침 시간을 정비해야할 때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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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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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를 비롯해 <인생>, <형제>까지 시대의 비극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민중의 삶에 천착하는 위화는 찰라의 순간에 녹아드는 인생의 유머와 피폐함 속에서도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위화의 소설들이 참 좋다.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 하나 마음에 남지 않는 이가 없다. 이것도 위화만의 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천융량 부부의 경우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스냅사진처럼 딱 찍혀지는 느낌인데, 예를 들면 린바이자 대신 천야오우에게 인질이 되라는 부분에서 내가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이러한 (꽤 많은) 장면들이 그순간 찰칵! 찍히듯 기억에 남아 있다. 린샹푸는 그의 인생 자체가 한 점의 수묵화 병풍처럼 남아 있고, 샤오메이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고 애잔하다. 아마 그들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 터다. 그래서 더 그들의 발걸음에 마음이 간다. 책장을 넘기며 아창이 차라리 샤오메이를 기다리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갔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의 죽음에서 순간적으로 울컥하고 말았다. 17년만에 찾은 고향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한 채 맞은 죽음에 괜스레 내가 더 서러워졌더랬다. 연신 눈물을 훔치며 그를 대신하는 이 설움이 가시기도 전에 만행이 다시 시작되는 상황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세상은, 시대는 누군가의 슬픔과 누군가를 향한 애도를 기꺼이 기다려 주지 않았었지'라고. 그리고 소설을 이어 읽으면서 또 다시 든 생각은, '그래, 그의 삶이 서럽다 여긴 건 내 생각이었구나'라고. (나는 지금 쓰면서도 목이 메어...) 


ㅡ 


그들의 운명을 이토록 꼬아 놓은 건 누구일까. 
누구에서부터,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소설에 등장하는 토비들처럼 절대악인(이 아닌 토비도 있었지만)이 아니라면, 시대의 운명에 있어 개인의 힘은 미미하기에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는 모호할 따름이다. 잠시 쉬어가자했던 그 짧은 만남이 한 남자의 굴곡진 인생을 만들어 갔을 줄은 그들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샤오메이가 안고 살아야했을 그 깊은 고독과 아픔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나.  


이 소설에는 운명을 처절하게 원망하며 이겨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은 운명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신이 지켜내야할 것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며 또 다시 몸을 일으킨다. 읽으면서 겸허히 느꼈던 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체념도, 패배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혈연과 상관없는 애끓는 가족애를 갖고 있는 천융량 부부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타인을 향한 선善과 도리.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무모해보일지언정, 세상은 사람으로 인해 살아갈 만한 것임을, 위화의 소설들이 전해준다. 


머릿속에서 한편의 흑백 영화처럼 남는 소설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뎦는 순간까지 울어서 찐득해진 눈을 비볐다. 
이 여운을 어쩌나... . 



사족.
위화의 소설들이 다 그렇지만, <원청>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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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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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동자가 가장 훌륭한 노동자일까요?"
"가장 값싼 노동자지요. 부려먹기에 가장 경제적인 노동자요."  

 






그래픽노블 버전이다. 다 읽고나니 원작 희곡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읽다보면 내용이 단순하지 않다. 인류 종말 앞에 인간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더구나 AI가 점점 더 보편화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보다 더 깊게 생각해봐야할 지점들이 상당수다.  


이야기 속에서 과학 기술을 추앙하는 이들의 말처럼 산책, 예술, 동식물과의 교감 등의 행위와 거기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는 것을 쓸데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다. 또한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함으로써 물질의 노예로 사는 삶은 끝이 날 것이고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을 하게 될 것이라는 부분 역시 온전히 받아들일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알퀴스트처럼 과학기술을 무조건적으로 증오하는 이는 더더욱 없을 터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전혀 극단적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책 속에서 지금의 우리 모습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ㅡ 


생산자들은 로봇을 만드는 이유가 오로지 노동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알퀴스트는  노동, 노동에 따른 피로, 봉사 등 힘들지만 보람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삶에 대해 말하지만, 해리는 앞으로 사라질 것들에 대해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한다.


