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휴전>이라는 제목 자체가 암시하는 이중성으로 치밀하게 직조된,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symmetry 또는 chiasmus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포로가 된 사람들이 죽음을 전제한 닫힌 시공에서 겪는, 어둠이 짙어지는 조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휴전>은 포로에서 놓여 난 사람들이  삶을 전제한  열린 시공에서 겪는, 어둠이 옅어지는 조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큰 틀은 전혀 다르지요, 이렇듯. 

그러나 서로 다른 상황임에도 펼쳐지는 인간성의 파노라마는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전혀 같다고 할 수 있는 면들이 전편에 걸쳐 드러납니다. 사실, 휴전은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닙니다. 끝났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질서하고 전쟁적 탐욕이 여전히 작열합니다.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풀어져 있고 평화적 역동이 육감적으로 준동합니다.  

이런 상황을 곰곰 들여다보면 휴전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메타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면서도 전쟁이 아니고 전쟁이 아니면서도 전쟁인, 역설. 이것은 <휴전> 전체를 가로지르는 통찰입니다. 이런 통찰에서 필수불가결한 캐릭터가 바로 모르도 나훔이란 인물이지요.  

" ......."하지만 전쟁은 끝났잖아요." 나는 반박했다. 그 몇 개월의 휴전 기간을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 처럼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늘 있는 거야."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라거는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도래했다. 그런데 나는 라거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의 어떤 추악한 변형으로, 괴물스러운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으로 인식했다. '전쟁은 늘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 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 (77-79쪽)  

사실 인간의 역사 전체를 보면 온갖 이름의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 사이를 평화기라 하는 것보다는, 휴전기라 하는 게 맞고, 그 휴전이란 게 특정 전쟁과 관련한 표현일 뿐, 보편적 관점으로 보면 언제나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 즉 전쟁적 존재로 살아 온 게 맞습니다. <휴전>의 시공도 그 역사의 한 에피소드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중대 포인트. 프리모 레비는 이 엄밀한 역사적 사실에 내밀한 허구적 역설을 끼워넣습니다. 바로 모르도 나훔에서, 저 나훔이란 이름! 나훔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포로기 말기의 예언자입니다. 고대 중근동의 제국주의 질서가 급변하던 기원 전 7세기 경 활동했던 것으로 보이는 예언자로서 니네베의 멸망과 유대 백성의 해방을 선포한 나훔서를 남겼습니다.   

프리모 레비가 구태여 이 예언자의 이름을 전쟁항시론자인 그리스인에게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나훔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의 저 나훔과 <휴전>의 이 나훔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사실을 프리모 레비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알았기 때문에 저 나훔과 이 나훔을 일치시켰을 것입니다. 이 나훔에게 저 나훔의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프리모 레비 자신의 이성의 힘과 낙관을 늘 있는 전쟁 상태에 불어넣어 '주술적 알레고리'로 작용하도록 한 문학적 장치일 것입니다.  간절한 염원이고, 곡진한 헌정일 것입니다.

히틀러의 독일제국이 일으킨 전쟁은 분명히 끝났고, 그래서 포로들은 귀환하는 도상에 있고, 그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구체적인 공포와 알 수 없는 불안에 내팽개쳐진 채입니다. 이 현실은 모르도 나훔의 현실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또 다시 포로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우슈비치가 과거사일 뿐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불확실하고 막막한 삶의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파멸의 길로 들어섭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이성을 극대화시키거나, 마치 체사레처럼, 반대로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이성을 극소화시키거나, 마치 플로라처럼, 하여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통합적인 인격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누가 이성의 힘과 낙관으로 살아남는가? 바로 프리모 레비 자신이지요. 그는 어떤 캐릭터와도 자신을 일치시키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는 통찰할 따름입니다. 그는 도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를 고요히 유지한 채,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中道-중도가 바로 正道이므로-적 이성으로써 그 때 그 때 삶의 과제와 마주합니다.  이 태도는 스톡데일의 역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적어도, 그는 끝내 온전히 살아남아, 이렇듯 증언을 해주었습니다. 나훔이란 알레고리는 이 <휴전>의 시공에서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전쟁과 포로, 이 문제를 학대와 상처의 문제로 치환해내야 하는 저, 醫者인 저에게 벼락 같이 던져진  화두는 이것입니다.   

