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앰버슨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0
부스 타킹턴 지음, 최민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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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조지 앰버슨 미내퍼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앰버슨 가문이 시대의 변화와 흐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묻혀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도입 부분에서 1880년대에 유행했던 패션, 주택 건축 및 인테리어, 놀이문화 등 당시의 트렌드, 사회 구조와 인프라의 변화, 그리고 사라진 풍습과 로맨틱한 청춘과 사랑을 서술하는데, 무엇보다 앰버슨 가문의 대저택에 대한 표현은 문장을 따라 그림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한다.  


또한 소설 후반부에 들어서는 산업화 과정에 따른 도시와 사회 저변의 변화를, 그리고 조지가 과거를 회상하며 몰락한 가문의 택지를 돌아보는 장면을 다이내믹하게 서술한다.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섬세한 묘사는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면은 입체감 있는 읽는 재미의 쏠쏠함을 더해준다. 



장기 불황의 시작인 1873년부터 시작된 앰버슨 가문의 부귀영화는 앰버슨 소령에서 꽃을 피워 1880년대에 그 지역의 유행을 선도했다. 앰버슨 소령의 유일한 손자인 조지는 집안의 막대한 재력만을 믿고 오만하기 그지 없으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고사하고, 장래에 대한 설계나 직업 혹은 야망 따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돈이 곧 권력이라고 믿는 그는 매순간 기분에 따라 내키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모순적이게도 평판을 가장 중요시한다.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조지는 사물을 단 한 가지의 기준으로만 평가한다.  


그는 하층민을 벌레에 비유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천한 것'이라고 칭하고(여기에 어머니인 이저벨도 예외는 아니다), 출신이나 사회적 지위 등으로 신분은 구분되어야 하며, 소위 최상위층에 있는 사람들 끼리는 서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믿는 부류다. 그야말로 무지해서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그래서 때로는 순진해보이기까지 하는,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 조지가 공장 노동자가 되는 부분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조지는 돈을 '버는' 행위 자체를 혐오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경제 활동, 구체적으로는 투자를 예외로 하는 제조나 노동을 통해 소득을 올리는 것을 '천박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투자 사업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으면서 할아버지가 임대 수익을 얻기 위해 주택을 짓거나 유진이 자동차를 생산 매매 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긴다. 그러니 직업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루시와의 관계가 걷돌 수 밖에 없다. 


ㅡ 


유진과 이저벨이 과거 파혼했다는 사실과 현재 두 사람이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패니 고모로부터 전해 들은 조지는 이성을 잃고 분개한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리가 없다'는 조지의 중얼거림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한 문장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책에서는 '내게'에 방점을 찍었다면 나는 '이런 일'에 더 무게를 둔다(조지가 어떤 인격인지는 앞서 충분히 보아왔기에).  


과연 그가 말하는 '이런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어머니의 재혼 자체? 아니면 재혼 상대? 그것도 아니면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한 자신과 루시와의 관계? 아마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조지가 가장 염두에 두지 않은 부분은 아마 루시와의 사랑이 아닐까싶다(그에게 있어 사랑 따위야...). 앰버슨 가문의 일원인 어머니가 '천박한 것' 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하필 재혼 상대가 그토록 멸시하는 '자동차'를 만들어 '천박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것도 분노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상황을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데에 가장 화가 났을 테고. 어머니의 평판을 자기에 대한 평판으로 동일시하는 모습이나 어머니의 행복보다는 평판을 우선하는 부분은 어찌보면 그가 유아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유진과 만나지도 말라며 이저벨을 몰아붙이는 조지의 모습은 이기심을 넘어 잔인하기까지 하다(조지, 네가 햄릿이냐). 


