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 을유세계문학전집 116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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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세상은 얼마나 지루한가요! (p440)



 
일단 그동안 읽어왔던 고골의 작품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차>와 <로마>를 제외하면 우크라이나 설화와 민담,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민속적 색채가 가득한, 마치 옛이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다. 여기에 실린 작품집을 읽다보면 고골이 우크라이나 카자크 출신임을 새삼 깨닫게 될 만큼 민족적 정서가 두드러진다. 우리나라의 옛이야기에서도 귀신이나 신령한 동물들이 자주 등장하고 전통적인 권선징악을 다루듯, 이 작품들 역시 악마와 마녀, 마귀 등이 단골로 등장해 위기와 갈등을 조장하고 대부분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처럼 해학적이고 풍자스러운 소동극과 판타지 요소도 있지만, 다소 기괴하고 음울한 이야기들도 있다. 물론 여타 고골의 작품에서 보아왔던 인간의 욕망과 가식과 허위, 나약함과 쓸쓸함, 그리고 염세주의도 볼 수 있다.  








 
시장으로 가는 길에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젊은 두 남녀. 아버지가 교활한 아내에게 휘둘려 딸의 결혼을 반대하자 영악한 꾀를 내어 결혼에 성공한 젊은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남자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자의 아버지가 결혼에 반대하고 폴란드인과 결혼을 강요하자 절망에 빠진 젊은이는 마귀의 꾐에 넘어가 동생을 살해하고 보물을 얻어 결혼에 성공하지만 1년 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섬뜩하고 슬픈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대장장이 화가를 통해 보여지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환상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데다 결말까지 해피엔딩으로써 작가의 염세적인 세계관에서도 사랑을 통한 인간 구원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에서 두 이반의 싸움은 이러한 희극적이고 희망적인 면을 싹 지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욕망과 허위를 걷어내지 않는 한 인간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비관적 세계관을 말하고 있음이 아닐까 한다.


 
권력자의 전형(부정적인 면에서)을 보여주는 촌장은 처제와 내연 관계이면서 아들의 연인까지 가로채려고 하는데, 아들은 이러한 촌장(아버지)를 골탕먹이며 조롱한다.선의를 실행하고자 하는 마을 청년들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촌장과 내연녀는 젊은이들과 대립 관계를 이루는데, 이처럼 선과 악의 대립 구도는 소설 곳곳에서 보여진다. 또한 <무서운 복수>에서의 마지막 반전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갖게 되는 염세주의를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은 신이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이 인간의 복수와 다를 바 없어 우습기도 했다만, 한편으로는 종교가 보여주는 한계 역시 짚어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 작품집에서 이전에 읽어왔던 작품들과 분위기가 가장 비슷한 작품은 <마차>다. 인간의 허세를 마차의 발판을 이용해 상징적으로 표현했는데, <코>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그래도 '코'가 더 좋다). 제일 의외였던 작품은 <로마>다. 마치 에세이 혹은 자전적 청춘 소설같은 느낌의 <로마>는 가장 편안하게 읽었다. 한때 로마를 예찬했다는 고골의 심경이 그대로 투영됐다싶을만큼 아름답게 그려냈다. 




도스토옙프스키와 톨스토이를 한창 읽을 때에는 아카데미에 강의까지 들으며 작가를 파고들곤 했는데, 고골의 작품은 제법 읽는다고 읽었지만 작가에 대해서는 수박 겉핥기 수준이다보니 작품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더하여 카자크(슬라브계) 민족을 비롯해 관련한 민족의 역사와 민족성, 그리고 당시 얽혀있었던 타타르, 터키, 폴란드에 대한 배경을 알고 읽으면 옛이야기 이상의 더 큰 재밌를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아쉬움이 남는다.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는 유대인 혐오, 카톨릭과 정교를 결합시키고 유대인이 가난한 민족을 몰아내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에는 질서가 없다고 자조하는 다닐로(무서운 복수)를 통해 고골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사상과 문학의 연계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종교 서적은 거의 읽지를 않아서).  



