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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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도대체 어떤 인간으로 태어나야 그처럼 커다란 관에 갇혀 사는 인생을 사게 되는 걸까? 어떻게 이디시어 신문을 사러 나가는 때를 빼고는, 낮 동안 단 한 번도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코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지도 않는 삶을 사는 거지?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유대인이어야만 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수감자들이었다. 그게 바로 모리스였다. 치명적인 참을성, 혹은 인내심 아니면 뭐 그따위 걸 갖고 태어난 사람.  



 


 

 




이 소설은 뭔가... 내내 애잔한다. 한평생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선의를 잃지 않고 일했으나 예순 살의 모리스에게 남은 것은 대출이자가 남아 있는 집과 손님이 끊겨 폐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식료품점이 전부다.  


그레이엄 그린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건조함과는 사뭇 다르고, 필립 로스도 연상되지만 그와도 다르다. 잔잔하면서도 고요한 울렁임이 가슴 밑바닥에서 소리없이 흐른다. 여기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정서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삶의 전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 정서가 현실감 있고 진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어느날 마을에 나타난 청년 프랭크 알파인. 모리스는 부랑아처럼 오갈 곳 없는 그를 받아준다. 하루에 열두 시간 가까이 일하지만 프랭크는 만족했다. 일단 추위와 배고픔을 피할 수 있었고, 이슬을 맞지 않고 잠들 수 있다. 또한 모리스가 준 옷은 깨끗하고 편안했다. 무엇보다 떠돌아 다니지 않아다는 점이, 창 밖이 아닌 안쪽에서 밖을 바라볼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이 장면은 소설 후반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누구든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볼 수 없고, 각자의 시선에서 볼 수 있는 건 상대의 외형에 불과하다. 가게의 안을 좀더 자세하고 보고 싶다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하듯 인간 역시 상대의 내면을 알려면 문을 열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단지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는 입장이 된다해도 그것이 행복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프랭크는 경험과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닫는다. 



헬렌이 의도적으로 비유대인 프랭크를 피했음에도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프랭크는 헬렌을 처음 본 날 그녀의 눈에 비친 갈구를 한눈에 간파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갈구를 떠올렸고, 그녀가 인생에서 뭔가를 기대한다는 그 느낌 역시 자신의 욕구와 흡사했다. 프랭크와 헬렌은 현실적인 문제로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화를 나눈다. 


헬렌은 젊음의 특권이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가능성을 잃어버린 자신이 더이상 젊다고 생각하지 않는 헬렌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인생이란 '가능성'이다. 이는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떠나온 젊은 시절의 모리스 또한 지금의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간절하게 바란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에 기댄 미래. 모리스, 헬렌, 프랭크는 제한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에게 거울의 역할을 했던 건 아닐까싶다.



프랭크가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있듯 헬렌 역시 프랭크에 대한 편견이 있다. 프랭크는 모리스에게 유대인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며, 본인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모리스는 유대인에게 율법도, 예배도 중요하지만 정작 본질은 옳은 일을 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인종과 민족과 국가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중요한 말이다.  


소설에서는 프랭크가 유대인을 이해하기 위해 유대 역사에 관련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한다. 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는 것과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끝까지 노력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이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크는 모리스의 단조롭고 지루하고 지긋지긋한 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큰 고통을 안고 살면서도 타인의 삶의 고통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그의 마음도 납득하지 못한다. 프랭크는 이 세상의 이방인이자 혐오의 대상인 유대인 모리스가 갖은 타인을 향한 연민을 대할수록 제 불행에 겨워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자신이 더 대조적으로 드러나기에 불편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프랭크는 가게에, 그리고 헬렌 곁에 남기 위해서라도, 가게를 살리고 싶어한다. 그의 노력은 처절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그의 거짓말과 잘못은 스스로 자신이 갇힌 감옥의 창살을 하나씩 만든 셈이다. 처음 강도 행각에 가담한 죄의식으로 모리스 가게의 무보수로 일하기를 자청했으나 또 다시 도둑질을 했고, 헬렌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잘못을 저지르는 등 스스로 잘못의 고리를 꿰어갔기에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도 그 다음 창살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그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도와 상관없이 거짓으로 관계를 시작한 프랭크는 발버둥칠수록 더 조여오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 신세가 될 수 밖에 없다. 


