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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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한바탕 소동으로 10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 애나를 떠올리는 사이 바움가트너.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활기 넘치는 애나는 케이프 코드의 파도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가 파도와 마주쳐 등이 부러져 죽었다. 







여러 등장인물의 삶의 이력을 통해 본 각 세대의 시대상과 젊은 시절의 초상을 작가 특유의 다정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죽은 아내를 놓지 못했던 노교수의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고, 부모들의 삶에 대한 기억 등 독자는 아내 애나의 글과 그 글들을 정리하는 바움가트너를 통해 누구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폴 오스터는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역사 즉 관계와 의존, 상실과 외로움, 제 삶을 살아낸 후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앙헬 플로레스의 손가락 절단 사건은 바움가트너가 10년 전 아내를 잃은 상실과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내가 떠난 후 몇 달 동안 의식이 분열된 자신의 모습은 플로레스가 겪을지도 모를 환지통과 같은 선상에 있는데, 바움가트너 역시 애나가 죽은 후 여섯 달 동안 그녀에 대한 '환지통'을 경험했다. 그 여섯 달 동안 바움가트너는 방향 감각을 상살한 채 비합리적인 충동에 휘둘리고 흔들리며 지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몇 권의 책을 이어서 써냈다. 다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우정을 쌓으며 때로는 다른 여자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오히려 애나의 죽음 이후 훨씬 더 생산성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애나를 사랑했던 내면 한 부분을 영혼의 깊은 곳에 영원히 죽은 채로 묻어둔 것이었음을, 그는 불에 타 쪼개져벼린 냄비를 보고 깨닫는다. 바움가트너는 환지통의 궁극적인 치료법은 없다고 말한다. 폴 오스터는 인생이란 곡절마다 겪는 환지통을 완화해가며 살아가는 일임을 말한다고 읽혔다. 그렇다면 환지통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까. 



기억과 애도, 그리고 연결됨.
소설 후반부가 인상적이다. 대학 후배인 톰은 바움가트너에게 애나의 시로 논문을 쓰고 싶다는 젊은 여성 비어트릭스 코언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이후 바움가트너와 비어트릭스는 이메일을 통해 우정에 가까운 관계가 되고 애나와 똑닮은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게 된다. 또한 비어트릭스의 방문을 대비해 정원을 손질하는 데에 소설 첫 부분에 등장했던 검침원 에드의 재등장까지, 이는 폴 오스터가 소설 내내 썼던 '연결됨'을 아주 잘 보여주는 설정이다. 사람과 사람,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기억과 상실 등 인생 전반에 있어 거의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없이 고립된다면 우리는 살아갈 힘을 잃는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떠올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J 씨, M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들. 특히 바움가트너의 어머니에 대한 서술을 따라가자니 자연스레 은섬 씨의 삶이 겹쳐졌다. 물론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주변 인들물과의 관계 방식도 다르지만 1900년대를 지나온 이들의 삶과 그들 스스로 부여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에는 분명 비슷한 정서들이 있다. 나는 제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이들에게 늘 감동을 받는다.   



가제본 책을 받았을 때는 아직 정식 출간 전이었다. 
내용적으로 구구절절 쓰고 싶은 얘기들이 많지만 출간 이후 읽을 독자들을 위해 남은 이야기들은 별도의 독서노트에 써둔다. 삶을 관조하는 따뜻하고 다정한 폴 오스터의 시선이 훈훈하게 들어오는 소설이다.  


가히, 그의 아름다운 마지막 소설이라 하겠다.



※ 가제본 도서지원   

외로움은 사람을 죽여요, 주디스. 그건 사람의 모든 부분을 한 덩어리씩 먹어 치우다 마침내 온몸을 삼켜 버려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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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란 미래의 문학 11
데이비드 R. 번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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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체'된 인간의 땅 모데란에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 미래소설이다. 이 책의 초판은 1969년,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064년으로 짐작된다.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그리 먼 미래는 아니라서 더 섬뜩한 부분들이 있다.  


