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삶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3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넌 짐승이야, 파비아누."
"넌 사람이야, 파비아누." 



소설은 소몰이꾼 파비아누 가족이 가뭄을 피해 무작정 길을 나선 데에서 시작한다. 목적지를 향해 계속 가야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은 그동안 살아온, 앞으로 살아갈 파비아누의 삶을 도입부부터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소설은 가뭄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이주민의 애환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층에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으로 인해 불공정과 불의에 익숙해져 체념적 삶을 살아가는 파비아누 가족을 통해 고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당시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파비아누는 카브라(흑인과 백인 혼혈인 물라토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고 남의 땅에 살며 남의 가축을 돌보며 살았다. 백인들 앞에서는 몸을 움츠렸고, 온갖 역경에서 버텨내는 힘은 스스로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짐승이라는 데에 있었다.  


파비아누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줄 몰랐고, 무지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지하기 때문인지 자문한다. 만약 그렇다면 무지한 것이 죄란 말인가? 노예처럼 일하며 살아왔고 거짓없이 성실하게 살았다. 무지한 것이 파비아누의 잘못일까, 그렇지 않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생각의 실타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파비아누는,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가뭄때문에 떠난 피난길에서 파비아누 가족은 살기 위해 키우던 앵무새를 잡아먹었다. 그렇다면 노란 제복의 군인들도 살기 위해서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파비아누를 잡아 가둔 것일까. 정부가, 기득권층이 약자를 핍박하고 차별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 일까? 파비아누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파비아누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제분소 주인인 토마스 씨를 소환한다. 그는 투표권이 있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다. 피난길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파비아누는 자신의 일조차 토마스 씨에게 결정을 부탁했다. 이는 "참아요, 정부에게 얻어맞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라고 외쳤던 파비아누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층의 위치를 잘 드러낸다.  


ㅡ 


소설은 상징과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극대화한다. 특히 한 가정의 가장인 파비아누와 그들이 키우는 강아지 발레이아를 같은 선상에 놓음으로써 독자는 발레이아의 삶을 관조하는데 이는 곧 파비아누의 삶임을 알 수 있다.  


발길질을 당하는 일이 예사인 개 발레이아는 그럴 때마다 도망간다. 때로는 발목을 물어버리고 싶지만,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기에 분노는 금세 사그라든다. 이 모습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의 파비아누와 아주 흡사한 모습이다. 감옥 안에서든 밖에서든 군인을 향한 잔인한 복수를 상상하며 기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억울함을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해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이를 두고 파비아누의 무지를 탓할 수만은 없다. 


또한 술이 들어가자 파비아누는 노란 제복 군인을 만나면 한판 붙기로 결심하고 발로 땅을 차며 소리를 질러대다가도 막상 노란 제복 군인이 나타날 것을 두려워해 가판대 너머로 몸을 숨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도발에 정작 본인 혼자 두려워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한다. 


복종으로 일관했던 지난 삶을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저항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발레이아의 모습 역시 파비아누와 아주 닮았다. 발레이아 삶의 끝을 읽으면서 파비아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비아누가 일방적으로 발레이아의 죽음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농장 주인과 파비아노의 부당한 관계, 그리고 가뭄과 광견병이 불가항력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왜 발레이아의 죽음이 아프게 다가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ㅡ 


이외에도 자신들의 권력과 약자들의 무지를 이용해 약자들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의 억압, 이자와 빚의 악순환으로 증서 없는 노예생활을 이어가야만 하는 소작농과 소몰이꾼, 가난과 천대받는 신분의 대물림, 그리고 교육의 부재를 꼬집는다.  


그들의 메마른 삶이 가뭄때문만이었을까. 
가뭄이 아니더라도 오직 견디고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르게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삶 자체가 가뭄일지도 모른다. 한평생 등이 배기는 나무살 침대에서 잠을 자야하는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등을 아프게 하는 나무살을 제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들. 


