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루시 - 루시 바턴 시리즈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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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남편 데이비드가 세상을 떠나고 외로움으로 힘든 루시. 이혼 후 친구로 지내는 첫번째 남편 윌리엄으로부터 함께 전염병을 피해 당분간 시골 바닷가 마을로 피해있자는 권유를 받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를 따라 메인 해안에 있는 크로스비라는 이름의 타운에 집을 빌려 머문다. 소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심각성이 뉴욕 한복판으로 밀려들면서 시작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점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엮어내는 데에 아주 탁월하는 것이다. 화자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 친구, 이웃을 넘어서 주변 인물들이 가지가 가지를 치듯 이어지는 서사의 과정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감동스럽다. 





 



등장인물 중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밥 버지스다. 그는 상대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자신이 듣고 있다는 신호를 적절하게 보낸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경험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무엇보다 밥은 루시가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가족 누구도 루시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다. 그리고 루시는 남편이었던 윌리엄과 데이비드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밥에게 한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이다. 예전부터 간혹 (아주 드물게) 밥과 같은 사람을 볼 때면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를 얻는지 궁금했다. 사실 나 자신을 납득하고 이해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타자를 수용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관계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윌리엄이 이부누이를 만나고 와서 어린애처럼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는 모습이다. 일평생 자신이 외동인 줄 알았고, 자신을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어머니의 비정한 과거를 알게 된,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이부누이 로이스 부바의 존재를 알게 된 윌리엄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설레임과 행복이었다. 루시는 그때서야 단 한 번도 생각치 못했던 윌리엄이 가진 외로움의 깊이를 깨닫는다. 그는 세 명의 아내와 이혼했고, 딸이 셋이고, 결혼 생활 중에도 만나는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외롭다고 느꼈다. 루시가 그랬듯, 누구도 윌리엄의 내면 밑바닥에 깔린 외로움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 


얼핏, 팬데믹 시대에 겪어야 했던 단절과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팬데믹이 아니라더라도 우리는 '이미' 타인의 감정에 무감하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안부를 건네는 것에 인색했으며, 지속적으로 폭력과 혐오를 반복해 왔음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코비드 시국을 빌어 소통의 부재와 타인에 대한 혐오가 지속되어 오고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마치 우리가 외부적 영향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것처럼 굴지만, 실은 훨씬 이전부터 '안전한 거리두기'를 해왔음을, 대화와 경청, 공감과 이해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읽혔다.   


누구나 혼자가 되는 것은 두렵다. 이 두려움은 전염병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물론 팬데믹 시대에 그 두려움이 극대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혼자'라는 데에서 오는 무서운 외로움을 감정 소모의 가성비를 따져가며 애써 감춘다. 감정에 손익을 매겨가며. 작가는 우리가 아닌 척, 모르는 척하며 눌러왔던 상실과 고립을 이제 서로에게 털어놓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더 자유로워지라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결국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혼자 짊어져야 한다. 그러니 그때 감당해야할 외로움과 두려움이 별 거 아닐 수 있도록, 살아있는 동안 충분히 서로에게 다정하고, 서로를 보살피기를.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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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9 - 5국 전쟁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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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에 이어 영일만에 나타난 왜선의 등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399년부터 왜국 연합군의 신라 침략과 숙군성 공략, 대방 전투가 벌어진 404년까지 다룬다.


소설은 신라의 '역성혁명' 이후의 정치적 상황과 고구려의 성城(국내성, 평양성, 국원성)에 대한 지리적 위치와 환경, 그리고 세 개 성이 국외 정세에 따른 전략적 요충지로서 군사적.정치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서술한다. 




 



9권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은 새 개의 사건인데, 먼저 400년에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왜국 연합군과 백제의 신라 침공이다(사실상 백제는 크게 한 일이 없다만). 관미성을 빼앗기고 절치부심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는 백제, 여러 욕심이 버무려진 왜국, 여전히 권좌를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여기며 다시 대륙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는 해평의 분노가 절묘하게 맞물려 전쟁이 벌어진다.


