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의 쿠르스크주에 대한 무리한 공격을 개시한 뒤로 러-우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군은 8월 6일 개시한 공격을 통해 전쟁의 국면을 전환하려 했겠지마는 피해를 너무 많이 입었다. 러시아 국방부의 발표로는 한 달 사이 쿠르스크 전선의 우크라이나군 사상자는 10,000명이 훨씬 넘는다. 러시아 측의 프로퍼갠더일 수 있어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어도 우크라이나군이 단일 전선에서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크라이나에 더 심각한 일은 전쟁의 중심 지역인 돈바스에서 심각한 패퇴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를 공격한 것은 돈바스 쪽 전황 개선에 도움을 얻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다. 쿠르스크의 방어를 위해 러시아군이 돈바스에 배치된 자국 병력 상당 부분을 ‘본토’ 방어를 위해 철수할 것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우크라이나군의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총사령관은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쿠르스크 공격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수만의 병력을 이동시켜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공격에 대해서는 그것대로 대처하면서 돈바스에서의 공격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전과도 매우 컸던 것 같다. 우선 우크라이나군이 엄청난 병력 손실을 당하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러시아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의 사상자 수는 하루 평균으로 따져 3월에 996명, 4월에 985명, 5월에 1,368명, 6월에 1,843명, 7월에 1,966명, 8월에 2,109명이다. 매일 발생하는 사상자 수가 최근으로 올수록 급증하는 추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의 발표가 사실에 가깝다면 우크라이나는 병력이 부족해서라도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

우크라이나가 잃는 것이 병력만도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체 조달할 수 없어서 나토, 특히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무기도 거의 고갈된 상태다. 지금 모든 전선에서 제공권은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패트리엇 미사일 등 대공 무기가 다 떨어져 우크라이나는 방공망이 사실상 와해한 상태다. 최근 들어 우크라이나는 영토도 급격하게 빼앗기는 중이다. 작년까지는 우크라이나 측 반격을 패퇴시키고자 공세적 소모전을 펼치며 진격을 자제하던 러시아가 올해는 공세로 전환하고 특히 돈바스 전선에서 함락 지역을 늘리고 있다. 러시아군은 차소프야르, 콘스탄티노프카, 우글레다르, 토레츠크, 셀리도보, 포크롭스크 등 전략 요충지를 이미 부분 점령했거나 진격을 위해 주변의 소규모 정착지를 계속 ‘해방’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진다.

현재 돈바스에서 진행되는 가장 중요한 전투는 포크롭스크를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 2022년 기준 인구 60,000명 규모의 이 도시를 함락당하면 우크라이나는 지난 2월에 돈바스의 주요 도시 도네츠크를 포격하는 근거지로 삼은 아브데예프카를 잃은 것보다 군사적으로 더 중요한 요충지를 빼앗기게 된다. 최근 몇 달 러시아가 돈바스에서 공세를 강화하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데에는 아브데예프카를 함락한 뒤 서쪽으로의 진격로를 확보한 덕분이라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포크롭스크가 러시아 수중에 들어가면 우크라이나가 입을 피해는 훨씬 더 클 전망이다. 아브데예프카와 그 서쪽의 포크롭스크 사이에는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요새화한 도시 지역이 많았으나, 포크롭스크 서쪽에는 그런 요새들이 드물다고 한다.

물론 포크롭스크가 아직 함락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뉴스 웹사이트 유로마이단 프레스의 8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전장에서의 힘의 균형과 포크롭스크의 지역 내 러시아 화력의 집중을 고려하면” 포크롭스크가 함락될 “공산은 계속 커지고 있다.” 포크롭스크를 잃으면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방어는 사실상 어렵게 된다. 그곳은 돈바스 지역 전체의 군수물자 보급에 핵심적이다. 포크롭스크에서 서쪽으로 200킬로 채 안 되는 곳에는 우크라이나 경제의 젖줄인 드니프로 강이 있고, 그 강변에 우크라이나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드니프로가 있다.

