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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44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0월
평점 :
이 소설은 말테 브리게라는 스물여덟 살 청년을 1인칭 화자 '나'로 내세운 수기 형식의 소설이다. 그는 파리에 온 지 고작 몇 개월에 지나지 않았고 글을 쓴다. 소설은 말테 브리게가 파리에서의 생활 및 지인 혹은 처음 보는 사람과 사물과 장소 들을 관찰하고 느낀 감정이나 생각, 유년 시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삶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고뇌, 그리고 여러 문헌 속 인물과 작가 들 및 화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사유를, 그야말로 수기처럼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서술하고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말테는 낯선 환경에서의 하루 하루가 두렵다. 혹여 병이라도 걸린다면, 의미없이 허송세월로 시간을 흘려버린다면... . 그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제 무언가를 시작할 참이고 그 무언가란 글쓰기다. 그래서 말태는 열심히 관찰하고, 떠올린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준비된 삶을 살고 준비된 순서에 맞춰 죽음을 맞는다. 사람들은 개개인의 죽음에 관심이 없다. 그토록 훌륭한 시설에서 맞는 수많은 죽음은 마치 대량으로 치뤄지는 행사같다. 자기만의 죽음을 갖겠다는 소망은 이제는 점점 더 진귀해지고 있다.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쓰여진다고 말한다. 이 경험이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말한다. 또한 경험과 기억이 많아지면 잊을 줄도 알아야 하고, 잊혀진 기억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이 가슴 싶이 내재될 때에야 비로소 시구의 첫마디가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테는 인류는 여러 면에서 진보를 이루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표면에 머물러 있는 것을 개탄하면서 자신은 최후까지 글을 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인생에는 늘 장애물이 있다. 어쩌면 불운한 한 번의 경험으로 인해 아직 생기지 않은 장애물을 앞서 걱정하며 살기도 한다. 그래서 불안하고 누군가를 의심하게 되어 옷깃을 바짝 잡아당긴다. 어디에도 안정은 보장되지 않으며, 어디든 고통은 늘 주변에 존재함을, 말테는 새삼 깨닫는다.
관습적으로 형성된 익숙한 것들, 상식적인 수준과 약속된 경계 안에서 요령을 터득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겉으로 보기에는 간결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가면들을 바꿔쓸 줄 알아야 한다. 반복적으로 가면을 바꿔 쓰다보면 애초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잃어버리고 만다. 만약 예측하지 못한 세계로 뛰어드는 일탈을 저지르면 경계 대상이 되기 일쑤다. 여러 관찰과 간접 경험을 하면서 말테는 말한다. 사람의 가치는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며, 분명한 것은 존재성이다.
화자는 많은 이들이 앞선 두려움이 스스로를 더욱 불운하게 만들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놓는 다짐처럼 타인의 평가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파고 들어 고독 안에서 삶을 고찰하라는 의미일테다. 릴케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존재'라고 읽혔다. 그는 글 곳곳에 '존재'에 방점을 찍는다. 신이든, 인간이든, 사물이든, 쓸모가 있든 없든, 사랑을 받든 받지 않든,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소설 속 말테는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빗대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상에 대한 소박한 소망, 글쓰기에 대한 열망, 삶의 신비, 생의 사이마다 간간이 찾아오는 상실과 과거의 기억, 고독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사랑, 아직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리고 그 끝에는 존재의 뿌리를 내려 내면을 다지고 시련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야함을 역설한다.
이 소설이 릴케의 자전적 소설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져 작가 연보를 찾아보니 그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나이가 스물아홉 살. 딱 말테의 그 무렵 나이다. 릴케가 그 시절, 얼마나 치열하게 삶과 사랑과 죽음과 고독과 존재에 대해 고뇌하고 방황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기 아닌 수기인 이 작품을 읽다보면 그의 번민이 과연 청춘의 전유물이겠나, 라는 생각이 든다. 릴케가 말테의 입을 벌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지금 내가 나에게 던지는 중이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