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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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과 문학 및 예술성을 모두 갖췄다고 평가되는 작가의 작품이다. <화재의 색>과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의 씁쓸함이 기억나는데, 이 소설은 어떤 블랙 유머로 독자에게 각인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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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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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난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는 말아요, 절대로, 절대로. 



느닷없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다섯 명의 남자가 각자 있던 장소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사방에서 달려왔다. 기구의 바구니에 타고 있던 소년의 할아버지를 포함해 여섯 명의 남자들이 기구에 달린 밧줄에 매달렸다. 줄을 끝까지 잡고 있다가 100미터 상공까지 떠오른 존 로건이 추락했다. 그가 추락한 시간은 불과 30초.  





 


서로 처음 본 그들에게 소환된 덕목은 협력. 모두 함께 줄을 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면, 누군가 처음으로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나머지 사람들도 계속 붙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은 누구인가?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것이 도덕적 책임을 물을 만한 요인이 될 수 있을까? 밧줄을 잡았다가 놓았던 그들 모두는 로건의 죽음에 간접적 가해자일까, 혹은 로건과 함께 죽기를 거부한 것이 잘못인가? 어쨌든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텐데, 어차피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 맹점이다. 


기구의 줄을 잡는 것도, 놓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이타심과 이기심은 늘 공존한다. 남들에게 무엇을 주고 자신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 어디까지가 선의를 지키는 경계선일까.  


ㅡ 


조는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이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구니에 타고 있던 소년은 기구가 20킬로미터를 날아가 무사히 착륙했기 때문에 전혀 다친 곳이 없었다. 모두가 밧줄을 잡지 않았아도 소년은 살았다는 것이다. 결국 로건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됐고, 30분간 밧줄을 잡고 있다가 결국에 놓아버려 로건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는 조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로건과 함께 추락했을 수도 있다. 조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정작 이 소설에서 집중하는 것은 인간의 윤리가 아니다. 문제의 시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단한다. 드클레랑보 증후군, 망상에 따른 믿음으로 신에 의한 운명적 사랑을 믿는 패리의 등장.   



소설이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나는 패리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워졌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패리가 이렇게까지 집착하고 의미를 부여할 만한 빌미를 조가 제공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거의 매일 조의 집 앞에 찾아와 길 건너편에서 두어 시간 자리를 지키고, 일주일에 서너통씩 편지를 보낸다. 그럼에도 클래리사는 패리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이쯤되면 독자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사이사이 클래리사의 지적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짐작을 불러낸다. 더하여 경찰조차 조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조에게만 보이고, 조에게만 들리는 패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일상의 작은 균열은 평소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적, 혹은 관계가 불안해지면 별 거 아니던 작은 균열은 어느새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슬그머니 커지게 된다. 클래리사가 조의 불만과 두려움에 찬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그가 혹시 미친 건 아닌지 의심하고,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웠던 조가 느닷없이 학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 역시 이와 같은 원인에 있을 터다.   


패리가 종교와 신을 통해 조에게 집착한다면, 조는 2년 전 한계를 느껴 중단한 박사 과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학계에 집착한다. 클래리사는 기구 사건에서 밧줄을 놓았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조가 패리를 이용한 것 이라고 짐작한다. 이 모든 과정은 패리가 유도한 것이 아닌 조가 의도한 바대로 이끌려 왔다는 것이다. 클래리사의 지적이 흥미로운 이유는 작가 이언 매큐언 역시 '피리 부는 아저씨'가 되어 스토리와 독자를 이끌고, 독자는 홀리듯 그의 뒤를 따른다는 점이다. 소설의 결말이 반전인지 아닌지는 독자 각각의 판단에 맡긴다.  


소설에서는 종교와 과학, 사랑과 집착, 오해와 사실, 망상과 진실, 관계와 고립 등 우리 주변에서 이분법적으로 맞닥뜨리는 갈등에 대해 등장 인물들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클래리사가 조를 신뢰했다면, 조가 패리에게 조금만 호의를 베풀었다면, 조가 이성적으로 행동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원제는 ENDURING LOVE. 
책의 마지막에 실린 <부록>을 읽으면, 원제가 무서워진다.
반전 아닌 반전이 던진 이언 매큐언의 묵직한 메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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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5 - 영락태왕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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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은 열다섯 살 담덕이 태자로 책봉된 후부터 고국양왕의 죽음, 담덕의 즉위, 관미성 전투를 거쳐 영락 2년까지를 다룬다. 
 