프랭크는 식료품점에서, 24시간 카페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이다와 헬렌의 생계를 책임지고, 동시에 헬렌이 대학에 등록할 수 있도록 애쓴다. 도대체 프랭크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모리스에 대한 죄책감, 혹은 헬렌에 대한 사랑? 나는 그것보다 이것이 그가 살아갈 명분이 되어주고, 존재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주며, 자신의 미래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헬렌은 프랭크에 대한 감정이 사랑과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곤경을 외면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증오를 회피하기 위해 프랭크를 대신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에 유대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프랭크. 이는 바꿔 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유대인과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홀로코스트라는 특정된 참혹한 고통을 간직한 민족성을 일반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리스의 삶이 격하게 공감되는 이유는 그의 인생 궤적과 회한이 대다수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테다.  


ㅡ 


p333
그는 슬픔 속에 자신의 인생을 생각했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했다. 가난한 자의 불명예. 이다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깨워 사과하고 싶었다. 그는 헬렌을 생각했다. 애가 노처녀가 된다면 처참한 기분일 거다. 프랭크를 생각하며 그는 작게 신음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 인생을 바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구나. 그 진실이 천둥처럼 몰려왔다.



인생을 바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후회는 비단 경제적.사회적 성공에서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고달픈 유년 시절을 보내고 어쩔 수 없이 현재에 이르러 죄의식과 가책에 혼란스러워하는 불쌍한 아이를 거두지 못했다는, 성숙하지 못한 어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 것은 아닐런지. 젊은 시절 영악하게 처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조 섞인 한탄이 과연 모리스의 것이기만 할까.  


늙은 행상에게 말없이 따뜻한 레몬차를 건네고, 배를 곯아 우유와 빵을 훔친 청년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며 불쌍한 '아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 증오했던 이웃의 불행이 마치 자신의 증오 때문에 벌어진 것인 양 고통스러워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모리스다. 



책을 덮은 후 프랭크의 이후 삶이 몹시 궁금해졌다. 모리스와 비슷한 인생 경로를 가게 될까? 아니면 대학을 갔을까? 그것도 아니면 헬렌과 결혼했을까? 무엇보다 그 끝에서 모리스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다 읽고 난 후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폴 하딩의 <팅커스>가 연달어 떠올려졌다. 하지만 두 작품과는 다른 결의 여운이 깊게, 꽤 오래 남을 듯 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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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현대 철학 - 아들러, 라캉, 마사 누스바움… 26인의 사상가와 함께하는 첫 번째 현대 철학 수업
안광복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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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존 롤스까지 스물여섯 명의 사상가를 들어 규율과 지배, 사색과 고독의 부재, 목적성 상실, 하위 정치와 새로운 경제적 상상력의 필요성, 구어 문명의 재再도래, 창조와 지배와 자유, 영혼의 빈곤, 생명과 진화 등을 '욕망' '틀' '통찰' '어울림'을 주제로 이야기한다.  
 







이토록 찰떡 넘기듯 꿀떡꿀떡 받아 먹을 수 있도록 쓰여진 철학서라니. 카를 융, 라캉, 벤냐민 등 머리를 뜯어가며 읽었던 내용을 이렇게 수월하게 개념을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책이다. 다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현대 철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국한된 얘기다. 입문서보다 더 쉽게 읽히는 책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이러구러 접해왔던 현대철학은 철학에 국한하지 않는 것으로 읽혀졌다. 이데올로기, 순수철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사회과학 등이 한데 맞물려 넓은 범위에서 철학적 사유를 아우르고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해왔던 생각들이 전혀 틀린 건 아닌 듯 하다.  


