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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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내 눈에는...... 날개가 잘려나간 크고 검은 새들로 가득찬, 아주 커다란 새장 같아요." 



'칼비노 이전에 팔라체스키가 있었다' 라는 문구에 홀랑 넘어가 읽게 된 작품이다. 책장을 넘기면 곧바로 소설의 남다른 분위기가 전해진다.  


페나, 레테, 라마 세 노파가 땐 벽난로의 연기에서 태어난 연기 인간 페렐라. 그는 세 노인이 불을 때면서 주절거린 대화 내용 덕분에 본의 아니게 아무 쓸모 없는 지식ㅡ사랑, 전쟁, 철학 등ㅡ을 배웠다. 언제부터 생각과 이해의 기능이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자신이 하나의 생명임을 느꼈다. 언어를 듣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말을 할 줄 알게 됐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람이었다. 








소설은 인간의 욕망과 제 잇속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덕스러움, 그리고 폭력적인 군중 심리를 통해 인간의 민낯을, 그리고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사회 문제를 환상적이고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세 노파의 이름인 페나pena, 레테rete, 라마lama는 각각 고통, 그물, 창을 의미하는데, 페렐라가 이들이 피운 연기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은 의미를 갖는다. 소설에서 '한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다른 한 사람은 고통스런 마음을 포획한 그물을, 또 다른 한 사람은 포획한 마음을 꿰뚫는 창'이라는 표현을 쓴다. 소설의 진행 과정을 보면 이 이름 들이 왜 반복적으로 불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육신과 정신이 순화된 신비롭고 새로운 존재인 연기 인간 페렐라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왕을 비롯한 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신과 비견되는 추앙을 받는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단조롭기만 한 그의 말은 계시요, 구원이다.  


재미있는 점은 페렐레는 거의 말이 없다. 화가, 사진사, 은행가, 시인, 박사, 철학자, 대주교, 왕궁의 하인 등 페렐라를 찾아온 이들은 페렐라가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얘기를 하지만,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성공, 대중의 인기 등을 탐하는 속내를 교묘히 감추며 자신들의 주장만 강화하고 정당화한다. 말 끝에는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않은 페렐라에게 고맙고, 감사하고, 존경한다고 말한다. 또한 다과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페렐라에게 질문을 하지만 그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 역시 페렐레 뿐 아니라 타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제 말만 할 뿐이다. 사회적 갈등의 원인 대부분이 경청의 부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비혼이든, 기혼이든, 혹은 외도 대상자든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자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남자들은 지적 허영을 부리며 교양을 과시하면서 여자들을 외모로만 평가하며 낮잡아 보고,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여성들은 괜찮은 남자들의 청혼을 기다리는 게 전부다. 여러 여성들의 발언을 통해 당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차별, 정략결혼, 성에 대한 내밀한 고민, 성정체성에서 오는 혼란과 번민, 드러낼 수 없는 성욕과 관능 등 여성이 갖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페렐라가 내려간 도시는 왕이 죽으면 가장 부유한 시민이 왕좌에 오른다. 나라의 금고에 금을 가장 많이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이다. 왕을 죽인 자는 새로운 왕에게 은총을 받고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의 신분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지경이니 돈이 많은 자들은 왕을 꿈꾸고, 꿈을 이룬 순간부터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세상의 주체는 과연 누구(무엇)일까?  


ㅡ 


일방적 추종이 흔들리는 계기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아주 사소하게 시작된다. 분노에 찬 근거 없는 짐작과 비방, 혹은 농담처럼 흘리는 말 한 마디 등 스치듯 가볍게 지나가는 의심은 귀와 입이 더해질수록 그 크기와 무게가 커지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재편집된다. 간혹 누군가는 대중의 억지스러운 짐작을 제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을 왜곡하고, "누가 알겠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라는 무책임한 말들은 모든 것들을 이미 하나의 결론에 두고 있다.   


한때 페렐라를 추앙했던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과도하게 평가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연기 인간은 신적인 존재에서 악마의 자식으로 추락하고 만다. 정작 페렐라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단죄하는 데에 있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대중에게 페렐라에 대한 약간의 비난과 적개심만 뿌려놓으면 그만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존재, 무無에 '신'이라는 프레임을 씌어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 세상에서 가능한 멀리 둔다. 군중을 조종하고 죄의식을 손쉽게 씻어내는 데 이만한 수단이 없다. 


페렐라는 늘 그 모습 그대로다. 전혀 변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군중은 폭도가 되어 페렐라를 몰아 세웠다. 페렐라는 야유와 창피를 당하고, 비웃음과 경멸을 사며, 물리적 공격을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아무도 그를 보호하려 들지 않았다. 페렐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추앙했을 때도, 폭력적으로 가해할 때도 그 이유를 모른다. 도대체 왜?   


