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에디터스 컬렉션 1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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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왔다고. 

 


1947년, 스물아홉 살 가즈코는 6년 전에 아이를 사산한 후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고, 그녀의 동생 나오지는 대학교에 다니다가 징집된 후 종전 후에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해부터 집안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외삼촌의 권유로 시골 이즈로 이사온 모녀. 몇 달 후, 아편 중독자가 되어버린 나오지가 돌아온다.  









소설에는 가즈코, 나오지, 우에하라를 중심으로 가즈코를 1인칭 화자로 삼아 서술한다. 종전 후 몰락해가는 귀족과 패전 이후 황폐해진 사회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내적 갈등, 혁명이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혼란, 그리고 구차한 삶이라도 살아내겠다는 생명력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허울뿐인 귀족에서 벗어나 평민으로 살아보고자 발버둥첬던 나오지. 그의 일기에는 전쟁터에서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이런 삶이 계속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음을 통탄하며,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쓰여 있다. 자신이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강인한 민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으며, 귀족 사회에서도, 민중 사이에서도 이방인이었던 나오지는 끝까지 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쾌락과 타락을 선택했으나 매순간 불행했다.  


나오지가 방황과 고뇌를 보여준다면 우에하라는 무기력함을 나타낸다. 집에서는 사흘이 지나도록 전구를 갈지 못해 아내와 딸이 해가 지면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각혈을 하도록 술을 마신다. 가즈코의 열렬한 구애가 담긴 편지를 읽었으면서도 답장 한 통 없다가 6년 만에 찾아온 그녀를 하룻밤 받아들인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일상에 도저히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가즈코는 6년 전에 한 번 만나 입맞춤을 한 게 전부인 우에하라에게 자신을 받아달라는 세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바라는 것은 아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그의 첩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랑을, 아이를 원할 뿐이다.   


가즈코는 자신의 편지를 비웃는 사람이라면 여자가 살아가려는 노력과 여자의 생명을 조롱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심정이 갇혀 있는 듯한 현실에 숨쉬기조차 어려워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항구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호소한다. 또한 자신은 정박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물 위에 떠있기만 하는 배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당장의 상황을 가장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누군가의 쑥덕거림 따위는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다.  



가즈코와 우에하라의 재회. 애초에 우에하라에게 의탁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혁명할 계기가 필요했고, 도전적으로 나서서 뭇사람들의 시선과 낡은 도덕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해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우에하라에게 멋지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전투를 치르라고. 어머니와 살던 시절의 귀족적 명예와 평온이라는 꾸며식 허식에서 벗어나 사생아와 그 어미라는 도덕적 허물을 걷어내고 혁명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꿋꿋하게 살아갈 것을 선언하는 그녀. 어쩌면 가즈코의 강인한 삶에 대한 욕구와 생명력 자체가 혁명이 아닐까. 그리고 혁명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우에하라에게 보내는 편지는 가즈코의 결연한 의지를 대변한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가즈코의 변화다. 소설 초반에 유약하게 느껴졌던 그녀의 모습은 어머니의 병세를 기점으로 달라지더니 우에하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상당히 도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내면에 숨어있던 기질이 위기를 맞아 발현된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부딪치면서 단단해진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나 진흙탕 속에서도 살아남겠다는 가즈코의 강인함은 나오지와 우에하라, 두 남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내 아이를 낳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아이를 낳아주겠다니. 그야말로 시대의 전복이 아닐 수 없다.




138.
나는 살아나가야 한다. 어린애일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어머니처럼, 사람과 다투지 않고, 증오도 원망도 없이 아름답고 가련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우리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너무나 추찹하고 생피 냄새 나는, 더럽기 그지없는 일이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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