ㅡ 


거울에 보이는 '나'는 실체가 아닌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평가를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다. 그래서 '나' 속에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가가 담겨 있다. 라캉은 '나'는 타인의 욕망이 빚어낸 상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인정받기 위해 짜여진 세상에 바라는 바를 욕망하며 살아가는데, 이는 '나'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음이다. 그러니  타인의 욕망을 무작정 따르지 말고 진정한 욕망을 좇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감정이나 성품은 그 자체로는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이를 유용한 방향으로 이끌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아들러의 말이 참 와닿는다. 



시장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 인간의 다양했던 삶의 동기가 오로지 '돈' 하나로 통일되었다. 칼 폴라니는 사회 저변에 널린 온갖 위험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이에 대한 원인을 한군데에서만 찾을 수도 없고, 이를 흑백논리로만 규정할 수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울리히 벡은 과학을 비롯한 각 분야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학문 아래 놓인 현실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는 '하위 정치'를 강조한다. 또한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 더 나아가 협력의 역할을 중요시 여긴다. 


규율 권력은 법과 원칙을 내세워 사람들을 서서히 길들여나간다. 미셸 푸코는 규율 권력이 감옥과 군대, 학교와 병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있다고 주장한다. 권력은 사람들이 자신이 강제당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고, 이로써 온 세상이 '행복한 감옥'이 되어가고 있음을 강조한다. 푸코는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을 언급하는데, 우리나라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옥사를 떠올려보면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납득이 될 것이다.  


ㅡ 


누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에 대한 공포와 그로인해 비롯된 혐오의 감정을 느낀다. 특히 '접촉'은 전염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유대인 게토, 미국의 흑인 구역  분리부터 현대의 따돌림과 혐오 표현에 이르기까지 이를 증거한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에 눈감고, 배려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폭력으로써 억압하는 처지에 발달하는 과학기술과 합리적 사고는 더 큰 증오와 폭력을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생존 본능을 뛰어넘는 인간적 욕망이 가득하니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 양심과 형이상학적 욕망을 따르라고 권한다. 인간의 자유란 이러한 의무감과 책임에 기꺼이 따를 때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는데 자유와 의무와 책임을 묶어서 깊게 생각해볼 필요성을 갖는다. '옳음rightness' 보다 '좋은goodness'이 더 중요하다는 매킨타이어의 말이 좋더라.  


읽다보니 '인간 진화의 끝은 어디일까?' '인간 그 자체(육체와 영혼)의 자연 진화만을 진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그야말로 '진화'가 맞기는 한 걸까?' 라는 막연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ㅡ 


철학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저자는 그 위대함은 철학이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안광복 선생의 책을 읽으면 철학이 우리가 속한 사회와 삶에 얼마나 밀착되어있는지를 늘 깨닫는다. 빈부격차, 차별과 혐오, 기후변화, 전염병 등 철학은 이 문제들과 별개로 위치해 있지 않다.   


이 책에서 눈여겨 본 철학자는 에른스트 카시러. 아직 이 학자의 책을 접하지 못했거니와 용어가 낯설지만 적어도 저자의 간단한 설명은 흥미로워 읽어보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나치스 시대를 지나오면서 인류 문명의 방향에 대한 카시러의 사유가 작금의 시대에 아주 시의적절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리고 한번쯤은 집중해서 작정하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철학자는 에마뉘엘 레비나스. 가벼운 에세이는 읽었는데 그의 문헌을 제대로 읽은 경험이 없다. '형이상학적 욕망'에 대해 잘 좀 읽어보려고.  



저자는 우리가 사는 21세기가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가 살았던 20세기 야만의 시대와 얼마나 다른지를 묻는다. 보이지 않는 비열하고 사악한 방식은 더 발달했을테고, 적어도 전쟁은 없으려니 했으나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철학자와 사상 끝에 마련해 놓은 안광복 선생의 [생각 열기] 코너다. 혹시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대여섯줄에 걸친 간단한 정리를 읽고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하다보면 앞선 내용들을 곱씹어볼 수 있다. 