대주교를 비롯해 과거 펠레라를 구원과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이들 모두가 증인으로 나서서 그를 부정하고 비난한다. 그토록 경외했던 단어인 '가볍다'는 어느새 혐오 단어가 되어버렸다.   


페렐라는 왜 스스로를 '가벼운' 인간이라고 했고, 사람들은 한때나마 가벼움에 매료됐을까? 어쩌면 인간의 삶이, 세상사가 너무 무거워서 아닐까? 욕망, 질투, 사랑, 아름다움, 부富, 권력 등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치고 어느 것 하나 무겁지 않은 것이 없다. 삶의 무거움은 페렐라가 왕궁을 출발해 도시의 중심 도로를 가로질러 포르타 칼레이오에 도착하는 동안 걷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람들의 욕설과 비웃음과 경멸을 감내해야하는 그 길이 마치 인간의 인생 행로 같이 느껴졌다. 



1911년에 쓰여진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와 군중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 투영해도 전혀 괴리가 없다. 또한 이념의 전쟁 시대였던 20세기를 빗대어 볼 때 이렇게 적절한 소설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책소개에서 언급했듯 이탈로 칼비노의 느낌이 곳곳에서 보여진다.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비롯한 '선조 3부작'의 주인공들에게서 '연기 인간'의 면면이 보이고, 가상의 두 도시에 대한 묘사는 칼비노의 소설들에서 표현된 도시들이 연상된다. 환상문학이라는 공통점에도 이 두 작가가 그려낸 작품의 맛은 사뭇 다르다. 팔라체스키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었기에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그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주제에 접근한다면 칼비노는 좀더 은유적이고 해학적이다. 읽으면서 칼비노의 작품들을 부분 발췌해 읽었는데, 비교하며 읽는 맛도 제법 쏠쏠하더라는. 


좋은,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작가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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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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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한테도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했던 40대 여성 주디스 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주디스는 남겨지고 혼자가 되는 것에 익숙하다.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자신이 대화를 이끌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호감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도 온통 신경을 집중한다. 그렇다고해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녀는 곧이 곧대로 듣고,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들고, 혼자 결론 짓는다. 


읽는 내내 주디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외모가 뛰어나지 않다, 특출난 재능과 지참금이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등등의 이유로 주디스 헌은 폄하된다. 어처구니 없게만 보이는 혼자만의 상상과 자기혐오를 반복하는 주디스의 독백을 읽으면서 그녀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마음이 아팠다.  


주디스는 일평생 그녀의 삶을 좌지우지 했던 이모를 원망하지만, 그녀 역시 이모의 일생을 닮아간다. 다른점이라면 주디스는 제 삶의 억울함을 토해낼 대상이 조카가 아니라 술이었다는 것뿐.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아일랜드 사회의 단면을 짐작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이민자 신분으로 삼십 년간 미국 생활을 했으나 금의환향은 고사하고 장애를 안고 귀향한 제임스 매든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같은 성공에 대한 꿈, 미국의 화려함, 그리고 어리석은 탐욕과 쾌락을 욕망한다. 또한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로 차별을 받았던 처지에 있었음에도 아일랜드로 돌아와서는 유색 인종을 비하한다.  


라이스 부인은 서른 살이 넘은 아들을 '아기'라고 부르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참견하고 제재하면서 모든 수발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것이 아들을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버나드 또한 그러한 엄마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하녀를 희롱하고, 거짓말까지 꾸며내 모사를 꾸미는 게 전부다.  


열여섯 살 하녀 메리는 하숙집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인 아들과 주인 동생의 희롱과 강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서도 오히려 자신을 탓하는 모습은 현재에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과 같은 결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사이사이 가난한 아일랜드 경제 사정과 빈부 격차, 여성 문제, 종교 등 인물들의 정황과 사건들을 통해 19세기 이후부터 꾸준히 대두되었던 사회 문제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ㅡ 


이 소설은 한편의 코미디극 같기도 하다.  


주디스는 오닐 부부가 절친이라고 믿지만, 정작 오닐 가족은 주디스가 일요일 오후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것이 마뜩치 않고 불편하다. 그녀가 올 시간이면 네 식구가 너나할것 없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누군가 그녀를 맡아야 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은 오닐네 가족에게 짜증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주디스는 오닐네 가족이 자신한테 관심도 없고, 그녀의 방문을 유쾌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교양이라는 허위 뒤에서 각자의 진심을 숨기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잘못의 원인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상대의 치부를 까발리는 자들의 모습은 시쳇말로 웃픈 소동극처럼 보인다.  


육체적 욕망을 억누르고 기독교적 신념으로 순결을 지키며, 폭력적이고 인색한 이모를 헌식적으로 돌보았지만, 세상은 위선의 허울 뒤에서 죄악과 부패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법도, 신도 이러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도대체 도덕과 종교와 법은 왜 존재하는가? 충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살아온 주디스는 신은 없다고 단정한다. 