두 번째는 고구려의 숙군성 공략. 
예정에 없던 전투였는데,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건드리고 5천 호 고구려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가 노역에 이용하는 바람에 일어났다. 숙군성 공략의 단 하나의 목표는 2년 전에 끌려간 고구려 백성 5천 호를 다시 데려오는 것. 단 시간에 끝내고 목적한 바를 이룬 후 바로 퇴각하는 것도 멋지더라. 후연의 수도성까지 노려볼만 했을텐데. 북위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었다하더라도.


세 번째는 대방 전투.
이 전투는 국가 대 국가의 전투라기보다는 단순 노략질이 목적인 대규모 도적떼를 처리하는 수준이어서 병력의 규모만 아니면 '전투'라는 용어가 민망할 지경이다. 물론 소설의 허구적 상상이지만 길잡이가 되어준 백제의 사두 장군까지 그들의 행태에 낯뜨거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  


ㅡ 


9권에서는 각 나라의 지도자들의 면면이 드러나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특히 모용정과 모용희를 보면서 규모를 떠나 리더가 집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라 결말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신하마다 의견은 다를 수 있으니 대립하는 의견들을 조율하고, 자신의 소신이나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여러 의견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군주. 과거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현재에 적용하여 더 나은 해결책을 도출해내는 리더십. 참 만나기 어려운 지도자다. 


이 무렵, 담덕의 나이는 이십대 중후반이다.
그는 꿈이 많아서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더라. 사방에 적을 두고 모든 사항을 면밀히 살펴야 했던 젊은 군주. 이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를 어떻게 견뎠을까싶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대임을 감안해도 삼십대 젊은 나이에 죽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든다(아버지가 잘 닦아놓아서 장수왕은 그야말로 천수를 넘겨 산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남은 마지막 10권.
모용희.모용운과 엮인 후연과의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보다는 동부여 토벌을 크게 담으리라 예상한다. 무엇보다 이 대장정이 어떻게 마무리될지가 궁금하다.


10권을 기다리며.  




#도서지원
 
 

‘군주는 그래야지. 지상의 별처럼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그 빛의 세례를 주어야지.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어야지. 가공할 무력으로 전쟁을 그치고(武), 인내와 사랑으로 고통을 없애고(無), 모든 이들이 희열로 춤추는(舞), 무무무武無舞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군주의 도가 아닐 것인가?‘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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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계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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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우리나라 번역본으로는 처음 만나는 작가이지 싶은데, 작품들 면면이 상당히 독특하다. 실린 소설들 중 서너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1인칭(한 작품은 2인칭)으로 서술하고, 대체로 화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각각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냄새'다. 피 냄새, 먼지 냄새, 오래된 것에서 나는 묵은 냄새, 낡은 집 냄새, 늙음의 냄새, 소독약 냄새, 형언할 수 없는 역겨운 혹은 전율하게 만드는 냄새. 이 냄새들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폭력을 대변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폭력을 행하는 주체는 이름이 없이 불특정하다. 앞서 1인칭 서술이 의미심장하다는 이유는 화자(피해자, 혹은 관찰자) 역시 누구라도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성폭력에 노출된 사회.
귀신이나 악마 혹은 죽은 것보다 살아있는 사람을 더 무서워해야 하는 세상. 
가족이든 연인이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강제와 폭력.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옮겨가는 중에서도 힘의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존재하는 이들.
혈연 안에서 벌어져 더욱 보호받지 못하는 근친상간 피해자.
여성의 욕망을 부도덕으로 치부하고 부정하는 세태.
애증의 또다른 이름, 가족. 