총 4부로 나뉘어진 소설은 모데란을 배경으로 하는 연작소설로 읽힌다. 1부가 '10번 성채'를 통해 모데란 세계에 대해 개괄적으로 서술했다면, 2부에서 4부는 모데란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는 신금속 인간들의 생활상을 비롯해 모데란에 진입하지 못한 올데란과 여성이 강제 이주된 하얀 마녀 계곡 등 성채 주인을 중심으로 종말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1부가 다소 어둡고 무거운 면이 있는데에 반해 다른 장章들은 풍자와 해학을 통해 모데란의 모순적인 모습을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핵전쟁으로 지구는 오염되고 인간 세계는 지옥으로 변했다. 9개월이라는 대수술을 받고 모데란을 지켜줄 10번 성채의 신금속 인간의 등장, 그가 위대한 운명을 선택받은 자 '나', 이 책의 서술자다. 


지구 표면은 플라스틱으로 뒤덮여 있고, 오직 전쟁과 쾌락만이 유일한 행위인 모데란 세계관에서 인간의 정신, 선의, 예의, 사랑, 꿈은 거짓된 개념일 뿐이다. 그리고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만사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신금속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위대한 운명을 선택받은 지도자가 되기에는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바로 슬쩍슬쩍 비어져나오는 '웃음'이다. 심지어 꿈까지 꾸고 종종 농담까지 한다. 위대한 신금속 인간에게 웃음, 꿈, 유머는 적절한 덕목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인상적인 점들이 꽤 많이 보인다. 예를 들면 성채 주인의 독백에 가까운 서술들(특히 2,3부)이 상당히 시적이다. 전쟁과 쾌락만이 남은 세상에서도, 인간의 인체가 모두 금속으로 바뀐 세상에서도, 성채 주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이들, 꽃, 새, 우정, 미소, 질투 같은 존재들이다. 이런 점들이 역설적으로 읽힌다. 그리고 모데란 종말 이후 살아남은 성채 주인의 회고는 우스우면서도 씁쓸하기 짝이 없다. 살아남은 신금속 인간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1에이커의 토양이다. 하지만 플라스틱 아래 묻혀버린 토양을 복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전쟁을 그만두지 않는다. 이는 실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보도블럭으로 뒤덮인 세상이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모데란과 큰 차이가 있을까? 또한 전쟁의 폐해에 대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세계는 아직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ㅡ 


의미 없는 갈등과 전쟁, 생태계 파괴, 과도한 과학기술에의 의존, 로봇의 출현과 인간 관계의 단절 및 고립, 사회적 약자 차별, 엘리트주의와 산업주의 팽배 등 소설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들을 압축적으로 꼬집는다.   


모데란이 추구하는 목표는 두 가지, 영원한 삶과 내면의 진정한 악덕을 체현하는 것이다. 모데란에서 생기는 오염은 플라스틱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최고의 신금속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꿈을 꾸지 않는다, 웃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신을 거부하면서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며 사유를 거부하면서 사색의 시간을 갖고 스스로 만들어낸 양심의 출현에 공포를 느끼는, 모순적인 존재다.  


꽤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고 『모데란』까지 오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키워드는 '접촉'이다. 그 많은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기저에 두는 것은 접촉을 터부시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 외 생명체와 인간 등 디스토피아 세계의 지도자들은 인간과 생명을 고립시킨다. 이를 달리 얘기하면 인간이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궁극적인 계기는 타자와의 관계(접촉)이다. 이것이 가능해야 도덕과 양심도 지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주의를 들어 타자를 차단하고 가상의 세계에 만족하며 이것이야말로 신인류라고 착각하는 지금,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발적으로 디스토피아 세상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다. 마치 10번 성채 '나'처럼. 디스토피아 소설에서나 있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거라고 콧방귀를 내뱉을 수만은 없다. 소설에서는 2025년 오늘의 모습이 아주 많이 보인다. 특히 깊은 방에 홀로 틀어박혀 있는 모습이.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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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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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편의 노벨레, 설화, 서평, 비평, 에세이 등이 실려있다. 그중에는 사후 출간했거나 미완성작도 있다. 크게 3부로 나뉘는 이 책의 매력은 다양한 벤야민의 글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은 독일 출신의 유대계 철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이고,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1부 꿈과 몽상>은 벤야민의 아포리즘 모음집 『일방통행로』를 떠올리게 한다. 「꿈」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이야기 속 화자가 꾼 꿈에 대한 이야기다. 나치를 피해 파리로 망명, 다시 나치에게 쫓겨 급기에 자살에 이른 벤야민에게 '꿈'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가 탐구했던 신비주의와 초현실주의가 꿈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2부 여행>은 벤야민이 여행자로서 또는 이방인으로서의 시각에서 쓴 에세이가 다수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꼽아본다. 나의 심리적 태도와 내가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타자와의 거리 등이 관계의 양상에 미치는 영향. 열등감과 자기비하에 치여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 꿈을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 혹은 본능 등이었다. 벤야민의 글에는 사는 동안 수시로 찾아오는 위기와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행복했던 기억과 그리움임이라고 말한다.  