담덕은 병 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한다. 각 부의 조의선인들을 하나로 모아 합동 훈련을 구상하고, 계루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연나부를 설득해 동의를 얻어 5부를 모두 끌어들여 동.서.남.북.중앙 5부로 재편했다. 담덕은 검은 제복을 입은 흑부군, 산동에서 고구려 유민들로 조직한 태극군, 태백산 개마고원의 사냥꾼들로 꾸려진 말갈꾼까지 조직적으로 군사조련을 시켰다. 그리고 왕의 직속 군대로 왕당군을 편성한다. 


후연의 모용농이 현도와 요동 두 성을 공격해 차지했는데, 요동성은 중원으로 향하는 인후부인 만큼, 후연에게 요동성을 빼앗긴 것은 타격이 컸다. 


한편 백제는 진사왕 치하에서 청목령(개성 부근)을 중심으로 북쪽의 팔곤성, 서쪽의 바다에 이르는 지역에까지 관방을 설치했다. 그러나 재위 6년째로 접어들면서 조카이사 선왕의 아들인 아신을 중심으로 하는 역모설이 돌기 시작했고, 요서 지역에서는 모용수가 후연을 세워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요서와 진평 두 군에 대한 백제의 지배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덩달아 흉작으로 민심까지 흉흉해지자 달솔 진가모는 역모의 기미를 잠재우고 국론을 하나로 뭉치자는 취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고구려왕 이련이 병상에 있음을 들며 고구려와의 전쟁을 부추긴다. 


ㅡ 


담덕은 백제가 요서에서의 경영이 가능했던 이유를 해상 장악에 있다고 판단했다. 벽란도와 강화도를 교역항으로 두고 인삼 경작지를 부소갑에서 강화도로 이주시킬 수 있었던 것도 역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삼 교역권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는 백제의 관문이자 군사요충지인 관미성을 공략해야 한다는 사실도 진작에 파악해 놓았다. 담덕은 관미성을 함락해 인삼 교역권을 가져온 후 서북방의 거란을 평정하고, 소금과 철을 통해 서역과의 교역을 활성화해 국방의 안정과 경제력을 키우며 동시에 불교를 유입해 민심을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위에 오른 담덕은 백제 북변의 적현성을 기습해 함락하고, 즉위 직후 연호 '영락'을 사용하고, 관미성 공략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또한 불국정토를 내세워 선왕 때부터 시작한 평양성에 아홉 개의 사찰을 짓는 것을 서두른다. 



5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관미성 전투다.
전쟁사에 대한 지식이 얄팍하지만 그럼에도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드는 생각은, 고대부터 근대 이전의 전쟁은 자연 지형과 바닷길, 물 때, 풍향, 기후 등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하고 상당히 면밀하게 조직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전투가 목적하는 바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임해야 실패를 줄일 수 있다는 것도. 그러니 지휘관의 역량이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을테다. 그런 면에서 소설 속 담덕은 더할나위 없는 장수다.  


ㅡ 


고구려군의 갑옷과 철기, 미늘 갑옷, 철기 마구 그리고 각 부대의  묘사가 사료에 나온 내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부분도 짧지만 각 부족의 성격과 특색을 상상해 볼 수 있어 재미있는 부분이다.


담덕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아신왕. 6권에서는 백제와 북방의 갈등이 더 구체적으로 다뤄질 듯 하다. 왕제 무와 고국양왕의 죽음으로 다시 한 세대가 저물어갔다. 원숙해진 추수의 귀환, 한때는 역적이었으나 담덕의 사람으로 돌아온 우신과 조환. <담덕>은 절반에 도달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시대가 서술될 후반부를 기대한다. 



읽다가 문득, 담덕이 고작 열아홉 살이라는 사실이 스치고 지나간다. 열아홉 살에 이 엄청난 설계를 하고, 국가를 책임지고, 전장의 한가운데서 서 있는다고? 마흔 남짓의 나이에 사망한 담덕의 나이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인생의 절반을 산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평균 수명 백세를 얘기하는 지금 시대로 치자면 1년을 10년같이 살았겠구나... 싶다. 


