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이 750년간 이어져 내려온 왕가의 후손이자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아흔두 살 요지 아저씨. 그는 더 이상 장작불을 피우지 않는 것처럼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무만 이행한다면 더는 열정을 불사를 일은 없으리라 여긴다.  


사이사이 드러나는 요지 아저씨의 인생사를 따라가다보면 그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과는 불화가 반복되고, 나름 평온하지만 외로운 말년을 보내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그에게 왕정복고를 꿈꾸는 방문객들이 찾아온다. 그들로 인해 아흔 살이 넘은 노인의 삶은 제대로 꼬인다. 






 
첫문장부터 의미 심장하다. 또한 첫 페이지에 쉼표를 잔뜩 찍어놓은 문장들은 가슴에 박힌다.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임팩트 있는 도입부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소동극 같다. 이런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한다는데 하물며 왕정복고라는 엄청난 대의(?)를 도모하면서 매번 엇박자로 틀어지는 그들의 모습은 코미디처럼 웃음이 난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있는 비관도 낙관도 아닌 공허는, 아무리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사회적 폭력은, 슬프다. 


ㅡ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두 군데가 특히 인상적이다.


마을에 돌아다니는 괴물 같은 개들은 낯선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곧장 떼로 달려들어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말하는 요지 아저씨는 그러한 이유로도 산책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괴물 같은 개'들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아흔 살이 넘은 노인, 가난한 노동자와 무명의 예술인, 그외에도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또는 무관심이라는 가해는 아닐런지.   


(여기는 살짝 스포) 요지 아저씨는 늙은 개 죔레가 죽자 이웃을 통해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얻었다. 그는 새끼 강아지를 데려워 곧장 죽은 죔레의 집 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이 새끼 강아지의 이름 역시 죔레.  이 집에는 33년 동안 많은 개가 있었지만, 모두 이름이 죔레였다. 죔레는 특정 한 마리 개가 아닌 요지 아저씨의 집을 거쳐간 모든 개의 이름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름으로 세대를 이어가는 것. 혹은 개별성을 잃어버린 채 부속품처럼 살다가 교체되듯 사라지는 인간의 숙명을 뜻하는 것. 혹은 의무처럼 삶을 이어가는 공허한 인생을 빗댄 것. 여러 생각이 스쳤는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요지 아저씨가 원한 것은 간단하다. 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다음 왕위 계승자를 지명하고, 계승자에게 계승 사실을 알리는 것, 그리고 평온한 노후, 이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요지 아저씨가 왕정복고와 왕좌에 앉기를 꿈꾸게 된 이유가 단지 추종자들의 부추김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흔 살이 훌쩍 넘은 노년의 끝에 이른 요지 아저씨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가난, 외로움, 단절, 돌봄의 부재 한가운데에 있다. 21세기의 시스템을 따라가기도 버거운 노인에게 제때 연금을 신청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마저도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당하기 일쑤다. 젊은 시절 소원해진 자식과의 관계는 얼어붙을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와 유대를 맺는 유일한 존재는 개, 죔레뿐이다. 그들 둘은 서로에게 거의 절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테다. 자기가 정한 원칙을 지키고,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버티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온 요지 아저씨의 말년이 과연 그에게만 해당하는 일일까.  


ㅡ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인 같다가도 사이사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비판적인 시각과 촌철살인은 오직 돈을 향해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 작금의 세태를 일갈한다. 작가의 작품에서는 정치, 환경 오염, 경제, 신자유주의, 복지와 돌봄, 예술 등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반드시 짚는다(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네 권은 그렇다). 즉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점들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보통의 일상처럼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고 있으니 이러한 것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며 늘 주의를 기울여야함을 당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도착했을 때 동봉된 '편집자의 레터'에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이 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음을 애달프게 깨달았"다고 쓰여 있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작가의 작품들이 난해한 것으로 워낙 유명한데,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문학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독자라면 (가장 최근작이지만) 『죔레는 거기에』, 그리고 『라스트 울프』를 추천한다. 무리없이 읽을 수 있으리라 단언한다. 다만 만연체가 갖는 특성은 감안해야한다.   