어른이 되지 못한 엄마를 대신해 어른이 되어버린 장녀는 엄마도 지키지 못한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오열한다. 어른의 부재 속에서 방치된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를 흉내내며 자란다. 외롭게, 조난자처럼.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채 어른이 되거나 어른이 되지 못한 부모를 대신해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성적, 물리적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리고, 살기 위해 잘못한 일도 없이 두 손을 비비며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했던 시간들, 그 시간 안에서 느껴야했던 무력감. 갈등을 제공한 자는 갈등 안에 존재하지 않고, 정작 피해자들끼리 자신이 더 큰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 그리셀다 아주머니가 만든 알록달록 예쁘고 환상적인 케이크와는 딴판인 현실의 세상. 


체중과 노화의 잣대는 유독 여성에게 엄격하다. 여성의 다이어트 욕망(최근에는 남성들의 몸매 가꾸기까지)이 순전히 한 개인의 취향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외모지상주의가 마치 전근대적인 사고라도 되는듯 말하지만 사회 구조는 여전히 너도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날씬하게, 더 근육질로, 더 아름답게, 더 젊게,를 부채질한다. 


ㅡ 


특히 두 편의 서술자 관점이 눈에 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ㅡ막달라 마리아, 마르타ㅡ을 통해 현재 공동체내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여성의 위치를 현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와 그의 수난을 쓴 『수난 』, 집안에 남성이 사라지고 여성만 남게 되자 상중임에도 두려움보다는 해방감을 느끼지만 여전히 폭력의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마르타의 모습을 그린 『상중喪中』.


『새끼들』에서 '나'를 밀폐된 공간으로 끌어들어 처음 성性 행위를 지시한 사람은 '이상한 오빠'다.  『블라인드』에서 매일같이 블라인드를 열고 닫는 일을 책임지는 사람은 '소년의 티를 막 벗고 있는 남자아이'다. '나'가 경매(폭행과 살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치를 감수하고 '미친년' 흉내를 내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투계』 에서). 생리를 시작한 여자 아이가 살아가면서 정말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이다(『괴물』 에서).



간혹, 인생에는 불행한 순간이 눈앞에 와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드는, 그리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안고 가게 될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투계장 같은 세상에서 우리 주위에 있는 괴물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설은 고발한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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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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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에서도 연상된 작가의 전작.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이름을 본 순간, 혹시나 싶어 그제서야 온라인 서점의 소개글을 읽었다. 역시나 <빛의 호위>. 소설은 이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2022년에서 202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소설은 권은과 승준의 관점을 번걸아가며 서술하면서 두 사람,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한다. 부모로부터,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인류로부터 버려진 자들이 겪는 절망과 공허를 통해 삶이 갖는 모순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연대의 필요성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독일 드레스덴에 소이탄을 퍼부은 영국 공군 소속의 조종사였던 콜린 앤더슨, 평생에 걸쳐 분쟁의 현장을 사진으로 증명하며 반전운동을 한 그의 아들 게리. 게리의 여동생 애나는 반전운동가였던 오빠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버지였다고 말하는데, 이는 난민 소녀를 받아들이고 후원하며 양육해온 애나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태어난 지 두 달여 된 딸에게 아름답고 따뜻하고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하고 싶다는 민영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듣는 다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하며 남편인 승준이 우크라이나 여성의 인터뷰를 맡은 것에 대해 불편해한다. 그리고 애나의 아들 데이비드는 브렉시트에 반대하면서도 난민이나 이민자 유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정서적으로 불우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후 3개월 딸에게 투영한 민영과 비현실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어머니 애나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데이비드가 갖는 모순은 우리 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모습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같은 반 급우였던 승준이 건넨 반자동 카메라가 자신을 살게 했다고 말하는 권은. 어느 순간 자신을 살게 했던 카메라가 자각하지 못한 채 신념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녀는 레스보스섬에서 살마를 알아갈수록 살마를 카메라에 담지 못한다. 자신의 유년 시절과 너무 닮아 있는 살마. 그래서, 피사체와의 거리가 유지되지 않아서, 살마를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이는 프레임 밖 피사체가 살아갈 실제 삶에 무지했다는, 사진을 위해 피사체의 고통을 이용해온 건지도 모른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이는 자신이 이룩해 놓은 지난 시간들이 결국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진 모래성 같은 자기 만족에 불과할 수 있다는 허무로 이어진다. 권은은 역사의 증언이 될 거라는 숭고함과 헌신이라고 믿어왔던 신념이 자신이 부여한 허울 좋은 욕망일 수 있음을 반추하게 했다고 말한다. 독자는 이 부분을 어떻게 판단할까.   