작품 사이사이 삶이 지루하다고 말하는 고골이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여왕을 알현하는 자포로지예 사람들이 민족에 대한 차별을 언급할 때 구두를 갖고 싶다는 바쿨라의 천진성에,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며 평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민의 소박함에 있지 않을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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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들 - 미투 이후의 한국, 끝나지 않은 피해와 가해의 투쟁기
이은의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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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대체 언제까지 피해자가 '나는 성범죄를 당하지 않을 주의 의무를 다했음'을, 공포 속에서도 최선의 저항을 하였음'을, '피해를 당한 후에는 피해자답게 행동했음'을 소명해야 하는 걸까. 



성폭력 피해 상담 및 법률 지원을 주로 해 온 변호사인 저자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여러 매체에 기고한 칼럼을 다시 정리해서 묶은 것이다. 가정 폭력, 친족간 성폭력, 데이트 폭력, 사내 성폭력, 낙태죄, 공공기관 내 성추행, 성매매 등 저자 본인이 맡았던 여러 사건 사례와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들이 담겨 있다.  








데이트 폭력 가해자가 재판에서 형을 감경받는 가장 많은 사유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사랑해서 우발적으로 때렸다고 말한 경우다. 한국은 여전히 처벌 여부를 판단할 때 이를 참작한다. 우발적 본능이 아동이나 여성에게서 흔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가해자에게 '우발적'이란 때릴 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때릴 수 있는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저자의 사무실을 찾아오는 의뢰인은 성폭력 피해 신고를 했거나 피해 사실을 말했다가 무고.명예훼손.위증으로 고소당한 피해자들이다. 미투가 사람들의 마음엔 변화를 일으켰을지 모르지만, 사회나 제도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법과 제도는 성폭력 피해자 처지에서 무언가를 해본 제대로 된 경험이 없다. 성폭력 무고의 경계선에 서서 성범죄로 성립하지도 않을 것을 신고하는 피해자 또는 당신은 성폭력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법조인 혹은 피해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문제인가라고 저자는 스스로에게, 우리에게 묻는다.



저자는 법이 약자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기득권의 입장에서 운용되어 왔음을 인정한다. 성관계와 성폭력에서 주장하는 바가 서로 극명한 차이를 보일 때에, 법이 인정하는 성폭력과 일반 피해자들이 처하는 성폭력 상황에는 괴리가 있고, 그 괴리는 피해자들이 겪는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성폭력 '가해자'의 처지를 '함께' 고민한다. 그나마 성범죄와 관련하여 형사재판 판결과는 다른 민사재판 판결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법의 판결이 다르다는 것도 씁쓸한 일이다.  




2020년 'n번방 사건'은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n번방 사건'이 뭐가 그렇게 충격적이냐고 되묻고 싶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수많은 'n번방 사건'이 꾸준히 있어 왔기 때문이다. 사건의 본질을 오도하는 대표적인 범죄가 성범죄다. 사실 디지털 성범죄 대부분이 'n번방 사건'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와 제도가 해야할 일은 긴급한 대안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과 피해자를 위한 제대로 된 개선책임을, 저자는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스텔싱을 처벌할 법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연인이든, 일회성 만남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가 원하지 않는 짓을 일방적 욕구로 자행하는 것은 폭력이다. 도의적인 책임을 현실적이고 법적인 책임으로 부여해야한다는 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현재 형법이 강간죄의 성립 요건으로 '최협의설'을 채택하고 있다.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해야 하고, 이를 완전히 억압하는 수준의 폭행이 이루어져야 강간죄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과연 '사력을 다한 저항'의 기준은 누구 입장의 기준인가. 또한 사법기관이 협박으로 인정하는 해악의 고지는 일반인들이 공포를 느낄만한 극단적인 용어를 구체적으로 사용해야 인정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자신의 인적 사항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워질 수 있음을 납득하지 않는 것이다. 법은 아직도 물리적.사회적 약자인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범죄가 발생하는 맥락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사건 사례를 접할 때마다 답답함을 넘어 분노가 이는 건 쩔 수 없다. 성범죄는 다른 범죄와 달리 객관적 증거가 잘 남지 않는다. 거기다 여전히 '문란'이라는 단어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여성을 향해 낙인을 찍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으나 남성에게는 '능력'이라는 단어로 대체되고, 피해자보다 경제적.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히는 대한민국사회에서 넘어야할 벽을 실감할 때마다 입안이 쓰다. 우리가 사회에서 누리는 작은 평등은 아픔을 겪은 개인들의 고단함에서 비롯된다는 저자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성폭력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성이어도 법은 동등하게 적용된다. 특히 직장 내 성범죄는 성적 문제에 더하여 계급 문제인 경우가 많다. 남성 가해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현실이지만, 여성이 가해자인 경우도 있다. 이 책에서 구성한 사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한 사건들의 피해자를 보면서 대다수의 성폭력 사건은 권력의 소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피해 사실을 쉽게 꺼내놓지 못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피해자 중심의 법률 개정도 필요하지만, 실무에서 시급한 것은 궁극적으로 피해자를 괴롭히는 일(무고죄를 빌미로 한 맞고소)이 가해자에게는 불리한 결과로 이어지는 제도 마련이라고 얘기한다.  