ㅡ 


「꿈 1」을 비롯한 1930년 이후에 집필한 글들은 당시 그가 처한 상황과 심경을 잘 보여준다. 특히 1933년 나치를 피해 파리로 망명한 벤야민이 쓴 글에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벤야민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와 문화에 대해 사유한다. 
언어(혹은 언어적 행위)의 모호함.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언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들어 「숨기고 있던 이야기」에서 짝사랑하는 여대생과 한 기차에 탄 남자 대학생. 그는 선뜻 아는 체를 하지 못하다가 그녀의 트렁크를 들어주는 차장의 손길에 질투심을 느껴 차장으로부터 그녀의 트렁크를 빼앗듯 낚아 채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 주었는데, 정작 여대생은 그를 짐꾼 취급이다. 여기서 알 수 없는 것은 남자가 여자한테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여자는 정말 그를 짐꾼으로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짐꾼이 아닌 줄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독자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어떤 비극적 순간에도 제 욕망에 충실한 인간의 원초적 성질. 
문자가 인간의 삶에 남긴 흔적들. 
거짓과 사실. 거짓은 발화發話됨으로써 존재하고, 거짓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신뢰는 상대적이다.
이처럼 세상, 세상 안에 있는 수많은 것들, 그리고 자아. 이들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찰. 



<3부 놀이와 교육론>에서는 벤야민의 비판이 유독 날카롭다.
그는 잘못된 교육 방식이 아이들의 재능을 사장시킨다고 말한다. 획일적이고 주입식 교육, 특히 특정 사상이나 이념의 강요는 아이들의 창의력에 가장 큰 독임을 지적하면서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놀이'임을 강조한다. 또한 동화를 비롯한 여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체들이 폭력과 학대를 선善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식민주의식 사고와 물질우선주의를 미화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독일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라고 일갈한다. 그는 철학적 농담과 언어 유희를 이용한 딜레마와 역설, 발명과 이름 붙이기, 유머 등 창의성 말살에 가까운 현대 사회의 교육을 향해 유니크하게 충고한다.  


ㅡ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머리를 스친 생각은, 삶을 살아가는 혜안은 차곡차곡 쌓여진 경험과 성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이비사에서 만난 낚시꾼 오브라이언은 '매듭 짓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그물의 매듭이 아닌 인생의 매듭으로 읽혔다. 그리고 간혹 지나가듯 말하는 은섬 씨의 한 마디는 여느 철학자 못지 않다. 이 짧은 글들을 통해서 벤야민은 경험과 사유의 공유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누구의 경험도, 어떤 이의 서사도 하찮은 것이 없음을, 그는 이야기하고 있다. 



매 작품의 앞에 실린 파울 클레의 그림들은 마치 마스킹테이프처럼 글의 분위기를 더해주는데, 본문의 내용과 묘하게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특히 대분류로 나뉜 각 부의 제목에 실린 그림들( 1부의 「여자와 짐승」, 2부의 「힐터핑엔 지방」, 3부의 「춤추는 꼭두각시」)은 해당 하는 본문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도 든다. 어느 분이 이 그림을 선별하고 각 단편마다 매칭시켰는지 알 수 없으나 칭찬드린다. 덕분에 파울 클레의 화집을 찾아보는 중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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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 체인지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8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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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일명 '호르몬 체인징'이라는 수술을 통해 호르몬을 제공하는 사람의 나이로 몸을 되돌릴 수 있다는 설정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노화에 대한 이야기같지만 이를 현실에 대입하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나는 수술을 받지 않고 자연의 순리대로 노화를 체감하며 살아가는 70대 여성이다. 그녀가 견디기 힘든 것은 늙어가는 신체가 아니라 수술 받은 친구들이 이십대로 돌아가는 바람에 외톨이 신세가 된 외로움이었다. 이제 노인이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동물원 원숭이와 다름없는 볼거리가 되고 만다. 소설의 내용에 따르면 호르몬 체인징은 엄청난 재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비싼 수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셀러(호르몬 제공자)의 남은 인생의 경제적 책임까지 모두 감당해야 한다. 이 말은 수술을 받지 않고 자연스레 늙어가는 노인은 외모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는 순리대로 살다가 늙어 죽겠소"를 외치며 소신대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짐작할 수 있듯이 셀러는 열이면 열, 가난한 사람들이다. 목숨을 담보로 거액을 받는 일이니 다급하게 돈을 필요로 하거나 오랜 시간 가난에 억눌린 이들이 선택한다. 대기업의 하청 시스템, 산재, 임금체불, 자립 청년, 청년 가장 등 복지의 사각 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요원하다. 소설에는 건강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많아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돈이 많아 생명을 연장하지만 한 번도 건강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빈자의 건강을 부러워한다. 누가 더 불행의 크기가 큰 지를 내기하듯 넋두리를 쏟아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록 이분법적 비교이기는 하지만 다른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 지 궁금해졌다.  