10년 후 그들 눈앞에 도래한 세상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꽤 많은 부분 겹쳐진다. 일상의 편리함에 만족하는 한편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부분들을 자동화라는 이름으로 AI(로봇)가 깊고 넓게 차지하는지 놀랄 지경이다. 제조업 생산 라인은 말할 것 없고, 위험 직업군, 은행, 고속도로, 식당과 마트를 비롯한 편의시설, 유원지와 문화시설 등 눈에 띄게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출산을 멈추게 되는데, 현재 세계 곳곳, 특히 경제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는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심각을 넘어서고 있다. 또한 인간에게 실리적이고 소비되지 않는 생명체들은 필요에 따라 개종하고 멸종시키기 일쑤다. 또한 생산의 주체가 수요임을 들어 로봇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구매, 사용, 폐기 처분까지의 과정에 동참한 모든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음을 짚는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을까? 사라져가는 인간의 노동과 일자리, 저출산, 삶의 자유 등 어떤 것에도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효율성과 생산성과 가성비를 따지는 동안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종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생명의 자연성을 인간의 편의와 이기에 맞게 개조하는 오만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성과 감정들을 꼬집으면서 알퀴스트를 통해 인간의 마지막 과업은 역설적으로 비생산성에 있음을 얘기한다.  


ㅡ  


흥미로운 몇 가지 지점은, 


헬레나가 일하는 인권연맹에서 원하는 것은 로봇들의 보호이고, 궁극적으로 로봇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한다. 헬레나가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의 로봇들에게는 자유의 개념 아예 없었다. 그런데 도서관 로봇 라디우스가 자아를 각성하면서 인간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그럴 수 없다면 분쇄기로 보내달라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로봇이 원하는 것은 정작 자유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인데,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헬레나는 남편과 이사진들에게 제발 공장을 폐쇄하자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해리는 오히려 나라마다 공장을 세워 생산확대 및 대량생산 예정을 말한다. 더하여 각국의 공장에서 생산된 로봇이 다른 공장의 로봇을 죽을 때까지 증오하도록 교육시키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로봇 라디우스 말과 다른 듯 하지만 묘하게 일치한다. 


섬을 장악하고 인간을 몰살 한 뒤 로봇이 외치는 구호는 "로봇들이여, 일터로!"다. 즉 노동이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자 목표인 셈이다. 그런데 읽을 때에는 인간과 로봇의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쓰다보니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수단이 아닌 듯하다.  


로봇 연구자 갈이 로봇의 기질을 인간으로 바꿈으로써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갈은 왜 독단적으로 로봇의 기질을 인간적으로 바꿨을까? 헬레나는 로봇이 인간을 증오할까봐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녀가 갖은 두려움의 기저는 무엇일까? 독자들이 각자 생각해보면 좋을 듯 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퀴스트.
알퀴스트가 갖는 희망의 두 객체.  


인간이 멸종된다면 로봇도 살아남을 수 없다.
21세기 첨단 시대에 로봇의 반격이 두려워 그들 없는 세상을 살기에는, 인간은 '편리함'이라는 달콤함을 버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원론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혜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우리는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각자 상상하는 '더 좋은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고민해볼 일이다.   



원작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황이 스멀스멀 시작될 무렵에 출간한 점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에서 다루어지는 요소들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전쟁, 가난, 노동, 독재, 인간성 말살 등 인간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는데 상대적으로 기술은 발달하고 있다. 1920년대에 쓰여진 이 작품이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텐데 오히려 지금이 더 읽기에 더 적절한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카렐 차페크는 모 광고의 카피처럼 '사람이 희망'임을 놓치 않는다. 
마지막장의 그림은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독자의 눈에 콱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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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발명된 신화 -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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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스라엘의 기원을 시작으로 유대인 추방의 신화, 유대인공동체 및 정체성, 유대인 음모론과 반유대주의, 시오니즘, 이스라엘의 우경화, 그리고 현재 여전히 심각한 국제 문제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 및 중동 분쟁과 미국 트럼프 정부와의 관계 시점까지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이 겨루려는 대상은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얽힌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놓고 극단적 편항으로 양분된 일반인들의 인식임을 밝히면서 유대인은 역사가 만들어낸 산물임을 인식함으로써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극단적인 편향 인식을 교정하는 데에 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흩어져,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던 것은 고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유랑의 결과가 아니다. 애초부터 다양한 지역에서 흩어져 살며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당시 시대의 필요에 의해 유대교로 개종한 뒤 기독교 세계에서 차별받는 분리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농민으로 속박된 삶을 살았던 기독교도와는 달리 유대인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신 교육과 이동의 자유가 있었다. 그들은 상업과 금융에 종사하며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산업 사회에서 우위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질시와 혐오는 근현대 들어서면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의해 강화됐고, 유대인 음모론과 홀로코스트까지 이어졌다. 유대인들은 각자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동화나 이주를 선택했고, 종교 및 역사적 시오니즘에서 정치적 시오니즘으로 전화시키며 현대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생경하면서도 재미있을 부분은 고대부터 근대 이전의 유대인 궤적과 정체성일 듯 하다. 저자의 지적처럼 고대 유대 주민의 후예임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사실 지중해 전역의 다양한 지역 출신의 후예이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대 원주민의 후예일 가능성이 더 크다. 