무명검법의 마지막 단계는 공심지검, 마음을 비우고 칼을 그친다는 의미. 이는 마음을 비워 나와 상대 모두가 칼을 그치도록 하는 방책으로서 전쟁이 아닌 평화, 원한이 아닌 화해, 대결이 아닌 친화라고 말할 수 있다(고 무명선사가 말했다).  


써서 보내주고 싶네, 그들한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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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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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도대체 어떤 인간으로 태어나야 그처럼 커다란 관에 갇혀 사는 인생을 사게 되는 걸까? 어떻게 이디시어 신문을 사러 나가는 때를 빼고는, 낮 동안 단 한 번도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코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지도 않는 삶을 사는 거지?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유대인이어야만 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수감자들이었다. 그게 바로 모리스였다. 치명적인 참을성, 혹은 인내심 아니면 뭐 그따위 걸 갖고 태어난 사람.  



 


 

 




이 소설은 뭔가... 내내 애잔한다. 한평생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선의를 잃지 않고 일했으나 예순 살의 모리스에게 남은 것은 대출이자가 남아 있는 집과 손님이 끊겨 폐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식료품점이 전부다.  


그레이엄 그린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건조함과는 사뭇 다르고, 필립 로스도 연상되지만 그와도 다르다. 잔잔하면서도 고요한 울렁임이 가슴 밑바닥에서 소리없이 흐른다. 여기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정서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삶의 전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 정서가 현실감 있고 진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어느날 마을에 나타난 청년 프랭크 알파인. 모리스는 부랑아처럼 오갈 곳 없는 그를 받아준다. 하루에 열두 시간 가까이 일하지만 프랭크는 만족했다. 일단 추위와 배고픔을 피할 수 있었고, 이슬을 맞지 않고 잠들 수 있다. 또한 모리스가 준 옷은 깨끗하고 편안했다. 무엇보다 떠돌아 다니지 않아다는 점이, 창 밖이 아닌 안쪽에서 밖을 바라볼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이 장면은 소설 후반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누구든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볼 수 없고, 각자의 시선에서 볼 수 있는 건 상대의 외형에 불과하다. 가게의 안을 좀더 자세하고 보고 싶다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하듯 인간 역시 상대의 내면을 알려면 문을 열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단지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는 입장이 된다해도 그것이 행복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프랭크는 경험과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닫는다. 



헬렌이 의도적으로 비유대인 프랭크를 피했음에도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프랭크는 헬렌을 처음 본 날 그녀의 눈에 비친 갈구를 한눈에 간파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갈구를 떠올렸고, 그녀가 인생에서 뭔가를 기대한다는 그 느낌 역시 자신의 욕구와 흡사했다. 프랭크와 헬렌은 현실적인 문제로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화를 나눈다. 


헬렌은 젊음의 특권이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가능성을 잃어버린 자신이 더이상 젊다고 생각하지 않는 헬렌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인생이란 '가능성'이다. 이는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떠나온 젊은 시절의 모리스 또한 지금의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간절하게 바란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에 기댄 미래. 모리스, 헬렌, 프랭크는 제한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에게 거울의 역할을 했던 건 아닐까싶다.



프랭크가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있듯 헬렌 역시 프랭크에 대한 편견이 있다. 프랭크는 모리스에게 유대인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며, 본인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모리스는 유대인에게 율법도, 예배도 중요하지만 정작 본질은 옳은 일을 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인종과 민족과 국가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중요한 말이다.  


소설에서는 프랭크가 유대인을 이해하기 위해 유대 역사에 관련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한다. 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는 것과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끝까지 노력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이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크는 모리스의 단조롭고 지루하고 지긋지긋한 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큰 고통을 안고 살면서도 타인의 삶의 고통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그의 마음도 납득하지 못한다. 프랭크는 이 세상의 이방인이자 혐오의 대상인 유대인 모리스가 갖은 타인을 향한 연민을 대할수록 제 불행에 겨워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자신이 더 대조적으로 드러나기에 불편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프랭크는 가게에, 그리고 헬렌 곁에 남기 위해서라도, 가게를 살리고 싶어한다. 그의 노력은 처절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그의 거짓말과 잘못은 스스로 자신이 갇힌 감옥의 창살을 하나씩 만든 셈이다. 처음 강도 행각에 가담한 죄의식으로 모리스 가게의 무보수로 일하기를 자청했으나 또 다시 도둑질을 했고, 헬렌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잘못을 저지르는 등 스스로 잘못의 고리를 꿰어갔기에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도 그 다음 창살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그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도와 상관없이 거짓으로 관계를 시작한 프랭크는 발버둥칠수록 더 조여오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 신세가 될 수 밖에 없다. 