우크라이나전쟁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 분명하다. 전쟁이 당장 끝나지는 않을 것이나 포크롭스크가 함락되는 시점이 중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에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전황은 갈수록 절망적으로 바뀌고 있다. 상식적으로 보면 러시아와의 평화협상이 답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협상에 나설 태도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것은 젤렌스키 정권이 국가권력을 장악할 정당성을 잃은 점 때문일 수도 있다. 젤렌스키는 전쟁을 이유로 계엄령을 선포해 5월에 치렀어야 할 대선을 무산시키고 법외 권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정당성의 결여 때문인지 젤렌스키 세력은 군사적 모험을 오히려 더 선호하고 외교적 협상은 기피하고 있다. 쿠르스크를 침공한 것을 보면 외교적 협상으로 전쟁을 종식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미국과 유럽 등 나토 세력 역시 협상에 임할 자세는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에 푸틴 대통령이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이스탄불 플러스’와 최근의 전황 반영을 협상의 조건으로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스탄불 플러스는 6월 14일에 푸틴이 러시아 외교부에서 언급한 협상 조건이다. 그것은 2022년 3월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타결 직전까지 갔으나 미국과 영국의 방해로 불발된 협상 내용에 이후 전황 전개로 생긴 새로운 현실을 추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최후통첩의 형태로 제출한 이스탄불 플러스 협상 조건은 우크라이나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배제한 채 국제평화회의로 대응하면서 ‘젤렌스키 평화공식’을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평화공식은 우크라이나가 아직 공세를 취하고 있던 2022년 11월에 제출된 것으로 19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할 때의 국경선 너머로 러시아군의 철수와 러시아 전쟁범죄를 기소할 특별재판소 설치, 전쟁 피해에 대한 러시아의 보상 등을 내용으로 한다. 2014년 마이단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신나치 세력인 우크라이나 정권에 의해 돈바스 지역에서 학살당하는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군사작전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러시아가 그런 요구를 수용할 리는 없다. 더구나 러시아는 전쟁 이후 2022년 여름과 가을에 나토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강력하던 기간만 빼면 계속해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고, 최근에는 돈바스에 대대적인 진격을 통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동방경제포럼에서 푸틴이 제시한 협상 조건은 이스탄불 더블플러스로 여겨진다. 6월 중순에 제시한 조건에 이후의 전황을 추가로 반영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구가 더 많아진 그런 제안을 우크라이나가 받아들일 리는 없다. 게다가 러시아 권력층 내부에서도 푸틴의 협상 자세에 대해 거부 반응이 심하고, 푸틴 자신도 실은 협상에 적극적인 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협상을 거론하는 것은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브릭스의 우방국들이 협상을 권유하고, 남반구 국가들도 식량 확보나 다른 교역 조건을 악화시키는 전쟁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푸틴이 이스탄불 더블플러스 협상안을 거론한 것은 그래서 브릭스와 남반구의 여론을 고려하되 우크라이나가 거부할 수밖에 없는 요구를 담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푸틴의 ‘새로운’ 제안에 응할 모양새는 전혀 아니다. 마치 국가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려는 태도이고, 나토도 그런 우크라이나를 말리려는 기색이 전혀 없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나 어디를 둘러봐도 전쟁을 종식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라면 포크롭스크가 함락된 뒤에도 우크라이나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협상으로 전쟁을 종식하려는 움직임은 별로 없다. 그런 점 때문인지 러시아의 전 대통령 메드베데프와 같은 강경론자들은 군사적 승리를 유일한 타결책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군사적으로 완전히 패퇴시켜 우크라이나를 무조건 항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토, 특히 미국이 어떤 태도를 드러낼는지가 관건으로 여겨진다. 우크라이나의 패배에도 집단서방이 협상에 불응하면 전쟁은 끝나도 끝나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현 정권 또는 그 대체 세력이 영토 밖에서 망명정부를 구성하여 저항을 계속하는 것도 상상된다. 그렇게 되면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두고 서방과 러시아 간의 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평화의 길은 묘연하기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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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신약성서 마타이오스(마태)의 복음서1128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그동안 이 말에 수많은 기독교도가 위로받았음은 물론이다. 더 많이 배반당했음 또한 물론이다. 왜 배반당했을까?

 

쉬게 한다는 말이 잠깐 쉬다 가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면 결국은 구원한다는 말일 텐데, 그다음 구절과 부딪친다: 내 짐은 가볍다. 아니, 짐을 내려놓게 한다는 말 아니었나? 세금 감해주는 정도를 가지고 구원이라 한 거야? 우리는 이렇게 배반당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짐이 짐 아니게 하는 길은 무엇일까? 짐을 내려놓게 하는 거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다. 어른 생각은 이렇다: 짐이 으로 여겨질 만큼 지는 거다.

