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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23년 6월
평점 :
시인은 책 머리에 책과 책들 사이를 서성이며 이 글들을 썼다고 했다. 경이롭고, 침잠하고, 기다리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귀 기울이는 날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일단 그저 좋았다. 두어 달 동안 축적되어진 피로와 고단함 끝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던지. 제목에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나도 그랬다). 물론 이 책에 에밀 시오랑에 대한 글과 시인의 감상이 실려있지만, 온전히 에밀 시오랑에 대한 책은 아니다. 에밀 시오랑, 니체,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좋아하는 시인의 글을 읽다보면 책 제목의 선정 이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독, 멜랑콜리, 노스탤지어, 망각의 미덕,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문화, 밤과 고요, 존재와 소실, 공허와 무, 기다림의 부조리, 디지털 시대에 책 읽기의 유용함, 몰입한 독서의 희열, 음악이 주는 기쁨, 상상력의 부재, 동식물과의 공존, 사랑의 정념, 침묵의 장엄함, 나이듦의 가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과 더불어 소비되는 값싼 연민.
팬데믹 사태, 정인이 사건, 이태원 참사 등 근래 몇 년 사이에 벌어졌던 여러 사건.사고들뿐 아니라 개선되지 않는 노동 현장과 산업 재해, 전쟁과 내전 난민, 살인적 기아, 학교 및 직장 폭력, 증오 범죄, 인종주의, 유혈폭동, 사회적 약자를 향한 억압과 차별, 청년 실업, 지구 온난화, 한국 정치의 구태, 갑질사회의 비대칭 구조, 혐오와 제노포비아 등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들을 짚으며 불행의 서사가 넘쳐 이제는 불행과 재난이 상습화된 현대 사회가 이미 디스토피아라고 단언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직시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인문학으로 고찰한다.
필립 들레름은 아침 식탁에서 조간신문 읽는 일을 두고 "이것은 모순적인 사치다"라고 했다고 한다. 평온한 아침 식탁에서 펼쳐든 신문에는 훈훈한 기사보다는 흉악 범죄와 자연 재해, 정치적 비난, 전쟁과 내전, 테러 등 죄악이 난무한다. 아침 식탁의 고요함과 소란스러운 신문의 극단적인 부조화. 시인은 종종 이 부조화의 괴리에서 기묘한 고통에 빠진다고 했는데, 현재를 사는 우리는 글쎄... 그가 느끼는 고통조차 무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 이 부분을 읽는 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젊건 늙건 인생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잘-죽음은 잘-삶에 잇대어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이 삶의 지혜나 잃어버린 길을 찾는 데 지침서가 된다고 장담할수는 없다. 다만 때때로 지치고 고단할 때 쉼이 되어줄 것이다. 시인이 묘사하는 삶의 비루함으로도, 쾌청한 가을 하늘의 볕 좋은 어딘가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나는 충분했다.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