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을유세계문학전집 14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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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그중 일곱 편은 처음 읽는다.
작가의 박학다식이 한껏 드러난 소설들. 이야기를 여러 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통해 분석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는데, 독자가 의심의 여지를 가질 필요 없이 기승전결이 분명하다. 


관습 혹은 관례에 묶여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는 사고의 유연성 부재. 남녀노소, 다양한 민족과 직업이 혼재하는 사회 안에서 수많은 이유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갖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고독. 유전병 남매를 자멸의 길로 이끈 고립과 단절. 여과없이 보여주는 인간의 폭력성. 가장 두려워해야할 자기의 양심. 집착에 이른 사랑의 광기. 죽음을 불사한 사랑.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삶을 잠식당하는 인간들. 과유불급過猶不及과 인과응보因果應報.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은 인간의 다양성과 사회의 부조리를 고딕소설로 아주 잘 그려내고 있다. 여성 학대와 차별,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고정관념과 폭력, 의심과 시기와 탐욕, 사기술에 가까운 처세가 능력으로 인정되는 세태 등 사회적 문제들은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가 이어지는 한 사라지지 않을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애절하게 쓰여 있다.  


지금 세태에 굳이 따지자면 장르소설에 가까운 그의 작품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호불호 없이 읽히는 이유는 아마 넓은 스펙트럼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이야기의 힘에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거의 모든 소설이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독자는 이야기에 훨씬 더 이입하게 된다. 특히 소설을 마무리하는 문장에 있어서 포만큼 재치있는 작가가 있을까싶다. 


재미있다.
앨런 포의 지적인 위트에 빠져보시길. 





※ 도서지원

슬픈 우리 인간 세계는 이성의 냉정한 눈으로 보아도 지옥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모든 동굴을 탐험해도 무사한 카라티스가 아니다. 아아! 암울한 무덤의 공포를 모두 공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프라시아브 왕이 오쿠스강을 따라 항해할 때 동행했던 악마들처럼, 그 공포는 잠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포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 공포가 잠자게 내버려두어야만 한다. 아니면 우리가 멸망할 것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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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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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천재 글렌 굴드와 그의 천재성에 열패감을 느끼며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포기한 두 친구 이야기. 


음악과 예술가로서의 본질에 대한 고뇌,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진정성, 연주자로서의 성공과 실패, 완벽과 최고에 대한 집착, 최고가 아니면 아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아집. 여기에 가르치는 학생이 자신을 뛰어넘는 꼴을 보지 못하고 젊은 음악도들을 망쳐놓는 무책임한 교수와 돈과 지위만 밝히는 무식한 예술가들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대부분의 문장을 '~, 난 생각했다'로 끝맺음을 한다는 점이다. 확인되지 않은 것들을 사실처럼 서술하고는 마지막에 자기의 생각이라고 선을 긋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백의 형태로 서술되는 소설에서, 독자가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은 거의 없다. 그저 그의 생각일 뿐이다.   


글렌은 승자, 베르트하이머와 자신은 패자라고 생각하는 화자 '나'. 
그는 자기와 베르트하이머가 글렌과 만나지만 않았다면, 호로비츠의 제자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대가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또한 자기가 피아노를 계속했다면 글렌 때문에 최고는 되지 못했을지언정 최상급에는 속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리고 그것이 예술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몰락한 자'로 전락시킬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화자 '나'는, 자기는 애당초 피아노 대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면서 죽음조차 선망의 대상이었던 글렌의 죽음 이후 자살한 베르트하이머를 동정한다. 그러나 정작 글렌에게 집착하는 자는 '나'다. 결국 '몰락한 자'는 자살한 베르트하이머라기보다 친구를 빌어 비겁하게 자기 합리화를 늘어놓고 있는 '나'라고, '난 생각했다'(화자를 따라해봤다).