"인간의 정의가 상처를 없애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상처는 마르지 않는 악의 샘이다. 그것은 가라앉은 자들의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그들을 비굴하게 만들고 영혼의 빛을 꺼뜨린다. 상처는 압제자들에게는 악명으로 되돌아가고 생존자들 속에서는 증오로 영속한다.  모든 이의 한결같은 바람과는 반대로 복수에 대한 갈증으로, 도덕적 굴종으로, 거부로, 피로로, 체념으로, 수천 가지 방식으로 돋아나는 것이다." (20쪽) 

그리고 귀환열차가, 어떻게, 하필, 독일의 뮌헨에 이르렀을 때, 그 거리에서 프리모 레비가 뮌헨의 독일인들과 맞닥드렸을 때,  그 장탄식.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아무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귀머거리, 벙어리에 장님이었다. 의도적인 무지의 요새 속에 있는 양 자신들의 폐허 속에서 피신해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강하고, 아직도 증오와 멸시를 할 수 있는, 오만과 죄의 그 오래된 매듭에 묶인 포로들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봉인된 얼굴들의 저 이름 없는 군중 사이에서 다른 얼굴들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얼굴들을, 모를 수 없고 기억하지 않을 수 없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유명한 얼굴들을,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하고 죽이고 굴욕을 주고 타락하게 만든 그 얼굴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부질없고 어리석은 시도였다......." (323-324쪽) 

정교하게 배치한 수미쌍관.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당위(Sollen)가 상처라는 현실(Sein)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지 않느냐고 던지는 준엄한 질문. 이 질문은 끝내 그의 절연한 죽음과 맞닿아 있는 한없이 무거운 주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과 또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상처를 '쌩얼'로 대면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여 그 화두를 깨쳐야만 합니다. 어찌하든. 

인간의 도덕성으로는, 이성과 의지로는, 대뇌 전전두엽으로는 상처를 없앨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상처를 없앨 수 있단 말인가요? 아니, 상처란 본질적으로 없앨 도리가 전혀 없는 것인가요?  대체, 상처는 무엇인가요? 

管見一場. 상처는 감성의 문제입니다. 감성은 몸과 밀착된 마음입니다. 하여 이성과 의지로는 상처를 없앨 수 없습니다. 감성으로 쓰러진 자, 감성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감성으로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길은 그 감성의 결을 알아차려주는 것입니다. 공감, 공현, 동조, 지지.......다 같은 결의 마음이지요. 어루만짐, 챙김, 보살핌.......다 같은 결의 실천입니다.  

이 마음과 실천은 영락없는 여성, 특히 어머니의 그것입니다. 이게 답 아닐까요? 프리모 레비가 여성적, 모성적 접근 방식을 택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인간과 역사 전체에 대해서도. 왜냐하면 어머니란 이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이것이 인간인가> 15쪽)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전혀 없는 게 백 번 천 번 맞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인간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그 인간의 기원이기 때문이지요. 절망임에도, 아니 절망이어서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인 인간을 어루만지고, 챙기고, 보살핍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할 수 있는 일일까요? 그 이상의 무엇이 아름답고 거룩한 일일까요? 