큰아이에게 있어서 좋은 장소는 그가 알고 있는 장소, 즉 염소 우리, 축사, 진흙탕, 안뜰, 물가, 푸른 산, 언덕 등 비록 때때로 위험이 있어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세계다. 큰아이에게 좋은 곳인 현실 세계는 언제까지 좋은 곳으로 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인생을 바꿔보고 싶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어 곧바로 체념하고마는 비토리아 어멈의 모습은 안타깝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쁜 기억을 떨쳐버리고 아름다운 것들에 주목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파비아누 가족이 살인적인 가뭄에서 살아남은 건 기적이지만, 그게 전부다. 파비아노가 자신을 억울하게 감옥에 가두고 매질까지 가한 군인에게 복수는 커녕 허리를 굽힌 이유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뼛속까지 새겨진 복종의 습성이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꿈에을 꾼다. 대도시로 가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것이고 부부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21세기의 여느 부모가 그렇듯, 부부는 그 희망으로 매일을 견딜 것이다.  


ㅡ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기후 정의에 대한 자료를 찾던 일이 떠올랐다. 가뭄과 홍수가 극단적으로 오가는 소설 속 브라질의 모습은 현재 기후 변화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이것을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소설에서는 기후 변화가 어떻게 전지구적으로 불평등을 초래하고, 인권 및 생명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너무 잘 나타내고 있다.  


​비만 온다면 씨암소도 돌아오고, 농장의 목동이 될 것이다. 살이 오르고 혈색이 도는 아이들은 뛰어 놀고, 비토리아 어멈은 화려한 치마를 입을 것이며, 소들은 우리를 가득 채우고 카칭가는 완연한 초록빛으로 물들 것이다. 이것이 파비아누가, 그리고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바라는 바다.  



160여쪽에 불과한 소설은 매 페이지마다 밀도감있게 채워져있다. 내용의 무게감과 글 전체에 존재하는 상징성은 웬만한 장편 소설을 능가한다. 작품도, 작가도 최초 번역이라는데 좋은 작가를 알게 됐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픽션으로부터 멀리, 낮으로부터 더 멀리
박대겸 지음 / 호밀밭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SF, 호러, 미스터리, 오컬트, (소위)순문학 등 다양한 장르가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한 사람이 썼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과 정서를 보여주는 소설들은 단행본을 읽듯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매력이 있다.  



우리가 온전히 목마름과 추위를 동반한 고립과 단절에 처했을때 가장 바라는 건 의외로 서로 체온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다. 소설에서 보자면, 극단적인 외로움을 넘어 일상에서 늘 따라오는 반복되는 공포와 두려움은 극심한 난시로 안경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승호(부러진 안경), 이러나 저러나 결국 총을 맞게 되는 남자(글록17)로 대변된다. 또한 사회 안에서 존재감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인의 외로움은 <호세 알프레도를 찾아서>를 비롯해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집단 내 괴롭힘,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 갖는 외로움뿐 아니라 당면한 삶을 주어진대로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길을 잃거나 반복되는 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 우리에게 고독은 늘 곁에 있다.  







 
소설에는 서술자 시점이 있다. 대부분 1인칭과 3인칭으로 쓰여지는데 사실 2인칭 시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2인칭 소설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적어도 내가 읽은 2인칭 소설은 다른 서술자 시점보다 독자의 긴장감이 길게 이어진다. 이 책에 실린 <빛의 암호> 역시 그렇다. 특히 독자가 등장인물의 '수첩'과 '죽음'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고 자신했을 때 그 수첩을 '너'에게 건넨 이유가 따로 있음을, 그리고 그의 죽음에 다른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너'라고 불리는 2인칭 시점 장치는 읽고 있는 내 마음을 더 묵직하게 눌렀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그런데 책에 실린 각각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가해지는 두려움이나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어있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대면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글록17>의 주인공이다. 부조리한 선택을 강요받으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도, 막상 도망갈 기회가 주어져도 차마 도망가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매순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희망적이다가도 비관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위와 체념이 오가는 소설들은 우리가 살면서 처하고 느꼈을, 적어도 한두 번은 겪었을 법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과 감정들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나비의 속도>에서 말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에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 발열이 우리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이듯 쉼에  대한 욕구 역시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DNA에 새겨진 생존본능 중 하나가 아닐까.  