내가 중등 이상 청소년들에게 꼭 추천하는 책이 안광복 선생이 아주 오래 전에 쓴 <열일곱 살의 인생론>이다. 그들이 짧게는 그들 인생의 3년을 걸고 학업에 집중하기 직전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인데, 이 책 <처음 읽는 현대 철학>도 한번은 읽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물론 위에 썼듯 청소년 독자뿐 아니라 현대 철학이 엄두가 나지 않는 독자에게도 권하는 바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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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앰버슨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0
부스 타킹턴 지음, 최민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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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조지 앰버슨 미내퍼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앰버슨 가문이 시대의 변화와 흐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묻혀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도입 부분에서 1880년대에 유행했던 패션, 주택 건축 및 인테리어, 놀이문화 등 당시의 트렌드, 사회 구조와 인프라의 변화, 그리고 사라진 풍습과 로맨틱한 청춘과 사랑을 서술하는데, 무엇보다 앰버슨 가문의 대저택에 대한 표현은 문장을 따라 그림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한다.  


또한 소설 후반부에 들어서는 산업화 과정에 따른 도시와 사회 저변의 변화를, 그리고 조지가 과거를 회상하며 몰락한 가문의 택지를 돌아보는 장면을 다이내믹하게 서술한다.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섬세한 묘사는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면은 입체감 있는 읽는 재미의 쏠쏠함을 더해준다. 



장기 불황의 시작인 1873년부터 시작된 앰버슨 가문의 부귀영화는 앰버슨 소령에서 꽃을 피워 1880년대에 그 지역의 유행을 선도했다. 앰버슨 소령의 유일한 손자인 조지는 집안의 막대한 재력만을 믿고 오만하기 그지 없으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고사하고, 장래에 대한 설계나 직업 혹은 야망 따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돈이 곧 권력이라고 믿는 그는 매순간 기분에 따라 내키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모순적이게도 평판을 가장 중요시한다.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조지는 사물을 단 한 가지의 기준으로만 평가한다.  


그는 하층민을 벌레에 비유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천한 것'이라고 칭하고(여기에 어머니인 이저벨도 예외는 아니다), 출신이나 사회적 지위 등으로 신분은 구분되어야 하며, 소위 최상위층에 있는 사람들 끼리는 서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믿는 부류다. 그야말로 무지해서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그래서 때로는 순진해보이기까지 하는,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 조지가 공장 노동자가 되는 부분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조지는 돈을 '버는' 행위 자체를 혐오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경제 활동, 구체적으로는 투자를 예외로 하는 제조나 노동을 통해 소득을 올리는 것을 '천박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투자 사업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으면서 할아버지가 임대 수익을 얻기 위해 주택을 짓거나 유진이 자동차를 생산 매매 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긴다. 그러니 직업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루시와의 관계가 걷돌 수 밖에 없다. 


ㅡ 


유진과 이저벨이 과거 파혼했다는 사실과 현재 두 사람이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패니 고모로부터 전해 들은 조지는 이성을 잃고 분개한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리가 없다'는 조지의 중얼거림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한 문장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책에서는 '내게'에 방점을 찍었다면 나는 '이런 일'에 더 무게를 둔다(조지가 어떤 인격인지는 앞서 충분히 보아왔기에).  


과연 그가 말하는 '이런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어머니의 재혼 자체? 아니면 재혼 상대? 그것도 아니면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한 자신과 루시와의 관계? 아마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조지가 가장 염두에 두지 않은 부분은 아마 루시와의 사랑이 아닐까싶다(그에게 있어 사랑 따위야...). 앰버슨 가문의 일원인 어머니가 '천박한 것' 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하필 재혼 상대가 그토록 멸시하는 '자동차'를 만들어 '천박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것도 분노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상황을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데에 가장 화가 났을 테고. 어머니의 평판을 자기에 대한 평판으로 동일시하는 모습이나 어머니의 행복보다는 평판을 우선하는 부분은 어찌보면 그가 유아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유진과 만나지도 말라며 이저벨을 몰아붙이는 조지의 모습은 이기심을 넘어 잔인하기까지 하다(조지, 네가 햄릿이냐). 