그러나 프리모 레비는, 그 자신은 어머니가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를 꿰뚫고 도달한  어머니의 저 숭고한 감성, 그것을 프리모 레비가 지닐 수 있었을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최대한 동원하여 삶을 살아냈습니다. 언어를 통한 증언은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름 값-프리모!-을 다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자기에게 남은 모든 것을 던져 마지막 증언을 한 것입니다. 목숨!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그 충격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런 증언을 한 그가 그렇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허탈감뿐이라면, 이는 그의 죽음을 모독하고 또 모독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죽음은 그의 삶에 비추어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그의 삶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의 죽음도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이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그가 서구의 이성의지주의 문명의 아들이었기에 목숨을 던져 그 한계, 그 벼랑 끝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인간 위기, 그 백척간두에서 갱진일보한 것이라는 사실.  그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그가 남긴, 인간세상을 '엄마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엄마는 양육자입니다. 바로 이 양육자적 관점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온통 분열적 질병으로 뒤덮여 있는 오늘날 인간 세계는 실상을 알고 보면 본질은 하나입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면서 작패(作悖)질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힘이 센 어린아이는 남에게, 힘없는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진실로 진실로, 또 진실로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와 <휴전>을 끌어안고  생각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심경을. 그는 혹시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먹을 것으로 준 게 아니었을까요? 그가 혹시 인류 최초의 남성 어머니 아니었을까요?  다시 한 번 이 구절이 가슴을 울리며 다가옵니다.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를 사랑하는 또 한 사람입니다. 나훔과 관련한 해석은 탁견인 듯 합니다.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외상(trauma) 가운데 하나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아니 증언한 것입니다. 전통적, 아니 통속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을 소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전적 소설이란 말과도 어울리지 않지요.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감동을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 할 때, 한 사람의 삶 자체가 이처럼 감동을 준다면 구태여 그것을 소설이라 하지 않더라도, 뭐라고 부르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위대한 문학일 것입니다.  

 

제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다소 아이러니컬한 계기를 통해서였습니다. 국가가 공정하게(!) 집행하는 폭력(!)에 맥없이 당하면서 깊은 두려움과 좌절감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침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떤 분이 이 책을 제게 건넸습니다. 그 분은 불안장애와 우울증 때문에 제게 상담을 받았던 분이지요. 이 책으로 그 분은 저의 벗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치료하는가, 구분이 사라진, 서로 말하고 들으면서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외상(trauma)에서 비롯한 만성적인 우울증후군을 오래토록 끌어안은 채 살아 온 터인데다 그것을 증폭시켜 재점화하는 사건에 휘말려 있었기에 제게 이 책은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치료 독서 기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따라서 예상대로 처음에는 기분부전이 즉각 악화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어린 시절에 두려움에 떨며 겪어야 했던 버려짐, 배고픔, 추위, 폭력의 기억이 하나 둘씩 되살아났습니다. 성인이 되어 겪었던 군대의 나름 수용소적 분위기도 송두리째 기억 저편에서 살아나와 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우울증과 이렇게 저렇게 관련을 맺으며 살아온 제 삶이 통째로 기우뚱거리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관념, 치료 이론, 치료 행위.......모두 재점검하는 정중동의 시공간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독서가 고통스럽고 불편해졌습니다. 펴서는 차마 읽지 못하고 황급히 도로 닫아버리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 편, 어떤 힘에 이끌려, 자꾸 책을 열게 되었습니다. 스무 번도 넘게 이런 뒤척거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제 삶에 대한 고요한 애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애도는 감정이 복받쳐 너울거리는, 장례식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연한 선정의 호흡처럼 꼿꼿하며 투명한 것이었습니다. 치졸한 자기 동정의 각질들이 떨어지면서 순수질량으로 복귀하는 영혼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애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외상(trauma)과 고통을 비교해서, 뭐 그 정도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느냐, 말하는 이성에 기댄 작업만은 아니었습니다. 삶의 조건, 그리고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서로 다른 모습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인간됨, 선악, 분노, 용서.......그리고 우울의 실상을 묻는 작업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 이스라엘(유대인)이 나치보다 더 나쁜 짓을 하고 있다며 이 책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시더군요. 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다만 나치를 고발하려고 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고통 받는 팔레스타인인의 삶의 조건을 먼저 본다면, 거기에 귀 기울인다면 그 분의 마음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시는 아우슈비츠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누구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 소망이 철저하게 배반당하는 시공간에 프리모 레비 대신 우리 자신을 놓는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프리모 레비는 문학가로 대성공을 거두고 삶의 절정에 선 순간 홀연히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이런 문제적 죽음과 마주하자, 문학과 문학의 바깥을 가로질러 제 고뇌는 맹렬하게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이 칼 같은 메타포가 되어 이미 죽은 과거를 벌떡 일으켜 세우는가 하면, 유령 같은 미래를 바로 눈앞에 불러 세웠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 온 게 어떤 의미가 있나, 이렇게 계속 살면 희망은 생기나, 아무도 답해줄 수 없는 질문에 휩싸였습니다. 급기야.  

