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자들 - 주류의 삶 바깥으로 달아나 칩거를 택한 청년들
리잉디 지음, 김경숙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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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임금에 지쳐 일용직을 선택한 중국 선전시의 청년들. 
연애와 결혼은 사치. 1인 생활에 맞춰 비혼을 선언하는 청년들.
천정부지의 집값과 물가를 감당하기 어려워 탈 대도시를 선택한 청년들.
한쪽에서는 대도시 생활에 지쳐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며 은거를 결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작은 도시에서 희망을 찾지 못해 대도시에서의 미래을 꿈꾼다.


작가는 대도시를 탈주하는 사람들을 취재하는 한편, 그들이 이주하는 곳 중 가장 이슈가 되었던 지역인 허강에서 두 달여를 지낸다. 이 책은 작가가 처음 은거바에 대해 알게 된 시점부터 그들과 대화하고 목격하고 느낀 점들을 쓴 3년 간의 기록이다. 






농업대학에서 원예기술을 전공한 왕하오는 애플 휴대폰을 생산하는 폭스콘에 취직해 하루 여덟 시간을 근무하지만, 실상은 늘 초과근무를 한다. 3년째 접어들면서 시간감각이 불분명해진 왕하오는 외부에 대한 감각이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왕하오를 비롯한 몇몇의 사례를 읽으면서 불현듯 몇 달 전에 본 방송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대학은 물론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청년들이 취업난으로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직업이 무엇이든 대학에서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은 아니겠으나 모든 청년이 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자격증이 필요한 직업을 얻어야 생계가 보전되는 사회라면 뭔가 이상한 게 아닐까. 


그들은 경제활동, 소비, 타인과의 관계 등 거의 대부분에서 최소화를 고집한다. 자발적으로 주거지를 낙후된 도시나 시골로 옮겨 살면서 필요할 때마다 단기 임시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빈 시간에는 온라인 게임이나 취미 활동 등을 하는데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온 심각성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대책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공간과 생활 반경이 한정되어 있을 뿐 나름의 루틴이 있고, 비대면으로 소통하는 지인이 있고, 평소 생각해왔던 것들을 하나둘씩 실천하기도 한다. 자유롭고 홀가분한 삶을 원했던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일상은 천차만별이다. 탈 대도시의 목적이나 의미, 추구하는 바도 저마다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타인과의 '깊은' 관계를 원하지 않고,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 대체로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헤아리고 배려하야하는 것에 피곤함을 느끼며 소모라고 여긴다.  


어떤 이의 삶은 꽤 괜찮아 보이고, 어떤 이의 생활 패턴은 걱정이 된다. 각자의 선택이지만 가족과의 정조차 포기하며 외부와 단절한 자발적 고립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하다고 보기에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작가가 썼듯 그들이 반복적인 권태, 한계와 절망감에서 벗어나 정신적 자유는 얻게 됐느냐는 질문에는 물음표를 놓게 된다. 분명한 건, 마치 낙원인듯 찾아간 그곳 역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하는 현실의 공간이며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도 자기 방식대로의 고군분투를 이어가야만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청년들 다수가 유복하고 돌봄이 잘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처 성인이 되기 전부터 자립과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해야만 하는 환경이었다. 자아를 갉아먹히며 치열하고 전투적으로 살아온 이들의 탈주가 누군가에게는 도피고 누군가에게는 자아찾기라고 하겠지만, 이 상황을 트렌드인 양 치부하는 시선은 우려스럽다.  


허강에 정착하고자 하는 외지인들 중 다수는 자기가 죽더라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국가는 고속성장을 하고 있다. 우리의 청년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있는가. 책을 덮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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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두발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8
카렐 차페크 지음, 정보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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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허망하고 착잡함에 꽤 오래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에서 이주노동자로서 광부로 일하다가 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호르두발. 그러나 집에는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그의 자리가 없다. 남편으로서도, 아빠로서도 무용지물이다. 그의 빈 자리를 꽤 오래 전부터 타타르인 일꾼 슈테판이 채워주고 있다.  


어디 가족뿐인가. 알고 지내던 마을 사람들 역시 호르두발을 낯설어 한다. 미국에 다녀왔다며 허세를 부린 때문일까. 한때는 툭 터놓고 지내던 사람들과도 대화가 어렵고, 심지어 그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슬픔이 호르두발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린다. 미국으로 되돌아가볼까 싶으나 그마저도 녹록치 않고, 일거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방황하지만 넉넉하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 그가 아니더라도 일손은 차고 넘친다. 사실 호르두발이 찾아다닌 것은 일자리라기보다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을 찾아다닌 것이리라.