벼랑 끝에 몰린 조지의 낙담과 좌절은 가문의 파산보다 '천한 것'들 사이에서 위대한 앰버슨가가 잊혀졌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이저벨은 다정하고 긍정적이며 분별력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단호하고 무정한 면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조지의 올바르지 못한 언행과 삐뚤어진 생각에는 왜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관대하기만 했을까? 이저벨은 유진과 조지의 사이가 돈독해지기를 필요 이상으로 바라는데, 아마도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을지.


유진은 편지를 통해 이저벨에게 그녀 스스로의 방식대로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아들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이저벨이 결론을 내리고 조지에게 쓴 편지를 읽다보면 처음에 들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려지면서 결국 '몸뚱아리만 어른'이 되어버린 조지를 만든 사람은 윌버와 이저벨이였음을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어머니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마침내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며 절규하는 조지의 모습은 그토록 못되게 굴었어도 딱하고 안타까움이 들더라는.  



내가 조지를 마음에 들어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사람을 개별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는 루시를 사랑하지만 루시와 유진을 부녀라는 이유 때문에 세트로 묶어 하나로 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좋아하는 친구라고 해서 상대와 관계한 사람들을 모두 좋아해야하는 의무감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데에 공감했다. 물론 그 선을 넘어서 싫어하는 것까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튼 나는 루시에게는 우호적이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유진에게 비우호적인 조지의 감정은 존중받아야한다는 입장이다. 그것 때문에 루시의 불편함은 역시 별개로 하고.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감정과 입장을 드러내는 조지의 방식에 조심성과 예의가 없음은 정말 별로다.    


ㅡ  


소설은 도시 집중화를 비롯해 산업화 시대로의 전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유진의 사업 품목인 자동차가 이 변화를 대변하고 있다. 유진은 자동차 개발자이지만 자동차가 가져올 부작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영적 문명의 후퇴, 전쟁 혹은 평화 양상의 변화, 공기 오염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은 분명해보이지만, 자동차는 이미 등장했고 이로써 인간의 삶은 변화를 맞이했으니 변화에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얘기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 소설이 출간되고, 1919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배경에는 이와같은 유진의 관점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1880년대 장인들이 만든 우아하고 아름다운 앰버슨 저택의 삼중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빛바램은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앰버슨 저택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유진 모건이 지은 조지 왕조풍의 집을 통해 비록 물질세계는 이동하고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역사는 반복되어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조지가 그토록 '천한 것'이라고 멸시했던 그 위치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화학 공장의 노동자로서 늙은 고모를 자진해서 부양하는 조지의 모습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이 소설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동시에 현실적이다. 악당이기만 한 것같은 조지는 마냥 미워하기 어렵고(결과적으로 루시같은 현명한 여성이 개망나니같은 조지를 사랑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다), 로맨스는 과하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애틋함은 충분히 남겨준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시대 상황을 섬세하고 면밀하게 스토리에 녹여내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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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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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연체가 지루하지 않은 소설을 만났다. 


낭만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삶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미하이는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듯 보이나, 본인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살아야 할 '명분'이다. 








미하이의 심상한 생각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신혼부부임에도 미하이의 예사롭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이며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선의와 예의로 행동하는 아름다운 보헤미안 미하이. 그는 이번 신혼여행으로 자신이 결혼을 통해서도 어른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폐허가 된 고대 성벽의 유적에 앉아 몇 시간에 걸쳐 행복하게 움브리아의 경치를 바라보'는 장면은 단편적이나마 미하이를 다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대목에서 미하이가 격하게 이해되는 거지?) 


