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계몽 - 이성, 과학, 휴머니즘, 그리고 진보를 말하다 사이언스 클래식 37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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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부에서 계몽주의의 개념들을 정리하고, 2부에서 그 유효성을 입증했다면, 3부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을 옹호한다. 특히 이성, 과학, 휴머니즘에서의 개몽주의 이념이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며 보탬이 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저자는 보편적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의 주제로서 네 가지를 꼽는다. 이성, 과학, 휴머니즘, 진보가 그것이다. 이성은 비타협적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 습관이 그다지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과학 혁명은 인간을 무지로부터 뿐만 아니라 공포로부터 탈출시켰다. 과학에는 우리 자신 즉, 인간에 대한 이해도 포함되었다. 휴머니즘은 부족, 인종, 국가, 종교의 영광이 아닌 인간 개개인의 안녕과 복리에 특권을 부여하고, 만족과 고통을 느끼는 지각 있는 존재는 집안이 아니라 개인이다. 인간은 공감이라는 정서를 타고 났기에 휴머니즘 본성에 부합할 수 있다. 과학과 이성과 세계주의가 공감의 범위를 넓혀 준 덕분에 인류는 지적, 도덕적으로 진보할 수 있었다. 진보를 이야기함에 있어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점은 휴머니즘에 기초하지 않은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조건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인 엔트로피, 진화, 정보는 인간의 진보 이야기의 핵심적 줄거리다. 저자는 이 세 개념을 통해 불행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유기체같은 복잡계는 수많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쉽게 망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여기서 망가짐이란 압제와 착취). 인간은 폭력을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으로 본다고 얘기하면서 그 증거로 인류 역사 전체에서 탐욕보다는 정의의 이름으로 살해된 사람이 더 많다는 문장이 확 와닿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경제 성장이다. 그리고 현재 예민한 이슈인 불평등, 환경에 대해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저자가 말하는 여러 형태의 폭력과 사고, 그에 따른 사망이 과거보다 현저히 낮아졌고, 앞으로 더 낮아질 것이라는 글에서 피해자에 대한 경시는 없다. 객관적인 자료에 따른 결과를 말할 뿐이고 이는 사회가 더 진보하고 있음을 근거한 것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상대 수치에 기대어 절대 수치의 피해자가 잊혀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한대로 분야에 따라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은 점점 진보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약자의 입장에서 평등은 여전히 미흡하다. 무엇보다 과거보다 현재가 더 나아졌다는 사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대중적 희망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진보(계몽)를 이뤄야하고, 진보는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저자의 의도가 무조건적으로 부를 지향하자는 것도 아니고, 기본소득 등 인류가 평등하게 누려야할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논리가 악용될 소지가 있을 가능성이 느껴진다. 따라서 인류가 추구해야할 가치의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어야하는지를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글은 중립적이고 정치적.편향적이지 않으며 현실과 인간의 본성을 기초로 냉철하게 판단한다. 읽으면서 크게 동의.공감한 부분도 있었고, 물음표를 찍어 놓은 부분도 있었다. 진보는 인간의 지식과 행동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저자에게서 계몽을 지향하는 그의 사상이 흔들림이 없음을 느낀다. 우리가 사회과학 문헌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사실에 입각한 정보와 다양한 시각으로 통찰할 기회를 줌과 동시에 독자 스스로 물음표를 찍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어떤 부분에서 공감하고 어느 지점에서 물음표를 찍을지 무척 궁금하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들이 많을 것 같아 독서 토론 한 번 가야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 리딩투데이 선물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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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 1 아이네이스 1
베르길리우스 지음, 김남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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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는 트로이아 멸망을 시작으로 하는 로마 건국 서사시로서 총12권으로 되어 있으며 베르길리우스의 11년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이 책은 트로이아 목마로 유명한 그 시점부터 신의 계시를 받은 후 일행을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 아이네아스가 카르타고를 떠나는 장면인 4권까지 실려있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질 때가 종종 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 베르길리우스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문구마다 감정이 격렬해 따라가기 바빴는데, 쓰는 장본인은 이 격한 감정을 어떻게 눌러가며 글을 썼을까싶다. 눈앞에서 아들을 처참하게 잃고, 무너져가는 남편을 지켜봐야하는 헤쿠바와 멸망 왕족의 여인으로서 살아남은 죄로 처절하고 기구한 운명에 던져진 안드로마케.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를 보면서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는 그녀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남편을 오라비가 살해하고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가까스로 마음의 문을 연 디도의 애절한 호소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더 가슴이 아픈 건, 처연하기까지 한 그녀의 죽음이 아니라 아이네아스와의 이별이 전 남편의 주검에 정절(신의)를 지키지 않은 대가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탓을 돌리는 디도의 절망감이다. 디도가 아이네아스의 이별 선언에 죽음을 선택한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에 찾아오는 상실감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 상실감과 그 이후에 강요받을 혼인에 대한 압박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디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도구가 아이네아스에게 선물로 요구해 받은 칼인데, 주석에서 보면 디도가 '트로이아의 칼'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상징성을 언급한다. 상징성이 차후 세 번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전쟁, 그리고 한니발을 끝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는 것을 말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감정 뿐만 아니라 상황의 묘사도 상당히 역동적이다. 목마가 열리고 시작된 살육과 파괴의 현장을 묘사한 문구는 어떤 설명없이도 오롯이 전해진다. 이어지는 일행의 방랑길은 극한의 연속이다. 첫번째 정착지에서는 영혼이 떠나라고 하고, 두번째 정착지에서는 역병이 돌고, 중간에 태풍과 괴조의 출몰은 서비스다. 정착할 땅을 찾아 떠도는 패배자이자 망명객의 고단함과 열패감 , 처절함이 애절하게 전달된다. 카르타고에 난파되기까지의 여정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감정을 흔드는 부분은 3권이다. 
 


