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 피아니즘의 황홀경 현대 예술의 거장
피터 F. 오스트왈드 지음, 한경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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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1957년에 처음 글렌 굴드와 교우 관계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글렌의 전 생애를 담고 있는 평전이다. 이 책에서 독자가 유심히 읽어야할 부분은 이미 알려져 있는 글렌의 음악적 성과보다는 그의 삶 전반을 좌우했던 심리 및 정신적 측면일 듯하다.  


저자 피터 오스트왈드는 글렌이 죽기 5년 전까지 그와 꽤 오랜 기간 교유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겪은 글렌, 그리고 글렌의 아버지를 비롯해 음악원 동기, 가까웠던 친구와 지인, 사촌, 매니저, 스승, 함께 작업했던 음악계 인사 등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보고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세 살 때 이미 절대음감을 가졌고 글자를 깨치기 전에 악보를 먼저 읽었다. 피아노와 자연 안에서만 안정감을 느꼈고, 손가락을 다치는 것을 두려워해 신체 접촉에 대한 두려움이 평생 이어졌다. 고독과 자연과 동물을 사랑해 유언장에 절반이 넘는 재산을 동물 애호 협회에 기부하도록 명시했다.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자이지만 정작 본인은 작곡과 지휘에 더 큰 열망과 야심을 가졌다. 꾸준하면도 열정적인 독서가로서 자발적 고립을 즐겼다. 영리한 데다 뛰어난 기억력, 유쾌한 유머 감각, 재치있는 말솜씨까지 갖추었다. 완벽주의자이고 극도의 건강 염려증과 무대 공포증을 평생 안고 살았다. 겨우 서른한 살에 무대 공연을 완전히 은퇴하고 녹음실에서만 연주하기를 고집했다. 죽기 전 몇 년은 연주보다는 제작자에 더 가까웠다. 만년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구부정한 등과 건반보다 한참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글렌 굴드하면 떠오르난 아주 대표적인 형상). 이 정도가 아주 간략하게 정리한 글렌 굴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정리로 글렌을 정의할 수 없다. 그의 심리와 정신 세계는 좀더 복잡 미묘하다. 글렌은 자신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평생 절제하며 살겠노라고 결심하며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음악을 방패 삼아 숨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내면에서는 타인과의 인간적인 접촉을 열망했다(글렌의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이외에도 많이 드러난다). 이는 피아니스트로서 한창 전성기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20대 음악가가 연주 무대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고 창파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공연이 싫다고 글렌 본인이 밝혔듯이 말이다. 


모짜르트에 대해 혹평을 하면서도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즐긴다든가 상반된 결을 가진 쇤베르크와 슈트라우스를 동시에 옹호하는 등 글렌은 모순된 모습을 보이지만 달리 말하면 틀에 갇히지 않고 순수하게 음악적으로만 접근해 다 끌어안는 성향, 자연과 동물(특히 늙은 동물)을 사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에 의존하는 '녹음'을 지향하는 이중성은 대표적인 글렌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1946년, 글렌이 열 네 살 된던 해의 일화다. 소년이 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을 때 집안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피아노 가까이에서 진공청소기를 켰고, 순간 연주는 기계 소음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때 글렌은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대신 그 소리를 연주해 내는 동작을 더욱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건반의 감촉으로 그것이 어떻게 소리로 연결되는지 느낄 수 있었고, 내가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들을 수는 없었다.(p165)" 이 경험을 통해 글렌은 손가락의 움직임을 더욱 명료하게 의식하면서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겨우 열네 살 소년이 단순한 경험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깨닫다니. 문제는 상상력의 산물이 현현하다보니 실제 소리에는 만족하지 못해 점점 더 완벽주의가 되어가면서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데에 있었다.  


