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시체를 묻으러 왔다 김영민 논어 연작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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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읽고 이번 개정판으로 두 번째 읽는데, 역시나 재미있다. 


『논어』는 물론 고전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 『논어』에서 보여지는 공자는 어떠한 인물인지를 흥미롭게 만날 수 있는데, 인문 에세이니만큼  『논어』 전반을 다뤘다기보다는 몇몇 문장 해석을 통해 공자가 살아있던 당시와 현재의 세태와 모순, 그리고 사회 안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동안 『논어』를 연구해왔던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독자가 여러 관점에서 『논어』를 대해야함을 짚는다.






 
 
들어가는 글에서 고전이 유의미한 이유는 변치 않는 근본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 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는 글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전을 통해 타성으로부터 한발 벗어나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 저자는 고전 텍스트를 통해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희망한다고 썼는데 이 역시 크게 공감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텍스트를 잘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텍스트를 잘 읽는다는 것은 문장들 사이의 침묵과 공백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더 감수성이 발달한 이와 함께 꾸준히 텍스트를 읽어나가야 하고, 텍스트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환경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정확히 모르는지 알아야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텍스트를 잘 읽기에는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지난한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한다는 것인데, 30초 영상도 길어 고작 몇 초의 숏폼에 열광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논어』는 공자의 말씀을 단순히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편집자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된 저술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논어는 편집 과정을 통해 매개된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독자들은 제자들의 시선에서 본 공자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논어』에서 발견된 모순은 긴 시간이 흐른 후 공자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어서 사상사 연구는 생애사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앞서 말한 역사적 환경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터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이유에 의해 여러모로 글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으니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를 판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저자는 공자를 '경천동지할 혜안을 가진 고독한 천재라기보다는 자신이 마주한 당대의 문제와 고독한 지성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논어』를 현대 사회의 해결책이나 서구중심주의의 대안으로 설정하기보다는 일단 『논어』를 매개로 해서 텍스트를 공들여 읽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제안한다. 『논어』을 읽을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준비운동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김영민 교수의 <논어 프로젝트> 첫 번째 책이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두 번 읽은 논어. 이 프로젝트를 따라가볼까 고민 중인데 전권을 다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몇 권을 골라 읽어볼 요량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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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 - 나를 짓누르는 삶의 중력을 거슬러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
시몬 베유 지음, 한소희 엮음 / 구텐베르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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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상, 시몬 베유의 글이 읽기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책상이 아닌 삶(생존)의 현장에서 철학을 고민하고 연구한 시몬 베유의 날카롭고 인류애적 통찰은 경험해 볼만한 일이다. 이 책은 시몬 베유의 주요 저작들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발췌해 재구성한 책으로써 시몬 베유의 글에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독자라면 그의 글을 에세이로 형태로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시몬 베유는 우리가 겪는 좌절과 무력감이 개인이 아닌 악순환되는 사회적 병리 현상에 원인이 있음을 말하면서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집단적 힘을 '거대한 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보고 있고, 생존 앞에서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을 수 있으며, 매순간 닥쳐오는 고통과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힘으로 극복하고, 내면을 채워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나 각자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베유는 어떻게 보느냐가 삶 전체를 결정한다고 보았고, 세상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원인은 본질을 가린 '자아'에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단절과 고립으로 이어진다. 그는 우리가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했던 부분을 몇 군데 꼽자면, 먼저 사랑이 감정이 아닌 태도의 문제라고 짚은 대목이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주고 받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는 사랑이 아닌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행위. 베유는 이를 '주의'라고 정의하는데, 그가 말하는 주의는 판단, 충동, 조언, 섣부른 공감이 아닌 판단 없이 들어주고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생각의 멈춤'이다. 시몬 베유가 르노자동차 공장의 켄베이어 벨트에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의 우리는 네모난 화면 앞에서 그것을 배운다. 이러한 지적은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언급되었으나 오히려 '생각 멈춤'은 더 가속화되고 있다.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선생들은 학생의 과제물이 AI 결과물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해야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 그야말로 목표는 있으나 목적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뿌리 중 하나가 '장소'라고 짚은 대목이다. 나는 유년 시절의 집이 남아 있는 사람이 부럽다. 유년 시절의 집을 언제라도 가볼 수 있는 사람. 그럴 수 없다는 데에 나는 종종 결핍을 느낀다. 이는 큰 틀안에서 공동체의 단절, 나아가 공동체 부재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의 고립과 외로움을 키우게 된다. 현재 돌봄이 큰 사회적 이슈인 까닭은 과거와 달리 돌봄의 선순환이 막혀버린 데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ㅡ 


