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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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10미터 내려온 지하 1층. 120호실에는 시체 한 구가 너부러져 있다. 범인은 지하에 있는 아홉 명 중 한 사람. 





 


예상치 못했던 지진, 산속의 지하, 출입구는 막혔고 비상구까지 가는 통로는 침수 상태라 나갈 방도가 없다. 그들이 방주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스마트폰은 불통이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철골을 제거하고 작은 방의 닻감개를 돌려서 막고 있는 바위를 아래로 떨어뜨리면 된다. 하지만 닻감개를 돌리는 사람은 그 방에 갇히고 만다. 심지어 지진으로 산길도 막혀 방주에서 탈출한들 구조대는 커녕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누가 희생양이 될 것인가. 설상가상으로 침수된 지하 3층의 수위가 높아졌다. 이대로라면 방주는 완전히 수몰될 것이다. 시계바늘은 더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ㅡ 


슈이치를 화자로 하는 1인칭시점인 소설은 야박할 정도로 각 인물들의 개별적 서사나 인물 간 갈등이 부각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건이 벌어진 당장의 상황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을 첫 번째 살해 피해자로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독자의 어설픈 추론을 애초에 용납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결은 고사하고 사건은 더 미궁으로 빠지며 독자는 오리무중에 놓인다.  


시작부터 호러와는 다른 결의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영화 '곤지암'이 떠오르는데, 나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몇 년 전에 읽었던 오승호 작가의 <도덕의 시간>이 떠올랐다.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도덕적 딜레마. 



밀실과 같은 공간에서 살인이 일어났고 범인이 일행 중에 있다면 모두 한 공간에서 감시를 병행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런데 쇼타로의 말처럼 아홉 명은 이와는 정반대로 하고 있다. 슈이치와 쇼타로를 제외하면 모두 방 하나씩을 차지해 각 방을 쓰고 있다. 즉 살인범에게는 더 없이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무기력한 태도로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사고방식이라니.  


희생양을 세우는 데 있어 죄의식을 덜기 위해 살인범에게 닻감개 돌리는 역할을 맡기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살인범이 아닌 무고한 사람을 지하에서 죽게 했다면 그들 자신이 살인범이 되므로 반드시 살인자를 찾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야말로 현실-합리가 아닌가. 살인범을 그들 자신의 목숨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단죄할 권리를 누가 누구에게 부여한 것인지. 더욱이 살인범의 죄는 희생으로 포장되고 말 것이다.


완벽한 근거가 없다면 차라리 모두가 용의자인 게 낫다는 쇼타로의 말, 누군가에게 닻감개를 돌리는 역할을 맡기는 일이 직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만큼이나 잔인하다는 자각, 가족을 정서적 인질로 삼는 저열한 악의 등 소설은 극단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본능과 이성,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순과 딜레마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결정적 전제는, '범인은 왜 구태여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죽을 위기에 있는 비상사태에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이다. 정황상 살인을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니다. 즉 범행의 직접적 동기는 지하 건축물에 갇힌 이후에 생겼다는 것. 위에 썼듯 이 소설은 보여지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점이 독자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 결정적 힌트일지도.


결말에 밝혀질 범인의 실체나 범행 동기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문제의 반전은 그 다음이다. 
독자는 마지막 여섯 장을 위해 삼백 쪽이 넘는 책장을 넘겼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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