우리는 종종 성폭력 가해자를 두고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가해자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그러나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가해자가,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제일 많이 겪게 되는 입장은 '주변인'이 될 것이다. 이 주변인이 어떠냐에 따라 2차 피해가 발생할 수도, 아니면 사건을 조속히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사건의 방향이 2차 가해로 향한다면 피해자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폭력과 갑질을 감수해야 하는 조직문화가 남으며, 그것은 남은 자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 된다. 피해자를 잡아 주는 손은 피해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저자는 주변인들의 건강한 가치관이 사회 곳곳에서 작동할수록 그동안 이례적인 판결로 여겨졌던 법원의 태도가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다. 법이 세상을 무작정 따라가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과거에 머무른 상태에서 현재를 재단한다면 세상의 인식과 늘 차이가 생길테고, 법의 존재의 이유를 묻게 될지 모른다. 저자는 부끄럽고 불편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 대중의 공분을 당부한다. 공분조차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을테니.



책을 읽으면서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척 하면서 언론 매체가 전달하는 대로 받아들이며 그 이면에 있는 진실을 외면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진정성 있게 이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어떤 주변인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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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프랜즌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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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내세가 있다고 생각해요. (p655)




[논제]

■ 영혼은 육신과 독립적이며 불변이다.

■ 선량함은 지성의 정반대 기능이다. (행위자가 자신의 지성을 활용해 전적으로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했을지도 모르는 행위를 선량한 행동이라고 지명할 수 있을까?)

■ 악을 포용하는 것이 힘을 주는가. (힘의 차이가 위법행위의 심각성에 따라 달라진다)

■ 러스의 딜레마. (프랜시스는 러스가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서 좋아했다. 그녀가 자신의 민낯을 알게 되면 싫어하게 될 것이고, 결국 그녀를 곁에 붙잡아 두는 방법은 자신의 욕정을 숨기고 선한 사람 코스프레를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녀(육체)를 가질 수 없다)







 
소설은 1971년 대림절에서 시작한다. 미국 서부 외곽의 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와해를 통해 1971년을 전후로 한 미국 사회를 통찰했다. 인종차별, 원주민 박해, 베트남 전쟁, 여성주의, 마약과 성적 욕망, 가치관 혼란, 서로를 연민도 신뢰도 하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의 애정 결핍, 인정 욕구, 죄책감 등 시대적 사건을 제외하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을 면밀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을 관통하는 논제는 '도덕성'이다. 이 작품이 상당히 매력적인 이유는, 작가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찬반도, 러스의 외도나 매리언의 과거에 대해서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 결론을 유도하지 않고, 끊임없이 논제를 제기하며 독자로부터 철학적.심리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 이는 이마누엘 칸트의 정의 명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더불어 근원적인 인간 심리에 대한 질문(심리)도 따라온다. 