횡설수설,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스포를 우려해 줄인다. 300쪽을 넘어서면서부터 계속 울컥했고 눈물도 그렁그렁.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별도의 독서노트에 열심 끄적이는 중이다.





※ 도서지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구두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니샤는 남편이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제공하지만 언제든 더 젊고 매력적인 여자가 남편을 유혹할까 18년 결혼 생활 내내 긴장을 놓지 못했다. 샘은 실의에 빠져 우울증과 무기력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혼자 생계를 짊어지며 동동거리는 아내에게 미안해하고 자책하지만 극복할 의지는 없이 만사가 비관적인 남편과, 거기에 작정하고 괴롭히는 상사까지 더해져 가슴을 짓누르는 나날의 연속이다.






  
 
가방이 바뀐 두 여성, 니샤와 샘. 가방이 바뀐 것도 모자라 갈수록 일이 꼬이는데, 두 주인공은 단지 차림새가 바뀐 것만으로도 아주 다른 일상을 경험하게 된다.  


재스민의 이타심과 이해심, 앤드리아와 샘의 우정, 줄리애나의 변치 않는 마음, 서로를 향한 연민, 알렉스가 가진 따뜻한 배려와 경청,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연대의식.  


중년은 노년의 끝에 다다른 부모, 자립하기에는 이른 자식, 부부 사이의 단절된 관계, 제 삶을 돌볼 겨를 없이 달려야하는 시기다. 미혹되지 않아서 불혹이라고 하건만 현실 속 우리네 삶이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다해서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에너지가 소진된 채 삶의 고비를 맞은 중년의 그들을 통해 독자는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특히 마지막 백여쪽, 루부탱 회수 작전과 에필로그까지 이어지는 후반부는 웃음과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따스한 코디미다.   


문득, 어르신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사는 게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도 길게 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씀 말이다. 현대판 여성 버전 『왕자와 거지』를 비틀어 놓은 듯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를 구성하고 만들어 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마음 나누기와 사랑이라는 것. 그러니 서로를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랑하기를... . 


푸근하면서 한편으로는 읽는 동안 여과없이(?) 감정을 드러낸 소설이다.
재미있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 도서지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한 페이지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2
에밀 졸라 지음, 이미혜 옮김 / 빛소굴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총서의 여덟 번째 작품이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열 살된 병약한 딸 잔을 홀로 키우는 이십대 후반의 엘렌. 늦은 시각, 잔의 발작으로 뜻하지 않게 모녀가 세 들어 사는 방의 집주인이자 이웃에 사는 의사 앙리 드베를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 만남이 비극의 시작이다.  








소설에서는 극명하게 대조를 보이는 두 인물이 있다. 모녀 관계인 엘렌과 잔이다.
잔은 오르간 소리에도 감정이 흔들릴만큼 신경질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충동적 성향을 보이고 나아가 때때로 망상 증세까지 나타난다. 이는 그동안 보여졌던 가정 내 폭력과 불안정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안전과 사랑이 결핍된 일련의 마카르가家 인물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아델라이드에서 시작된 유전적 요인도 있겠으나 온전한 가정이 주는 정상성과 따뜻함에 대한 동경, 그리고 엄마를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충돌하는 상황에 따른 환경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잔이 고열과 발작에 시달리면서도 오직 엘렌과 앙리가 옆에 있기를 고집하는 장면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잔을 진료하고 간호하고 돌보는 과정을 보면 세 사람은 마치 한 가족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행복감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은 엘렌으로 읽힌다. 이러한 따뜻한 가정은 잔은 물론 엘렌 역시 꿈꾸는 삶이 아니었을까싶다. 어쩌면 엘렌이 소망했던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엘렌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이타심과 연민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언뜻 집안의 광기가 잔에게만 대물림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엘렌에게도 이와 같은 성향은 곳곳에서 보인다. 차분하고 고요한 성정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예민함과 상대가 원하지 않는 친절을 베풀고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적 분노는 잔 못지 않다. 쥘리에트의 외도를 알게 된 이후 엘렌은 아픈 딸을 돌보고 바느질이나 하며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다시피하는 자신의 처지가 지겹고 화가 난다. 앙리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정당한 명분을 얻었음에도, 상심과 분노가 뒤엉킨 그녀의 감정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앙리와의 사랑때문이라기보다 앙리같은 완벽한 남자(엘렌의 관점에서)를 남편으로 두고도 젊은 남자와 밀회를 즐기는 쥘리에트에 대한 질투에 가깝다고 읽힌다.   