소설에서 호르몬 체인징을 주선하는 회사는 합법을 위장해 불법으로 매칭을 시킨다. 법적으로는 제공자가 사망해야 호르몬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에(살아 있는 사람의 호르몬을 제공받는 건 불법이다. 이에 대해 매매와 기증에 대한 언급은 없다), 회사는 셀러에게 먼저 사망신고를 하게끔 한다. 그리고 소설 후반부에서는 호르몬 체인징을 매칭시키는 회사에서 셀러의 수가 줄어들자 팀장 한 명이 셀러의 연령대를 낮추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자 부장은 "유레카"를 외칠 기세로 반긴다. 당연히 불법이다. 이 장면은 마치 멀쩡하게 생긴 고학력자 인텔리들이 그럴듯한 회의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장기 밀매 회의를 하는 것처럼 읽힌다. 미성년자를 돈으로 유혹해 사망신고를 하게 만들고 법망을 피해 호르몬 매매를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인 것 같지만, 글쎄... 누가 알겠는가. 지금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장담할 일은 아니다. 



나는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봤다. 노화와 죽음이 없는 우리 사회. 정확히 말하면 죽음이 드러나지 않는 사회. 돈이 있는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의 호르몬을 제공받아 젊어진다. 가난한 청년들은 셀러로 인생의 하향곡선을 그으며 벌집의 여왕벌처럼 숨만 붙어 있는 채 정기적으로 수술을 받는다. 이를 통해 큰 돈을 벌어봐야 밖으로 나갈 기운이 없으니 쓸 데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불현듯 노동 인구에 대한 책 『일 할 사람이 사라진다』가 생각났다. 몸은 젊어졌으나 재력이 넘쳐나니 신체가 젊어진 노인은 일을 하지 않는다(일을 할 필요가 없다). 인류 종말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예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호르몬을 공유한 바이어와 셀러가 일심은 아니더라도 동체라는 점이다. 바이어의 수술 이후의 삶은 전적으로 호르몬을 제공한 셀러에게 달렸다. 셀러의 신체에 문제가 생기면 바이어도 그에 준하는 수준에 부작용을 겪는다. 셀러가 죽으면 바이어 역시 짧은 시일 내에 죽는다. 즉 자기 몸이면서도 자기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호르몬 체인징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서술한다. 당연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세상 아닌가.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도 이 수술을 받고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의 서사가 궁금해졌다.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셀러다. 그들 중 바이어(호르몬을 제공받아 수술한 사람)는 두 사람인데, 소설 앞부분에서 잠깐 등장하는 민재준은 한나의 젊은 시절 친구다. 만약 한나가 과거의 친구였던 민재준을 알아봤다면 그녀의 선택이 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의 마지막, 윤희는 나이들 권리를 달라고 외친다.
우리 사회는 노화를 혐오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넘쳐나는 안티 에이징 화장품이나 기구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고 남는다(솔직히 나도 가끔 하나쯤은 사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어려보인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고, 60대 연예인이 20대 몸매를 유지한다는 게 기사로 나오는 세상이다. 피부가 늘어지고 주름이 생기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다. 우리는 늙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젊어지기 위한 불로초가 아니라 늙어도 괜찮다는 위로, 열심히 살아왔다는 인정, 세대 간 서로를 적이라 여기지 않는 시스템 구축일 것이다.  


