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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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와 동시대를 살다가 서른네 살의 나이로 요절한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 선집이다. 읽어본 바, 더 많은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면 버지니아 울프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실린 열여섯(미완 포함) 편의 소설은 광기와 살인, 연애와 사랑, 가족애와 모성애, 여성이 갖는 존재의 의미, 사회적 약자를 향한 편견어린 시선, 인간의 오만 등을 현실적으로 구현한다. 









그저 피곤하지 않은 아이가 되고 싶을 뿐인 어린 소녀, 어디에서든 성폭행의 노출로부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젊은 여성, 사랑은 둘이 하건만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육체적.정신적 부담을 짊어져야하는 대부분의 여성들, 강요되는 전통적 여성성, 이분법적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선의의 본질,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달라질 것이 없는 권태로운 인생, 존재의 의미에 대해 되짚게 하는 황혼, 쓸모와 자유 안에서 갖는 삶의 의미 등 누가 겪어도 이상하지 않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사실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다가간다. 또한 독자는 이러한 일상적이고 소박한 표현에서 우러나는 섬세한 감정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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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만에서> <인형의 집>으로 이어지는 연작이 인상적이었는데, 현대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을 짧은 분량 안에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정숙하고 순종적인 여성성, 그리고 동경하는 이상적인 사랑과 본능적 욕구 및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베럴. 전업주부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갈구하는 린다. 삶의 조수에 저항하지 않고 선선히 따르는 것이 인생의 순리라고 말하는 조너선의 말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베럴이나 린다에게 얼만큼 공감이 가능한지 되묻게 된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경제적 능력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일상의 무게를, 그리고 출산과 임신의 부담을 여성은 혼자 짊어져야 한다. 본능이라고 여기는 모성애의 부재에 대한 여성의 죄책감. 인생에 있어서 '절대'라는 단어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인생을 보내야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는 조너선은 한 번 뿐인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 안타깝다. 자신의 삶이 일반적인 죄수의 삶과 큰 차이가 없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본인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고, 아무도 꺼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개탄스러워하지만, 그 역시 벗어날 용기는 없다. 


<인형의 집>에서 보여지는 학교 내 학생 차별 및 따돌림 현상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집안을 들먹이며 경계선을 만들어 놓는 것은 어른들이고, 인형의 집을 구경하기 위해 아첨하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있는 자들에게 기생하는 그들의 부모(불특정 다수의 어른)를 연상케 한다. 켈비네 아이들에게 인형의 집을 보여주면 안 되냐는 어린 키지어의 말에 당연히 안 된다고 대답하는 린다의 모습에서 대다수 사회 구성원을 볼 수 있었고, 답답함을 느꼈다.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어린 키지어가 결국 린다와 같은 어른으로 성장할 거 라는 사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상대의 약점을 잡아 매몰차게 상처를 입히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 더 이상 아이의 것이라고 할 수 없어 안타깝다. 더하여 베럴이 조카가 보는 앞에서 켈비 자매를 닭 쫓는 내몰며, 냉랭하고 거만한 자세로 고작 허리춤도 오지 않을 아이들에게 "당낭 나가!"라고 말하는 장면은 잔인하고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이 두 연작은 가정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겪게 되는 딜레마,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폭력적인 시선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부조리 등을 자연스럽게 녹여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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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부분, 자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의 경험담에 혼자만의 생각으로 예전의 시선으로 아내를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해먼드 씨('낯선 사람')처럼, 전투적이고 고달픈 삶을 토로하는 파커 아주머니 앞에서 자기 도취에 빠져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문학가('파커 아주머니의 인생')처럼, 상대에 대한 연민도, 인류애도 아닌 그야말로 선의를 베푸는 자기만족 즉 나르시시즘으로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여인을 충동적으로 집에 데려가는 로즈메리('차 한 잔')처럼,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이입이 부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이러한 인간 세상을 때로는 호러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때로는 냉철하게 그려냈다. 이와같이 여러 색깔로 삶을 써내려가는 작가가 요절했다는 것이 애석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그의 글이 그리워질 듯 하다. 




♤ 출판시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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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1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의와 나르시시즘의 차이는 이해와 이입이라는 말씀 공감합니다.

사율 2022-05-12 15:26   좋아요 1 | URL
공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