 

생명이란 본성상 열역학제이법칙을 거슬러 가는, 그러니까 짐 지는사건이다. 누구도, 무엇도 이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자기 짐은 꼭 똑 자기가 져야 한다. 꼭 똑 지는 자기 짐은, 그러므로 짐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과도하게 질 때 그게 바로 이다.

 

예수가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한 까닭을 정치적으로 추적해 보자. 당시 유대는 로마 식민지였다. 식민지 백성에게서 종주국 시민이 내는 세금보다 더 많이 착취하는 게 제국 본성이므로 당연히 유대 백성은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 짐을 가볍게 해준다는 약속은 결국 독립( 전쟁)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정신적,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영적 해석으로 흘러간다. 어떤 이는 이런 전통을 자칭 사도 파울루스(바울) 영향이라 말한다. 말하자면 특권층 부역자였던 파울루스가 예수 운동을 매판 종교로 둔갑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기독론이 기독교를 왜곡했다는 주장이다. 통속 기독교도는 펄펄 뛰겠지만 우리는 절절하게 듣는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독립 국가라고 하지만 사실상 식민지로서 전작권을 가진 주한미군 체재 비용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왜놈들이 해양 투기한 원전 오염수 피해를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매국 특권층이 정권을 잡고 자기 패거리한테 깎아준 세금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왜놈들이 창경궁 희화화하듯 청와대 희화화하고 따로 대통령실 만들고 관저 마련하는 데 드는 세금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할 짐만 지고 싶다. 우리 몸으로 여겨질 만큼만 지고 싶다. 그게 독립 국가며 민주 국가 아닌가. 이 자주·민주 국가를 약속하는 예수는 없는가. 이 소식을 전하는 복음은 없는가.


 

어제 우리는 기독교인 두 사람과 숙의 치료를 했다. 한 사람은 남의 짐까지 짊어지고 애쓰며 산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자기가 깔려 죽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며 죽을상이다. 앞 사람은 남의 짐 돌려줄 결심을 어렵사리 세웠다. 뒷사람은 가짜 짐 내려놓을 결심을 쉽게 거절했다. 실제 식민 살이 벗어나기는 어렵고, 자작 식민 살이 길들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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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네가 먹는 것을 말하라,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하겠다(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식도락가 사바랭이 한 말이다. 본디 문맥을 이탈해 보편 의미로 번져갔다고 하지만, 틀릴 일이 없는 이야기다.

 

인과에 갇힌 서구 과학 눈으로 보면 먹는 것에 함유된 성분과 그 섭취량을 따져서 끼칠 수 있는 영향 정도를 말해야 한다, 따위로 말하겠지만, 생태학 차원에서 보면 먹는 생명이 먹히는 생명에게서 본성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이치에 닿지 않는다. (물론 생태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우리가 말하는 생태학은 서구 과학의 분석 어법을 넘어서 종합 판단으로 나아가는 범주 인류학적 생태학이다.)

 

단도직입으로 문제의식을 꺼낸다: 냅다 고기-특히 네발 달린- 먹어대는 사람과 딥다 푸성귀 먹어대는 사람은 정말 다른가? 당연하다. 특별한 목적에서 육식과 채식을 일시적으로 증강해 먹는 경우가 아닌 한, 오랫동안 영 다른 음식을 섭취해 온 두 부류 사람이 지니는 심신 성향은 도저히 같을 수가 없다. 우리 생태학 어법으로 이야기해 보자.

 

우선, 먹는 행위 자체에서 이야기를 비롯한다. 가령 두릅을 먹는다고 할 때, 나는 단순히 영양분을 보충한다거나 좋은 맛을 즐긴다는 도구 차원 너머에 있는 근원 진실과 마주한다. 먹는 행위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과 합일하는 사건이다. 합일하는 과정에서 나는 두릅의 목숨을 거둔다. “거둔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살육이고 다른 하나는 포용이다. 각각 품은 더 깊은 진실로 다가간다.