 

나 같은 무지렁이는 그렇다 치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그의 삶이 보여준 이성의 힘과 낙관은 결국 실패한 것인가? 이 문제의식을 자기 사유의 핵심으로 놓고 고민한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따르면 그런 단서가 아프도록 풍부하다고 합니다. 물론 서경식은 자살을 이해 대상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면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어떤 답도 답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세존께서도 침묵하셨을 것입니다. 하여 무기(無記).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답은 유보입니다. 너무 멉니다. 너무 깁니다. 그래서 딱 반걸음 안쪽에 있는 풀만 뜯어먹는 말과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그 이상은 허세이며 과장입니다. 인간, 오직 인간만이, 지나치게 진화하였습니다. 탐욕을 기획하고 집단화하고 구조화하여 서로를 파멸시킵니다. 뼈아픈 반성도 무력하며 따뜻한 희망도 공허합니다. 바로 이런 인간 현실에 대한 주체적 감응(response)은 생사일여를 찰나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로 더 이상 표현해서는 안 되는 차원입니다. 마지막 예의를 지켜야 하는 대목이지요.  

 

프리모 레비의 또 다른 작품, 아니 증언인 <휴전>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알라딘에 주문해 놓고, <이것이 인간인가>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습니다. 아니 에르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프리모 레비는 제 풀죽은 영혼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 깨우는 독(毒 )이 되어 오래토록 함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사람의 아픈 마음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의자(醫者)로서, 그의 증언, 그의 삶, 무엇보다 그의 죽음을 언제나 품에 안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들릴 테지요, 저 영원한 웅얼거림, 이것이 인간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
호시노 요시히코 지음, 임정희 옮김 / 이아소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마음의 문제를 가진 분들과 만나면서 갈수록 깊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의사가 지니고 있는 어떤 의학적 도식에 따라 그들의 고통을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게 얼마나 안일한가, 아니 옳지 않은가, 하는 깨달음이지요.  

의사라면 으레 무슨 병이라고 진단하고 약 처방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고통을 겪는 당사자한테는 그런 행태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병이라고 해야 할 것을 병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를 더욱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많은 구체적 정황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타성적으로 '의사질' 하는 의사가 너무 많아서 오늘날 의사는 돈 잘 버는 기술자 쯤으로 자리매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사란 본디 사람의 생명과 삶, 즉 생명현상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조력자이며, 나아가 안내자, 더 크게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성격이 변화하는 데 따라 신성한 사제에서부터 싸구려 기술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놓이지만, 인류가 갈수록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의사가 그 본분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던 중, 우연히 호시노 요시히코의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을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특별하다거나, 금시초문의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닌 문제의식으로 마주했더니, 전혀 다른 각도에서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려서, 적어도 제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책이 되었습니다.  

2. 저자가 말하는 발달장애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이른바 자폐증과 아스퍼거증후군을 아우르는 광범성발달장애(PDD), 학습장애(LD)를 모두 담아내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라는 표현이 주는 편견을 고려하여 저자는 발달장애를 발달불균형증후군으로 다시 고쳐 말합니다.   