다각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 소설이다. 
이러한 글을 쓰고도 아이크림을 바르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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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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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성폭력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미투운동, 성소수자, 외모지향주의, 현대인의 고독 등을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서술한다. 특히 그들의 소통 방식이 시종일관 이메일이라는 점, 그리고 팬데믹에 의한 거리두기와 봉쇄로 인해 서로 거의 대면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개개인의 정서적.물리적 고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스카가 쓴 메일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린 말은, "가지가지한다"였다. 그는 한마디로 종합세트다. 직장 내 성추행, 알코올 및 마약 중독 등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데다가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들은 가관이다. 조에를 열렬히 좋아하고 그녀와 연인 관계가 되고 싶어 끈질기게 치근덕거린 건 사실이지만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한 적은 없었다고 항변한다. 특히 그 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고, 조에가 불쾌해할만한 일이라면 가볍게(?!) 억지로 그녀의 입에 입맞춤한 정도가 전부라고 말하면서 그것도 술기운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오히려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백인 남성의 화신이 되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면서 덫에 걸린거라고 억울해 한다. 한마디로 자신은 여자나 후리는 난봉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스카의 오랜 지인인 프랑수아즈는 모든 강간범이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고 대꾸한다. 즉 오스카가 아주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 대부분의 성범죄자들이 따르는 수순이자 핑계라는 것이다. 그가 유년 시절부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지만 거의 공감하기 어렵다. 



작가는 현실 속 성폭력 현장을 가상의 이십대 여성 조에를 통해 서술한다. 세상은 여성의 성적 욕구를 억압하며 족쇄를 채우고, 여성의 성욕을 부정하기 위해 성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 점에 대해 '투우장에 끌려온 황소나 다름 없다(p35)'고 쓰는데, 이 부분을 읽다보면 많은 독자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레베카의 말들 중에서 크게 동감하는 부분은 '교육'이다. 레베카는 근본적인 원인을 교육의 문제에 두고 있다. 당연시 여겨지는 모성애, 대등하지 못한 성적 관계, 여성의 정숙함, 희생자에게 씌어지는 가해자 프레임, 사회적 살인의 용인, 부지불식간의 남성우월주의, 강요된 행복 등 대부분 일상이나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스라이팅에 가깝게 학습되어진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모든 젠더에게. 페미니스트를 향한 비난을 쏟아내는 이들은 비단 남성뿐만이 아니다. 기성 세대 여성들은 조에가 겪은 일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고 다들 잘 넘겨왔으니 유난 떨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은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오스카가 자신의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상대가 레베카라는 사실은 의외다. 레베카 역시 전적으로 조에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입장이고, 오스카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따박따박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레베카에게 지속적으로 이메일을 보낸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공감이 아닐까싶다. 레베카는 처음에는 굉장히 분노하지만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약 중독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오스카에게 공감의 메시지를 보내고, 진심어린 충고(와 경고도 함께)를 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와 같은 '대화'가 아닐까. 사실을 인지하고, 제대로 알지 못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해법을 의논하고, 때때로 상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릴지라도 끊임없이 상호이해가 가능한 길을 모색하는 과정을 함께 얘기해야하는 것. 그래서 조에처럼 메아리만 울리는 일방적 외침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것. 자신 유약한 인간일뿐이라고 말하는 레베카가 오스카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충고는 젠더와 계급을 넘어서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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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금은 노출의 시대다. 그만큼 위험은 더 커진다. 더 자극적인 노출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사생활 보호를 외치는 이 역설적이고 기괴한 사회 현상. 레베카와 오스카, 두 사람 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한다. 폭력 중독, 권력 중독, 차별 중독, 분노 중독, 학벌 중독, 성공 중독, 외모 중독, 자극 중독, 혐오 중독.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수많은 중독에 노출되어 있고 의심없이 흡수하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이성을 잃어버린 중독의 시대. 



조에는 성범죄자의 이름이 공공연하게 알려질 때, 그를 법정에 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집단적으로 책임을 묻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방관하는 자, 침묵하는 자, 그들이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사과하고 개선될 수 있도록, 그래서 반성하지 않고 개선하지 않는 자들은 집단 내에서 몰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소설에서 정말 안타까운 점은, 오스카는 자신이 조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끝까지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한하는 것이다. 다만 레베카와의 대화를 통해 하나하나 복기하면서 서서히(너무 느리게) 자신이 개자식이었음을 깨달아가는데, 그마저도 반성하는 자신을 착한 남자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며 일상의 안정을 찾아간다.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며 여전히 투쟁 중인 피해자 조에와 자신을 꽤 괜찮은 남자라고 자위하는 가해자 오스카. 이러한 대비에서 오는 씁쓸함은 소설이 아닌 현실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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