벼랑 끝에 몰린 조지의 낙담과 좌절은 가문의 파산보다 '천한 것'들 사이에서 위대한 앰버슨가가 잊혀졌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이저벨은 다정하고 긍정적이며 분별력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단호하고 무정한 면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조지의 올바르지 못한 언행과 삐뚤어진 생각에는 왜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관대하기만 했을까? 이저벨은 유진과 조지의 사이가 돈독해지기를 필요 이상으로 바라는데, 아마도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을지.


유진은 편지를 통해 이저벨에게 그녀 스스로의 방식대로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아들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이저벨이 결론을 내리고 조지에게 쓴 편지를 읽다보면 처음에 들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려지면서 결국 '몸뚱아리만 어른'이 되어버린 조지를 만든 사람은 윌버와 이저벨이였음을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어머니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마침내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며 절규하는 조지의 모습은 그토록 못되게 굴었어도 딱하고 안타까움이 들더라는.  



내가 조지를 마음에 들어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사람을 개별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는 루시를 사랑하지만 루시와 유진을 부녀라는 이유 때문에 세트로 묶어 하나로 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좋아하는 친구라고 해서 상대와 관계한 사람들을 모두 좋아해야하는 의무감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데에 공감했다. 물론 그 선을 넘어서 싫어하는 것까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튼 나는 루시에게는 우호적이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유진에게 비우호적인 조지의 감정은 존중받아야한다는 입장이다. 그것 때문에 루시의 불편함은 역시 별개로 하고.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감정과 입장을 드러내는 조지의 방식에 조심성과 예의가 없음은 정말 별로다.    


ㅡ  


소설은 도시 집중화를 비롯해 산업화 시대로의 전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유진의 사업 품목인 자동차가 이 변화를 대변하고 있다. 유진은 자동차 개발자이지만 자동차가 가져올 부작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영적 문명의 후퇴, 전쟁 혹은 평화 양상의 변화, 공기 오염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은 분명해보이지만, 자동차는 이미 등장했고 이로써 인간의 삶은 변화를 맞이했으니 변화에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얘기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 소설이 출간되고, 1919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배경에는 이와같은 유진의 관점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1880년대 장인들이 만든 우아하고 아름다운 앰버슨 저택의 삼중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빛바램은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앰버슨 저택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유진 모건이 지은 조지 왕조풍의 집을 통해 비록 물질세계는 이동하고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역사는 반복되어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조지가 그토록 '천한 것'이라고 멸시했던 그 위치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화학 공장의 노동자로서 늙은 고모를 자진해서 부양하는 조지의 모습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이 소설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동시에 현실적이다. 악당이기만 한 것같은 조지는 마냥 미워하기 어렵고(결과적으로 루시같은 현명한 여성이 개망나니같은 조지를 사랑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다), 로맨스는 과하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애틋함은 충분히 남겨준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시대 상황을 섬세하고 면밀하게 스토리에 녹여내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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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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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연체가 지루하지 않은 소설을 만났다. 


낭만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삶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미하이는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듯 보이나, 본인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살아야 할 '명분'이다. 








미하이의 심상한 생각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신혼부부임에도 미하이의 예사롭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이며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선의와 예의로 행동하는 아름다운 보헤미안 미하이. 그는 이번 신혼여행으로 자신이 결혼을 통해서도 어른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폐허가 된 고대 성벽의 유적에 앉아 몇 시간에 걸쳐 행복하게 움브리아의 경치를 바라보'는 장면은 단편적이나마 미하이를 다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대목에서 미하이가 격하게 이해되는 거지?) 


