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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 신과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
필리프 르셰르메이에르 지음, 레베카 도트르메르 그림,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어디서 만든 목록이든 성경은 현대인 필독서로 늘 올려지는 문헌이다. '나, 이런 책도 읽었다'라는 허영심 가득한 독서를 하던 한참 어린 시절, 나의 자신감을 왕창 박살내놓았던 책이 성경이다. 집에 있는 성경과 개신교 성경까지 구해다 읽었지만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결국 포기, 꿩 대신 닭이라고 해제로 내놓거나 혹은 산문체로 출판한 성경으로 대체해 읽기를 마쳤으나 나에게는 많은 부분이 여전히 오리무중인 글들이다.
이 책은 기독교 성경을 삽화와 함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놓았다. 다양한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챕터별로 산문체, 서사시, 희곡 등 차별화하고 있어 읽는 맛이 색다르다. 성경 혹은 이와 관련한 책을 읽을 때마다 구약이 신화 및 설화 같다면, 신약은 그야말로 판타지, 마법 동화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은 그 느낌이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필리프 르셰르메이에르는 성경은 오로지 종교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공동 자산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의 신화들은 우리 사회를 형성했고 일상의 삶에 개입해 우리 무의식 안에서 순환한다고 얘기한다. 이 책은 '성경'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이야기들이라는 그의 글이 무슨 의미인지 책의 말미에 알 수 있다.
책의 내용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알만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구약의 창세기를 시작으로 카인과 아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사무엘, 사울, 다윗, 솔로몬, 유딧, 욥, 그리고 신약까지, 이외에도 전혀 모르는 내용은 없지 않을까싶다. 혹시 모르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쉽게 쓰여 있어서 읽는 데 전혀 어려움은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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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학습자 모드가 아닌 독서가 모드였기에 사이사이에 들었던 몇 가지 생각들만 써본다.
먼지와 물과 하느님의 숨으로 만들어진 아담. 인간은 죽음에 임박하면서 신의 숨이 사라지고 물이 사라지며 먼지로 남는다. 나는 별 내용도 없는 이 문장에서 눈이 한참 머물렀더랬다.
같은 환경에서 아담은 왜 권태를 느끼고, 이브는 호기심을 가졌을까. 연인 혹은 부부 사이에서의 비극도 이러한 차이에서 오는 건 아닌지. 권태보다 호기심이 더 큰 죄악인가? 하느님은 왜 여자를 우선해 단죄했을까. 산고의 고통과 복종과 방황을 주는 것보다 권태와 호기심을 두 인간에게서 거둬냈다면 좀더 본질적인 해결 방법이 됐을지도 모를 일일텐데. 그랬다면 인간의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려나. 혹시 이러한 딜레마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야할 이유를 찾아가라는 신의 빅 픽처?
바벨탑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민족을 이루어 경쟁했다. 인간의 불화는 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려나. 그래서 질투와 탐욕은 신이 부여한 인간이 갖는 본성인 것인가. 신은 왜 인간을 시험하고 기회를 주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불란을 조장할 그릇된 약속을 주고, 인간 사이를 이간질했을까. 집단 학습능력이 뛰어난 인간이라는 존재. 하필이면 못된 짓에 더 발달을 보이는 집단 학습능력이라니.
애초에 축복을 두 아들 모두에게 내렸으면 불란도 없었을 것을. 이사악은 왜 상황을 굳이 이렇게 만드는지!
나는 어느 판본에서든 야곱과 라헬의 이야기에서 늘 의아한 점은 라반의 속임수로 레아와 먼저 결혼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라헬과 결혼하기까지 7년의 기다림이 있었다하더라도, 야곱이 레아와의 사이에서 그렇게 많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랑없이 결혼한 야곱을 불안해 했을 레아를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 대부분의 '형제의 비극'이 부모로부터 비롯된 사실을 떠올려볼때, 신조차 형제의 감정을 배려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는 애초에 불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의 말씀은 너무나 모순적이야!)
어리석은 삼손이여, 두 번 속았으니 그 정도면 눈치 챌만도 한데, 들릴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어쩌면 우연의 일치라고 믿고 싶었던 게 더 컸겠지만. 그럼에도 들릴라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했던 영웅. 그럴거면 차라리 멋지게 보내주던가. 어우, 구차해.
밧세바와 뱃속의 아이를 차지하기 위해 여인의 남편을 전장터에서 죽인 다윗. 이럴거면 '하느님의 궤'는 왜 모시고 있는건지. 여자를 포함한 그 어떤 것이라도 다른이에게 속한 것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숭배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정작 권력자 본인에게는 예외다.
엘리사의 열두 기적은 예수가 행한 기적과 아주 흡사하다.
욥의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봐도, 하느님의 자식이 되기 위한 일이 이렇게 고통스러워야할 일이야? 어쩐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단 하나가 희망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힘을 달라는 예수. 그 글의 끝에 써있는 문구는 '행복했다'이다. 어쩌면 우리가 행복한 순간은 여전히 희망이 있고, 나를 신뢰해주는 존재가 있을 때가 아닐까. '행복했다'라는 네 글자가 왜 이렇게 뭉클하게 와닿는지.
유다의 배반,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될 지 이미 알고 있었던 예수가 '나의 하느님'을 읊조리며 흐느꼈을 때, 나는 왜 그가 울었을까 궁금하다. 한바탕 흐느낌 이후 두려움을 걷어낸 그의 모습에서 때로는 울음이 카타르시스가 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또한 엄마의 걱정을 걱정하는 아들의 눈빛까지, 아마도 예수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에 우리는 그에게 더 친근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니 숫자 7은 많은 부분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기간은 일곱 날, 히브리인들이 예리코를 함락한 것도 칠일 째,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계약의 궤'를 돌려준 시점도 일곱 달 뒤, 노아의 방주도 그렇고. 우리가 흔히 행운의 숫자로 7을 꼽는 것이 기독교 문화에서 파생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혹시 나만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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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말하지만 와닿는 삽화가 많았다.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 마지막장의 요한,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그린 그림은 정말... . 만약 예수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멈추고 곁을 지키겠다던 막달레나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라는 헛된 상상도 해봤다.
책을 덮고 난 후에 든 생각은 신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 특히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생각이 크다. 성경이라는 선입견을 거두고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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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지 말라고 금하는 율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신음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지 말라고 하는 율법도 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간의 율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게는 오직 하나의 율법, 곧 하느님의 율법만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