어떤 평가와 판단도 배제된 시선으로 나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기.
세상의 모든 대상을 편견과 차별없이 받아들이기.
시몬 베유가 말하는 자아, 주의, 자유, 객관성, 자연의 질서, 아름다움, 우정, 사랑 등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 책이 비록 시몬 베유의 저작은 아니지만 새삼 느낀 점은 그가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라면 실제의 삶에서는 감히 실행할 수 없을 듯한 일들을 그는 자신 인생으로써 본인의 철학을 증명해내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 개인의 경험을 학문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삶을 따라가자면 그가 쓴 글에 공감할 수밖에 없고, 그 이유는 그의 지성이 현실과 맞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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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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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첫 장에서 바다와 그 주변 여러 민족 및 국가의 역사, 문화, 정치에서 바다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임을 밝힌다. 해양사를 넘어 흑해를 관통하는 문명사를 다룬 이 책은 흑해의 기원과 용어 정의를 시작으로 지리와 생태, 고고학, 정치, 종교, 경제, 문화, 인구 이동, 전쟁, 산업과 인프라 등 다방면으로 흑해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고대, 중세를 지나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간과 반복되는 흥망성쇠의 순간을 순차적으로 서술한다.  
 


 





그가 짚은 대로 흑해는 지중해나 태평양처럼 어떤 이미지나 연상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지중해라고 하면 곧바로 올리브나 지중해 요리, 휴양지를 떠올리는 것과는 달리), 그래서 인접한 지역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역이다. 따라서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흑해 인접 지역의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고대부터 18세기 무렵까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무래도 집중해서 읽게 되는 지점은 근현대 이후다. 19세기에 흑해는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제국이 어떻게 분할될 것인가에 대한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복잡한 경쟁 구도 속에 자리했고, 두 차례 세계대전이 치러지는 동안 유럽 보호령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이후 냉전시대에는 서방의 전위대 역할을 했으며 공산주의가 종식된 시점부터는 불안정한 정치적 전환을 겪는 지역이자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들의 지역이 됐고, 유럽 통합의 기획에서 공백 지대가 됐다.  


저자는 이 책이 약한 국가들의 붕괴로 인한 지역 질서 혼란, 국내 분쟁이 국제 갈등으로 번지는 현실 등 흑해 주변 민족들의 역사와 문화, 정치를 하나로 엮어내고 유럽 동남쪽 변경 지역에 대한 오래된 지적 지도를 되살리려는 시도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민족적 정체성 및 동질성, 바다를 통한 해체와 연결을 유럽과 유러시아를 아우르며 흑해와 인접한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와 전략적 환경 변화에 따른 형성과 소멸을 보여준다.  


읽으면서 이 책이 상당히 공을 들여 면밀하게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독자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용어부터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고, 여러 분야를 아울러 서술하고 있음에도 지칭하는 대상이나 단어를 적확하고 세분화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읽는 내내 전해졌다. 고대부터 서유럽 중심의 서사가 주를 이룬 문헌들을 익숙하게 읽어왔다면 동쪽의 민족과 국가(몽골-타타르, 크림-타타르, 오스만 등)를 중심으로 서술한 책을 읽게 되어 개인적으로 유의미했다.  