 
지극히 트로이아인의 관점(굳이 따지자면 로마인 관점)에서 쓴 작품이다보니 베르길리우스의 약간 유치한 면도 있어 웃음이 나는 구석이 꽤 있고, 주석을 읽으면서 오뒷세이아까지 뒤적거리며 맞춰 읽다보니 번역하신 선생의 말씀에 나 혼자 궁금한 점이 생기기도 했더랬다. 예를들어, 2권에서 꿈을 꾸고 있는 아이네아스는 헥토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는 주석이 있는데, 왜일까? 헥토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나?'처럼. 베르길리우스는 코로이부스를 통해 '간계'가 그리스 사람들의 전유물인 양 표현했다고 해석했다. 즉 그리스인들을 에둘러 폄훼한 것. 그리고 속임수를 쓰는 그리스군이 승리한 것에 아이네아스는 분노하는데 올림픽도 아니고 전쟁에서 무슨 정정당당한 승부를 외치시는지. 





 
고대 문헌을 읽을 때 주석을 따로 읽는 편이다. 원문을 한 번 읽고, 원문을 보지 않은 채 주석만 읽는다. 그러면 두 번 읽는 효과도 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좋다. 주석을 읽다보면 해석에 대해 아직까지 논쟁되는 부분이 있다고하는데, 이런 부분은 과감(?)하게 통과하면서 읽었다. 
 


이 판본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가능한 원전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물론 의역해 놓은 판본들보다는 읽고 소화하는데 시간이 좀더 필요하지만 아름답고 호소력 짙은 문장을 즐길 수 있어 기꺼운 마음으로 읽는 중이다. 두번째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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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으로 빚은 집 - 1969 퓰리처상 수상작
N. 스콧 모머데이 지음, 이윤정 옮김 / 혜움이음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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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문학이 익숙하지 않다. 그동안 이와 관련해 읽었던 책을 떠올려 보면 곧바로 생각나는 책은 <모히칸족의 최후> <내 영혼이 따뜻해던 날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정도다. 그나마도 원주민이 직접 쓴 작품은 체로키 혈통을 이어받은 포리스트 카터의 작품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시애틀 추장의 책은 문학이라고 볼 수 없는 듯 하고). 원주민 역사에 대해서도 교과서에서 배운 정도와 이후 위의 책들을 읽을 때 찾아본 상식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데 나바호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 카이오와족 출신 작가가 쓴 이 책을 손에 쥐고 오랜만에 만나는 북미 원주민 문학과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고향 땅 왈라토와 협곡으로 돌아온 나바호족 청년 아벨과 그의 할아버지 프란치스코의 과거를 통해 원주민의 아름다웠던 땅, 하늘, 사람들과 백인들로 인해 비참하게 내몰린 그들의 이야기다.  
 


콜럼버스에 의해 졸지에 인도 사람이 되어버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쫓겨났고, 야만인으로 낙인 찍혀 강제로 개종당했다. 각 부족의 전통과 문화와 관습은 무시된 채 수용소 생활과 기나긴 이주를 반복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 노무로 푼돈을 벌며 남는 시간에는 술집에서 빈둥대는 것 뿐이다. 문명인이 그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저 시간을 죽이는 일. '보호'라는 명분으로 인디언 자치 지구를 만들어 지배자 편의에 맞춰 부족 간의 관계 혹은 관습에 상관없이 재배치하고,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경고와 감시를 해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은 서정적으로 표현한 원주민들의 대지와 자연, 그리고 영혼이다. 과하지 않은 간결한 문장으로 써내려간 자연의 모습은 종종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처절한 원주민 서사를 몇 안되는 등장 인물을 통해 사실적이면서 아프게 그려냈다. 아벨은 환각에 빠져 백인 남자를 위협적인 뱀으로 착각해 살해했는데, 이는 원주민을 위협하는 침략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아벨이 재판 당시 묵비권을 행사한 까닭은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을 통해 자신(원주민)의 상황을 백인들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얀 악마들. 원주민이 바라본 문명인의 모습일 터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예전의 문화와 전통에 스며들지 못하고 겉돌던 중, 술과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환각 상태에서 백인을 살해해 7년을 복역하고 인디언 재배치 기관에 의해 LA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활하지만 급속하게 변화된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벨에게 더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아벨의 할아버지 프란치스코의 죽음과 할아버지를 자신이 땅에 묻지 않고 교구 신부에게 부탁한 후  '여명으로 빚은 집'으로 달려가는 아벨의 모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생각해 볼 일이다. 프란치스코와 아벨이 추억하는 세상과 현실의 괴리는 극명하지만, 그들은 자신들만의 영혼을 놓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
 