미하이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대로 살면서 혹사 당했다(고 본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큰 자기 혹사는 바로 결혼이었다. 어쩌면 정서적으로 돌아갈 곳이 없었던 미하이에게 열차에 잘못 오른 것은 그의 무의식이 이끈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미하이가 혹사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독자는 안다. 도망가듯 도착한 산악 도시에서 미하이의 행색은 관광객이 아닌 '도망자'다. 그런데 이 표현이 더할나위 없이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한때 모든 것을 함께 나눈 친구였던 세베리누스 신부(에르빈)에게 고해 성사를 하듯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가짜 어른의 삶을 살았고, 결혼을 망쳤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가야하며, 어떤 미래를 기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미하이. 그러면서 제발 외롭게 혼자 있는 자기를 내버려두지 말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살고자하는 그의 처절함이 잘 나타난다. 세베리누스 신부는 우연에 스스로를 맡기고 일정 없이 그 자신을 온전히 놔둬보라고 조언하는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조언에 의미를 알 수 있다.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는 발트하임과의 만남. 죽어가는 것이 에로틱한 행위라는 발트하임의 말에 터마시를 떠올리는 미하이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묻는다. 발트하임은 죽어가는 것은 성적 쾌락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이때 죽음을 욕망하는 자들은 치명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에 원초적인 본능과 죽음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문명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으로 정착해 사람들은 욕구를 억누르게 되었다 설명인데,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일 뿐 발트하임은 누구에게도 자살을 권유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발트하임과의 만남으로 미하이는 에버에 대한 집착과 터마시를 향한 열망이 더 강해진다. 어디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미하이는 터마시와 같은 죽음을 맞기를 바랐고,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에버가 지켜봐주기를 바랐다. 터마시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ㅡ 


겉으로 보기에 미하이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유부녀든 비혼녀든 가리지 않고 사랑하고 싶은 대상이 나타나면 주저하지 않으며, 죽고자 할 때 죽으려 한다. 그의 행동에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타인에 대한 도덕적 배려와 의무는 찾아볼 수 없다. 어른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러한 삶을 선택한 그가 자신의 삶에 있어 목적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쩌면 미하이에게 있어서 터마시와 에버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영혼의 목소리 같다고 해야할까. 미하이가 죽기로 작정한 날, 반니니 앞에서 부끄러웠던 이유는 자신의 죽음에 그 어떤 숭고함도 없는 것뿐만 아니라 터마시처럼 죽음 자체를 욕망하는 것도 아닌, 그저 도피에 불과하기 때문이었을 터다. 


밤새도록 환영에 시달리며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노동자였을 뿐이다. 죽음의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바꾼 미하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제로 죽고 싶어하는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의지를 갖는다.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미하이와 에르지를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상대에게 직접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기보다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지레짐작하고 저울질을 하며 제나름의 잣대로 사람이나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경쟁에 쫓기며 낙오와 생계의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우리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삶에, 살아가는 데에 꼭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죽음을 예정한 시각을 불과 서너 시간을 앞두고 이웃의 소소한 초대가 그날을 살 이유가 된다. 작가는 죽음을 이야기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 살아봅시다.


382.
폐허 속의 들쥐처럼 그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항상 뭔가가, 여전히 뭔가가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족
이 소설에서 사랑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에르지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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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더헤드 수확자 시리즈 2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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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지역의 수확령에서는 '수확을 즐기라'라는 고더드의 가르침을 점점 더 지향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죽음이 더 이상 고결하지 않은 시대로 향하고 있다.  


마음속 신념에 따라 살아가라는 가르침과 마음 따위는 내버리고 본능을 좇아 목숨을 빼앗는 것을 즐기라는 가르침을 두 스승에게 받은 후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자아가 분열된 채 갈등하는 로언. 수확 대상자에게 한 달 시한부를 통보하고 삶을 정리할 시간을 준 뒤 수확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게끔 해 수확자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수확자 아나스타샤. 선더헤드는 이 두 사람에게 인류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다.    



2권에서는 점점 격렬해지는 수확령의 분열과 갈수록 막강해지는 '신질서'들의 세력,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 눈여겨 볼 부분은 1권의 「수확자들의 일기」가 스토리의 배경 설명과 '수확자'의 고뇌를 대신했다면, 2권의 선더헤드의 내레이션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문제와 인간이 갖는 고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선더헤드의 정부는 산 사람들의 세계를 다스리고, 수확령은 죽음을 다스린다. 선더헤드는 삶이 의미를 지니려면 죽음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확령은 그런 이유에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죽음이 더 이상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도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도 선더헤드는 이를 지키기 위한 선을 넘지 않는다. 법은 명확해야 하고 지켜질 때 유의미하므로. 그가 루시퍼를 묵과하는 숨겨진 이유다.   