저자가 흑해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데에 있어서 강조하는 부분은 구분이 아닌 연결과 연속성이다. 역사상 여러 시점에서 흑해 주변 땅들은 변경 혹은 변방으로 불렸다. 제국이나 국가 사이의 위치로 규정되는 독특한 공동체들의 거점이자, 외부인의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대조점 역할을 해왔던 흑해가 종교 공동체, 언어 집단, 제국, 민족과 국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 온 것임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는 책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흑해와 흑해 연안 국가 및 이웃 지역의 현주소와 당면한 문제점들을 짚으면서 그들뿐 아니라 외부인들 역시 바다가 가진 다양성을 포용하기를 기대하는 저자의 바람이 더 크게 와닿는 까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읽고나니 새삼, 러시아가 왜 그토록 우크라이나를 탐내고 있는지, 그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도 알겠더라. 의도치 않았으나 책을 읽고나니 당면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에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도 재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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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메초
샐리 루니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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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타자에 대한 첫인상이 있다. 독자라면 책을 통한 작가의 첫인상도 있기 마련이다. 성향상 사람이든 책이든 첫인상이 미래의 일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처음 읽은 책에 호감이 가면 즐겨 읽지 않는 주제를 다룬 작품이더라도 그 작가의 글은 가능한 읽어보려고 한다. 나에게 샐리 루니가 이와같은 작가 중 한 명이다.  
 







 
피터와 아이번, 소설은 두 형제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었던 연인과 헤어지고 두 여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피터.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며 외톨이로 사는 게 익숙하고 가족으로부터 여전히 아이 취급을 받는 아이번. 사고 이후 연인의 미래를 위해 이별을 선택한 실비아. 중년을 바라보면서 20대 청년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낯설고 두려운 마거릿.  


지루하고 굳이 살아야할 이유도 방향도 찾지 못하지만 달리 다른 삶을 생각해볼 여력없이 하루하루 지나가버리는 일상. 아내가 떠난 후 묵묵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며 헌신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형제의 갈등을 표면 위로 드러내게 하는 동시에 그들 스스로 자기 삶에 물음표를 놓는 계기가 된다. 



소설 전반에 걸쳐 간결하게 쓰여진 문장은 인물의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세세한 생각의 편린들을 산발적으로 쏟아내듯 서술하고 있는데, 끊임없이 죽음, 삶, 혼란, 사랑, 이별, 욕망, 그리움 사이에서 방황하며 위로와 안정을 갈구하는 인물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된다. 


얼핏 읽으면 마치 아이번만이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처럼 보여지지만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그들 모두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든 혼자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는 정말 혼자가 좋은 걸까? 공을 들여 대화로써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단편적으로 드러난 것을 통해 지레짐작하고 혼자 결론을 내리는 게 시간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더 편리하기 때문 아닐까.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는 오해와 갈등을 쌓는 원인이 된다. 피터와 아이번의 대화는 형제 사이라고 하기에는 지독하리만치 어색하다.  


피터는 죽고싶을 만큼 외롭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해 엉뚱한 곳에서 자극을 찾고 지친다. 마거릿은 다람취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은 일상 중에 아이번과의 설레었던 하룻밤에 대해 누군가와 말하고 싶지만 이런 얘기를 털어놓아도 될만한 사이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그들 모두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을 꺼리고,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다가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말을 삼킨다. 이들 뿐 아니라 나오미, 실비아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나 의도와는 다르게 말하고, 때로는 생각 중 일부를 절사한 상태로 말하다보니 오해가 쌓인다.  


그런데 이런 대화 양상이 소설 밖 현실의 우리에게서 그대로 보여진다. 고정관념, 빗나간(혹은 과잉) 배려, 자존심 등 여러 이유로 우리의 대화는 어긋나기 일쑤다. 진심을 숨기고 쏟아내는 말들. 소설의 후반부에 형제의 말다툼과 폭력에서 피터의 경멸과 혐오과 섞인 말들은 결국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차오르는 분노의 방향은 정작 나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똑같은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소설 속 그들에 세상은 소설 밖 현실과 괴리가 거의 없다. 애증 가득한 가족 관계(부자, 모녀, 형제 등), 같은 업무, 뻔한 반복적 일과. 요즘 '도파민'이라는 단어가 흔하게 쓰이는 까닭도 자극을 찾아 부유하는 피터와 다르지 않으리라.  