ㅡ 


글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 언제나 관계를 끝냈다. 그에게 있어서 1순위는 자유와 음악이었다. 그러니 오래 관계를 이어가는 친구가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 터다. 세상의 잣대로 봤을 때 글렌 굴드는 사회적으로 미성숙하거나 부적응자로 보일 법하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그는 누구보다 음악에 헌신했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다. 모든 걸 차치하고 일단 그의 바흐(특히 젊은 시절의 바흐)를 들어보시라. 이십대 초반에 심코 호숫가 오두막에 틀어박혀 바흐를 연구한 그의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렌과 작업을 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글렌은 함께 일하기 까다롭고 상당히 힘든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 결과물은 매우 만족스러웠고, 다시 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지만 그 과정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에만해도 나는 글렌 굴드를 좀더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혹은 음악가를 꼭 이해해야만 하는가에 물음표를 놓는다. 글렌 굴드라는 사람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면 굳이 애쓸 필요 없다. 그저 그의 연주를 들으면 된다. 그가 살아있다면 그 역시 인간 글렌 굴드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의 음악에 심취해주기를 바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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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마음 -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
정고요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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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 짧은 소설 등이 담긴 산문집이다. 강릉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저자가 그곳에서의 일상과 산책을 통해 느낀 감상과 깨달음을 잔잔하게 풀어냈다.  

불과 얼마 전에 강릉을 다녀왔고, 요 며칠 전에는 속초에서 삼일을 머물렀다. 이때 읽으면 좋겠다싶어서 동행했는데, 읽는 동안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의도치 않게 하룻밤 사이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처음 서너쪽은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얘기인가싶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마음에 내 마음이 찰떡처럼 붙어버렸다.   




 



 
「'곁'이란 공간도 '유니콘'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타인의 옆으로는 쉽게 갈 수 있어도 타인의 곁으로 가기는 쉽지 않다. 타인이 곁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곁에 가지 못한다. 갈 수가 없다. 곁이라는 건, 있는 공간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공간이니까. 옆과는 다르다. 옆에 갈 수는 있다. 그러나 곁은 타인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지 않는 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곁이라는 공간은 타인이 우리에게 허락해야 마련되는 공간이다. 한 세계와 한 세계가 만날 때 생기는 틈 같은 것. (p25)」  


♣ 나는 종종 친해지기 어렵다는 말을 듣는다. 곁을 좀 내어달라는 말도 듣곤 한다. 그럴때면 가까워지는 데에 시간이 필요한 부류라고 핑계를 대며 양해를 구한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데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의식적으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더 가깝다. 저자의 말처럼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세계라면, 나는 다른 세계를 만나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ㅡ  


「잘하든 못하든 여전히 하고 싶다는 것, 잘하든 못하든 꾸준히 하는 게 하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나의 피아노에 대한 소박한 자랑이다. (p101)」  


♣ 이 대목도 참 반갑더라. 잘하든 못하든 꾸준히 하는 것이라면 피아노, 요가, 독서. 어쩌면 평생 쥐고 살았던 성실함과 인내심이 현재 내가 그럭저럭 살아가는 원동력이었으리라 생각하며 나 스스로를 위무해 본다.   


ㅡ  


「인생이란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은 나와 관계된 사람과 나누어 갖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나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나누어 갖는다. 아이러니한 점은 나와 관계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p123)」  


♣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말이 늘 입속에 맴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저자가 짚은대로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부모, 친구, 동료 심지어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나의 삶과 크고 작게 관련이 있다. 그러니 누구도 나만을 위해서 살기란 어렵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인지 의문이기도 하고.   


ㅡ  


저자 스스로 산책자라고 자처하는 만큼 산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산책이야말로 시간을 두고 한 도시와 천천히 가까워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오늘 춘천을 다녀왔다. 책을 읽다가 점심도 먹을 겸 육림고개와 중앙시장을 둘러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춘천은 꽤 자주 찾는 곳이지만, 시내 한가운데를 관통해 동네를 산책하는 건 드문 일이다. 내면의 지도를 만들어간다는 말이 새삼 와닿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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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을유세계문학전집 146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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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적 사랑을 애걸하는 남자 제베린, 살아 있는 동안 갖고 있는 모든 쾌락을 전부 소진하고 죽겠다는 여자 반다.  