참전 당시 콜린은 스무 살 어린 청년이었다. 콜린은 자신은 군수 시설을 목표로 투하했을 뿐, 드레스덴이 민간인 지역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말해왔다. 그는 이 작전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민간인을 죽여 보복하고 독일을 동요하게 해서 항복을 이끌어내는 것. 그때의 기억은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그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콜린은 모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몰랐다고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단지 죄책감의 무게가 조금 덜해지려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콜린이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나는 권은의 자각에서 다시 보게 됐다.  


ㅡ 


자신이 무심코 건넨 카메라 한 대가 한쪽 다리를 잃은 권은의 삶을 결정했다고 여기며 자책하는 승준. 하지만 만약 그때 어린 소년이 또래의 그녀에게 카메라를 건네지 않았다면 소녀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열두 살 그 시절, 권은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찾아오는 반장(승준)을 간절히 기다렸었다. 이후 어른이 되어서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자괴감을 느꼈을 때, 다리를 잃고 의족을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유년 시절 승준을 기다렸던 그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 기다림만이 살아갈 이유였던 열두 살의 나날들을. 


사지를 종횡무진 누비며 죽는 순간까지 카메라와 함께 했던 게리는 수십 번의 생의 기적을 몸소 체험한다. 바로 옆에 있던 동료를 관통한 그 총알은 죽음과 삶을 한 프레임에 담고 있다. 이처럼 생의 매순간에는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많은 일들과 감정이 혼재해 있다.  


당연하게 지속될 것 같은 우리 일상의 평화,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깨질 수 있다. 일상이 붕괴된 이들의 사연이 언제 나의 사연이 될 지 알 수 없다. 또한 생존과 죽음은 이어져 있다. 천운으로 비켜간 총알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순간, 비켜간 총알을 경험한다. 그 말은 언제든 총알이 나를 향해 날아올 수 있다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ㅡ 


이 소설을 다 읽고나니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서 언급했던 '연루됨'이라는 단어가 다시금 떠오른다. 권은과 승준, 게리와 콜린, 권은과 살마와 애나, 승준 - 권은 - 나스차 - 살마, 그리고 알마를 살린 장 베른의 악보와 권은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반자동 카메라. 정서적으로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살마에 대한 권은의 이해와 살마의 그 짧은 수면 시간만이라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담은 공감. 이들 모두 종과 횡으로 연루된다.


권은이 수 년 만에 승준의 메시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는 대상은 승준의 딸 지유다. 과거는 현재와 이어져 있으며, 어떻게든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승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권은을 살렸던 것처럼, 권은 역시 중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지금 그들의 삶이 지유의 미래에 보탬이 되기를, 그리고 한 시대를 통과해 온 자신들의 삶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사족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소설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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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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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2년부터 약 1년 반 동안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신여성읽기세미나팀이 1백년 전에 발행한 월간지 <신여성>을 함께 읽고 탐구한 글쓰기를 20년 만에 재출간한 개정판이다. 머리말에서, 20년 전 초판에서는 <신여성>이라는 매체를 탐사하고 꼼꼼하게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 개정판에서는 매체의 소개보다 당시 '신여성'이라고 불리던 여성들을 소환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고 썼다.  