읽으면서 그들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고민들이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언제부턴가 소설을 읽으면서 인물들에 나를 대입시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그러한 경험을 했고,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상대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소설적 인물로서 아이번과 마거릿의 관계를, 실비아와 나오미와 피터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적어도 현실에서는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죽음보다는 살아가는 것에 무게를 두기로 한 피터를 보면서 말이다. 




※ 도서지원

한때는 인생이 무언가로 이어져야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은 모든 갈등과 의문이 더 큰 정점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이처럼 정작 충분히 고민 해보지 못한 생각들이 그의 삶을, 그의 성격을 떠받친다. 의미에 대한 비이성적인 집착.(...) 삶은 어떤 조건일 때 견딜 만할까?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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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고백 머묾 세계문학 사랑 3부작
기 드 모파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머묾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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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의 단편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은 때는 아마도 고등학생 시절이었으리라. 사실 그 이후로 모파상의 작품을 단 한 번도 읽지 않았는데,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2,3년 전쯤부터 몇몇 출판사에서 모파상의 단편집을 출간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 번은 꼭 다시 읽어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기회가 닿았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목걸이」 「달빛」을 포함해 열네 편이 수록되어 있다. 주요 테마는 사랑.   


돈 앞에서 사랑은 부서지기 쉬운 모래성 같고, 화려한 상류사회에 대한 분에 넘치는 동경은 비극을 불러온다. 집착이 가진 어리석음, 사랑에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사랑 역시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하며 배려하고 기다려주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봄이 뿜어내는 향기로움에 취해 함부로 사랑을 속단하지 마시라, 때로는 봄의 속임수일 수도 있으니.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걸까, 아니면 그저 연민과 공감과 사랑이 그리웠던 걸까. 전투적인 일상 속에 간간이 찾아오는 축제같은 하루. 뜨거운 태양 만큼 강렬했으나 여름밤의 꿈처럼 끝나버린 격정의 시간이여.  


돈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가족애.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강요되는 관습과 몰이해. 우리 모두  병病, 배신, 돈, 원한, 사건사고, 죽음 등 막연한 미래의 걱정으로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기를.



이번에 모파상 단편들을 읽으면서 내가 왜 그동안 그의 작품을 다시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 모파상을 읽었던 그때의 나는 그가 쓴 사랑과 삶의 깊이, 그리고 문장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경험도 없었다. 아마도 크게 공감하지 못한 채 머릿속에 박힌 당시의 기억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지싶다.   


사랑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들의 사랑 안에서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을 엿본다. 아내의 실수로 잃어버린 목걸이를 사기 위해 엄청난 빚을 지고도 묵묵히 아내의 짐을 나누는 남편이 있는가하면, 돈 앞에서는 형제도 부모도 나몰라라 하는 이들도 있다. 거금의 유산 앞에서 아내의 외도쯤은 눈감아 버리는 남자가 있는가하면,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자는 상실감으로 인해 자신이 죽어가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다. 떳떳하게 살아가는 인생에 직업의 귀천은 없다. 너도나도 찰라의 행복에 기대어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이 짧은 소설들에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파상의 글은 참 귀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다.



요 몇 년 사이에 출간한 모파상 단편집들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은 일단 번역이 부드러워 매끄럽게 읽혀서 좋았고, 행간이 넉넉해서 눈의 피로도가 적은 것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이 단단해서 만족. 온라인 서점으로 검색해보면 '선물하는 문학'이라고 안내를 하고 있는데, 쓰인대로 선물하기에 예쁜 책이다.  




※ 도서지원

누가 알겠는가? 삶이란 얼마나 기이하고 변덕스러운가! 얼마나 사소한 일로 사람을 망치고 구원하는가!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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