미하이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대로 살면서 혹사 당했다(고 본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큰 자기 혹사는 바로 결혼이었다. 어쩌면 정서적으로 돌아갈 곳이 없었던 미하이에게 열차에 잘못 오른 것은 그의 무의식이 이끈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미하이가 혹사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독자는 안다. 도망가듯 도착한 산악 도시에서 미하이의 행색은 관광객이 아닌 '도망자'다. 그런데 이 표현이 더할나위 없이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한때 모든 것을 함께 나눈 친구였던 세베리누스 신부(에르빈)에게 고해 성사를 하듯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가짜 어른의 삶을 살았고, 결혼을 망쳤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가야하며, 어떤 미래를 기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미하이. 그러면서 제발 외롭게 혼자 있는 자기를 내버려두지 말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살고자하는 그의 처절함이 잘 나타난다. 세베리누스 신부는 우연에 스스로를 맡기고 일정 없이 그 자신을 온전히 놔둬보라고 조언하는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조언에 의미를 알 수 있다.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는 발트하임과의 만남. 죽어가는 것이 에로틱한 행위라는 발트하임의 말에 터마시를 떠올리는 미하이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묻는다. 발트하임은 죽어가는 것은 성적 쾌락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이때 죽음을 욕망하는 자들은 치명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에 원초적인 본능과 죽음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문명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으로 정착해 사람들은 욕구를 억누르게 되었다 설명인데,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일 뿐 발트하임은 누구에게도 자살을 권유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발트하임과의 만남으로 미하이는 에버에 대한 집착과 터마시를 향한 열망이 더 강해진다. 어디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미하이는 터마시와 같은 죽음을 맞기를 바랐고,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에버가 지켜봐주기를 바랐다. 터마시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ㅡ 


겉으로 보기에 미하이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유부녀든 비혼녀든 가리지 않고 사랑하고 싶은 대상이 나타나면 주저하지 않으며, 죽고자 할 때 죽으려 한다. 그의 행동에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타인에 대한 도덕적 배려와 의무는 찾아볼 수 없다. 어른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러한 삶을 선택한 그가 자신의 삶에 있어 목적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쩌면 미하이에게 있어서 터마시와 에버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영혼의 목소리 같다고 해야할까. 미하이가 죽기로 작정한 날, 반니니 앞에서 부끄러웠던 이유는 자신의 죽음에 그 어떤 숭고함도 없는 것뿐만 아니라 터마시처럼 죽음 자체를 욕망하는 것도 아닌, 그저 도피에 불과하기 때문이었을 터다. 


밤새도록 환영에 시달리며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노동자였을 뿐이다. 죽음의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바꾼 미하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제로 죽고 싶어하는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의지를 갖는다.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미하이와 에르지를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상대에게 직접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기보다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지레짐작하고 저울질을 하며 제나름의 잣대로 사람이나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경쟁에 쫓기며 낙오와 생계의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우리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삶에, 살아가는 데에 꼭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죽음을 예정한 시각을 불과 서너 시간을 앞두고 이웃의 소소한 초대가 그날을 살 이유가 된다. 작가는 죽음을 이야기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 살아봅시다.


382.
폐허 속의 들쥐처럼 그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항상 뭔가가, 여전히 뭔가가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족
이 소설에서 사랑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에르지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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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더헤드 수확자 시리즈 2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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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지역의 수확령에서는 '수확을 즐기라'라는 고더드의 가르침을 점점 더 지향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죽음이 더 이상 고결하지 않은 시대로 향하고 있다.  


마음속 신념에 따라 살아가라는 가르침과 마음 따위는 내버리고 본능을 좇아 목숨을 빼앗는 것을 즐기라는 가르침을 두 스승에게 받은 후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자아가 분열된 채 갈등하는 로언. 수확 대상자에게 한 달 시한부를 통보하고 삶을 정리할 시간을 준 뒤 수확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게끔 해 수확자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수확자 아나스타샤. 선더헤드는 이 두 사람에게 인류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다.    