발달불균형증후군이 또 하나의 병명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그게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제게는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는 데 "발달"이란 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발달이란 말은 '신체, 정서, 지능 따위가 성장하거나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장, 성숙이란 말로 바꿔 써도 무방하겠지요. (이 모든 한자 말을 아우르는 순 우리말 "자람/자라남"을 필요에 따라 쓰겠습니다.) 발달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유독 인간이란 종(種)만이 긴 발달기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문제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 긴 발달기에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으면 발달의 균형이 깨지고, 바로 거기서부터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발달의 불균형은 전체적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 할 것입니다. 즉,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알맞게 자람으로써, 두루 고르게 자라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겠지만, 실은 지나치게 자란 부분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 때문에 다른 부분이 소홀히 되어 실제 삶이 기우뚱거리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 들쭉날쭉한 발달이 생각, 언어, 행동의 조화와 협동을 깨뜨림으로서 나타나는 다양한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가  지녀 온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성질머리가 더럽다, 성격이 까칠하다, 배려심이 부족하다, 제 생각만 한다, 조신하지 못하다, 경망스럽다, 게으르다, 지저분하다, 예의바르지 못하다, 변덕스럽다, 정신력이 약하다, 못나빠졌다.......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인격, 성격, 윤리적 감수성, 가치관, 따위의 틀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묻고 다그치는 태도입니다. 

둘째, 앞의 태도와 전혀 다른, 거의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일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요. 뭔가 남다른 사람의 개성, 즉 기인(奇人)다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성편력이 심하다든가, 약물 의존 상태에 빠져 있든가, 할 때, 아,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지요.   

셋째,  의학적 차원에서 장애나 병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뇌의 특정 영역이나 신경체계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요. 저자가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장애라는 말에 덧씌인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발달불균형증후군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태도를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4. 독자로서 개인적인 소회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자는 발달불균형증후군을 만병의 근원이라 보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 생각을 철저하게 밀어붙여서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병은 발달불균형증후군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병은 발달의 문제로 바뀝니다. 발달은 결국 양육 문제입니다. 양육은 무엇입니까? 아이를 보살펴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본 문제입니다. 윤리보다 깊고, 윤리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그의 인격적 책임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육은 치료보다 깊고, 치료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병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윤리도 의학도 어른의 기준으로 어른을 말하는 표준담론(!)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피면 그 표준담론을 들이대는 장본인이 대부분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닙니다. 그가 제대로 된 어른이려면 자라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아이에게 어른의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그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통찰할 수 있어야 어른인 것이지요. 

결국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대부분 발달의 문제를 지니고 있고 양육이라는 보살핌이 필요한 미완의 존재입니다. 인간, 우리 모두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계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아픈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이 현실을 공감/동조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양육적 삶의 흐름에 맡기는 것만을 허합니다. 

5. 그 동안 깊은 우울, 날카로운 불안, 불 같은 분노, 살 떨리는 원망으로 고통 받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 분들의 내면에 학대 받은, 그래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또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부부상담 또한 본질이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외도, 고부갈등, 섹스 언밸런스 등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끼리 맞붙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여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아이들. 그리고 그 어머니들. 현재 아이들과 그들을 양육하는 어머니들의 문제가 심각 또 심각함에도 우리사회는 아무런 아젠다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제목이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이고 내용도 거기에 집중되어 있지만 저는 이 책을 읽고 그 앞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만나 맺어지는 인연은 각기 다른 법이지요. 어떤 인연이 다가올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괴물 2010-10-17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우연히 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써 넘 좋은 서평글을 읽어서 기분이 좋은 밤입니다. 감사합니다.
 
명상
윌러드 마거리트 비처 지음 / 북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1966년에 쓴 책인데 44년이 지난 뒤에야 번역되었으니 번역자의 눈에 우연히 띄지 않았다면 한국 독자들에게는 영원히 없는 책이 될 뻔 하였습니다. 보기 드문 "다른 유(類)"의 책입니다. 저자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책'과 다릅니다. 이 책은 처음과 끝이 따로 없으며 아무 데도 향해서 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라는 바다 속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장애와 암초라는 환상을 찾아낼 수 있는 실상의 지도(map of What is)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19-20쪽) 