정신의학자 크라프트 에빙이 이 작가의 이름에서 마조히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소설은 화자 '나'의 꿈에서 시작하는데, 그 짧은 꿈을 통해 이 작품이 어떤 소설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당시에 왜 논란이 됐는지 완독하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의외(?)로 소설은 선정적이거나 외설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폭력과 가학성, 그리고 여성에게 억압당하는 남성이라는 설정 때문에 논란이 됐을 거라는 게 사견私見이다.  






 


제베린이 모피에 집착하고, 반다는 제베린을 대할 때면 늘 채찍을 쥐고 있다. 제베린이 모피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가 매질을 당하면서 느낀 고통을 통해 쾌락을 처음 경험했을 때 매질을 한 친척 아주머니가 모피 재킷을 입고 있었다. 소설에서의 모피와 채찍은 권력을 상징함과 동시에 쾌락을 이끄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물리적 학대를 당하는 것에 매료되는 제베린과 남을 희생해서라도, 동성심을 버리고, 쾌락을 즐기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반다. 애초에 제베린이 먼저 반다에게 접근하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한 것이라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는 그도 미처 알지 못했다. 반다의 변덕과 조울 증세, 거기다 변화무쌍한 연기까지, 그야말로 능수능란하게 제베린을 조종한다. 반다가 제베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끝까지 속을 알 수 없는 여인이다.  


반다는 끝까지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거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존경 따위는 바라지도 않을 뿐더러 그저 행복하고 싶을 뿐이다. 기도교적인 영원한 삶은 원하지 않는다. 이승에서의 반다 폰 두나에프로서 끝낼 것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라면 누구든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라면 누구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즐겁게 쾌락과 향락을 위해 살 거라고 서슴없이 밝힌다. 이것만 두고 반다가 사디즘적 성향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녀가 제베린을 학대하면서 쾌락을 느꼈지는 독자에 다라 다를 수 있다. 처음에는 제베린의 요청에 의해 시작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심취했다는 점에서 의심해볼만하지만, 제베린을 제외하면 다른 누구에게도 그와 같은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보면 가학적 성애에서 한 발 물러서야하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사랑의 배신과 절망을 경험하고 집으로 돌아온 제베린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이나 쾌락보다는 폭력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를 쾌락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 그리고 아무리 사랑을 전제한다해도 사람을 노예나 개로 취급하는 것이, 또한 사랑이 타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문제인가를, 소설은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반다의 변화와 끝까지 오리무중에 빠진 그녀의 진심이었다.  




#도서지원

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그녀가 미친 걸까? 이 모든 것은 터무니없는 나의 상상력을 한번 무찔러 보려는 의도를 가진, 짓궂고 재간 있는 여인의 머리에서 나온 걸까? 아니면 이 여자는 정말로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지닌 인간들을 마치 벌레처럼 발로 으깨 버리는 데에서 악마와 같은 쾌감을 맛보는 네로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인가?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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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잔해를 줍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6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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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연상케하는 소설은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허리케인이 지나간 다음날로부터 그 이전 12일을 담고 있다. 흑인 일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순한 재난 소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막내를 출산하면서 세상을 떠난 아내의 빈 자리를 채워가며 사남매를 돌보고 살피는 데에 한계가 있는 클로드. 경비를 지원받아 농구 캠프에 참가해 스카웃 제의를 받고 싶은 랜들에게 동생들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다. 투견 차이나와 강아지들에게 집착하는 스키타. 다섯 식구 중 유일하게 여자이자 터울이 많이 나는 동생을 돌보는 일을 도맡고 엄마 역할까지 해내야하는 에시는 고작 열다섯 살.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어 엄마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는 주니어.  
 







