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네 - 2025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
아베 아키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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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하루만에 읽어버린 소설이다. 남동생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이후 하나씩 드러나는 정황들을 통해 우리가 나 자신을 제외한 타인(때로는 자 나신까지)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문체가 수월하게 읽히고,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가오루코와 세쓰나의 케미가 재미를 더한다.  


남동생 하루히코의 죽음과 그의 유언장이 이어준 인연으로 가사 대행 서비스 회사 '카프네'의 무료 봉사에 참여하게 된 가오루코는 어쩌다 세쓰나와 파트너가 되어 가정 방문을 한다.  


홀로 노모를 돌봄하는 중년 남성(혹은 여성), 사별 후 단순 노무직을 전전하며 사춘기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여성, 갓난 쌍둥이의 독박육아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 엄마, 아내가 가출한 후 혼자 두 살난 아들을 양육하다 지쳐버린 남성, 방치된 두 아이만 남은 집, 치매 남편을 돌보는 노부인. 두 사람이 찾아간 가정은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살다보면 노력과 성실로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제 자신을 다치게 한다. 그럴수록 나 자신을, 나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가오루코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치유를 얻는다. 그렇다고 가오루코가 자신보다 불우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대적 위안을 얻었다는 오해는 금물. 오히려 그들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시선을 돌려 다른 일에 집중하고, 진솔한 대화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조금 더 나아진 '나'를 경험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은 사랑만큼 대가를 치르듯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춰 살고, 그로인해 지쳐간다. 성실을 강요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속박하는 세상. 그럼에도 이 고단한 세상에서 의지할 대상은 결국 사람이다. 이 소설의 키워드를 꼽자면 '도움'과 '돌봄'이다. 이 두 가지는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도 포함하며 어느 한쪽에서 한쪽으로의 일방이 아닌 양방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이야기도 이야기만 각각의 인물물이 무척 흥미롭다.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보편적 인물이지만, 그들이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그들만의 이야기를 통해 새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어떤 말 못할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가오루코와 세쓰나. 정말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세쓰나가 염세적이라면 가오루코는 모든 일(심지어 탈선도)에 열정이 넘친다. 세쓰나가 다른 사람의 인정에 관심이 없는 반면, 가오루코에게는 타인의 인정과 쓸모있는 존재라는 자부심이 삶의 동력이 된다. 상대를 위로하는 방식부터, 하다못해 영화 취향까지 극과 극인 두 사람의 유대가 주는 따뜻함은 어느 독자라도 대리만족을 얻을 것이다. 


사실 읽는 내내 세쓰나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퉁명스럽고 냉정한 말투 이면에 가식 없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보살핌을 통한 위로와, 무심한 듯하지만 솔직한 조언과 배려는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오히려 더 와닿는다.  


구성이나 문체 등 여러 면에서 이성과 감성이 조화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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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자 뱀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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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 피에르 르메트르의, 그동안 출간되지 않았던 첫 번째 소설이란다. 갈래는 블랙 코미디를 곁들인 누아르. 머리말에서, 출판을 결정하면서 결점들을 발견해 어느 정도 수정해야 했으나 표현적 구절 몇 문장을 제외하고 처음 집필 그대로의 상태로 출판했다고하니 독자는 작가 스스로 판단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말한, 그야말로 그의 첫 작품을 읽을 기회가 생긴 셈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전혀 없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제 분노에 지나치게 충실한 마틸드는 독자로서 연민 한 조각 생기지 않는 60대 여성 킬러다. 그녀에게는 굳이 살인청부업자를 해야할 만한 사정도, 동정을 유발할 만한 서사도 없다.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해 자신과 비슷한 사회적 계급의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사별 후 노년의 여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자식도, 반려견도, 과거에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도 안중에 없다. 남의 인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상을 죽인다는 것, 그녀에게는 밥을 먹거나 쇼핑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틸드에게 있어서 이 직업은 지루한 일상에 자극을 얻어가는 창구일 뿐이다. 이토록 잔인하고 인간미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살인 기계 같은 인물이 주인공인 소설이 있었나?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 없다. "설마..."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만큼, 소설은 독자의 작은 희망조차 완전히 저버린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이라면 바로 '마틸드' 같은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등장한다(이 장치와 설정도 인상적이다). 