 
 
"유라이 호르두발이 살해당했다!"
(p163) 

 


호르두발이 누구에게, 어떻게 살해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자는 고향에 돌아온 호르두발의 진심을 알고 있다. 그는 아내가 손가락질 받고 죄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답답할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다. 그리고 가장으로서 수년간 부재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그가 남긴 유언장에 우리는 생각이 많아진다. 그렇기에 법정에서 그저 이기는 것에 급급한 검사와 변호사의 열띤 주장이 공허하게 울린다. 가장 안타까운 지점은 외로움과 고립, 죽어서까지 땅에 묻히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호르두발의 심장과 그의 죽음을 아무도 애석해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8년 만에 돌아온 집에서 다정한 가장이 되어 아내와 딸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한 남자의 죽음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 자극적인 치정 살인에 흥분할 따름이다. 


고향 사람들에게 금의환향한 것 마냥 달러를 벌어왔다고 큰소리치지만 실상 그곳에서의 생활은 고통스럽고 끔찍했다. 깊은 갱도를 내려가는 것이 마치 끝없는 지옥으로 가는 것 같았던 호르두발. 이국땅에서도, 고향에서도 이방인으로 존재하며 부유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이 참으로 애석하다. 집이 아닌 곳으로 가게 될까 두려웠던 그의 죽음을 단 한 사람도 애도하지 않았다. 너무나 슬픈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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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2026-10-23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열차에 내려 고향마을로 호르두발이 거닐 때부터, 아니 이미 열차에서 그의 미국 생활의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고통스럽겠구나 하며 아주 더디게 읽어나갔답니다. ˝애도 없는 슬픈 인생˝이란 말씀, 정말 아프네요. 감사히 읽고 갑니다~

사율 2026-10-28 16:45   좋아요 0 | URL
무척 안타깝게 읽은 소설입니다.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알갱이들 - 제6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황보나 지음 / 사계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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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년 전 자살한 정미의 언니 유미가 정미의 친구인 현비를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언뜻 김려령 작가의 『우아한 거짓말』이 떠올려지지만 이 소설이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데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면, 『알갱이들』은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다. 



현비는 정미와 친한 건 맞지만 '절친'인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독자는 이러한 그의 말이 의아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 현비가 전학가서 만나게 된 소윤을 대하는 태도에서 짐작되어지는 부분이 있다. 사실 소설 초반에 현비의 말이나 태도를 보면서 "요즘 아이들에게 친구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었고, 더 나아가 내가 꼽는 친구의 범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현비는 정미의 죽음 이후에 자기의 일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슬프지도 두렵지도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태연해 우려스러운 현비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은 분명한 상실과 고통이다. 몸은 껍데기일뿐이라면서 그저 얼굴만 아는 남자와 육체 관계를 맺고, 자해를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말한다. 앞서 썼듯 현비는 정미가 절친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친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사람은 정미뿐이다. 





  
 
현비는 썩지 않는 쓰레기(플라스틱류)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다(어떤 측면에서는 집착이라고까지 보인다). 읽는 내내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는데 소설 후반부에 알맹이, 알갱이, 껍데기에 대한 현비와 고모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었다. 하나하나의 알갱이가 되어 알맹이가 된다. 우리가 구분을 했을 뿐 껍데기 역시 알맹이의 일원이라는 것. 


현비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본다거나 마음을 담아 애도하고 보내주는 장면 그리고 유미와의 화해는, 죽으면 모두 잊어야한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거부이자 살아있는 자들이 망자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어야함을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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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쫄지 마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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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세 개의 꼭지점에서 개별적 사건으로 출발하지만, 하나의 이벤트를 향해 가고 있다. 1차적으로 닉네임을 사용하는 범인과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밝히고 시작하는데, 읽으면서 궁금해지는 부분은 범인 '트리그'가 누구냐는 것, 그리고 그가 왜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미 죽은 자의 복수를 자발적으로 하고 있냐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종단에는 체포될 것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골자가 정의실현을 명분으로 하는 무차별적 대리 살인인 것 같지만, 사실상 가정폭력을 다루고 있다고 읽힌다. 범죄 가해자 둘의 공통점은 가정폭력, 특히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점이다. 한 명은 아버지로부터, 다른 한 명은 어머니와 광신도로 이루어진 교회로부터.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할 부모의 그릇된 양육으로 인해 범죄자의 길로 들어선 자녀. 소설은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에 있는 가족이 가해자가 될 수 있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두 범죄자가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정작 그 이면에 깔린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과정은 그들이 감내해야했던 유년시절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가해자 서사에 섣부른 동정은 금물이라고는하나, 그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범죄자뿐만이 아니다. 중년에 이른 사립탐정 홀리 역시 과거 어머니의 말을 현재까지도 잊지 못하고 상처를 되새긴다. 문득,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은연 중에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도로, 자녀가 아직은 미숙하다는 이유로, 삶의 여러 부분에서 선택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건 아닐까싶고. 이걸 가스라이팅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어른들 스스로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   