ㅡ 


인상적인 장면은 엘린이 드베를의 집에서 랑보 씨가 밀어주는 그네를 타며 쾌락을 느끼고 흥분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그녀가 한 아이를 키우는 미망인이라는 현실을 벗어나 짧지만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조차도 앙리가 눈앞에 나타나자 서둘러 그만두고 만다. 사실 우리가 어떤 역할,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만 존재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거기에 사랑이란 감정도 예외는 아닌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잔이 엘렌에게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이나 숲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엘렌의 대답은 모두 "모르겠다"이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18개월째 살고 있는 파리라기보다는 스스로조차 알 수 없었던 공허함이 아니었을까. 특히 소설이 결말로 향해가는 지점에서 쥘리에트가 주도하는 장례 준비 과정과 장례식은 한 소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시간이 아닌, 평소 그들 부인네들이 해왔던 이벤트(예를들면 연극이 다과 모임)처럼 묘사되고 있는 장면에서 상실의 고통을 전혀 공감받지 못하는 엘렌의 외로움이 극대화된다고 느꼈다.  


ㅡ 


두 남녀의 아슬아슬한 사랑이야기임에도 그들의 애틋한 사랑보다 더 두드러졌 것은 한 여자의 고독이었다.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여인의 몸부림의 대가는 너무 참혹하다. 안정을 되찾고 지난 1년 동안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는 엘렌을 보고 있자니 영화 『데미지』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특별했다고 믿었던 사랑이 결국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상처와 무의미로 남았을 뿐, 별다를 것 없었다는 뉘앙스를 담은 남자 주인공(제레미 아이언스)의 허무 가득한 자조가 여운을 남겼더랬다. 엘렌 역시 비슷한 감상을 남기는데, 소설이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엘렌의 곁에는 라봉 씨가 있고 소설은 낙관적으로 마무리가 된다는 것.   


가정이 있는 남자를 마음에 품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욕망 속에 스스로를 던져넣고 싶다고 의지를 불태우지만 결국 엘렌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쥘리에트를 차마 놓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엘렌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제2제정 당시 파리의 풍경이나 분위기, 부르주아 사교계의 소소한 단면들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까지 읽었던 에밀 졸라의 작품들 중 가장 부담(?)없이 읽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의 시체를 묻으러 왔다 김영민 논어 연작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판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읽고 이번 개정판으로 두 번째 읽는데, 역시나 재미있다. 


『논어』는 물론 고전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 『논어』에서 보여지는 공자는 어떠한 인물인지를 흥미롭게 만날 수 있는데, 인문 에세이니만큼  『논어』 전반을 다뤘다기보다는 몇몇 문장 해석을 통해 공자가 살아있던 당시와 현재의 세태와 모순, 그리고 사회 안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동안 『논어』를 연구해왔던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독자가 여러 관점에서 『논어』를 대해야함을 짚는다.






 
 