  


작은 메노파 공동체 집단에서 성장한 러스는 목사로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열등감과 박탈감은 매리언을 만나면서 대리만족으로 전환되고 이는 가정생활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지나치도록 딸을 편애하고 집착하는 걸 넘어서 다른 자식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의 모습을 납득할 수 없었다가 이야기가 진행할수록 알게 되는 사실은, 그에게는 모든이의 주목을 받고 외모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자신을 빛내줄 자식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차별받는 약자의 입장에 서는 사랑과 공동체를 실천하며 정의롭고 선량하며 도덕적인 부목사라는 겉모습 뒤에는 외모를 중요시하고 여성 신도를 욕망하며 자식조차 자기를 빛내줄 도구로 이용하는, 홀로서기에 실패한 나약한 내면이 있다. 이러한 러스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은 곳곳에서 보인다.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신경쓰며 저 혼자 추측하고 단정하고, 타협이나 조율을 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자격지심 등 이러한 모습은 관계의 미숙일 수도 있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부재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러스가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더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아내 모습을 보며 결혼 생활이 비참하다고 말하는 러스는 한때 주체적이며 똑똑하고 자유로웠던 매리언이 현실을 인식하고 살림에 주저앉은 이유가 자신의 가부장적인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과 죄책감을 매리언에게 돌린다. 또한 러스는 앰브로즈와의 관계가 처음 틀어진 책임까지 매리언에게 전가한다. 극도로 불안정한 아들을 모습을 보고도 그저 페리와 엮이지 않고 싶다는 바람만 떠올리는, 심지어 그와중에 프랜시스를 떠올리는 러스는 인간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그야말로 최악이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러스는 마약에 중독된 페리에게 도덕적 결함을 들이미는데, 여성 신도에게 부적절한 욕정을 품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둘 만의 시간을 만들어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치의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앰브로즈가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라는 것에 열등감을 감추고 앰브로즈에게 없는 육체노동의 경험을 내세운다. 러스가 크로스로드 창설에 자부심을 갖고 집착했던 이유는 그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중심에 서있어 본 적 없는 그에게 '중심'이라는 맛을 보게 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중심의 역할을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가 크로스로드의 나바호족 청소년 봄 수련회에 집착하는 것도, 끊임없이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프랜시스에게 깊이 빠져든 것도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내 매리언에게 느꼈던 감정은 대부분 열등감이었기에. 그런데 러스가 성적 욕망에 집착하게 된 것이, 어린 시절 가정 환경으로부터 세뇌되었던 성적 억압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매리언은 자기가 늘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남자에게 상처를 받을 때마다 분노가 있어야할 자리에 죄책감이 들어앉았고, 스스로를 향해 비난의 돌을 던지며 '벌을 받아도 싼' 사람이라고 낙인 찍는다. 분노는 자연스러운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했다는 자체만으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든 매리언. 불륜, 해고, 낙태, 매춘 등 피해자임에도 스스로를 가해자 위치에 놓았던 그녀. 그래서 결혼 후 러스에게 복종에 가까운 순종적인 아내로 살았다. 자기 안의 나쁜 것을 억압하고, 입을 계속 다물고 있음으로써 매일 계속 벌어들이고 있는 인생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진짜 매리언은, 날씬하고, 모든 걸 강렬하게 느끼고, 죄인이고, 배우라고 정의한다. 이는 언니 셜리가 되고 싶었던 매리언의 무의식, 그리고 진짜 모습이라고 믿는 환상이다. 늘 어떤 역할ㅡ순종적인 아내, 상냥한 부목사 사모, 인내심 있는 엄마ㅡ을 해내야 하는 매리언은 분노를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었다. 매리언이 유독 페리에게 애착을 갖는 이유는 똑똑하고 재능이 많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페리에게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러스의 잠정적 외도로 인해 남편에게서 벗어나자 오히려 자신의 욕구에 충실해지며 홀가분함을 느낀다. 그 욕구가 적절한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린시절부터 지속됐던 과거의 불행에 붙잡혀 여전히 내면의 아이가 존재하는 매리언은 유일하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으며 승자의 입장에서 관계했던 브래들리에게 30년이 지나서 다시 집착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프랜시스에게 집착하는 러스의 모습과 닮아있다. 러스는 매리언이 자기 혐오에 빠져서 남만 돌보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는데, 그 말이 과연 매리언에게만 해당될까. 