인상적인 부분은 스키타가 출산을 마친 투견 차이나와 그 강아지들을 대하는 태도와 말들은 여느 엄마와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두려워하는 에시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소설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에시의 상황을 알게 된 가족 모두 누구 하나 딸이자 여동생을 향해 화내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스키타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음에도 말없이 에시의 비밀을 지켜주었고, 랜들은 사실을 알았을 때 매니가 보란듯이 에시에게 든든한 오빠가 있다는 것을 단 한 번의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잠깐 놀라기는 했으나 아빠 역시 에시를 걱정했다. 가난하고 제 앞가림하기에도 버거운, 하루하루가 상처와 아픔의 연속이지만 바티스테 가족의 버텀목은 그들 서로다. 


핵가족을 넘어서 1인 가구 시대에 접어들어 '가족의 유대'가 점점 더 희미해져가는 요즘이다. 돈 앞에서는 형제자매끼리도 아귀다툼이 흔한 세태에, 이들처럼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 생사의 기로에서 가족을 향한 사랑,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유대는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진부한 소재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어쩌면 지금 세상에 더욱 필요한 정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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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
맥스 포터 지음, 민승남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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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첫 번역책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터라 그의 작품은 번역 출간하는대로 읽고 있다. 이 책은 세 번째 한글 번역본이다. 



새벽 3시 13분.
돌멩이가 잔뜩 들어 있는 배낭을 메고 집을 빠져나오는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샤이. 


그 야심한 시각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언덕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면서까지 어디로 가는 걸까?
들판에 다다르자 시골의 밤이 이렇게 밝은 줄 몰랐고, 너른 들판은 마치 자신을 깊게 안아주는 듯하다. 걸음을 멈추고 주의를 둘러보니 소년은 갑자기 외롭다고 느낀다. 





 



샤이는 조울증과 불안, 폭력 충동과 죄책감의 반복, 자기파괴와 자기혐오, 환영과 악몽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여기며, 누가 와서 제발 자기 좀 죽여주기를 바라는, 열여섯 살 소년. 


소설은 소년이 죽을 결심으로 대안학교 '라스트 찬스'에서 나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서너 시간을 서술한다. 그 사이사이에 소년이 대안학교에 오게 된 경위를 제3자의 시각에서 보여준다.  


샤이의 엄마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소년이 치료가 필요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의 엄마는 그저 사춘기 방황쯤으로, 친구를 잘못 만나 길을 잃은 탓이라고 믿고 싶다. 주변 사람들은 버릇이 없어서, 천성적으로 거칠어서, 가정 교육이 잘못돼서 등 여러 이유를 갖다 붙인다. 그리고 아픈 자식들은 어느새 부모들의 수치가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정신과적 질병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누구보다 감정 기복과 폭력 충동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환자 본인이다. 감히 그들보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고통스럽다는 말은 하지 말기를. 소설 속 엄마와 의붓아버지는 샤이가 마치 가정을 파괴하려고 드는 포식자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가정' 안에 샤이의 자리는 점점 더 작아진다. 


샤이가 배낭에 잔뜩 집어넣은 돌은 그가 안고 있는 미안함이다. 미안함과 돌의 무게가 비례하는 소년의 배낭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얼마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로 사는 게 지치고, 길고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에 있다고 느끼는 건, 샤이뿐만이 아닐터다. 우리는 각자 서 있는 그 터널에 끝이 있다고 믿으며 일상을 지켜낼 밖에는 도리가 없다. 


모퉁이를 돌면 늘 그 자신이 거기에 있을 거라고 말하는 '라스트 찬스'의 교사 스티브의 말이 감동스러우면서 한편으로 슬픈 까닭은 이 소설이 긍정적으로 꽉 닫힌 엔딩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적 낭만없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그럼에도 한순간 한순간 고군분투하며 살아내는 그들이 포기하지 말고 좀 더 힘을 내주기를, 우리가 좀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깜냥이 커지기를, 간절히 바람하는 마음이 크다. 


중년의 어른인 나에게도 무척 위로가 되는 문장들이 적지 않았다.  




※ 도서지원

넌 아직 너를 몰라. 내 말을 믿어봐.
앞으로 알게 될 거야.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건
여러 계절이 걸리는 일이지. 넌 아직 봄이야.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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