저자는 기존의 인생 지침서 또는 자기계발서들이 '적극적 접근법'에 터 잡아 사람들로 하여금 환상을 좇게 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그 환상을 깨뜨리는 '소극적 접근법'을 쓴다고 천명합니다. "~하라" "~하지 말라" 따위의 지시를 거두고 다만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지도처럼, 드러낸다는 뜻이지요. 그렇게만 하면 스스로 돕는 내부의 힘을 따라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자신이 빠진 함정에서 벗어나는 자유인, 즉 현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프롤로그를 읽고 나면, 이 책이 매우 신랄한 내용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지요, 매우. 그러나 여기까지만으로도 이 책이 구사하고 있는 근본적(radical) 어법에서 대뜸 근본주의적(radicalistic) 경계를 넘나들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여부는 읽는 이 각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범접 불가능한 큰 스승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호하게 자신의 논지를 단속하는 걸 보면 그럴만하다 하실 겁니다, 대부분.   

그리고 이 책이 오만하다 싶을 만큼 단단하고 비타협적인 주지주의에 터 잡고 있음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계몽 이성의 표독함이 하늘을 찌르지요. 죄다 쑤시고, 부수고, 해체하는 통렬함이 때로는 저자 스스로 엄히 비판하는 반항적인 습관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럭 불러 일으킵니다. 과연 이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성숙이란, 분명코 하나의 과정인데, 그 과정에 대한 고려는 일언반구도 없이 "아테나 처럼 완전히 자란 채로 제우스 신의 눈썹에서 갑자기 튀어나온"(193쪽) 존재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거야말로 진짜 환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요. 아무튼.   

근본주의와 주지주의, 그리고 그 둘의 결합. 주류 서양사상을 떠받치는 단단한 대리석 기둥들이지요. 아폴론적 형식논리학에 터잡은, 이것은 다만 이것이고, 저것은 다만 저것이다, 더우기,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다, 이것은 진(眞)이고, 저것은 위(僞)이다, 그러니 양자택일이다, 이런 이야기지요.  

물론 이 책에서는 어른, 자립, 존재함(Being), 실재는 선이요 진이고, 아이, 의존, 존재됨(Becomming), 현상은 악이요 위이다, 그러니 어른, 자립,  존재함(Being), 실재만을 선택할 일이다, 이런 이야깁니다. 이런 개념을 근본적 진리로 삼고 다양한 변주를 펼쳐내면서 반복적으로 통속한 인생 지침과 자기 계발의 기만성을 폭로합니다.  

이런 칼 같은 이분법, 과연 관통하는 힘이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라는데 그 중간을 파고드는 일은 비겁해 보이지요. 더구나 유치한 긍정주의에 터 잡은 통속한 성공주의를 가차없이 해체하는 단도직입의 통찰 앞에, 그래서, 뭐, 그러는 넌 얼마나 잘났어?, 하고 물을 엄두를 내기 쉽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하여.  

번역자가 이 책과의 만남을 운명적이라 했듯, 읽는 이에 따라, 각자의 punctum이 이 책의 근본적인 신랄함과 만나면 전율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온 영혼이 내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제1부 제1장부터 제6장까지, 빠직!, 금 가는 소리를 듣다가, 제7장에서 쩡!, 제8장에서, 급기야, 와장창,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7장에서, 쩡!, 소리 내게 만든 것은, "거물(big shot)이 되고자 하는 욕망"(78쪽)이란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제8장에서, 와장창!, 소리 내게 만든 것은, "사회에서 봉 노릇 하고 있다"(90쪽)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미 뼈 속 깊이 느끼고,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누군가 비수로 앙가슴을 거침없이 찔러 옴으로써, 으악!, 소리를 지르며 감응(response)하게 된 것이지요. 최후로 철퇴 마무리. 

".......자기가 연극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연기에서 주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유일한 관객으로 삼고 텅 빈 무대에서 연기하는 서투른 배우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91쪽)  

이 시점에서 이런 말은 여태까지 살아 온 제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한 비문(碑文), 그것도 명비문(名碑文)이었습니다! 흠, 여기가 나의 사회적 본질이군, 책을 내려놓고, 허리를 곧추 세웠습니다. 명징하게 깨어서 다시 한 번 제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언어로 비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이 통쾌로 전화하기 시작함을 감지합니다.  