이 세상 누구도 나보다 외롭지 않다. (p240)




러스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폭력적으로 변한 인간을 공동체에서 치유한다는 나바호족에 짜릿함을 느낀다. 이때부터 러스는 자신이 전지적인 존재, 즉 신(종교)의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착한 일을 하면서 공동체 구성원에게 존경을 받으며 그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사회 집단에서 적응이 어려웠던 러스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능한 작은 공동체가 적합했을테고. 


매리언은 과거의 자신을 셋째 페리에게 투영하지만, 정작 매리언의 전철을 밟는 아이는 베키다. 다른 여자의 남자친구를 뺏았고, 여자 친구와 어서 헤어지라고 압박했으며 이로인해 좋아하는 남자의 앞날에 피해를 줄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끼는 베티의 모습은 외도를 저지른 브래들리가 아닌 그의 아내를 찾아간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매리언과 아주 흡사하다. 또한 매리언은 아들 클렘이 섀런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을 과거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남자들의 행동과 동일시 한다.  


힐데브란트의 가족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은 애정 결핍과 그릇된 애정 방식, 인정 욕구, 뒤섞인 자기 연민과 죄책감, 자아감 결핍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가치와 존재감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찾는다. 가정은 성인이 되어 자립하기 전 사회적 경험을 할 수 있는 통로다. 그런데 힐데브란트 가족, 특히 러스와 매리언은 가족 구성원 누군가에게 경험이 되어 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미성숙한 내면을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은 자식들에게 마음의 한 공간을 내어줄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휘청거리며 돌아온 아이들에게 아무도 없는 불꺼진 집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러스와 매리언이 겪고 있는 감정과 태도는 그들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프랜시스도 불우한 환경에 있는 로니보다 로니에게 베푸는 자신의 모습에 더 집착한다. 좀더 실질적인 도움보다 동정심에 선행을 실천하려는 모습은 자기만족적인 형태로 재포장된 인종차별주의의 또 다른 단면이다. 태너는 로라와 여자 형제나 다름없음에도 약을 먹이고 성관계를 강요했었다. 이처럼 우리는 외적인 측면에 얼마나 현혹당하고 있는지 새삼 돌이켜 볼 일이다.








러스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게 죄책감이냐고 묻는데, 그 자체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자신이 매리언을 외롭게 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결혼을 두고 서로가 희생당했다고 주장하는 러스와 매리언. 이들 가족에게는 오직 자기의 아픔 뿐이다. 페리와 베키는 서로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들은 서로를 알고자 노력한 적이 없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짐작으로 재단할 뿐이다. 베키는 페리에게 동생이니까 더 잘 알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 전에 '네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알아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가족을 알아가는 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다.   


베키가 클렘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성공'이라는 것 역시 제 나름대로 다를 것이고, 이 성공의 성취 또한 저마다 제 각각일터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결과가 어떻든 격려하고 위무할 뿐이다. 가족이란 서로의 관심사를 함께 공유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관계다.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성공'이라는 것 역시 제 나름대로 다를 것이고, 이 성공의 성취 또한 저마다 제 각각일터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결과가 어떻든 격려하고 위무할 뿐이다. 가족이란 서로의 관심사를 함께 공유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관계다.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 출판사 지원도서, 지극히 사적인 리뷰




#조너선프랜즌 #크로스로드 #크로스로드챌린저 챌린지 #독파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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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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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애런데일은 임신 중에 혹은 출생 직후에 자폐를 치료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태어난 마지막 세대다. 같은 세대의 자폐인들은 자신들이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다면 '정상'인으로 살 수 있었을 것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자폐인 루의 시선에서 서술하는데, 그가 바라보는 정상인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의 시선을 하나하나 좇다보면 독자는 어느새 그들에게서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일부분을 볼 수 있다.  