들어가는 글에서 고전이 유의미한 이유는 변치 않는 근본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 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는 글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전을 통해 타성으로부터 한발 벗어나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 저자는 고전 텍스트를 통해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희망한다고 썼는데 이 역시 크게 공감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텍스트를 잘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텍스트를 잘 읽는다는 것은 문장들 사이의 침묵과 공백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더 감수성이 발달한 이와 함께 꾸준히 텍스트를 읽어나가야 하고, 텍스트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환경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정확히 모르는지 알아야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텍스트를 잘 읽기에는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지난한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한다는 것인데, 30초 영상도 길어 고작 몇 초의 숏폼에 열광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논어』는 공자의 말씀을 단순히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편집자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된 저술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논어는 편집 과정을 통해 매개된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독자들은 제자들의 시선에서 본 공자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논어』에서 발견된 모순은 긴 시간이 흐른 후 공자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어서 사상사 연구는 생애사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앞서 말한 역사적 환경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터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이유에 의해 여러모로 글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으니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를 판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저자는 공자를 '경천동지할 혜안을 가진 고독한 천재라기보다는 자신이 마주한 당대의 문제와 고독한 지성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논어』를 현대 사회의 해결책이나 서구중심주의의 대안으로 설정하기보다는 일단 『논어』를 매개로 해서 텍스트를 공들여 읽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제안한다. 『논어』을 읽을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준비운동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김영민 교수의 <논어 프로젝트> 첫 번째 책이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두 번 읽은 논어. 이 프로젝트를 따라가볼까 고민 중인데 전권을 다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몇 권을 골라 읽어볼 요량이다.


​ 
 
​#도서지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 - 나를 짓누르는 삶의 중력을 거슬러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
시몬 베유 지음, 한소희 엮음 / 구텐베르크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험상, 시몬 베유의 글이 읽기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책상이 아닌 삶(생존)의 현장에서 철학을 고민하고 연구한 시몬 베유의 날카롭고 인류애적 통찰은 경험해 볼만한 일이다. 이 책은 시몬 베유의 주요 저작들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발췌해 재구성한 책으로써 시몬 베유의 글에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독자라면 그의 글을 에세이로 형태로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시몬 베유는 우리가 겪는 좌절과 무력감이 개인이 아닌 악순환되는 사회적 병리 현상에 원인이 있음을 말하면서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집단적 힘을 '거대한 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보고 있고, 생존 앞에서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을 수 있으며, 매순간 닥쳐오는 고통과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힘으로 극복하고, 내면을 채워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나 각자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베유는 어떻게 보느냐가 삶 전체를 결정한다고 보았고, 세상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원인은 본질을 가린 '자아'에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단절과 고립으로 이어진다. 그는 우리가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했던 부분을 몇 군데 꼽자면, 먼저 사랑이 감정이 아닌 태도의 문제라고 짚은 대목이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주고 받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는 사랑이 아닌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행위. 베유는 이를 '주의'라고 정의하는데, 그가 말하는 주의는 판단, 충동, 조언, 섣부른 공감이 아닌 판단 없이 들어주고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생각의 멈춤'이다. 시몬 베유가 르노자동차 공장의 켄베이어 벨트에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의 우리는 네모난 화면 앞에서 그것을 배운다. 이러한 지적은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언급되었으나 오히려 '생각 멈춤'은 더 가속화되고 있다.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선생들은 학생의 과제물이 AI 결과물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해야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 그야말로 목표는 있으나 목적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뿌리 중 하나가 '장소'라고 짚은 대목이다. 나는 유년 시절의 집이 남아 있는 사람이 부럽다. 유년 시절의 집을 언제라도 가볼 수 있는 사람. 그럴 수 없다는 데에 나는 종종 결핍을 느낀다. 이는 큰 틀안에서 공동체의 단절, 나아가 공동체 부재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의 고립과 외로움을 키우게 된다. 현재 돌봄이 큰 사회적 이슈인 까닭은 과거와 달리 돌봄의 선순환이 막혀버린 데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ㅡ 


어떤 평가와 판단도 배제된 시선으로 나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기.
세상의 모든 대상을 편견과 차별없이 받아들이기.
시몬 베유가 말하는 자아, 주의, 자유, 객관성, 자연의 질서, 아름다움, 우정, 사랑 등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 책이 비록 시몬 베유의 저작은 아니지만 새삼 느낀 점은 그가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라면 실제의 삶에서는 감히 실행할 수 없을 듯한 일들을 그는 자신 인생으로써 본인의 철학을 증명해내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 개인의 경험을 학문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삶을 따라가자면 그가 쓴 글에 공감할 수밖에 없고, 그 이유는 그의 지성이 현실과 맞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 도서지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