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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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여류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하여 찾아보니 우리말 번역본이 출간 되어 있었는데 아직 읽어본 작품이 없다. 초기작이라니 더 읽어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칼비노 작품을 번역한 이현경님의 번역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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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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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부를 읽다보니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도 생각나고, <안나 카레니나>도 떠오른다. 사람 마음이 늘 뜻대로 되는 것도, 이성적이기만 한 것도 아닌지라 선택의 본인의 몫일 터. 나는 독자로서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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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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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10미터 내려온 지하 1층. 120호실에는 시체 한 구가 너부러져 있다. 범인은 지하에 있는 아홉 명 중 한 사람. 





 


예상치 못했던 지진, 산속의 지하, 출입구는 막혔고 비상구까지 가는 통로는 침수 상태라 나갈 방도가 없다. 그들이 방주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스마트폰은 불통이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철골을 제거하고 작은 방의 닻감개를 돌려서 막고 있는 바위를 아래로 떨어뜨리면 된다. 하지만 닻감개를 돌리는 사람은 그 방에 갇히고 만다. 심지어 지진으로 산길도 막혀 방주에서 탈출한들 구조대는 커녕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누가 희생양이 될 것인가. 설상가상으로 침수된 지하 3층의 수위가 높아졌다. 이대로라면 방주는 완전히 수몰될 것이다. 시계바늘은 더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ㅡ 


슈이치를 화자로 하는 1인칭시점인 소설은 야박할 정도로 각 인물들의 개별적 서사나 인물 간 갈등이 부각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건이 벌어진 당장의 상황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을 첫 번째 살해 피해자로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독자의 어설픈 추론을 애초에 용납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결은 고사하고 사건은 더 미궁으로 빠지며 독자는 오리무중에 놓인다.  


시작부터 호러와는 다른 결의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영화 '곤지암'이 떠오르는데, 나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몇 년 전에 읽었던 오승호 작가의 <도덕의 시간>이 떠올랐다.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도덕적 딜레마. 



밀실과 같은 공간에서 살인이 일어났고 범인이 일행 중에 있다면 모두 한 공간에서 감시를 병행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런데 쇼타로의 말처럼 아홉 명은 이와는 정반대로 하고 있다. 슈이치와 쇼타로를 제외하면 모두 방 하나씩을 차지해 각 방을 쓰고 있다. 즉 살인범에게는 더 없이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무기력한 태도로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사고방식이라니.  


희생양을 세우는 데 있어 죄의식을 덜기 위해 살인범에게 닻감개 돌리는 역할을 맡기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살인범이 아닌 무고한 사람을 지하에서 죽게 했다면 그들 자신이 살인범이 되므로 반드시 살인자를 찾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야말로 현실-합리가 아닌가. 살인범을 그들 자신의 목숨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단죄할 권리를 누가 누구에게 부여한 것인지. 더욱이 살인범의 죄는 희생으로 포장되고 말 것이다.


완벽한 근거가 없다면 차라리 모두가 용의자인 게 낫다는 쇼타로의 말, 누군가에게 닻감개를 돌리는 역할을 맡기는 일이 직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만큼이나 잔인하다는 자각, 가족을 정서적 인질로 삼는 저열한 악의 등 소설은 극단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본능과 이성,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순과 딜레마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결정적 전제는, '범인은 왜 구태여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죽을 위기에 있는 비상사태에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이다. 정황상 살인을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니다. 즉 범행의 직접적 동기는 지하 건축물에 갇힌 이후에 생겼다는 것. 위에 썼듯 이 소설은 보여지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점이 독자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 결정적 힌트일지도.


결말에 밝혀질 범인의 실체나 범행 동기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문제의 반전은 그 다음이다. 
독자는 마지막 여섯 장을 위해 삼백 쪽이 넘는 책장을 넘겼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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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뷰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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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돌이켜보면 정적이 제일 기억에 남았다. 함께 치열하게 싸운 뒤 찾아든 평화, 그가 자기 삶으로 끌어들인 사람에 대해 품어야 했던 잘못된 관심들.  

 


 





소설은 두 개의 줄기로 진행된다. 이스트앵글리아의 변두리 마을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줄리언과 과거 UA 요원이었던 플로리안을 추적하는 프록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인물들의 중심에는 에드워드 에이번이 있다. 