스스로에게 변해야 한다, 변해야만 한다고 읊조리는 그들의 이 자조가 낯설지 않다. 변해야만 한다는 강박, 변하지 않으면 도태할 것이라는 불안감.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 협찬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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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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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고정된 주거지 없이 자동차에서 생활하며 떠돌이 임시 임금 노동자로 생활하는 노마드들을 취재하고 경험한 3년 간의 기록이다. 이 이야기 중심에는 저자와 각별히 교감을 나눈 예순네 살 여성 린다 메이가 있고, 그녀의 주변 혹은 그녀가 머물렀던 장소에서 만난 많은 노마드 들이 등장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노마드 들은 2008년 전후에 일어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파산한 사람들로서 연령은 60대 이후가 주를 이룬다. 그들은 한때 높은 학위와 전문 분야의 일자리를 갖고 있었고 은퇴 후 안정된 노후를 기대했던 사람들이었으나 경제 대붕괴로 한순간에 주거지를 잃고 노년에 임시 저임금 노동자로 내몰렸다. 임금과 주거 비용의 상승률이 반비례하는 현상에 과감히 '집'을 포기함으로써 집세, 주택 융자금, 공공 설비 사용비의 족쇄를 부순 사람들의 이야기다.









 
 
노마드 들은 아마존닷컴 물류 센타, 설탕 공장, 캠프장 관리 등 고강도 육체 노동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고용주 입장에서 이들만큼 효율적인 인력이 없다. 부담없는 저임금과 어느 순간 해고를 해도 문제될 것이 없고 수월한 인력 보충으로 아마존은 캠퍼포스를 브랜드화하기까지 했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로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현재, 노마드가 아니더라도 일반 급여 노동자로서 중산층이 될 수 없는 시절에, 노년으로 접어든 사람들은 일을 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하물며 모든 자산이 날아가버리고 오직 밴 한 대가 전부인 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은퇴의 종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노년 세대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가 만난 노마드 중에는 젊은 세대도 적지 않다. 학자금 대출은 점점 늘어나고 대학 학위를 취득해도 취업이 어렵거나 고용의 질이 떨어지니 졸업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득을 늘릴 수 없다면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비용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거비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RV에 몸을 싣는다. 노마드의 진입 연령층이 낮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린다의 딸 가족 역시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노마드가 됐다.



스스로를 노예 노동자라고 일컫는 77세 워캠퍼 데이비드와 '우리 사회의 불가촉 천민'이라고 쓴 라본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을 현대의 여행자요 집시라고 지칭하는 돈 휠러도 있다. 물론 사회의 관습이 모든 사람에게 일관된 행복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사회 규범을 잘 지켜도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 밥처럼 오히려 노마드 생활로 행복해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고, 린다는 노마드가 된 뒤로 삶을 즐기게 됐다고 말한다. 책을 읽다보면 낭만적인 생각에 젖어드는 순간이 있다. 비록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시작한 이 생활 방식이 점점 더 그들을 끈끈한 연대로 결속시키며 이타심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노마드 사회 안에서도 크지 않지만 인종 차별이 존재하고, 급여나 육체 노동에 있어서 여성에게 취약한 환경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노마드 규모가 커지면서 그들을 '홈리스'로 사회적 낙인을 찍은 미국 정부는 다수의 도시에서 차량 숙박을 금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차장에 차는 세울 수 있지만,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다. 미디어 역시 타이어 떠돌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인터뷰한 대다수의 노마드 들은 주류 주거 형태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장애인 복지 수당으로 살아가는 RTR 노마드 데이비드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하우스 리스' 일뿐 '홈리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자유롭고 낭만적인 생각을 걷어내고 좀더 냉정하게 짚어보자.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은 재정적 위기에 몰러 집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60대 이후에 상상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감당하면서 적은 임금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고, 병이 나면 의료비는 큰 부담이다. 또한 집 역할을 하는 자동차가 고장나면 그에 따른 수리비 마련도 엄청나다. 무엇보다 그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다. 이 모든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일평생 열심히 일한 예순네 살 여성이 머무를 집 한 채 없이, 노년에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며 떠돌이로 살아야하는 사회가 정상인가?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꽤 많다. 어지간해서는 중산층 진입이 어렵고, 기업 의존형 마을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 여전한 고용 불안정으로 임시직을 전전해야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 중년까지 자녀 교육에 올인하느라 노후 대책이 전무한 중년층, 취업난으로 졸업을 하지 않은 채 영원히 '생(대학생, 대학원생, 휴학생, 취준생)'으로 남아있는 청년층 등. 계속 살아가기 위해 당신은 이 삶의 어떤 부분을 포기하겠냐는 질문에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예순네 살 린다의 꿈은 어스십이다. 그녀가 어스십을 짓기 위해 굴삭기로 퍼올리는 흙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의 꿈이, 연대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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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14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스십 좀 찾아보았어요. 지속가능한 환경친화집이네요. 대단한 공동체입니다. 벌써 70년대부터 지었다니 놀랍구요. 리뷰 잘 읽었어요 ^^