포넘 박사는 탁월한 지적 수준을 갖고 있는 루(자폐인)가 읽을 줄 안다(문해력)는 사실을 모르고, 그가 하는 말은 무의미하고 기계적이며 뜻도 모른 채 중얼거리는 입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루의 정신과 주치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루에게는 '생각'이 없다고 여기니까. 진 크렌쇼는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직원을 부정적인 직원들로 치부하고, 직원의 사고와 불행에 공감하지 못하며, 타인의 인생을 제물삼아 제 욕망만 채우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폐인에게 사랑도 성생활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돈은 마저리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펜싱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심지어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모두 루와 같은 자폐인 때문이라고 분노하며 테러를 감행한다. 사람은 처한  위치나 신분에 따라 다르게 불려진다. 그러나 '정상'인들의 눈에 자폐인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위치에 있든 그냥 자폐인이다. 이들의 모습은 소수자에 대한 지원을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현재의 사람들과 같다.  



그렇다면 루의 편에서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톰과 루시아와 마저리, 회사에서 자폐인의 입장을 대변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올드린은 어떨까? 루는 크렌쇼와 돈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어디를 향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정말 온전히 이타심에 입각해 불의와 폭력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인지를. 물론 그들에 대한 선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루에게 애정이 있음은 분명하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감정에 완벽하게 이입하기 힘들기도 하고. 어쩌면 루가 정상인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일지 모르겠다. 타인의 감정에 대한 이입과 관용적 이치. 그렇지만 우리가 제3자를 향한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이타심인지를 들여다 볼 필요는 있다. 과연 그 분노가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잠재적 피해자 혹은 간접적 피해자인 자신을 위한 것인지.  
 



작가는 의도적으로 '정상'인이라는 용어와 루의 자문을 통해 독자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등장인물 들에 의해 자폐인을 비하하는 내용을 따라가보니 이는 특정 대상이 아닌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이 직면한 고민들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된 생활의 연속, 소통과 공감과 이해와 상대에 대한 측은지심의 부재, 실패의 두려움에 의한 도피,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연애, 선택의 기로  등 우리 모두가 삶의 과정에서 겪는 문제이자 굴곡이다.  



루는 자신이,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를 바라듯, 돈이 비록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두뇌에 칩을 넣어 사회 복귀 훈련을 받은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돈이 공식적인 장애인은 아니지만, 그가 더 장애를 갖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정상화 수술'은 자폐인들이 연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루는 돈의 테러 사건을 겪으면서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깨닫고,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 직장 동료를 초대한다. 그리고 회사와의 협상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에서 스스로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이렇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성장하는 과정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닐까.



캐머런은 크렌쇼가 강요하는 수술을 받겠다고 말한다. 편견어린 시선과 정기적인 정신과 치료,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있는 자기자극적 행동이 자폐인에게만 있는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 고정관념, 익숙해서 서로를 잘 이해하지만 공감력이 부족한 자폐인 사회, 안정성 증명서 없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정상인으로 살고 싶어서. 그것이 비록 나의 본질과 다른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정상화 수술'로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폐증은 자신의 일부라는 루의 말에서 과연 장애의 정체성에 대해 물을 수 밖에 없다.



수술의 결정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다만 '정상'인이든 아니든 어디에도 완벽한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에서 '정상'의 기준은 늘 다수의 기준이었으며 자폐인의 약점이듯 말하는 공감 능력은, '정상'인들 안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크렌쇼 씨를 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또한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생각만큼 예측 가능하지 않은, 변수의 연속이지 않은가. 이 소설의 매력은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심리적 함정을 잘 간파하고 있다. 내가 어느 함정의 구덩이에 빠져있는지 각성하는 것도 읽는 묘미가 될 터다.  