반파시스트에 반제국주의 볼셰비키였고, 반베트남전쟁소년단 주모자였으며, 청년공산주의자 연맹에서 정회원으로 활동했던 남자.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한 후 자기 의지로 아버지 나라, 폴란드로 돌아갔던 사람.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대의를 위해 사는 공산주의자. 



잘나가던 증권사를 그만두고 작은 해변 마을에 서점을 연 줄리언 론즐리. 어느날 저녁, 서점에 들어온 노신사 에드워드는 한동안 줄리언을 성가시게 해놓고 정작 책은 사지 않더니 서점의 지하실만 구경하고 나간다. 얼마 후 카페에서 만난 에드워는 뜬금없이 그가 죽은 줄리언의 부친과 동창이라는 말과 함께 서점 지하에 '문화공화국'을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한다. 그러고는 한참이 지나 예고도 없이 다시 서점에 나타나 본격적으로 '문화공화국'에 대한 조언을 하면서 생뚱맞은 부탁 하나를 한다.  


스튜어트 프록터 박사는 국토안보 수장이자 스파이캐처 팀장이다. 그는 토목업자 피어슨이라는 신분으로 어느 군대 기지의 영국 연락장교 지휘관 토드 앞에 앉아 있다. 스튜어트가 이곳에 온 목적은 기술적 사고때문이라는데 토드는 의심스럽다. 진짜 기술적 사고 때문이라고? 


ㅡ 


'실버뷰'는 정보국 최고 요원으로서의 영광을 잊지 않고 뼛속까지 요원이었던 데버라,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채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여왔으나 노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도 삶을 공유할 수 없고, 가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안주하지 못하며, 위로조차 받지 못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현직에서 물러난 스파이들의 뒷모습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튜어트는, 그리고 나도 묻고 싶다. 에드워드, 당신 정체가 뭐냐고, 그동안 그렇게 수많은 인물로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당신의 정체가 도대체 뭐냐고. 당신의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냐고. 그에게 있어 사랑도 신념이었을까.



책에는 존 르 카레의 아들 닉 콘웰의 후기가 실려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은 작가가 꽤 오래 전부터 수정을 반복하며 마감없이 써왔고, 작고할 때까지 미출판 상태로 남아있었다는데, 완독을 하고보니 존 르 카레가 왜 선뜻 출간을 할 수 없었는지 알겠더라는.  


첩보국은 해결책일까, 문제의 원인이었을까?
이는 작가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든 듯 싶다. 


어쩌면 이 소설은 작가 자신에게, 그리고 한 시절 신분을 숨기며 설사 죽음에 이르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신념 하나로 해왔던 그들에 대한 헌사가 아닐런지.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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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마지막 한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2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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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이렇게 분열된 집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네 집이 영원히 화합하지 못하기를, 주춧돌마저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지기를, 네 자식들이 네게 반기를 들기를, 그리고 네가 아주 비참하게 몰락하기를 빈다. 
 






소설은 화자 무어를 시작으로 다 가마ㅡ조고이비 가문의 연대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임팩트 있는 첫문장을 시작으로 저자는 도입부에서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끌어모으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 살만 루슈디는 그야말로 탁월한 경지를 보여준다. 여타 작가들이 숨겨두었다가 중반 이후에 풀어놓을 법한 것들을 도입부에서 이미 공개해 버린다.  


『무어의 마지막 한숨』은 다 가마-조고이비가家 가족사를 얘기한 '무어 연작'을 가리키며, 동시에 바스쿠 미란다가 자신의 작품마다 새겨 넣은 조고이비 일가의 상징적인 그림으로써 그가 붙인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아우로라 조고이비의 '무어 연작'은 1957년부터 1977년까지가 초기이고, 1977년부터 1981년까지의 기간이 성숙기, 무어가 집을 떠난 이후 그의 행적을 묘사한 마지막 '암흑기'로 구분된다. 아우로라의 무어 연작은 가족사뿐 아니라 세계대전 발발 직전부터 20세기말까지 시대의 혼란을 대변하는 것으로 읽혔다.  