ㅡ
 
가정과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
제 잇속으로 타인의 고통과 양심을 저버리는 자들.  
 
소설이 절정으로 치닫는 후반부. 두 명의 살인마가 활개를 치고 있는데, 정작 경찰은 자선 야구 경기에 더 열을 올린다.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대리 살인으로 애도하겠다는 정신 나간 사람, 경찰보다 더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위험을 감지하는 사립탐정과 그의 동료들, 잿밥에 더 정신을 팔고 있는 경찰. 이 웃지 못할 설정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작가가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알고 있을 리는 만무하고,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이입해서 읽었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이 비단 어느 한 나라에 국한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일터다. 시의성 짙은 소설이다.  
 
스티븐 킹 작품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는데, 본문만 600쪽 분량을 일요일 하루에 읽었다. 역시 가독성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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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어디에 있나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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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잃고 이름이 '찰스'에서 '언un찰스'가 된 시종 로봇 하나가 새 주인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대인 봉사에 특화된 정교한 서비스 모델로서 인간을 섬기게끔 설계된 로봇이다. 주인으로 섬길 자의 조건은 오직 하나, 인간이기만하면 된다. 그런데 이 인간 한 명을 발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언찰스가 처음으로 보게 된 장원 밖 세상은 폐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거의 없고, 사방은 파괴의 흔적과 오염물질과 쓰레기산으로 둘러싸야 있다. 지구의 모든 지역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쇠퇴했고, 사회적 붕괴를 맞이했다. 인류는 이제 선도 악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했던 로봇들만 남았다. 세상은 종말을 맞았는데 로봇들은 그들대로 취업난으로 경쟁 중이다. 마치 인간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 역시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도태되어 사장된다. 그리고 인류가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그 잘못된 길을, 로봇들은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타자를 적대시하고, 승리를 위해 경쟁자를 짓밟고, 폭력에 광분하며, 아무런 명분 없이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인 전쟁을 자행하는 파괴적인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로봇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자신이 로봇임을 반복적으로 각성하는 기계 언찰스. 감정에 충실하고 직감이 뛰어나며 존재의 의미에 집착하는 인간 여성 더 윙크. 전혀 다른 특성과 기질을 가진 두 개체의 동행. 만약 로봇에게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할 의지와 자율권이 있고, 생각을 통해 판단을 하고, 감정을 느끼며 타자를 향한 연민의 손을 내밀 줄 안다면, 그는 로봇일까, 사람일까. 점점 더 정교하고 인간에 가까운 AI를 만들겠다는 인간의 열망은 혁명일까, 파국일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인간이 설계한 AI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단죄하는 세상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갈수록 진화해가는 AI 앞에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가. 


소설은 인류 종말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장원이나 수도원과 비슷하게 그려지는 도서관, 성직자처럼 느껴지는 사서 로봇 등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한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사를 빗대어 지금의 우리 모습을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의식과 자율, 지식과 기록, 권리와 의무, 사유와 고독, 이타와 연대, 이기와 탐욕, 폭력과 파괴, 기억과 망각, 신神과 종교, 신을 자처하며 군과 사법부를 장악해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정부, 정의正義의 정의定義, 종단에는 이르러야할 공존 등 소설은 로봇을 통해 인간을 반추하고 있다. SF소설이지만 철학소설로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의미있게 읽힌 지점은 언찰스와 더 윙크의 '연결'이다. 그 둘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끊임없이 소통을 하는데,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좀처럼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다. 그럼에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더 윙크는 진실을, 언찰스는 자신을 받아줄 인간 주인을 찾기 위해 하염없이 헤매지만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데, 그와중에도 서로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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