달빛 2021-10-15 08:2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번 기회에 어스십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패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1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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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통일을 향해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독일과 이를 견제하는 프랑스의 전쟁을 배경으로, 에밀 졸라는 이 전쟁의 시작부터 파리 코뮌까지를 충실하게 복기했고, 승부의 분수령이 됐던 스당 전투의 패배와 마지막 파리 코뮌에 집중했다. 등장인물의 개인적 서사보다는 역사적 사실과 민중 전체의 서사에 집중하다보니 작가의 여타 작품보다는 이야기의 풍부함이 다소 부족한 듯 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전쟁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만족스러운 읽기였다.   
 



전쟁은 선전포고를 한 프랑스 황제의 호언과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선전포고 이전에 이미 의무 병역 제체로 상시 전투태세에 돌입해 젊은 지휘관과 강한 정신력, 출중한 판단력으로 이미 오스트리아를 제압하고 있었다. 반면 프랑스의 낡은 제정은 뿌리까지 썩어 있었고 자유를 말살시켰으며, 대리복무제로 인해 군대는 망가진 상태에서 군사훈련도 타성에 젖어 있었고 승리를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현대 과학의 새로운 기술 도입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작가는, 한마디로 프랑스가 까막눈 상태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떼처럼 지리멸렬하게 전쟁터로 나갔다며, 시작부터 모든 사태를 통찰했던 바이스를 통해 맹렬히 일침을 가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방탕한 생활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입대한 지식인 청년 모리스, 무학의 농민 베테랑 군인 장 마카르. 농부와 지식인 사이에 존재하는 본능적인 반감과 계급과 교육의 차이에서 오는 서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불편했던 두 사람은 열악한 군 상황에서 진심어린 장의 격려, 그리고 같은 처지에서 오는 공감을 통해 반감을 줄여나가고 이후 서로의 목숨을 구하며 연민과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진한 형제애를 나눈다. 소설 초반, 언뜻 읽히기에 두 사람의 배치는 대다수 평민과 진보적인 젊은 지식인을 대변한다고 느껴졌지만 소설 후반에 이르면 다른 의미로 전해지고, 무엇보다 모리스의 변화가 와닿는다.   



모리스는 전쟁을 통해 자신이 좋은 교육을 받았으나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에는 전혀 무지한,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허영에 들떠 향략의 열기와 거짓되 위세에 도취된 보잘것 없는 사람임을 깨닫는데, 그가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각성한다는 설정은 프랑스도 마찬가지라는 것, 즉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안이하고 방만하며 진보하지 않은 채 오히려 퇴화하고 있는 현재를 인지하지 못한 프랑스가 자초한 위기이며, 이를 계기로 새롭게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모리스가 자신을 장의 뼈에 붙은 종양이라고 말하는 데에서, 더 전진한다. 현실적으로 죽은 지식만을 고집하며 민중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인과 기득권층을 향한다. 파리를 불태우는 불이 모든 것을 회복시키리라는 모리스의 말 역시 혁명과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소멸시켜 프랑스를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에밀 졸라는 말한다.
프랑스는, 선의와 용기로써 자신의 집을 야전병원으로 내놓은 드라에르슈와 사비를 들여 환자를 치료하러 다니는 달리샹 박사, 그리고 연약해 보이지만 역경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앙리에트처럼 이타심과 올바른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지켜낼 것이다. 또한 프로스페르가 열심히 땅을 파고 씨를 뿌리는 날, 농부였던 장의 손에 다시 곡괭이가 들리는 날, 프랑스는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코뮌의 이름으로 희생당한 1만 2천의 사망자 가운데 폭도로 오인된 선량한 시민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재건, 살아 남겨진 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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