 

살육은 대뜸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죽여서 먹든 먹어서 죽이든 살육 행위는 불가피하다. 살육하는 순간 살육자는 경건해야 한다. 생명 하나의 단절이 다른 한 생명에게 연속성으로 전이되는 카이로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육은 제의를 창조한다. 제의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야기는 쉽지 않아진다. 제의는 숭고하다. 그래서 인간은 제의를 포기한다. 포기한 결과를 오늘 우리가 참혹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포용은 알기 쉽지 않은 이야기다. 린 마굴리스 이야기로 출발하자. 단세포 생명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 하나를 먹는다.” 살육 행위다. 그런데 먹힌 생명이 먹은 생명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단순히 살아남기만 한 게 아니라 먹은 생명과 더불어 전혀 다른 생명으로 도약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린 마굴리스는 이 사건을 내부 공생이라 일컫는다. 내부 공생 사건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두 생명의 성적 결합이 된다. 이렇게 포용은 놀이를 창조한다. 놀이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야기가 쉬워진다. 놀이는 질탕하다. 그래서 인간은 놀이만을 탐한다. 탐한 결과를 오늘 우리가 참담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단순히 이렇게 갈라 정리함으로써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인다. 탐식에 빠지는 인간은 어느 쪽인가? 냅다 고기-특히 네발 달린- 먹어대는 인간인가, 딥다 푸성귀 먹어대는 인간인가? 질문 자체가 실없다. 육식을 탐하는 인간이 일군 문명이 오늘날 인류와 지구생태계를 이 모양으로 망가뜨렸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네 발 달린 동물인데 거기다가 또 동물-특히 네 발 달린-을 대고 먹어대니 네 발 달린 동물 본성이 증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네 발 달린 동물 본성이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한마디로 자르면 외곬(偏向)”이다. 추우면 따뜻한 곳을 침략하고, 더우면 서늘한 곳을 침략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르는 기생 생명체가 동물-특히 네 발 달린-이다. 침략 외곬 본성을 무한 증강한 직립보행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과 행위체계가 형식논리, 수학 기반 과학·기술, 마침내 제국주의다. 제국주의를 사바랭 어법으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너는 네가 네 발 달린 고기를 주로 먹는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답한다: 그렇다면 너는 침략 본성을 지닌 제국주의자다.

 

제국주의 역사를 보면 사실임이 드러난다.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이 쓴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국적 생활양식을 상징하는 아이콘 셋 가운데 하나가 고기(肉類)”. 제국주의 종주국이든 변방 부역국이든 제국적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은 육식 인간이다. 그들은 분명히 고기를 먹기 위해 산다. 그렇게 고기를 먹어대야 더욱 제국적 체취를 풍길 수 있다. 그 체취가 제국 시민임을 과시하는 훈장이다.

 

우리는, 물론, 이른바 비건이 아니다. 우리가 고기를 삼가고 푸성귀를 먹는 까닭은 동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얼굴 있는 생명은 먹지 않는다는 알량한 종 편견 따위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생명으로서 끝까지 일궈내야 할 팡이실이(hyphaeing)” 흔히 말하는 네트워킹 본성을 따르기 위해서다. 그 본성의 창조자인 곰팡이, 곧 버섯과 그 본성의 현창자인 식물들을 삼가 먹는다. 비건이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아주 특별한 경우는 고기를 먹기도 하거니와 그보다는 버섯을 귀히 여겨 받들어 먹기 때문이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는 제국의 총아인 육식주의를 버린다. 생명 체계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머리 숙여 엎드려 식물과 버섯과 말을 거룩하고 질탕한 식탁에 모신다. 먹기 전 한 번 되새긴다: 내게 네가 먹는 것을 말하라,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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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말할 때, 청빈(淸貧)이라 하면 유교, 안빈(安貧)이라 하면 도교, 성빈(聖貧)이라 하면 천주교, 인욕(忍辱)이라 하면 불교가 떠오른다. 그 가운데 맨 나중 인욕은 물론 가난에 국한한 말이 아니지만 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만큼 욕된 일이 없으니 다른 말과 나란히 놓아도 크게 무리는 없겠다.

 

인욕에 관해 나는 진욕(進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찌감치 자기 삶의 적극 능동 좌표로 삼아두지 않으면 이런 비아냥을 듣기 때문이다: 실패한 자가 늘어놓는 자기변명이다. 제국 자본주의 논리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주제에 돈 버는 거 관심 없다 하면 위선이 된다는 말이다. 과연 그렇다.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감히 자기변명을 선택했다. 한의사가 우울증을 상담, 곧 숙의(熟議)로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돈을 벌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오은영이 100만 원을 받을 때 나는 15만 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한의사를 대우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나는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만큼 나는 가난을 삶 샅샅이 들여놓았다. 궁상맞은 일을 서슴없이 하고도 쪽팔리지않다. 나는 이런 삶을 청빈·안빈·성빈, 그 어느 말로도 미화하지 않는다. 가난은 항일 무장투쟁 전사 후손으로서 내가 반제 전투에서 쓰는 병기다. 이 병기가 나를 제국적 생활양식에 살해되지 않게 한다.