프랭크는 식료품점에서, 24시간 카페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이다와 헬렌의 생계를 책임지고, 동시에 헬렌이 대학에 등록할 수 있도록 애쓴다. 도대체 프랭크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모리스에 대한 죄책감, 혹은 헬렌에 대한 사랑? 나는 그것보다 이것이 그가 살아갈 명분이 되어주고, 존재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주며, 자신의 미래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헬렌은 프랭크에 대한 감정이 사랑과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곤경을 외면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증오를 회피하기 위해 프랭크를 대신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에 유대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프랭크. 이는 바꿔 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유대인과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홀로코스트라는 특정된 참혹한 고통을 간직한 민족성을 일반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리스의 삶이 격하게 공감되는 이유는 그의 인생 궤적과 회한이 대다수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테다.  


ㅡ 


p333
그는 슬픔 속에 자신의 인생을 생각했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했다. 가난한 자의 불명예. 이다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깨워 사과하고 싶었다. 그는 헬렌을 생각했다. 애가 노처녀가 된다면 처참한 기분일 거다. 프랭크를 생각하며 그는 작게 신음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 인생을 바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구나. 그 진실이 천둥처럼 몰려왔다.



인생을 바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후회는 비단 경제적.사회적 성공에서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고달픈 유년 시절을 보내고 어쩔 수 없이 현재에 이르러 죄의식과 가책에 혼란스러워하는 불쌍한 아이를 거두지 못했다는, 성숙하지 못한 어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 것은 아닐런지. 젊은 시절 영악하게 처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조 섞인 한탄이 과연 모리스의 것이기만 할까.  


늙은 행상에게 말없이 따뜻한 레몬차를 건네고, 배를 곯아 우유와 빵을 훔친 청년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며 불쌍한 '아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 증오했던 이웃의 불행이 마치 자신의 증오 때문에 벌어진 것인 양 고통스러워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모리스다. 



책을 덮은 후 프랭크의 이후 삶이 몹시 궁금해졌다. 모리스와 비슷한 인생 경로를 가게 될까? 아니면 대학을 갔을까? 그것도 아니면 헬렌과 결혼했을까? 무엇보다 그 끝에서 모리스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다 읽고 난 후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폴 하딩의 <팅커스>가 연달어 떠올려졌다. 하지만 두 작품과는 다른 결의 여운이 깊게, 꽤 오래 남을 듯 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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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현대 철학 - 아들러, 라캉, 마사 누스바움… 26인의 사상가와 함께하는 첫 번째 현대 철학 수업
안광복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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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존 롤스까지 스물여섯 명의 사상가를 들어 규율과 지배, 사색과 고독의 부재, 목적성 상실, 하위 정치와 새로운 경제적 상상력의 필요성, 구어 문명의 재再도래, 창조와 지배와 자유, 영혼의 빈곤, 생명과 진화 등을 '욕망' '틀' '통찰' '어울림'을 주제로 이야기한다.  
 







이토록 찰떡 넘기듯 꿀떡꿀떡 받아 먹을 수 있도록 쓰여진 철학서라니. 카를 융, 라캉, 벤냐민 등 머리를 뜯어가며 읽었던 내용을 이렇게 수월하게 개념을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책이다. 다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현대 철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국한된 얘기다. 입문서보다 더 쉽게 읽히는 책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이러구러 접해왔던 현대철학은 철학에 국한하지 않는 것으로 읽혀졌다. 이데올로기, 순수철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사회과학 등이 한데 맞물려 넓은 범위에서 철학적 사유를 아우르고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해왔던 생각들이 전혀 틀린 건 아닌 듯 하다.  