2권에서는 점점 격렬해지는 수확령의 분열과 갈수록 막강해지는 '신질서'들의 세력,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 눈여겨 볼 부분은 1권의 「수확자들의 일기」가 스토리의 배경 설명과 '수확자'의 고뇌를 대신했다면, 2권의 선더헤드의 내레이션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문제와 인간이 갖는 고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선더헤드의 정부는 산 사람들의 세계를 다스리고, 수확령은 죽음을 다스린다. 선더헤드는 삶이 의미를 지니려면 죽음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확령은 그런 이유에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죽음이 더 이상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도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도 선더헤드는 이를 지키기 위한 선을 넘지 않는다. 법은 명확해야 하고 지켜질 때 유의미하므로. 그가 루시퍼를 묵과하는 숨겨진 이유다.   


영구적인 삶과 경제적 안정을 통해 스트레스 혹은 생계형 범죄는 사라졌고, 지혜와 양심과 연민이 다스리는 세계가 확립됐다. 그러나 사회 불안은 여전하다. 선더헤드는 이 지점에서 삶의 의미를 '저항'에서 찾는 부류를 짚는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불미자'라는 낙인이 명예롭다. 그렇다면 고더드같은 부류의 인간도 '저항'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진짜 불미자는 로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선더헤드와 수확령의 성격은 극명하게 나뉘어져 있다. 인간의 수명이 영구적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선더헤드는 사망 시대 이후를, 수확령은 사망 시대 이전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더헤드의 세계가 원칙이 살아 있고 부패가 없다면, 수확령은 욕망과 탐욕, 경쟁과 질투, 정의와 불의, 선의와 악의 등 인류사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살아 들끓고 있다. 그들은 '고결한 수확자'라고 불리지만, 때로는 여느 인간보다 더 태초의 본능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 된다.   


선더헤드가 수확령을 침범할 수 없는 것(더 정확히 말하자면 침범하지 않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앞서 말했듯 선더헤드가 삶을, 수확령이 죽음을 관장함으로써 지구에 전지전능한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더헤드는 자신이 정한 규칙에 의해 얽매여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모순에 붙잡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2권에서 흥미로운 점은 클라우드가 진화한 선더헤드에게서 인간성이 간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손상과 고통을 담고 있는 선더헤드는 종종 애도를 하고, 분노와 격분을 경험하고 이를 자제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종단에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분노를 표출한다. 또한 정의와 불의를 조율하고 고독을 인지하며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싶어한다. 그야말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기계가 관장하는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과 오히려 이러한 인간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클라우드. 이 역설적 배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문득 영구적인 삶에서 죽음이 새로운 삶의 통찰을 가져다줄 수 없다면 인류가 존속해야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ㅡ 


어정쩡한 사회과학이나 철학 관련 책보다 훨씬 실질적으로 여러 명제에 깊이 들어가지는 소설이다.   


관찰과 감시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움을 주기 위한 관찰은 감시에 해당하지 않을까? 개인 사생활 보호, 그리고 범죄 예방에 따른 감시카메라 설치. 이 간극에서 둘 사이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선더헤드는 관찰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세상의 사각지대를 없애야하는 상황이 더 빨리 오게 될 것이라 짐작한다. CCTV 확대와 코비드 시국 당시 개인 사찰에 가까운 정보 노출을 떠올려 볼 때 그러한 짐작에 힘을 보탠다.  


고더드의 연설문과 퀴리의 연설문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모든 미드메리카 수확자들이 원하는 만큼 생명을 수확하게 하며 수확자가 갖는 권리의 한계를 없애는 것으로써 인류의 안전한 존속을 우선하기보다는 수확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만들겠다는 자, 수확자가 원하는 세상이 아닌 세상이 수확자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를 우선하며 높은 가치와 이상을 지켜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 누구를 택할 것인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계획도, 거창한 대의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 갖은 한순간의 즉흥적이고 나약한 감정이다. 패러데이는 로언에게 부패한 수확자를 거두기 전에 그들의 삶의 이면을 살펴보고, 먼저 그들을 향한 애도를 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감정일 것이다.  




사족.

자신의 진짜 모습이 그레이슨인지 슬레이드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그레이슨 톨리버의 모습은 전편 <수확자>에서 로언이 겪었던 정체성 혼란과 흡사한데, 영화 <무간도>도 잠깐 생각이 났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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