 
 
여성의 소비를 여성의 허영으로, 여성의 허영을 여성의 본능으로 만들어, 새롭게 등장한 모던걸을 정신적 미성숙자로 몰아간 남성의 욕망과,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비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한 여성의 욕망이 동시에 드러나며 충돌한다. 관음증으로 드러나는 남성의 심리를 식민지 현실과 연관시켜보면 한층 더 흥미롭다. 제국주의자들은 대체로 스스로를 남성으로, 식민지민을 여성으로 규정한다. 여성이나 다름없는, 무력한 타자로 전락한 식민지 남성의 주체화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이에 따라 식민지 남성들은 여성의 타자화를 통해 자신의 주체화를 꾀한다. 이 부분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봉급생활자를 그만둔지 한참 전이라 요즘의 직장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돌이켜 보면 적어도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타자화를 통해 자신의 주체화를 꾀하는' 남성들은 사회 조직 안에 상당수(경험적으로는 대부분)였다. 


1920년대 초반 월간지 <신여성>은 여성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거듭내야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지만, 실제 문 밖으로 나온 신여성을 지속적으로 비판(이라고 썼으나 비난에 가깝다)했다. 또한 <신여성>에는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양육에 대한 기사가 적지 않았는데,  독자에게 어머니로서 반드시(?) 알아야하는 주의 사항(모유 수유, 이유식 등)과 함께 아동 교육에 관한 지식, 아동의 성장과 영양학적 관계, 아동심리, 아동기 질병과 간호 등 의학적 지식을 갖춘 '관찰자로서의 어머니'역할을 강조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성에게 능력과 정숙(더하기 순종)을 함께 요구함으로써 안팎으로 완벽하기를 바랐고, 이는 현재의 슈퍼워킹맘으로 재현되고 있는 건 아닌가싶다. 그래서 이 책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책을 받고 읽기 전부터 가장 궁금했던 점이 있었는데 월간지 <신여성>과 '신여성' 담론의 주체가 어디에 있느냐였다. 마침 3장에서 이에 대한 화두, '신여성들을 명명하거나 재명명하는 담론적 주체는 누구인가?'를 던진다. <신여성>에 실렸던 내용의 면면을 살펴보면, 지금으로 치자면 소위 '운동권' 학생이자 여성 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송계월이 맡았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잡지 <신여성>에서의 여성은 주체가 아닌 계몽의 대상이었다. 필진 또한 대부분 남성이었고, 그들의 글은 사실에 기반한다기보다 한 단면을 부풀리고 확대해 마치 소설을 쓰듯 서술하면서 여성들에게 순한 양이 되어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야단치거나 빈정거린다. <신여성>에 실린 글들을 보면 시대는, 그리고 남성은, 여성의 자아와 욕망을 타락으로 치부하고, 연애의 실패나 여성의 매춘을 시대에 따른 결과가 아닌 여성 개인의 문제로 몰아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래봐야 100년도 안 된 과거다. 어느 면으로 보자면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ㅡ대체로 물리적인 것들ㅡ이 바뀌었고, 다른 면에서 보자면 지긋지긋하도록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가사 노동과 양육은 여전히 '노는 일'로 취급되기 일쑤고, 남성의 출산 및 육아 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한 직장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맞벌이 부부의 퇴근 후 주 양육자는 어김없이 여성이다. 임금과 승진 차별은 여전하고, 일하는 기혼 여성에 대한 시선은 이중적이다(어디 기혼 여성뿐이겠냐마는). 또한 직장 내 성추행은 남성보다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비율이 훨씬 높다. 1930년대 당시 언론인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인 김경재가, '국가의 조직이 남자를 본위'로 하고 있는 세상에서 '경제적 실권을 가진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 사이에는 주인-노예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일견 긍정하게 된다. 김경재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경제권이 우선해야 했다. 그의 표현이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양상은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1930년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여성의 등장. 지금의 우리들은 월간지 <신여성>이 '신여성'의 불온함을 비판하는 글 안에서 그 이면의 것, 문장 사이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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