ㅡ 


거울에 보이는 '나'는 실체가 아닌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평가를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다. 그래서 '나' 속에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가가 담겨 있다. 라캉은 '나'는 타인의 욕망이 빚어낸 상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인정받기 위해 짜여진 세상에 바라는 바를 욕망하며 살아가는데, 이는 '나'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음이다. 그러니  타인의 욕망을 무작정 따르지 말고 진정한 욕망을 좇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감정이나 성품은 그 자체로는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이를 유용한 방향으로 이끌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아들러의 말이 참 와닿는다. 



시장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 인간의 다양했던 삶의 동기가 오로지 '돈' 하나로 통일되었다. 칼 폴라니는 사회 저변에 널린 온갖 위험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이에 대한 원인을 한군데에서만 찾을 수도 없고, 이를 흑백논리로만 규정할 수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울리히 벡은 과학을 비롯한 각 분야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학문 아래 놓인 현실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는 '하위 정치'를 강조한다. 또한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 더 나아가 협력의 역할을 중요시 여긴다. 


규율 권력은 법과 원칙을 내세워 사람들을 서서히 길들여나간다. 미셸 푸코는 규율 권력이 감옥과 군대, 학교와 병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있다고 주장한다. 권력은 사람들이 자신이 강제당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고, 이로써 온 세상이 '행복한 감옥'이 되어가고 있음을 강조한다. 푸코는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을 언급하는데, 우리나라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옥사를 떠올려보면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납득이 될 것이다.  


ㅡ 


누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에 대한 공포와 그로인해 비롯된 혐오의 감정을 느낀다. 특히 '접촉'은 전염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유대인 게토, 미국의 흑인 구역  분리부터 현대의 따돌림과 혐오 표현에 이르기까지 이를 증거한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에 눈감고, 배려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폭력으로써 억압하는 처지에 발달하는 과학기술과 합리적 사고는 더 큰 증오와 폭력을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생존 본능을 뛰어넘는 인간적 욕망이 가득하니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 양심과 형이상학적 욕망을 따르라고 권한다. 인간의 자유란 이러한 의무감과 책임에 기꺼이 따를 때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는데 자유와 의무와 책임을 묶어서 깊게 생각해볼 필요성을 갖는다. '옳음rightness' 보다 '좋은goodness'이 더 중요하다는 매킨타이어의 말이 좋더라.  


읽다보니 '인간 진화의 끝은 어디일까?' '인간 그 자체(육체와 영혼)의 자연 진화만을 진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그야말로 '진화'가 맞기는 한 걸까?' 라는 막연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ㅡ 


철학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저자는 그 위대함은 철학이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안광복 선생의 책을 읽으면 철학이 우리가 속한 사회와 삶에 얼마나 밀착되어있는지를 늘 깨닫는다. 빈부격차, 차별과 혐오, 기후변화, 전염병 등 철학은 이 문제들과 별개로 위치해 있지 않다.   


이 책에서 눈여겨 본 철학자는 에른스트 카시러. 아직 이 학자의 책을 접하지 못했거니와 용어가 낯설지만 적어도 저자의 간단한 설명은 흥미로워 읽어보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나치스 시대를 지나오면서 인류 문명의 방향에 대한 카시러의 사유가 작금의 시대에 아주 시의적절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리고 한번쯤은 집중해서 작정하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철학자는 에마뉘엘 레비나스. 가벼운 에세이는 읽었는데 그의 문헌을 제대로 읽은 경험이 없다. '형이상학적 욕망'에 대해 잘 좀 읽어보려고.  



저자는 우리가 사는 21세기가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가 살았던 20세기 야만의 시대와 얼마나 다른지를 묻는다. 보이지 않는 비열하고 사악한 방식은 더 발달했을테고, 적어도 전쟁은 없으려니 했으나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철학자와 사상 끝에 마련해 놓은 안광복 선생의 [생각 열기] 코너다. 혹시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대여섯줄에 걸친 간단한 정리를 읽고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하다보면 앞선 내용들을 곱씹어볼 수 있다. 


내가 중등 이상 청소년들에게 꼭 추천하는 책이 안광복 선생이 아주 오래 전에 쓴 <열일곱 살의 인생론>이다. 그들이 짧게는 그들 인생의 3년을 걸고 학업에 집중하기 직전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인데, 이 책 <처음 읽는 현대 철학>도 한번은 읽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물론 위에 썼듯 청소년 독자뿐 아니라 현대 철학이 엄두가 나지 않는 독자에게도 권하는 바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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