죽임을 당한 어떤 이들도, 그들에게 방아쇠를 당긴 마틸드도 '뱀'이다. 돈, 욕망, 욕정, 자극에 눈이 멀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의치 않고 독기를 뿜어내며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고 부숴버리는 자들, 그들 모두 '뱀'이다. 피해 당사자는 물론 그로 인해 고통받을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안중은, 그들에게는 없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정서적 학대, 보호자를 잃은 아이와 노인, 무참히 밟혀버린 사랑, 방향이 잘못된 복수. 쓰다보니 누구라도 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완독을 하고 리뷰를 써야 하는데, 쓰는 족족 스포일러가 될 것만 같아서 난감하다. 그럼에도, 이 점만은 쓴다. 후반부 두 인물의 숨막히는 대결은 놓칠 수 없는 절정이다. 읽을 예정이라면 천천히 그 긴장감을 음미하며 읽으시기를.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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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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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750년간 이어져 내려온 왕가의 후손이자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아흔두 살 요지 아저씨. 그는 더 이상 장작불을 피우지 않는 것처럼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무만 이행한다면 더는 열정을 불사를 일은 없으리라 여긴다.  


사이사이 드러나는 요지 아저씨의 인생사를 따라가다보면 그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과는 불화가 반복되고, 나름 평온하지만 외로운 말년을 보내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그에게 왕정복고를 꿈꾸는 방문객들이 찾아온다. 그들로 인해 아흔 살이 넘은 노인의 삶은 제대로 꼬인다. 






 
첫문장부터 의미 심장하다. 또한 첫 페이지에 쉼표를 잔뜩 찍어놓은 문장들은 가슴에 박힌다.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임팩트 있는 도입부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소동극 같다. 이런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한다는데 하물며 왕정복고라는 엄청난 대의(?)를 도모하면서 매번 엇박자로 틀어지는 그들의 모습은 코미디처럼 웃음이 난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있는 비관도 낙관도 아닌 공허는, 아무리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사회적 폭력은, 슬프다. 


ㅡ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두 군데가 특히 인상적이다.


마을에 돌아다니는 괴물 같은 개들은 낯선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곧장 떼로 달려들어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말하는 요지 아저씨는 그러한 이유로도 산책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괴물 같은 개'들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아흔 살이 넘은 노인, 가난한 노동자와 무명의 예술인, 그외에도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또는 무관심이라는 가해는 아닐런지.   


(여기는 살짝 스포) 요지 아저씨는 늙은 개 죔레가 죽자 이웃을 통해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얻었다. 그는 새끼 강아지를 데려워 곧장 죽은 죔레의 집 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이 새끼 강아지의 이름 역시 죔레.  이 집에는 33년 동안 많은 개가 있었지만, 모두 이름이 죔레였다. 죔레는 특정 한 마리 개가 아닌 요지 아저씨의 집을 거쳐간 모든 개의 이름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름으로 세대를 이어가는 것. 혹은 개별성을 잃어버린 채 부속품처럼 살다가 교체되듯 사라지는 인간의 숙명을 뜻하는 것. 혹은 의무처럼 삶을 이어가는 공허한 인생을 빗댄 것. 여러 생각이 스쳤는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요지 아저씨가 원한 것은 간단하다. 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다음 왕위 계승자를 지명하고, 계승자에게 계승 사실을 알리는 것, 그리고 평온한 노후, 이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요지 아저씨가 왕정복고와 왕좌에 앉기를 꿈꾸게 된 이유가 단지 추종자들의 부추김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흔 살이 훌쩍 넘은 노년의 끝에 이른 요지 아저씨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가난, 외로움, 단절, 돌봄의 부재 한가운데에 있다. 21세기의 시스템을 따라가기도 버거운 노인에게 제때 연금을 신청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마저도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당하기 일쑤다. 젊은 시절 소원해진 자식과의 관계는 얼어붙을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와 유대를 맺는 유일한 존재는 개, 죔레뿐이다. 그들 둘은 서로에게 거의 절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테다. 자기가 정한 원칙을 지키고,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버티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온 요지 아저씨의 말년이 과연 그에게만 해당하는 일일까.  