ㅡ 


주디스는 버나드와 말다툼을 하면서 이번 생은 사후에 판별될 공덕을 쌓기 위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말하지만, 이 고되고 외로운 십자가에 주디스 본인도 얼마나 분노했던가. 


자괴감에 치를 떨며 괴로워하는 주디스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녀는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다. 고해성사를 핑계로 자신의 처지를 늘어놓는 그녀의 말을 사제조차 들어주지 않는다. 주디스는 신에게 말한다. 어서 계시를 보여달라고.  


퇴거를 통보받고 방 안에서 홀로 흐느끼며 현실과는 다른 일상과 훗날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하는 주디스의 모습은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진다. 죽어서만이라도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했던 주디스의 처절한 독백이, 그리고 주디스에게 어디로 가야되는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물음에 어디로 가야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대답을 못하는 주디스의 모습이, 나는 마냥 슬펐다. 


술에 취한 상태로 택시를 타고 마치 순례하듯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주디스의 모습은 재산과 마땅한 직업이 없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없는 중년의 비혼 여성을 넘어서 어느 한 곳에 안정된 삶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도시 유목민이 된 우리네 모습과 겹쳐졌다. 


결국 그녀가 도달한 곳.
주디스는 마지막까지 이모의 그늘에서도, 신에게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그녀의 한 마디는 왜이리 아련한지.


ㅡ 


1955년에 쓰여진 가난하고 외로운 비혼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이토록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주디스 헌이라는 캐릭터가 조금 극단적으로 읽힐 수 있으나 기실 우리는 점점 더 주디스 헌의 삶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금에 있어 출산은 고사하고 결혼도 꺼린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수명은 연장되어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으나 실질 노동 인구는 줄어들어 노인 복지가 더 나아질지는 미지수다. 핵가족 시대에서 1인 가구 시대로 접어들어 노인 부양과 노년층 빈곤 및 고독사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또한 우울증과 극단적 선택, 조기 퇴직과 실업 등 소설에서 보여지는 사회적 문제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 크고 넓고 깊게 심각해지고 있다. 


요양원으로 보내진 에디 마리넌. 그녀의 모습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유,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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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소설
앙투안 로랭 지음, 김정은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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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에서 스릴러 소설 찾기가 쉽지 않은데 작품성, 대중성을 모두 잡은 작품으라고 하니 자못 궁금하다. 미셸 우엘벡의 작품들과 견줄만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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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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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누구요?"
"우린 사람이오."

(p137) 
 


선문답같은 등장인물의 대화와 부조리극으로 오래 전부터 유명한 이 작품은 한 번만 읽기에는 부족하다.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는 작품이다. 이번까지 세번째 읽는다.  


50여년간 실체도 명확하지 않은 고도Godot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두 남자. 에스트라공은 이만 떠나자고 하고,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들의 하루는 단조롭기 그지없다. 한 그루의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입씨름하고, 서로의 불만을 토로하고, 목을 매려다가 실패하고, 소년에게서 내일의 다짐을 받고, 고도를 기다릴 뿐. 이것이 반복되는 그들의 매일이다. 







베케트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통해 일상의 단조로움, 의미없는 행위, 현대인이 갖는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극도의 개인주의로 깊어지는 외로움을 얘기하고 있다.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는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블라디미르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뉘우친다는 에스트라공의 말은 획일화된 현대사회의 틀 안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밀어넣지 못해 도태되는 인간의 모습을 자조한다.  


블라디미르는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당시 같이 못박힌 두 도둑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 현장에 있었던 네 사람 중 단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의 얘기를 썼는데, 후세 사람들은 오직 그 사람의 기록만 믿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에스트라공은 간단히 대답한다.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그렇다는 것. 이는 너나할것 없이 모두 하나의 방향으로 달려갈 때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누가 정해놓았는지 알 수 없는 기준선에 도달하기 위해 자아쯤은 놓아버리며 안전을 명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권리를 헐값에 팔아버리고 이후에 찾아오는 자괴감에 우울해지는 우리네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  


럭키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포조에게 인간으로서 창피하고 파렴치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주인으로부터 겨우 얻어먹는 럭키의 뼈다귀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뜯는 에스트라공의 모습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아를 버리면서까지 복종하는 럭키에게서, 부조리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는 소모품처럼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그들의 대화를 읽자니 인생의 공허와 외로움을 새삼 느낀다.  