영구적인 삶과 경제적 안정을 통해 스트레스 혹은 생계형 범죄는 사라졌고, 지혜와 양심과 연민이 다스리는 세계가 확립됐다. 그러나 사회 불안은 여전하다. 선더헤드는 이 지점에서 삶의 의미를 '저항'에서 찾는 부류를 짚는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불미자'라는 낙인이 명예롭다. 그렇다면 고더드같은 부류의 인간도 '저항'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진짜 불미자는 로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선더헤드와 수확령의 성격은 극명하게 나뉘어져 있다. 인간의 수명이 영구적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선더헤드는 사망 시대 이후를, 수확령은 사망 시대 이전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더헤드의 세계가 원칙이 살아 있고 부패가 없다면, 수확령은 욕망과 탐욕, 경쟁과 질투, 정의와 불의, 선의와 악의 등 인류사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살아 들끓고 있다. 그들은 '고결한 수확자'라고 불리지만, 때로는 여느 인간보다 더 태초의 본능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 된다.   


선더헤드가 수확령을 침범할 수 없는 것(더 정확히 말하자면 침범하지 않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앞서 말했듯 선더헤드가 삶을, 수확령이 죽음을 관장함으로써 지구에 전지전능한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더헤드는 자신이 정한 규칙에 의해 얽매여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모순에 붙잡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2권에서 흥미로운 점은 클라우드가 진화한 선더헤드에게서 인간성이 간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손상과 고통을 담고 있는 선더헤드는 종종 애도를 하고, 분노와 격분을 경험하고 이를 자제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종단에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분노를 표출한다. 또한 정의와 불의를 조율하고 고독을 인지하며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싶어한다. 그야말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기계가 관장하는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과 오히려 이러한 인간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클라우드. 이 역설적 배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문득 영구적인 삶에서 죽음이 새로운 삶의 통찰을 가져다줄 수 없다면 인류가 존속해야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ㅡ 


어정쩡한 사회과학이나 철학 관련 책보다 훨씬 실질적으로 여러 명제에 깊이 들어가지는 소설이다.   


관찰과 감시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움을 주기 위한 관찰은 감시에 해당하지 않을까? 개인 사생활 보호, 그리고 범죄 예방에 따른 감시카메라 설치. 이 간극에서 둘 사이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선더헤드는 관찰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세상의 사각지대를 없애야하는 상황이 더 빨리 오게 될 것이라 짐작한다. CCTV 확대와 코비드 시국 당시 개인 사찰에 가까운 정보 노출을 떠올려 볼 때 그러한 짐작에 힘을 보탠다.  


고더드의 연설문과 퀴리의 연설문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모든 미드메리카 수확자들이 원하는 만큼 생명을 수확하게 하며 수확자가 갖는 권리의 한계를 없애는 것으로써 인류의 안전한 존속을 우선하기보다는 수확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만들겠다는 자, 수확자가 원하는 세상이 아닌 세상이 수확자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를 우선하며 높은 가치와 이상을 지켜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 누구를 택할 것인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계획도, 거창한 대의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 갖은 한순간의 즉흥적이고 나약한 감정이다. 패러데이는 로언에게 부패한 수확자를 거두기 전에 그들의 삶의 이면을 살펴보고, 먼저 그들을 향한 애도를 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감정일 것이다.  




사족.

자신의 진짜 모습이 그레이슨인지 슬레이드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그레이슨 톨리버의 모습은 전편 <수확자>에서 로언이 겪었던 정체성 혼란과 흡사한데, 영화 <무간도>도 잠깐 생각이 났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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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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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만큼 소설은 심리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쫀쫀함으로 독자의 긴장감을 조여 쥔 채 이야기를 끌고 간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은 어느 현대소설보다 세련됐다.   


