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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나이 ㅣ 환상문학전집 38
안드루스 키비래흐크 지음, 서진석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평점 :
동물, 유인원과 언어 및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고대 설화에서 보여지는 세계관을 상징하는 숲과 기독교 문명 세계를 상징하는 마을로 나뉘는 소설은 석기시대 - 청동기 및 철기 시대 - 중세 시대를 한 차원에 배치한다.

레메트는 숲이 아닌 마을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에게 숲에서 나와 마을에서 살자고 한 사람은 아버지였고, 가족은 모두 마을로 옮겨갔으나 어머니는 마을 생활을 싫어했다. 그녀는 작물과 빵처럼 가공식품(혹은 식재료)을 쓰레기라고 말했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새로운 시대의 사람이라면 암울한 숲이 아닌 밝은 태양과 하늘 아래 마을에 사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아버지는 언어와 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이를 터득해 나가는 스스로를 뿌듯해 한다. 그와 동시에 숲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뱀의 말', 즉 숲의 언어는 잊었고 그로인해 그는 마치 숲에게 대가를 치르듯 죽임을 당한다. 또한 어머니가 밀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노동을 두고 '여름 내내 시커먼 개미'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버지는 숲에서 열매를 따고 사냥을 하는 행위에 대해 '거지같은 삶'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시작에 해당하는 이 대목은 현대 사회에서 노동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바라보는 시선에 닿아 있으며, 문명과 생태의 공존과 조화 측면에서 고찰해볼만하다. 이러한 점은 이후 요하네스와 레메트가 뱀 인츠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데, 뱀을 친구라고 주장하는 레메트에게 뱀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며 꼬챙이로 인츠를 죽이러 달려드는 요하네스를 보면서 엘크의 옆구리를 꼬챙이로 찔러 죽이는 숲 사람, 즉 자신들을 떠올리며 당황해한다.
그리고 유인원은 마을 사람들보다 오히려 동물을 죽이고 철을 갈취하며 마을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제 삶의 방식만 옳다고 여기는 외곬의 숲 사람들 생활방식을 더 비판하는데에서 유인원들이 보다 더 훨씬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 인간 외 생물을 지배할 대상으로 삼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와 유사한 관점은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래메트가 마을에 내려갔다가 우연찮게 요하네스가 소를 치료하는 과정을 목도하게 되는데, 요하네스는 소를 치료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소의 고통은 외면한다. 이를 지켜본 레메트는 차라리 소를 죽여 고통을 줄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다만 요하네스는 소를 자산으로서 접근했다면 레메트는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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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진행할수록 눈여겨 볼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레메트의 어릴 적 친구인 패르텔을 꼽을 수 있다. 숲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마을로 이사를 간 패르텔의 가족. 그가 마을에서 소위 기독교 문명 사회에 적응하고 동화되면서(과하게 말하면 세뇌 당한듯한) 한때 자신이 살았던 숲의 생활을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낮잡아 말하는 패르텔이 변화하는 과정은 눈에 띈다. 더불어 숲과 땅,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을 사랑하지만 세상과 고립된 채 숲에서 평생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레메트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이에 대해 비판의 시선보다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말하고자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숲에서의 삶을 고집하는 집단 안에서도 광신적이고 왜곡된 사람은 존재한다. 탐베트나 윌가스는 자연과 숲에서 찾아야할 본질보다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구습만을 폭력적으로 고집한다. 어쪄면 숲 공동체의 쇠락은 시대의 흐름뿐 아니라 이와같은 사람들에 의해 더 가속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에는 유의미한 상황들이 많이 보인다.
엘크 고기를 물 건너온 포도주와 함꼐 마시는 최초의 결혼식이 된 레메트와 히에의 결혼식. (하느님을 포함한)영적인 존재를 신봉하면서 그 안에 인간의 안위는 존재하지 않는, 그럼에도 끝없이 구원을 믿으며 집착하는 인간의 광기. 같은 시각에 마을과 숲에서 동시에 일어난 죽음. 자발적으로 철창에 갇혀 인간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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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문명의 공존과 조화 차원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살메와 믐미, 그리고 유인원 부부다. 인간 살매와 곰 믐미가 결혼했고,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족의 형태다. 그리고 유인원 부부 역시 모두가 도살당하다시피 죽어가는 숲에서 살아남는데, 그들은 숲의 사람들이 동물을 강압적으로 사육하고 도륙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품었던 이들이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숲의 생물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처럼 마을 역시 폐허가 되었다.
이처럼 지배와 피지배 구도가 아닌 수평적 관계의 상생이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하는 지향점임을 말하고 있는듯 하다. 소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에 물음표를 놓는다. 인간이라면 과연 '살아있기만 한 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 사회에 동화하지 못하고 고립된 삶이 진정한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삼촌 보텔레는 사람들이 뱀의 말은 잊은데다 뱀의 말을 배우는 것이 어려워서 마을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하네스는 숲의 삶이 원시적이고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삶이다. 뱀의 말을 배우것만큼이나 문명 세계에 맞춰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과거 속에 살고 있는 그들과 그들 세계에서 마지막 존재인 레메트. 집안의 마지막 남자, 숲의 마지막 남자, 히에의 마지막 남자, 마을의 마지막 이교도, 뱀의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존재.
끝으로 숲의 사람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북녘 개구리가 있는 곳, 그리고 그곳의 상징성. 이는 보고 느끼고 깨닫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이해했다. 쓰다보니 어떻게 '살고 있다'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이 '인간다운 삶'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헛헛하고 쓸쓸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새롭게 열리는 세상에서 조용하고 무미건조하게 썩어 가는 나의 지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부질없었다. 갑자기 비참해진 미래가 눈 앞에 펼쳐졌다.(중략) 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마을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밭을 갈고 빵을 먹으로 살아야 할까? 난 그곳에 살기 싫었다. - P268
그들의 성실한 삶은 이제 끝이 났다. 그들의 세상, 그들의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 P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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