ㅡ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인 같다가도 사이사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비판적인 시각과 촌철살인은 오직 돈을 향해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 작금의 세태를 일갈한다. 작가의 작품에서는 정치, 환경 오염, 경제, 신자유주의, 복지와 돌봄, 예술 등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반드시 짚는다(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네 권은 그렇다). 즉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점들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보통의 일상처럼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고 있으니 이러한 것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며 늘 주의를 기울여야함을 당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도착했을 때 동봉된 '편집자의 레터'에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이 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음을 애달프게 깨달았"다고 쓰여 있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작가의 작품들이 난해한 것으로 워낙 유명한데,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문학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독자라면 (가장 최근작이지만) 『죔레는 거기에』, 그리고 『라스트 울프』를 추천한다. 무리없이 읽을 수 있으리라 단언한다. 다만 만연체가 갖는 특성은 감안해야한다.   


횡설수설,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스포를 우려해 줄인다. 300쪽을 넘어서면서부터 계속 울컥했고 눈물도 그렁그렁.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별도의 독서노트에 열심 끄적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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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구두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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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샤는 남편이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제공하지만 언제든 더 젊고 매력적인 여자가 남편을 유혹할까 18년 결혼 생활 내내 긴장을 놓지 못했다. 샘은 실의에 빠져 우울증과 무기력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혼자 생계를 짊어지며 동동거리는 아내에게 미안해하고 자책하지만 극복할 의지는 없이 만사가 비관적인 남편과, 거기에 작정하고 괴롭히는 상사까지 더해져 가슴을 짓누르는 나날의 연속이다.






  
 
가방이 바뀐 두 여성, 니샤와 샘. 가방이 바뀐 것도 모자라 갈수록 일이 꼬이는데, 두 주인공은 단지 차림새가 바뀐 것만으로도 아주 다른 일상을 경험하게 된다.  


재스민의 이타심과 이해심, 앤드리아와 샘의 우정, 줄리애나의 변치 않는 마음, 서로를 향한 연민, 알렉스가 가진 따뜻한 배려와 경청,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연대의식.  


중년은 노년의 끝에 다다른 부모, 자립하기에는 이른 자식, 부부 사이의 단절된 관계, 제 삶을 돌볼 겨를 없이 달려야하는 시기다. 미혹되지 않아서 불혹이라고 하건만 현실 속 우리네 삶이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다해서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에너지가 소진된 채 삶의 고비를 맞은 중년의 그들을 통해 독자는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특히 마지막 백여쪽, 루부탱 회수 작전과 에필로그까지 이어지는 후반부는 웃음과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따스한 코디미다.   


문득, 어르신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사는 게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도 길게 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씀 말이다. 현대판 여성 버전 『왕자와 거지』를 비틀어 놓은 듯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를 구성하고 만들어 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마음 나누기와 사랑이라는 것. 그러니 서로를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랑하기를... . 


푸근하면서 한편으로는 읽는 동안 여과없이(?) 감정을 드러낸 소설이다.
재미있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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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한 페이지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2
에밀 졸라 지음, 이미혜 옮김 / 빛소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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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의 여덟 번째 작품이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열 살된 병약한 딸 잔을 홀로 키우는 이십대 후반의 엘렌. 늦은 시각, 잔의 발작으로 뜻하지 않게 모녀가 세 들어 사는 방의 집주인이자 이웃에 사는 의사 앙리 드베를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 만남이 비극의 시작이다.  