사랑과 질투, 배신과 복수심이 엇갈리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서로에게 화살을 겨누듯 육욕과 열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허우적거린다. 두 주인공 마리아와 피에트로의 감정선을 따라가다보면 독자가 힘에 부칠 지경이다. 



마리아의 심리 상태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다. 처음에는 피에트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호한 입장을 보이더니 키스 한 번에 홀랑 넘어간 뒤로는 허영심 때문에 연인 관계를 주변에 숨기고, 급기야 몰래 결혼까지 감행하면서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무심하게 대하는 듯한 태도에 실망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리아는 자신의 경솔하고 변덕스러웠던 행동들을 부끄러워하지만, 젊은 시절에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핑계로 후회나 반성은 하지 않는다. 


후반부에 마리아가 짧은 시간 동안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격렬하게 갈등하는 장면이 대여섯 장에 걸쳐 서술된다. 이 장면을 통해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데, 자책은 하지만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보편적인 우리네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 식상하더라도 한 번쯤 묻게 되는 질문. 마리아를 향한 피에트로의 감정은 사랑이냐, 집착이냐, 그의 자존심이냐. 무엇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제각각일터다. 사랑하는 이의 안온함을 위해 박수를 쳐주며 보내주는 이가 있는가하면, 모든 장벽을 극복하거나 타인의 희생쯤은 나몰라라 하며 쟁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피에트로는 스스로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을 터다. 마리아가 진작에 피에트로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그녀의 진심에 대해 진솔하게 말했다면, 소설에서 보여지는 피에트로의 성향을 봤을 때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마리아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피에트로의 말은 희생과 사랑이 아니라 욕망과 탐욕이었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정작 본인이 모르는 억울함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며 답답함을 안은 채 교도소에서 남은 생을 살아야하는 연진이나 폐쇄된 공간에서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하는 죄수 '3724'처럼, 마리아야말로 남은 생이 지옥 아닌 지옥이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해방될 것이다. 


애초에 니콜라가 피에트로를 채용하지 않았다면, 피에트로가 로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면, 훔친 고기 한 점을 먹지 않았더라면, 마리아가 다시 돌아온 피에트로를 외면했다면 그들의 인생 행로는 달라졌을까. 쓸데없는 가정이다만.  


ㅡ 


포도를 수확하고,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 마리아와 프란체스코의 결혼식 장면 등은 샤르데냐 섬의 서정성과 문화를 충분히 드러냈고, 무척 아름답게 그려졌다. 5월 목초지에서 보내는 마리아 부부의 일상도 경험해보고 싶은 삶의 모습이다. 생계를 위한 혹은 필요에 의한 노동이 아닌 노동은 얼마나 한가롭고 낭만적으로 보이는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피에트로가 마리아에게 다짐했던 "당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겠다"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사비나도, 피에트로도 사랑했던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거만함과 위악이 마치 부러 쓴 가면인 양 허세를 부리며 양심적인 듯 괴로워하지만 결국 제 이기심과 자기합리화로 무장한, 그래서 세상이 늘 자기 편이라고 자만해 타인의 감정 따위는 모르쇠로 일관했던 마리아, 당신이야말로 가장 큰 유죄. 그리고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욕망과 사랑에 스스로를 던져 악의 길을 선택한 피에트로 역시 유죄. 이 난장판같은 복수극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연적에게 지옥을 선사한 사비나일지도... .



351.

어떤 의사도 그들의 질병을 고칠 수 없듯이 어떤 판사도 그들에게 이미 내려진 형벌보다 더 큰 형벌을 선고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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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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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읽은 이언 매큐언의 작품이 <스위트 투스>였지싶다. 사실 속죄만큼 임팩트 있는 작품을 만났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이 소설은 <속죄>를 쓴 무렵에 쓰여졌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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