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앰버슨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0
부스 타킹턴 지음, 최민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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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조지 앰버슨 미내퍼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앰버슨 가문이 시대의 변화와 흐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묻혀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도입 부분에서 1880년대에 유행했던 패션, 주택 건축 및 인테리어, 놀이문화 등 당시의 트렌드, 사회 구조와 인프라의 변화, 그리고 사라진 풍습과 로맨틱한 청춘과 사랑을 서술하는데, 무엇보다 앰버슨 가문의 대저택에 대한 표현은 문장을 따라 그림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한다.  


또한 소설 후반부에 들어서는 산업화 과정에 따른 도시와 사회 저변의 변화를, 그리고 조지가 과거를 회상하며 몰락한 가문의 택지를 돌아보는 장면을 다이내믹하게 서술한다.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섬세한 묘사는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면은 입체감 있는 읽는 재미의 쏠쏠함을 더해준다. 



장기 불황의 시작인 1873년부터 시작된 앰버슨 가문의 부귀영화는 앰버슨 소령에서 꽃을 피워 1880년대에 그 지역의 유행을 선도했다. 앰버슨 소령의 유일한 손자인 조지는 집안의 막대한 재력만을 믿고 오만하기 그지 없으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고사하고, 장래에 대한 설계나 직업 혹은 야망 따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돈이 곧 권력이라고 믿는 그는 매순간 기분에 따라 내키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모순적이게도 평판을 가장 중요시한다.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조지는 사물을 단 한 가지의 기준으로만 평가한다.  


그는 하층민을 벌레에 비유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천한 것'이라고 칭하고(여기에 어머니인 이저벨도 예외는 아니다), 출신이나 사회적 지위 등으로 신분은 구분되어야 하며, 소위 최상위층에 있는 사람들 끼리는 서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믿는 부류다. 그야말로 무지해서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그래서 때로는 순진해보이기까지 하는,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 조지가 공장 노동자가 되는 부분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조지는 돈을 '버는' 행위 자체를 혐오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경제 활동, 구체적으로는 투자를 예외로 하는 제조나 노동을 통해 소득을 올리는 것을 '천박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투자 사업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으면서 할아버지가 임대 수익을 얻기 위해 주택을 짓거나 유진이 자동차를 생산 매매 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긴다. 그러니 직업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루시와의 관계가 걷돌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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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이저벨이 과거 파혼했다는 사실과 현재 두 사람이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패니 고모로부터 전해 들은 조지는 이성을 잃고 분개한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리가 없다'는 조지의 중얼거림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한 문장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책에서는 '내게'에 방점을 찍었다면 나는 '이런 일'에 더 무게를 둔다(조지가 어떤 인격인지는 앞서 충분히 보아왔기에).  


과연 그가 말하는 '이런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어머니의 재혼 자체? 아니면 재혼 상대? 그것도 아니면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한 자신과 루시와의 관계? 아마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조지가 가장 염두에 두지 않은 부분은 아마 루시와의 사랑이 아닐까싶다(그에게 있어 사랑 따위야...). 앰버슨 가문의 일원인 어머니가 '천박한 것' 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하필 재혼 상대가 그토록 멸시하는 '자동차'를 만들어 '천박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것도 분노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상황을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데에 가장 화가 났을 테고. 어머니의 평판을 자기에 대한 평판으로 동일시하는 모습이나 어머니의 행복보다는 평판을 우선하는 부분은 어찌보면 그가 유아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유진과 만나지도 말라며 이저벨을 몰아붙이는 조지의 모습은 이기심을 넘어 잔인하기까지 하다(조지, 네가 햄릿이냐). 


벼랑 끝에 몰린 조지의 낙담과 좌절은 가문의 파산보다 '천한 것'들 사이에서 위대한 앰버슨가가 잊혀졌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이저벨은 다정하고 긍정적이며 분별력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단호하고 무정한 면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조지의 올바르지 못한 언행과 삐뚤어진 생각에는 왜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관대하기만 했을까? 이저벨은 유진과 조지의 사이가 돈독해지기를 필요 이상으로 바라는데, 아마도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을지.


유진은 편지를 통해 이저벨에게 그녀 스스로의 방식대로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아들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이저벨이 결론을 내리고 조지에게 쓴 편지를 읽다보면 처음에 들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려지면서 결국 '몸뚱아리만 어른'이 되어버린 조지를 만든 사람은 윌버와 이저벨이였음을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어머니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마침내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며 절규하는 조지의 모습은 그토록 못되게 굴었어도 딱하고 안타까움이 들더라는.  



내가 조지를 마음에 들어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사람을 개별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는 루시를 사랑하지만 루시와 유진을 부녀라는 이유 때문에 세트로 묶어 하나로 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좋아하는 친구라고 해서 상대와 관계한 사람들을 모두 좋아해야하는 의무감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데에 공감했다. 물론 그 선을 넘어서 싫어하는 것까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튼 나는 루시에게는 우호적이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유진에게 비우호적인 조지의 감정은 존중받아야한다는 입장이다. 그것 때문에 루시의 불편함은 역시 별개로 하고.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감정과 입장을 드러내는 조지의 방식에 조심성과 예의가 없음은 정말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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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도시 집중화를 비롯해 산업화 시대로의 전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유진의 사업 품목인 자동차가 이 변화를 대변하고 있다. 유진은 자동차 개발자이지만 자동차가 가져올 부작용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영적 문명의 후퇴, 전쟁 혹은 평화 양상의 변화, 공기 오염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은 분명해보이지만, 자동차는 이미 등장했고 이로써 인간의 삶은 변화를 맞이했으니 변화에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얘기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 소설이 출간되고, 1919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배경에는 이와같은 유진의 관점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1880년대 장인들이 만든 우아하고 아름다운 앰버슨 저택의 삼중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빛바램은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앰버슨 저택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유진 모건이 지은 조지 왕조풍의 집을 통해 비록 물질세계는 이동하고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역사는 반복되어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조지가 그토록 '천한 것'이라고 멸시했던 그 위치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화학 공장의 노동자로서 늙은 고모를 자진해서 부양하는 조지의 모습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이 소설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동시에 현실적이다. 악당이기만 한 것같은 조지는 마냥 미워하기 어렵고(결과적으로 루시같은 현명한 여성이 개망나니같은 조지를 사랑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다), 로맨스는 과하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애틋함은 충분히 남겨준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시대 상황을 섬세하고 면밀하게 스토리에 녹여내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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