그들이 '몰락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천재적 재능이 없어서도 아니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보잘 것 없게 만들고,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남탓으로 돌리거나 실패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기보다는 명분을 만들어 핑계를 대는 데 급급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제 삶을 의심하며 패배감에 익숙해져 버린 데에 있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목적 없이 목표만 좇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는 게 숨가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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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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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소설이 실린 소설집은 시의성 면에서 이보다 더 탁월할 수 있을까싶을 정도로 현 세태를 풍자적으로, 밀도있게 다루고 있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소소하지만 적지 않은 장치와 상황 들, 그리고 묘한 딜레마는 독자를 공감과 이입 속으로 충분히 끌어 당기고 있다.  









보이는 것으로 전체를 재단하는 세상, 본인의 생각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세상, 예의까지는 바랄 것도 없이 최소한의 에티켓조차 지키지 않는 익명의 세상. 타인과의 안전거리, 상대를 이해해야 하는 부담, 일탈이나 돌발 상황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것들의 강박과 불안, 우울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갖는 열패감. 더 나아가 극단의 경쟁 사회에서 연속된 실패의 책임을 늘 자신에게 돌리고 마는 가슴 아픈 현실들.   


호기심과 질문이 사라진 교실, '친한' 사이가 되어야만 하는 이들, 대중 예술과 정치, 선한 영향력, '잘' 산다는 것의 기준, 일방적 주장과 경청 없는 논쟁보다 우선되어야 할 대화, 한 방향의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는 쌍방향의 '통通'. 


작가는 이처럼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현실에 직면한 고충들을 해학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독자가 생각해야할 바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근래에 읽은 단편들 중에 단연 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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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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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언어)를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 


제목과 저자를 알려주지 않은 채 소설의 일부만 읽어도 단박에 한강 작가의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작가의 색깔이 강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유년시절부터 상실과 가까운 존재의 죽음을 경험하고 자신의 일부를 잃어가면서 이미지와 꿈과 상상의 세계를 마주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잃은 그들의 슬픔이 처연하다. 그렇게 절망의 끝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빛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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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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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복간을 기다려왔던 에세이집이다.  


언어와 사물, 사람의 정체성과 근원에 대한 상상력의 깊이와 범위가 남다른 작가. 우리가 미처 생각치 못한 언어적 상상력. 거기에 더해진 경험은 (문학과 번역, 읽기와 쓰기를 포함한) 언어뿐 아니라 문자, 몸의 감각, 역사, 신화, 철학, 생물, 민속, 예술, 지리를 넘나들며 아우른다.  


3부에 해당하는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을 읽노라면 독자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의 소설들로 이어진다. 특히 『Hiruko 3부작』은 작가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유해왔던 많은 것들을 담아낸 소설이었음을, 이 에세이를 통해 짐작케한다.   





 



여행 일기를 여행 중에 쓰지 않고, 여행이 끝난 후 지어낸 이야기라고 고백하는 그의 일기는 가족에 대한 회상이자 그들의 이상향을 추억하는 판타지 소설처럼 읽힌다. 사물의 의인화, 그 사물을 통해 새로운 세계(언어)에 진입하는 과정, 그와 반대로 사람을 낱개의 글자로 관찰하는 모습 등 다와다 요코의 글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조금 낯설 수도 있겠으나 이내 그만의 세계에 매료될 것이다.  


단어에 씌어진 고정관념이나 오해.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왜곡된 민족주의와 편협한 사대주의.
익숙해지고 내재화되면 하나의 사고​思考나 틀에 갇히게 되는 보편적 모습들.  


나는 종종 다와다 요코야말로 코즈모폴리턴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언어를 관찰하는 것에서 이를 구현하고 있다. 읽다보면 사유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 도서지원

 

모어에서는 단어들이 사람과 꼭 붙어 있어서 도대체 언어에 대한 유희를 하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모어에서는 생각이 단어에 너무 꼭 들러붙어 있어서 단어나 생각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가 없다. 외국어를 쓸 때는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같은 것을 갖게 된다. 이 제거기는 서로 바짝 붙어 있는 것과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모두 뗴어놓는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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