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 지음, 오숙은 옮김 / 반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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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눈멂은 내게 완전한 불행은 아니었다. 삶의 한 방식, 삶의 스타일일 뿐이다. 
(보르헤스) 
 

열 살 무렵 망막색소변성증(정확한 진단명은 원뿔세포-막대세포이상증)을 진단받은 저자는 열여섯 살 즈음에는 보통 크기의 글자도 읽을 수 없게 됐고, 첫 진단 후 40년이 지난 현재는 완전한 실명은 아니지만 앞을 보지 못한다. 이 책은 시각장애인의 위대한 인간 승리 성공담이나 장애인 관점에서 비시각장애인 중심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일방적 비판의 글이 아닌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밀턴, 보르헤스, 샬럿 브론테, 주제 사라마구, 프랭크 허버트,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등 분야를 불문한 고대 및 현대의 인물과 그들의 문헌을 데려와 문학과 철학을 비롯해 스티비 원더 등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눈멂이 갖는 피상성, 죄악, 진실과 거짓, 시각 중심주의 등을 서술한 문화 및 예술 비평서에 가깝다.  









 
온전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게 되리라는 눈멂의 은유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저자는 젠더가 눈멂을 굴절시킨다고 쓰면서 여성과 눈먼 남성을 같은 선상에 놓으며 그들이 비주류 바라봄의 대상임을 짚는다. 동시에 인간 존재의 가변성이 젠더 유동성으로 나타남을 지적하며 눈멂이 곧 여성성과 동일시됨을 얘기한다(그러니 시각장애인이 여성일 경우는 어떻겠는가).


시력이 아주 완벽하다고 믿을 때조차도 우리의 시력은 근본적으로 어둡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멂이 우리 인간성의 한 양상임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문헌들에서 혹은 고정관념적으로 보통 인간의 내면적 깊이와 관련해 눈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 눈은 물질로 구성된 몸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저자는 뿌리깊은 시각 중심적 편견 때문에 시각장애 작가가 자신의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야기가 초반부터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무척 공감했다. 많은 비시각장애인 작가들이 마치 시각장애인의 세계를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쓴 글들과 이를 위화감없이 받아들이는 독자들에 대해, 그리고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기도 했다. 평소 궁금했던, 영아기에 시각을 잃은 시각장애인의 경우, 비시각장애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시각 세계가 암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경험적 비교 대상이 없기에 적절하지 않음 또한 새삼 인지했고.   



올리버 색스는 사물을 보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선천적인 능력 같지만, 실은 전반적인 기능의 위계가 필요한 인지적 성과에 해당한다고 했다. 즉 읽는 법을 배우듯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해당 장에서 시각을 복구하는 것이 우울한 어둠에서 기쁨 넘치는 빛으로 나아간다는 안일한 은유를 피해야한다고 얘기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올리버 색스의 저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생각났다. 비장애인이 장애에 대해 갖고 있는 섣부른 고정관념과 왜곡된 인식을 깨달았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 당시 느끼고 배웠던 점을 다시 각성할 수 있었다.  


저자는 점자가 하나의 문자 체계임을 분명히 하면서 점자의 읽고 쓰기를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비시각장애인도 배울 수 있는데, 문제는 동기에 있다고 말한다. 각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배우는 것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 점자 역시 마찬가지임을 주지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비시각장애인에게 점자를 배울 동기는 많지 않다. 거기다 시중에 점자책도 쉽게 구할 수 없어서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11장에는 헬렌 켈러를 들어 장애 행동주의에 대해 서술한다. 예술 창작 및 공연에 있어서 시각장애인이 만든 역할을 그들이 연기하는 것은 장애 행동주의를 위한 중요한 수단임을 밝히며 비시각장애 작가와 배우가 연극과 영화 속의 시각장애인을 창조하는 것은 포용과 다양성에 있어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작년에 시청했던 한 드라마에서 다운증후군 장애인이 직접 배역을 맡아 연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익광고를 비롯해 이러한 추세로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듯한데 점점 더 확대되기를 바람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영감 포르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저자는 장애가 영감을 준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며 장애를 영감과 연관 짓는 것은 장애가 단지 인간성의 한 양상이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인권에 반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 부분은 1장의 호메로스와도 연결되는데 이러한 점은 현대의 대중문화에서도 수시로 활용 및 은유된다는 점에서 나 역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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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은 평생의 파트너에게 보살핌을 받아야한다는 인식, (시각)장애인의 지적 수준이 비(시각)장애인보다 낮다는 편견, 성적 지향의 결정조차 시각의 있고 없고에 달려있는 듯한 태도 등 우리는 여전히 많은 편견을 갖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15장에서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무시되는 눈먼 자들에 대해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데, 이 부분에서 저자의 의견을 더 듣고 싶은 점이 있었다. 소설은 우의적인 설정이고 정황상 눈먼 자들이 갑자기 실명해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여길 수 있음을 저자도 짚는다. 그럼에도 사라마구가 소설 속에서 묘사는 '눈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소설에서 인물들은 목숨을 잃을수도 있고 그안에서도 절대 악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과연 '눈먼' 사람들은 어떻게 그려져야 했으며, 유일하게 시각을 잃지 않은 여성과 눈이 멀게 된 사람들은 어떤 구조를 가져야했을까. (이 부분은 계속 생각 중이다.) 



"장애는 유동적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시각)장애인으로서 주류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위의 짧은 문장은 장애와 비장애의 장벽이 얼마나 낮은지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비장애 중심주의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저자는 통찰하며 일갈한다. 


이 책을 펼치고 서너쪽을 넘길 즈음 내가 갖고 있는 비시각장애인으로서의 한계를 또다시 깨달았다. 책의 표지에 점자가 있는 것까지는 납득을 했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든 생각은 '폰트가 왜 이렇게 커?'였다. 그순간 나는 여전히 비시각장애인 관점에서 사물을 우선해 판단하고 있구나라고 새삼... . 산산히 쪼개져있는 의식의 조각들을 모으는 노력이 필요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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