다 가마 집안의 몰락은 프란시스쿠 다 가마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ㅡ 


재미있는 설정은 모라이시(무어) 조고이비 가족들의 직업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점인데 아브라함은 사업가(그냥 사업가가 아니다), 아우로라는 예술가, 이나는 섹슈얼리티 연예인, 미니는 수녀, 마이나는 급진파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당시 인도 아대륙의 정치, (지하 경제를 포함한) 경제, 종교, 사회, 군사, 예술, 인도 관점에서의 국제 정세 등을 아울러 그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무어는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으나 조로증을 앓고 있는, 대중의 시선에서는 비정상인으로 그려져 모두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된 인물로서 마치 극장의 관객처럼 시간의 흐름을 관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고이비 가족의 부적절한 관계, 딸과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해야하는 아이러니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조고이비가家에 빗대어 은유하고 있다. 


ㅡ 


유대교도로 키워졌으나 무슬림 혈통을 물려받은 아브라함, 민족주의자 프란시스쿠와 카몽시, 기독교도이며 친영주의자 이피파니아, 사회주의자 혁명가 이사벨라, 아랍인 바스쿠, 카톨릭교도이지만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는 아우로라, 그리고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우파 힌두교도의 행동대원이었던 무어.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무신론 등 종교로 세상을 갈라놓는 건 의미가 없음을 얘기한다. 


이 소설에는 네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첫 번째 공간은 이 소설에 있어서 1세대에 해당하는 프란시스쿠와 이피파니아의 카브랄섬이다. 두 번째 공간은 아우로라가 군림하는 말라바르언덕의 살롱, 세 번째 공간은 카몽시의 공중정원, 네 번째 공간은 바스쿠 미란다가 지은 성채 '리틀 알람브라'다. 특히 조고이비가의 왕국인 엘레판타는 의도적으로 모든 종교적 유대 관계를 거부하는 유일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낙원이며 금단의 열매를 먹으려하는 자는 추방당한다. 반전이라면 이 낙원을 유지하는 자는 알고보면 아우로라가 아니라는 것.  


ㅡ 


작가는 '무어 연작'의 공통 주제는 무어의 비극, 즉 다양성이 통일성 때문에 파멸하는 비극, '여럿'이 '하나'에 패배하는 비극이라고 썼다. 그야말로 인도 아대륙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봄베이가 포르투갈과 영국의 결혼으로 탄생한 사생아라고 표현하면서 봄베이의 폭력과 타락과 퇴폐를 들어 한때 인종, 민족, 신앙에 상관없이 조화롭게 살아온 시절을 언급 한 마디 없이 상기시킨다. 


살만 루슈디는 이피파니아가 집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정 식구들을 끌어들이고, 다시 집안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이사벨라였으며 그녀가 단명하는 설정을 시작으로 소설 곳곳에 이와 같은 장치를 통해 식민 시대, 그리고 외세에 의존해 오히려 분열을 자초했던 역사를 꼬집는다. 또한 겉으로는 신사적이고 인자한 호인의 외형을 갖추었으나 지독한 냉혈한 아브라함과 외로운 아웃사이더에서 점차 폭력과 광기에 휩쓸리는 무어의 대비는 이 소설 전체 인물을 놓고 봤을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설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작가 특유의 유머 안에서 끊임없이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우마는 왜 조고이비가를 이렇게까지 분열시키고 싶어했을까? 그녀는 당시 인도의 분열을 더 극단적으로 조장했던 상징이 아닐런지.  


소설의 마지막.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유대인 혈통의 혼혈 출신 후손으로 평생을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대립하는 인도에서 가톨릭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던, 신이 아닌 부모가 종교였던 모라이시 조고이비는 도대체 어디에 정착했어야 할까.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낙원이며 동시에 지옥이었던 엘레판타뿐이려나. 



혹시 아직 살만 루슈디의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한밤의 아이들>과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연이어 읽어보기를, 그리고 인도의 근현대사를 개괄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읽는다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재미있을 것임을 보탠다.  


"당신한테는 앞으로도 영원히 바깥에만 머물러야 하는 저주를 내리겠어. 이제 안전한 궁전 따위는 없고, 이렇게 정원에서 당신을 기다릴 거야. 끝없이 이어지는 이 바깥에서 당신을 끝까지 뒤좇을 거야. (p486)" 마치 작가 본인의 얘기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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