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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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도대체 어떤 인간으로 태어나야 그처럼 커다란 관에 갇혀 사는 인생을 사게 되는 걸까? 어떻게 이디시어 신문을 사러 나가는 때를 빼고는, 낮 동안 단 한 번도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코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지도 않는 삶을 사는 거지?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유대인이어야만 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수감자들이었다. 그게 바로 모리스였다. 치명적인 참을성, 혹은 인내심 아니면 뭐 그따위 걸 갖고 태어난 사람.  



 


 

 




이 소설은 뭔가... 내내 애잔한다. 한평생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선의를 잃지 않고 일했으나 예순 살의 모리스에게 남은 것은 대출이자가 남아 있는 집과 손님이 끊겨 폐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식료품점이 전부다.  


그레이엄 그린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건조함과는 사뭇 다르고, 필립 로스도 연상되지만 그와도 다르다. 잔잔하면서도 고요한 울렁임이 가슴 밑바닥에서 소리없이 흐른다. 여기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정서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삶의 전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 정서가 현실감 있고 진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어느날 마을에 나타난 청년 프랭크 알파인. 모리스는 부랑아처럼 오갈 곳 없는 그를 받아준다. 하루에 열두 시간 가까이 일하지만 프랭크는 만족했다. 일단 추위와 배고픔을 피할 수 있었고, 이슬을 맞지 않고 잠들 수 있다. 또한 모리스가 준 옷은 깨끗하고 편안했다. 무엇보다 떠돌아 다니지 않아다는 점이, 창 밖이 아닌 안쪽에서 밖을 바라볼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이 장면은 소설 후반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누구든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볼 수 없고, 각자의 시선에서 볼 수 있는 건 상대의 외형에 불과하다. 가게의 안을 좀더 자세하고 보고 싶다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하듯 인간 역시 상대의 내면을 알려면 문을 열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단지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는 입장이 된다해도 그것이 행복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프랭크는 경험과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닫는다. 



헬렌이 의도적으로 비유대인 프랭크를 피했음에도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프랭크는 헬렌을 처음 본 날 그녀의 눈에 비친 갈구를 한눈에 간파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갈구를 떠올렸고, 그녀가 인생에서 뭔가를 기대한다는 그 느낌 역시 자신의 욕구와 흡사했다. 프랭크와 헬렌은 현실적인 문제로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화를 나눈다. 


헬렌은 젊음의 특권이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가능성을 잃어버린 자신이 더이상 젊다고 생각하지 않는 헬렌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인생이란 '가능성'이다. 이는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떠나온 젊은 시절의 모리스 또한 지금의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간절하게 바란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에 기댄 미래. 모리스, 헬렌, 프랭크는 제한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에게 거울의 역할을 했던 건 아닐까싶다.



프랭크가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있듯 헬렌 역시 프랭크에 대한 편견이 있다. 프랭크는 모리스에게 유대인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며, 본인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모리스는 유대인에게 율법도, 예배도 중요하지만 정작 본질은 옳은 일을 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인종과 민족과 국가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중요한 말이다.  


소설에서는 프랭크가 유대인을 이해하기 위해 유대 역사에 관련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한다. 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는 것과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끝까지 노력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이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크는 모리스의 단조롭고 지루하고 지긋지긋한 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큰 고통을 안고 살면서도 타인의 삶의 고통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그의 마음도 납득하지 못한다. 프랭크는 이 세상의 이방인이자 혐오의 대상인 유대인 모리스가 갖은 타인을 향한 연민을 대할수록 제 불행에 겨워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자신이 더 대조적으로 드러나기에 불편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프랭크는 가게에, 그리고 헬렌 곁에 남기 위해서라도, 가게를 살리고 싶어한다. 그의 노력은 처절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그의 거짓말과 잘못은 스스로 자신이 갇힌 감옥의 창살을 하나씩 만든 셈이다. 처음 강도 행각에 가담한 죄의식으로 모리스 가게의 무보수로 일하기를 자청했으나 또 다시 도둑질을 했고, 헬렌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잘못을 저지르는 등 스스로 잘못의 고리를 꿰어갔기에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도 그 다음 창살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그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도와 상관없이 거짓으로 관계를 시작한 프랭크는 발버둥칠수록 더 조여오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 신세가 될 수 밖에 없다. 


프랭크는 식료품점에서, 24시간 카페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이다와 헬렌의 생계를 책임지고, 동시에 헬렌이 대학에 등록할 수 있도록 애쓴다. 도대체 프랭크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모리스에 대한 죄책감, 혹은 헬렌에 대한 사랑? 나는 그것보다 이것이 그가 살아갈 명분이 되어주고, 존재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주며, 자신의 미래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헬렌은 프랭크에 대한 감정이 사랑과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곤경을 외면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증오를 회피하기 위해 프랭크를 대신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에 유대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프랭크. 이는 바꿔 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유대인과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홀로코스트라는 특정된 참혹한 고통을 간직한 민족성을 일반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리스의 삶이 격하게 공감되는 이유는 그의 인생 궤적과 회한이 대다수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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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33
그는 슬픔 속에 자신의 인생을 생각했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했다. 가난한 자의 불명예. 이다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깨워 사과하고 싶었다. 그는 헬렌을 생각했다. 애가 노처녀가 된다면 처참한 기분일 거다. 프랭크를 생각하며 그는 작게 신음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 인생을 바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구나. 그 진실이 천둥처럼 몰려왔다.



인생을 바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후회는 비단 경제적.사회적 성공에서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고달픈 유년 시절을 보내고 어쩔 수 없이 현재에 이르러 죄의식과 가책에 혼란스러워하는 불쌍한 아이를 거두지 못했다는, 성숙하지 못한 어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 것은 아닐런지. 젊은 시절 영악하게 처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조 섞인 한탄이 과연 모리스의 것이기만 할까.  


늙은 행상에게 말없이 따뜻한 레몬차를 건네고, 배를 곯아 우유와 빵을 훔친 청년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며 불쌍한 '아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 증오했던 이웃의 불행이 마치 자신의 증오 때문에 벌어진 것인 양 고통스러워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모리스다. 



책을 덮은 후 프랭크의 이후 삶이 몹시 궁금해졌다. 모리스와 비슷한 인생 경로를 가게 될까? 아니면 대학을 갔을까? 그것도 아니면 헬렌과 결혼했을까? 무엇보다 그 끝에서 모리스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다 읽고 난 후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폴 하딩의 <팅커스>가 연달어 떠올려졌다. 하지만 두 작품과는 다른 결의 여운이 깊게, 꽤 오래 남을 듯 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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