소설에서 좋았던 부분 중 하나는 거리에 대한 서술이다. 몇몇 작품('부러진 안경' '그날 있었던 일' '시간의 유속' 등)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현 위치와 이동하면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독자가 인물과 함께 그곳에 있다는 현장감을 주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특히 우리나라 소설이다보니 알고 있는 지역이나 지명이 나오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때때로 카프카적이고, 때때로 카를로스 푸엔테스 같은 느낌.  




오랜만에 눈에 훅 들어오는 우리나라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
종종 근래에 나온 한국 단편들 중에는 소재나 전달하는 메시지, 심지어 정서적인 부분까지 너무 흡사해 읽고난 후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뒤표지에 보면 '소설이 가진 힘을 믿는 새로운 정직성의 출현'이라는 문구가 있다. 동의하는 바다. 단편임에도 장편같은 힘을 가진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 출판사 지원도서

싸우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생명체들. 먹기 위해 싸우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싸우고, 때론 자연과 싸울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그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싸우기도 하고, 어떨 때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살고 싶어서 싸우기도 하지. 그도 아니면 그저 싸우고 싶어서 싸우기도 하고. - P17

이 남자는 왜 내 대답 같은 건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걸까.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계속 이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내가 그냥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까. - P1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보고 "잭 런던이 쓴 느와르(혹은 스릴러)라고?" 이런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 나의 착각이었다. 암살, 청부살인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소재를 데려와 윤리의 딜레마와 사회 이념 및 철학적 의도를 가진 소설이다.  


꿈을 꾸며 이론만 늘어놓고 분노만 쏟아낼 뿐 어떤 성과도 이룩하지 못한 채 실질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날선 비판은 마치 작가가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내뱉는 말처럼 들린다.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암살국 수장, 암살자 조직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가졌던 자가 (임시) 수장이 되어 조직을 운영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암살을 지목한 사람이 연인의 아버지이며 이제는 필사적으로 구해야하는 사람이 조직의 설립자라는 부조리. 이렇듯 소설은 처음부터 모순과 딜레마를 툭 던져놓는다.  


잭 런던은 일정 부분 자신을 투영하고 더 나아가 로망했던ㅡ돈 걱정 없는 부유한 사회주의자ㅡ모습을 덧붙여 윈터 홀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던 잭 런던의 한계는 암살국 조직원들이 대부분 학자, 교육자, 언론인 등 지성인 집단이라는 설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의구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으며 무자비하게 살인을 저지르면서 그것이 곧  도덕성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에 빠진 자들이 사회의 기득권층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질적 근심없이 사유와 도덕이 지배하는 고결한 집단. 그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그 계층에 진입하고 싶어했던 작가가 열망한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독자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가', '상식에서 벗어난 약속도 지켜져야 하는가', '원시사회에서부터 진화한 인간에게 도덕 의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등 몇 가지 윤리적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아마 잭 런던은 인문학적(혹은 철학적) 차원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기보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자로 살면서 본인이 가졌던 이중적 모습(신념과 동경)을 반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윈터 홀은 암살국이 옳은 기관인지의 여부와 그들이 갖는 명분의 정당성에 대해 따지지만, 설령 정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들에게 그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볼 문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결말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독자는 그들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어느새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잭 런던은 걸핏하면 철학적 딜레마에 빠져 자기들끼리 논쟁을 주고받는 이 못말리는 고지식하고 고집불통 지성인 집단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단단하게 내려서 원칙과 신념이 존재하는 사회를 희망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스스로에게 바라는 소망을 담은 것이었을까.   


