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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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난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는 말아요, 절대로, 절대로. 



느닷없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다섯 명의 남자가 각자 있던 장소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사방에서 달려왔다. 기구의 바구니에 타고 있던 소년의 할아버지를 포함해 여섯 명의 남자들이 기구에 달린 밧줄에 매달렸다. 줄을 끝까지 잡고 있다가 100미터 상공까지 떠오른 존 로건이 추락했다. 그가 추락한 시간은 불과 30초.  





 


서로 처음 본 그들에게 소환된 덕목은 협력. 모두 함께 줄을 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면, 누군가 처음으로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나머지 사람들도 계속 붙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은 누구인가?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것이 도덕적 책임을 물을 만한 요인이 될 수 있을까? 밧줄을 잡았다가 놓았던 그들 모두는 로건의 죽음에 간접적 가해자일까, 혹은 로건과 함께 죽기를 거부한 것이 잘못인가? 어쨌든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텐데, 어차피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 맹점이다. 


기구의 줄을 잡는 것도, 놓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이타심과 이기심은 늘 공존한다. 남들에게 무엇을 주고 자신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 어디까지가 선의를 지키는 경계선일까.  


ㅡ 


조는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이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구니에 타고 있던 소년은 기구가 20킬로미터를 날아가 무사히 착륙했기 때문에 전혀 다친 곳이 없었다. 모두가 밧줄을 잡지 않았아도 소년은 살았다는 것이다. 결국 로건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됐고, 30분간 밧줄을 잡고 있다가 결국에 놓아버려 로건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는 조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로건과 함께 추락했을 수도 있다. 조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정작 이 소설에서 집중하는 것은 인간의 윤리가 아니다. 문제의 시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단한다. 드클레랑보 증후군, 망상에 따른 믿음으로 신에 의한 운명적 사랑을 믿는 패리의 등장.   



소설이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나는 패리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워졌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패리가 이렇게까지 집착하고 의미를 부여할 만한 빌미를 조가 제공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거의 매일 조의 집 앞에 찾아와 길 건너편에서 두어 시간 자리를 지키고, 일주일에 서너통씩 편지를 보낸다. 그럼에도 클래리사는 패리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이쯤되면 독자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사이사이 클래리사의 지적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짐작을 불러낸다. 더하여 경찰조차 조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조에게만 보이고, 조에게만 들리는 패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일상의 작은 균열은 평소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적, 혹은 관계가 불안해지면 별 거 아니던 작은 균열은 어느새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슬그머니 커지게 된다. 클래리사가 조의 불만과 두려움에 찬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그가 혹시 미친 건 아닌지 의심하고,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웠던 조가 느닷없이 학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 역시 이와 같은 원인에 있을 터다.   


패리가 종교와 신을 통해 조에게 집착한다면, 조는 2년 전 한계를 느껴 중단한 박사 과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학계에 집착한다. 클래리사는 기구 사건에서 밧줄을 놓았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조가 패리를 이용한 것 이라고 짐작한다. 이 모든 과정은 패리가 유도한 것이 아닌 조가 의도한 바대로 이끌려 왔다는 것이다. 클래리사의 지적이 흥미로운 이유는 작가 이언 매큐언 역시 '피리 부는 아저씨'가 되어 스토리와 독자를 이끌고, 독자는 홀리듯 그의 뒤를 따른다는 점이다. 소설의 결말이 반전인지 아닌지는 독자 각각의 판단에 맡긴다.  


소설에서는 종교와 과학, 사랑과 집착, 오해와 사실, 망상과 진실, 관계와 고립 등 우리 주변에서 이분법적으로 맞닥뜨리는 갈등에 대해 등장 인물들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클래리사가 조를 신뢰했다면, 조가 패리에게 조금만 호의를 베풀었다면, 조가 이성적으로 행동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원제는 ENDURING LOVE. 
책의 마지막에 실린 <부록>을 읽으면, 원제가 무서워진다.
반전 아닌 반전이 던진 이언 매큐언의 묵직한 메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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