소설에서는 극명하게 대조를 보이는 두 인물이 있다. 모녀 관계인 엘렌과 잔이다.
잔은 오르간 소리에도 감정이 흔들릴만큼 신경질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충동적 성향을 보이고 나아가 때때로 망상 증세까지 나타난다. 이는 그동안 보여졌던 가정 내 폭력과 불안정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안전과 사랑이 결핍된 일련의 마카르가家 인물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아델라이드에서 시작된 유전적 요인도 있겠으나 온전한 가정이 주는 정상성과 따뜻함에 대한 동경, 그리고 엄마를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충돌하는 상황에 따른 환경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잔이 고열과 발작에 시달리면서도 오직 엘렌과 앙리가 옆에 있기를 고집하는 장면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잔을 진료하고 간호하고 돌보는 과정을 보면 세 사람은 마치 한 가족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행복감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은 엘렌으로 읽힌다. 이러한 따뜻한 가정은 잔은 물론 엘렌 역시 꿈꾸는 삶이 아니었을까싶다. 어쩌면 엘렌이 소망했던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엘렌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이타심과 연민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언뜻 집안의 광기가 잔에게만 대물림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엘렌에게도 이와 같은 성향은 곳곳에서 보인다. 차분하고 고요한 성정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예민함과 상대가 원하지 않는 친절을 베풀고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적 분노는 잔 못지 않다. 쥘리에트의 외도를 알게 된 이후 엘렌은 아픈 딸을 돌보고 바느질이나 하며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다시피하는 자신의 처지가 지겹고 화가 난다. 앙리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정당한 명분을 얻었음에도, 상심과 분노가 뒤엉킨 그녀의 감정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앙리와의 사랑때문이라기보다 앙리같은 완벽한 남자(엘렌의 관점에서)를 남편으로 두고도 젊은 남자와 밀회를 즐기는 쥘리에트에 대한 질투에 가깝다고 읽힌다.   


ㅡ 


인상적인 장면은 엘린이 드베를의 집에서 랑보 씨가 밀어주는 그네를 타며 쾌락을 느끼고 흥분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그녀가 한 아이를 키우는 미망인이라는 현실을 벗어나 짧지만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조차도 앙리가 눈앞에 나타나자 서둘러 그만두고 만다. 사실 우리가 어떤 역할,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만 존재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거기에 사랑이란 감정도 예외는 아닌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잔이 엘렌에게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이나 숲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엘렌의 대답은 모두 "모르겠다"이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18개월째 살고 있는 파리라기보다는 스스로조차 알 수 없었던 공허함이 아니었을까. 특히 소설이 결말로 향해가는 지점에서 쥘리에트가 주도하는 장례 준비 과정과 장례식은 한 소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시간이 아닌, 평소 그들 부인네들이 해왔던 이벤트(예를들면 연극이 다과 모임)처럼 묘사되고 있는 장면에서 상실의 고통을 전혀 공감받지 못하는 엘렌의 외로움이 극대화된다고 느꼈다.  


ㅡ 


두 남녀의 아슬아슬한 사랑이야기임에도 그들의 애틋한 사랑보다 더 두드러졌 것은 한 여자의 고독이었다.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여인의 몸부림의 대가는 너무 참혹하다. 안정을 되찾고 지난 1년 동안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는 엘렌을 보고 있자니 영화 『데미지』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특별했다고 믿었던 사랑이 결국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상처와 무의미로 남았을 뿐, 별다를 것 없었다는 뉘앙스를 담은 남자 주인공(제레미 아이언스)의 허무 가득한 자조가 여운을 남겼더랬다. 엘렌 역시 비슷한 감상을 남기는데, 소설이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엘렌의 곁에는 라봉 씨가 있고 소설은 낙관적으로 마무리가 된다는 것.   


가정이 있는 남자를 마음에 품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욕망 속에 스스로를 던져넣고 싶다고 의지를 불태우지만 결국 엘렌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쥘리에트를 차마 놓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엘렌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제2제정 당시 파리의 풍경이나 분위기, 부르주아 사교계의 소소한 단면들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까지 읽었던 에밀 졸라의 작품들 중 가장 부담(?)없이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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