윈터 홀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자기모순ㅡ계약이 만료되어 그루냐의 결혼식을 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결국 자기가 살아남는다면 그가 세운 암살국의 완벽한 시스템의 부정否定이 된다ㅡ에 괴로워하는 드라고밀로프의 모습 역시 잭 런던의 한 단면이지싶다(그런데 사실 소설의 결말은 잭 런던이 쓰지 않았다. 물론 그가 의도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쓰다보니 스스로를 '생각하는 기계'라고 칭하며 인생을 살지 못했다고 말하는 드라고밀로프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 각자 나름의 성공적인 경제 성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참 열심히 사는데 어째 삶의 생동감은 크지 않다. 이러한 드라고의 회한 아닌 회한은 소설의 맥락과 조금 동떨어져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끝내 마무리를 하지 못했던 작가의 당시 심경이 이와같지 않았을까, 나 나름대로 짐작해본다. ( 꽤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쩐지 내용 자체보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등장인물들을 설정했을지에 더 마음이 쓰였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단단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그의 바람이 다 담겨있는 듯 느껴졌다.   


책을 덮으면서 상상해본다.
호놀룰루의 어느 섬에 모여 현실적으로 영양가 하나 없는 그 열띤 논쟁을 벌이는 유쾌한 그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웃고 있을 젊은 홀과 그루냐를.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먼 곳에서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칸이다."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스웨덴인 호칸의 이야기다. 모험소설 같다는 점에서 미국 버전 '신드밧드 모험'이라고 해야할까. 혹은 예상치 않은 곳에 던져져 살아남아야했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 같기도 하고. 하지만 호칸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결의 삶의 경이가 있다.  


가난한 소작농인 아버지는 주인 몰래 빼돌린 말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 두 아들을 미국으로 보낸다. 형제애가 남달리 돈독했던 두 형제는 서로를 의지 삼아 배에 오르고, 뉴욕행 배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서로를 잃어버린다. 뉴욕행 배만 찾으면 형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아메리카'로 향한다는 말만 듣고 올라 탄 배에서 호칸은 뭔가 잘못됐음을 인지한다.  

 

 




호칸의 세계는 복잡하지 않다. 존중과 사랑을 주고 받는 데에 물리적인 계산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고 판단한다.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수치와 부끄러움과 도리를 알기에 손을 내밀고 거둬야하는 순간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사랑과 고통이 동시에 수반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닌 상대의 평온을 우위에 둔다.  


호칸은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인간의 탐욕과 포악, 침략과 약탈, 폭력성, 비열함, 이기심, 반면에 헬렌과 로리머와 에이서를 통해 사랑과 우정, 존중과 이해, 생명이 갖는 개별성의 존중과 자연을 통한 존재의 방법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때는 침묵으로의 침잠과 깊은 고독의 순간이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육체의 신성함, 생生과 사死로 엮인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과의 연대.  



소설은 독자를 광활한 초원과 사막 한가운데로 끌어와 호칸의 고독에 동참시킨다. 어린 시절에 건너온 뒤 일평생을 '아메리카'에서 보냈지만 여전히 어린애처럼 단답형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호칸의 언어에는 거짓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독자는 호칸을 사랑하게 된다. 


​고향으로 향하는 여정의 첫걸음부터 그 여정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수반될지, 독자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그를, 지지하게 된다. 



이 소설은 개척시대 이방인으로서 끝내 동화하지 못한 채 사막과 초원의 건조한 바람처럼 부유하는 한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의 사유다. 독자는 이을 통해 인간이 갖는 윤리적 철학을 통찰할 수 있다. 호칸이 지나쳐갔던 수많은 감정과 행위들. 두려움, 자괴감, 수치, 부끄러움, 무기력, 무감정, 무의미, 이질감, 자처한 고립과 단절,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공포, 평온, 소생. 아마도 누구나 살면서 반복적으로 겪는 것들일테다.  


우리는 이 반복되는 과정의 침묵과 고독을 통해 스스로를 고찰하는 과정을 거치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대받은 여자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5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2의 성 이전에 쓰인 소설로 알고 있는데, 작가의 어떤 생각이 제2의 성으로 이어졌을지도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