박해와 유랑의 서사,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성서의 계시, 유대교의 개종 및 포교와 신자의 증감 등이 오류와 짜집기로 만들어진 신화이며, 후대에는 현대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민족적 이데올로기로 활용됐음을 하나하나 짚어간다. 더하여 유대인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주변의 강요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그들 또한 강요된 정체성을 스스로 강화하며 주변의 차별과 억압에 대응했고, 유대교 신자에서 출발해 종교 공동체를 거쳐 종족적 의미의 유대인 집단에 이어 민족과 인종 집단으로까지 나아갔음을 서술한다.  


ㅡ 


우리가 알다시피 2차대전 뒤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허락하는 유엔 결의안을 채택했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은 기나긴 싸움과 협정을 거쳐 무산됐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사보타주도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무관심했던 주변 아랍 국가들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현대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드러나는 핵심 사안은 그 땅의 정당한 권리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설령 고대에 유대인이 그 땅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기존 주민을 일방적으로 몰아내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무엇보다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이 정통한 유대 주민ㅡ유대교가 아닌ㅡ일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그들이 내세우는 조상의 땅이라는 주장도 역사적 신빙성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120년 전부터 그 땅에 들어왔다. 그 세월 동안 토지를 매입하고 정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프라를 구축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도시를 건설했다. 120년이라는 세월과 그들의 노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저자는 유대인이과 팔레스타인 모두 그 땅에 살 권리와 당위는 충분하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책을 읽다보면 어디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다시 시작을 해야하는지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ㅡ 


현대 이스라엘 정부가 내놓은 역사적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고 모순되는 부분이 상당하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텅 빈 땅'이었다는 둥, 무슬림 정복 당시 유대교도들을 추방했다는 둥, 심지어 시오니스트도 인정한 팔레스타인 주민이 유대 주민의 후예임을 인정하는 유대 기원론 삭제까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거리다.   


이스라엘 건국은 박해받는 민족(집단)의 자구책이었으나,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또 다른 차별과 배제를 만들었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이스라엘 건국 정당성을 찾는 동시에 그들을 짓밟았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다. 저자는 이를 유대인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음을 얘기한다. 유대인 문제는 서양 기독교 문명이 만들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기독교 문명에 입각한 패권국가가 만든 국제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오니즘이 정치적으로 전환되고 거기다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팔레스타인(중동) 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이 되어갔다. 아랍계 주민과의 공존을 염두에 두지 않는 유대인, 정작 직접적으로 대립을 야기시켜 놓고도 근본적인 해결보다 야심에 급급한 서방 국가, 이에 못지 않은 주변 아랍 국가들, 그리고 중재자가 되어야 하건만 오히려 진짜 전쟁의 서막을 올려버린 유엔까지. 이 모든 고통의 당사자는 팔레스타인 주민이다. 탁자 앞에서 떠들고 있는 자들이 아니고. 


해당하는 두 나라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잇속까지 맞물려 꼬일대로 꼬인 실타래를 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가 그랬던가.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하라고. 그 기본이 거짓과 차별, 탐욕과 독단이 아닌 근거에 입각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타협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역사의 굴레에서 억압받는 피해자에서 폭력적 가해자가 되는 건 어느 한 나라만 해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담론에서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자유롭지 않다. 또한 국가 내 사회집단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피해자와 가해자의 순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잊지 말기를.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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