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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N23004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올해는 도선생님의 작품을 재독하고 그의 위대함을 다시한번 느껴야 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첫번째로 선택한 책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다. 예전에 민음사 판으로 읽었는데, 열린책들 버젼으로 재독했다. (열린책들 도선생님 버젼으로 다 모았다~!!)
갑자기...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라고 선택해야 한다면 난 도스토예프스키를 고르겠다. (두분 다 매우매우 좋아하는 작가에다가 두분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톨스토이의 작품이 더 가독성도 좋고 감동도 있지만, 난 톨스토이가 그려내는 상류사회의 모습 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내는 하류사회의 모습과 왠지 찌질하고 짠한 도선생님의 주인공 모습에 더 애정이 간다.
도선생님 작품 중 아마 찌질함으로 따지면 이 책의 '지하인'이 최고이지 않을까? 여기서 말하는 '지하인'은 정말 지하에서 사는 사람을 말하는건 아니고, 밑바닥 인생을 뜻하는 거다. 온갖 열등감에 쌓여서 과대망상을 하고, 쉽사리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 강한척, 아는척 하는 '지하인'은 나의 모습이자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다. (좀 과장되긴 했지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독서로 보냈다. 나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모든 것을 외부의 감각들로 잠재우기를 원했다. 외부의 감각들 중에서 내게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은 독서였다. 독서는 물론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나를 흥분시켰고, 기쁘게 했으며, 괴롭혔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나를 대단히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행동을 원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지저분한, 지하의, 그리고 혐오스러운 행동에 뛰어들었다. 그것은 너무 보잘것없어서 악행이 되지도 못했다. 나의 불쌍하고 초라한 정열들은 내게 항상 내재하는 병적인 초조함 때문에 날카롭고 뜨겁게 타올랐다. 내 충동들은 신경질적이었고 눈물과 경련들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독서 이외에 피난처가 없었다.] P.77
이 작품은 1부 지하실, 2부 진눈깨비 때문에 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는 크게 1. 당구장에서 무시 당하는 사건, 2.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사건, 3. 직업여성인 리자에게 버림당하는 사건 으로 구분할 수 있다.
1부 지하실은 내가 왜 40년 동안 지하인으로 살아야 했는지 자기변명을 하는 수기 이다. 엉뚱하고, 괴변을 늘어놓지만 읽다보면 왜 내가 지하인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주변에서 봤을때는 별볼일 없이 보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저들보다 더 영리하다고, 나는 저들이 느끼지 못하는 죄의식을 느낀다고, 저들은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고, 단지 정해진 방법으로만 사고할 줄 안다고 오히려 무시한다. 그리고 그는 지하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면서 위로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지하인이 외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희극적으로 만들어졌다. 명백히 이 모든 것들에서 말장난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2×2=4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2×2=4는 내 의견으로는 뻔뻔스러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그렇다. 2×2=4는 멋쟁이처럼 보인다. 당신 길을 가로막고 으스대며 침을 뱉는다. 나는 2×2=4 라는 것이 훌륭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칭찬해야 한다면, 2×2=5도 때때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P.55
2부 진눈깨비 때문에는 왜 내가 지하인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경험담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책이 시간의 역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눈이 내리고 있다………. 거의 젖은, 황색의 흐린 눈이. 어제도 눈은 내렸고, 또한 며칠 전에도 내렸다. 떨쳐 버릴 수 없는 그 사건을 회상했던 것은 진눈깨비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진눈깨비 때문이라고 해두자.] P.65
1부가 좀 장황하고 다소 철학적이어서 약간 어렵다면, 2부는 재미있다. 완전 웃기다. 1부에서의 까칠하고 철학적인 지하인의 모습은 없고 엉뚱하고 찌질한 지하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변덕적이고 모순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하고 반복해서 실수 후회하고 또 실수하고...
지하인은 아무런 적의를 품지 않은 상대에게 혼자서만 적의를 느끼고 복수를 다짐하며 소심한 복수를 하고 혼자서 만족한다.
[나는 무심결에 길을 막고 당구대 옆에 서 있었는데, 그는 내 옆으로 지나가기를 원했다. 그는 내 어깨를 잡고 조용히, 경고나 설명도 없이, 나를 내가 서 있었던 곳에서 다른 데로 옮겨 놓았다. 반면 그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지나가 버렸다. 나는 차라리 맞았더라면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통로에서 나를 옮겨 놓은 것과, 그토록 눈에 띄게 나를 무시한 것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P.79
그리고 어떻게든 친구들의 모임에 끼고 싶어 하지만 친구들은 괴상한 지하인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럼에도 그는 어떻게는 참가하는데 거기서도 괴변만 늘어놓고 오히려 친구들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네가 모욕했다고 ? 나는 네가 알아줬으면 한다. 존경하는 선생,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모욕할 수 없다는 것을.] P.125
게다가 지하인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겉모습을 꾸미는데 과도하게 치중하고,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또 엄청 무시한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게 될 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일이야. 어제 나는...... 그녀에게 영웅으로..….… 보였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흠! 이건 소름끼치는 일이야, 얼마나 초라하게 되어 버렸나. 내 아파트는 진짜 불결해. 그리고 어제 그런 옷을 입고 저녁 식사에 갈 용기를 냈다니! 그런데다 저 소파에 씌운 천안에 있는 것이 비어져 나온 걸 좀 봐! 게다가 내 실내복은 항상 짧지! 그건 걸레같은 옷이야……. 그녀는 이것을 모두 다 볼 거야, 그리고 아론도 보게 되겠지. 저 짐승은 그녀를 모욕할 것이 확실해. 그놈은 내게 단지 무례하게 굴기 위해 그녀를 모욕할 거다.] P.167
왜 도선생님은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1부)과 현실의 나의 모습(2부)을 대비시킨 걸까? 자칭 지식인의 모순을 풍자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책을 통해 배우는 지식은 단지 이상일 뿐, 실제 현실과는 다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결국 인간은 그의 영혼을 인생에서 오직 한 번만 드러내는 거야. 발작을 일으킬 때에만! 그래서 너는 뭘 더 원하는거야? 이 모든 것을 말했는데도 내 앞에 버티고 서서 가지 않고 왜 나를 괴롭히는 거냐?] P.187
이 작품을 다 읽고나서 나의 본성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온갖 괴변을 늘어놓고 어떻게든 자기합리화를 하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고, 나를 보는 다른 사람의 시각을 바꿀수는 없다. 하지만 겸손과 행동이 따른다면 조금은 개선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져본다. 언제까지 지하인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