 

내가 버는 적은 돈, 그 병기 때문에 자원·에너지 집약적인 제국적 생활양식”(울리히 브란트·마르쿠스 비센)이 내 삶 본진을 공략할 수가 없다. 한평생 나는 내 이름으로 집·자동차를 가진 적도, 육식을 위해 음식점에 들어간 적도, 은행 계좌에 단돈(!) 천만 원을 넣어 놓은 적도 없다. 진심으로 고맙다.

 

가난이 고맙다고 하니 누가 묻는다: 불안하지 않나요? 산속 승려가 아닌 이상 목돈 들어갈 일이 돌발할 수도 있는데 전혀 대책이 없다면 불안은 당연하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정도 일이면 운명입니다. 그런 일을 걱정하는 대신 나는 작디작은 틈새에서 죽은 돈을 산 돈 만드는 기회를 찾아낸다.


 

그동안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를 쓰지 않았다. 중앙 정부가 한의원에 쓰는 방식과 같은 속임수를 쓰는 게 괘씸해서다. 최근에 생각을 바꿨다. 그래도 거긴 도시철도공사고 나는 극빈 한의사이니 같은 급이 아니다. 절약되는 푼돈이나마 기부/후원해 죽은 돈을 산 돈으로 만드는 일도 반제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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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첫 일과인 빨래를 널며 하늘을 보니 심상치 않다. 이 정도 땡볕이면 경강 지천 걷기는 어렵다. 그래도 본류는 곳곳에 버드나무숲이 있어 그늘을 드리우고 물을 증산해 더위를 피할 수 있다. 잠시 산책이라면 모르되 몇 시간에 걸친 걷기 장소로 지천은 무리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걸어서 가장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관악산으로 간다. 기슭을 따라 돌다가 나오기로 한다.

 

익숙한 바리궁 주산을 가로지르고 살피재 건너 까치 능선을 따라간다. 관악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무렵 홀연히 숲이 물로 다가든다. 그렇다. 강과 바다는 파란(blue)” 물이고, 숲은 푸른(green)” 물이다. 풀과 나무가 뿜어내는 곱디고운 푸른 물방울이 온몸을 휘감는다. 날씨 탓인지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마음껏 두 팔 크게 벌리고 기쁜 소리 지르며 푸른 물길을 따라간다.

 

숲이 물 되자 나도 이내 물 클러스터 하나 되어 유유히 흘러간다. 물 행성 지구에서 누가 차마 물이 아닐 수 있는가. 땀도 비 오듯 흘러 살갗과 옷을 적시고 소금 결정을 남긴 다음 증발해 다른 순환에 합류한다. 갈증으로 벌컥벌컥 마신 물도 장 바깥을 타고 흐르다 몸으로 스며들며 또 다른 순환에 합류한다. 사소한 데부터 거대한 데까지 이 물 순환은 지구생태계 전제조건이다.

 

나는 이 평이하고 진부한 숲 걷기에서 찬찬히 작디작은 물과 그 기운을 살핀다. 작은 골짜기 괸 물에 손을 담그고 똘랑똘랑 초르르초르르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샘 자리와 물길에 주의를 기울인다. 장마 끝나 물길은 끊겼으나 촉촉한 습기 머금은 돌과 이끼를 거룩한 카이로스로 모신다. 생명 간 경계와 생명-비생명 간 경계가 물로써 뭉그러진다. 물이 진리다.



 

물에 소나타 양식이 있을 리 없으니 나도 목적성과 의미 부여, 엄숙한 마무리를 뺀다. 골짜기, 능선, 숲 이름을 잊는다. 시조창에서 마지막 한마디를 허공에 달아두듯 흔적 없이 일상으로 배어든다. 빈둥빈둥 시간을 길거리에 놓아주고 시적시적 장 보아 집으로 돌아온다. 땀에 절인 몸을 씻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 맑은 물 한 종지를 모셔둔다. 내일 새벽 이 물이 내 영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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