2막에서 에스트라공은 혼자 있을 때가 낫다고, 그들은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다고 말하면서도 블라디미르와 붙어다닌다. 이러한 모습은 버림받을 게 무서워 폭력을 감수하는 1막에서의 럭키와 닮아 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무엇을 염원하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ㅡ 


1막과 2막의 차이를 보자면 일단 나무. 1막에서 묘사된 나무에는 마치 죽은 것처럼 잎이 전혀 없는데 2막 시작에서는 나무에 잎이 달려 있다. 두 번째는 검정색이었다가 흐릿하게 바랜 구두의 색깔. 이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억하는 어제는 사실 훨씬 이전이었음을 암시하면서, 그들이 긴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고도를 기다려왔음을 얘기하고, 원을 그리듯 끊임없이 모자를 돌려쓰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단조롭고 반복적인 삶에 한 점 의혹과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채 인생이란 죽는 날까지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삶의 근본이란 무엇인지를 고찰하게끔 한다.  


앞이 안 보이는 포조가 누구냐고 묻자 블라디미르는 그들이 사람이라고 답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여러 의미로 이해된다. 현대인이 (럭키로 대변하는) 짐승과는 달리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혹은 사회적 약자를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시와 노래와 춤과 연민의 '인간성'을 잃지 않았는지, 이것이 베케트가 독자와 관객에게 던진 질문이 아닐까. 



흥미로운 점은 세상이,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그렇다고, 베케트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 럭키가 어떤 잘못을 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운명이나 시대가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인생은,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 예외없이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떠나자고 말만 할뿐 정작 떠나지 못하는 에스트라공과 기약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가 같은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과는 반대로 포조와 럭키는 비록 앞을 못보고 말을 못할 지언정 길을 떠난다. 새로운 길을 떠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안주한다고 해서 행복을 장담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가다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데서 넘어진다면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면 된다는 포조의 말에서 앞선 질문의 답을 대신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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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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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2
도시엔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 


작가는 춘천에서 자라 현재 원주에서 약국을 운영 중이다. 나는 춘천은 비교적 구석구석 다녀봤지만, 원주는 백운산과 치악산을 가본 것이 전부다. 그래서 작가가 책에서 춘천 가는 길의 휴게소를 언급했을 때 '음... 가평휴게소쯤이겠군.', 또는 명동 거리와 소양호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고개를 주억거렸다면, 약국에서 바라본 원주 시내의 풍경은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았다. 원주 시내를 가 볼 핑계가 생긴 셈이다. 








버섯, 새, 고래, 거북, 문어, 나무, 외국인 이주민, 그리고 그들과 주류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야생 동물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기까지 혹은 혐오동물로 전락하기까지, 그리고 동물실험을 비롯한 동물학대, 이주 노동자, 군 의문사, 존엄사, 노화, 자연의 순리와 생명의 순환, 생동성, 그리고 각각의 생명체들이 갖는 생의 경이로움 등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다. 


내가 줄줄이 늘어놓은 단어들만 보면 상당히 심각한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제법 묵직하고 심오한 현상들이 우리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약국을 드나드는 이웃들에게서, 극지방뿐 아니라 동네마다 하나쯤은 있는 뒷산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친구와 나누듯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작가가 발췌한 소설과 시와 옛 문헌의 일부들, 그리고 소소하지만 늘 바쁜 일상에서 잠시 갖는 철학적 사유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철학이 아닌 우리의 삶 속, 찰라의 순간에 떠오르는 그 수많은 생각들이야말로 철학이 아니랴. 


지난 주말에 엄마와 밥을 먹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엄마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더랬다. 북가좌동(책에서 이 동네 이름이 나와 불현듯 떠오른 아줌마)에서 경영식집을 하던 친구분은? "걔 죽은 지가 언젠데." 절친 숙이 아줌마는? "절교했다." 노인들이 무슨 절교냐고 했더니 절교할 때는 노인이 아니었다나... .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잠깐 알았다가 잊어버린 이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도시에서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작가.
에세이를 다 읽은 후 이전에 읽었던 그의 몇몇 소설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작가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 소리없이 사라져 간 이야기들을 쓴 거였구나... 라는 것을.




사족
마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신시아 라일런트의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림책 속 할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혼자 남겨질 강아지가 안쓰러워 마당에 들어선 길강아지를 선뜻 들이지 못한다. 누군가 노년에 반려 동물을 키우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노년에 반려동물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도, 동물을 혼자 남겨두는 것도 두렵다는 이유에서다. 마토의 이야기를 읽으니 사실 반려동물을 들이기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과 어떻게 마음을 주고 받아야할지, 이미 많은 죽음을 보아온 내가 또 하나의 죽음을 보탤 용기가 있을지(물론 인생사,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사고나 질병없이 순리대로 산대면야), 잘 모르겠다. 



p107
아세트아미노펜 300밀리그램과 카페인 30밀리그램을 먹어서 나아지는 것이 몸의 통증만일까? 마음이 아플 때도 누군가는 진통제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엔 내가 너무 어렸던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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