♤ 출판사 지원도서,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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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율리아 에브너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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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극단주의 집단이 어떻게 지지자를 동원하고 어떻게 취약한 개인을 본인들의 네트워크로 유인하는지, 그들의 비전은 무엇이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며, 그들이 가진 사회적 역동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진화하는지 알기 위해 스스로 고양이와 쥐가 되어 10여개의 극단주의 집단에 잠입, 합류했다. 그래서 극단주의 전략과 전술 등 애초에 알고자 했던 바 뿐만 아니라 극단주의자들의 인간적 면모와 저자 본인의 취약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극단주의 운동 집단끼리의 공통점은 별로 없지만 작동 방식은 비슷하다. 집단의 리더들은 안전한 사회적 보호막을 만들어 더 넓은 세계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장려하고, 집단 구성원들은 반反세계화 이념을 세계화하며, 현대의 기술을 이용해 반현대적 비전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극단주의 운동이 갖은 숨겨진 근원에 대해 말한다.   







 




온라인 에코체임버의 등장은 극단주의 운동이 신입 회원을 세뇌시키고 집단 의존성과 집단 가치를 강화하고 내면화시키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릴랜드대학교의 연구원들이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2016년 한 해 동안 발생한 모든 급진화 사례의 90퍼센트가 온라인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영향을 받았음을 발견했다. 소셜미디어는 극단주의자들의 관계 맺기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급진화를 가속화했다.  


저자가 어느 집단에 가입하기 위한 심사는 예상보다 구체화, 조직화, 체계화 되어 있었다. 극단주의 커뮤니티는 내가 책을 읽기 전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극단주의자들에 대해 읽으면서 전반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인정욕구와 자존감의 부재, 외로움과 불안이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것. 그래서 음모론자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이러한 주장들이 정말 먹힌다고?' 싶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즉흥적인 변화에 가장 취약한 것은 사회기반시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정신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처음 의도는 좋았으나 종단에는 악의적으로 활용되는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우리가 신기술이라고 칭송하며 사용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전쟁에서 파생됐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사이버 혁신도 마찬가지다. 국제적인 극단주의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극단주의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디지털 네이티브를 급진화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협력하고 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하나가 되고 틈새 시장을 공략해 지지자들을 끌어모은다. 점점 더 진화된 방식으로 신입 회원을 모으고, 세뇌하고, 사회화시킨다. 그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소셜미디어를 비롯해 사이버 세상 곳곳에 존재하며, 우리는 연령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들의 광고선전물을 실어나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딥페이크'에 대한 단어의 뜻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읽다보니 정말 우려되는 부분이 컸다. 이제는 활자화 된 거짓 기사를 넘어 화면을 바꾸고 연설을 수정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미국의 한 비정부기구는 자사의 텍스트 적용 딥페이크 기술을 오용을 염려해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미 현재의 기술만으로도 극단주의의 파급은 충분히 커질 수 있으며 집단주의를 가속화한다. 저자는 근래의 사례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를 든다. 우리는 여러 소셜미디어를 통해 경계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자유롭게 친구맺기를 하고 다름을 공유할 것 같지만, 실은 알고리즘 덕분(?)에 자신의 취향이나 정치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학습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알면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온라인 컨텐츠에 대한 과잉 검열과 언론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 등이라는 딜레마에 부딪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허점을 극단주의자들은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많은 사회기술적 문제가 악순환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높은 수준의 외로움과 중독, 집단주의는 신기술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화면 안에서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고, 연출된 셀카로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과 경쟁을 하고,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래같은 존재감과 자존감으로 만족하고, 어느 순간부터 화면 속과 현실의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최첨단 기술과 소셜미디어 사용에 능한 극단주의 운동과 싸우려면 그 원인을 사회나 기술 중 하나에서 찾으면 안 된다고, 최근의 기술 혁신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시대성과 약점, 욕망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사회와 기술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지해왔던 내용들이었지만 극단주의에 대해 좀더 구체적이고 면밀하게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누군가 이 책이 도움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들은 의외로,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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