다음날. 제9장 섹스와 사랑 부분을 읽다가 문득,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어? 이상하다.......그러다가 제11장 동성애 부분에 이르러 제8장에서 겪은 현상과 정반대의 충격을 받습니다. 1966년이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제8장 이전의 통찰이라면 있을 수 없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어이 털린', 이전의 모든 날카로움을 한 순간에 말아먹는, 아니 그 날카로움이, 휘릭!, 길을 잘못 들어선, 그래서 모든 언어들이 오로지 편견 덩어리가 되어 시커먼 강물에 둥둥 떠내려 가는, 그런 판이 되어버립니다.  

".......'사랑'은 그들에게 적용될 수 없는 단어임......." (119쪽) 

어허, 이런! 

그 뒤를 계속해서 읽어야 하나,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은 시종도 방향도 없는 지도와 같은 것이라 한 말을 기억했습니다. 이 부분 잘못 표시됐다고 해서 다른 부분까지 의심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싶어 계속 읽었습니다. 물론 다 읽고 나서도, 왜 그랬을까?, 의문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번역자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번역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사실 저자의 이분법적이고 근본주의적이고 주지주의적인 통찰은 다분히 남성가부장적입니다. 아무리 철저하고 투명해도 이 한계를 벗어나긴 어렵지요. 인간인 한. 아마도 이런 역설이 숙명적 딜레마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깊고 폭넓게 알았다면 이야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까요.  

군데군데 세계가 대칭구조로 되어 있다는 통찰이 없지 않지만 그 대칭성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실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인간의 자립성과 의존성이라는 대칭에서 100% 자립과 100% 의존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 개념이라는 사실이 저자에게는 깊게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태어났고, 혼자서 살아가며, 혼자서 죽습니다......." (47쪽)  

과연 그럴까요? 이 표현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기보다 자립적 독립 존재인 인간의 한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라면 이것은 자립이 아니라 고립입니다. 진실은 그 맞은편에 있는 상호의존적 존재로서 인간의 측면을 같은 무게로 유의하는데서 드러납니다. 인간 존재에서 의존은 다만 어린아이의 생존 전략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연기적 속성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실은 늘 반쪽 이하입니다. 

저자가 이런 통(通) 진실에 전혀 무지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말은, 그 말이란 집에 거주하는 사유는, 한 번에 하나의 논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최종 판단을 유보하는, 여백을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려는 것입니다. 이 여백까지 자신의 논리로 채워버린 결과 저자는 도리어 자신의 통찰 한가운데 구멍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치명적인.   

하지만  이 또한 저자의 몫. 그리하여, 이 책은, 장히 훌륭합니다. 자립심을 지닌 10%의 사람을 위한 헌사인지, 그렇지 못한 90%의 사람을 향한 경책인지, 집필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랜 세월 동안 뭔가 치우쳐 살았다는 앙칼진 자각을 스스로 요구하던 제게는 이른바 "관통의 고통과 통쾌"라는 역설의 일치를 맛보게 해준 고마운 안내자였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같이 평범해서, 저자의 염장지르기 식 '갈구기'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서가 가까운 곳에 놓아두고 이따금식 아무 데나 열어 한두 군데 읽는 일이, 시크릿 류의 책을 읽는 삽질보다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곳곳에 박혀 있는 촌철살인의 경구, 독특한 어휘 사용과 재정의,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예리한 포착이 저자의 범상치 않음을 웅변으로 증명해줍니다. 가령, 

".......어떤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역설적으로 구속 상태에 자신이 들어가도록 기꺼이 허락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마치 수영하면서 죽은 사람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자신을 물에게 내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182쪽) 

과연. 책 전체 논지나 특정 부분 오류에 대한 비판과 무관하게 찰나찰나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언어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구태여 외면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까칠하지만 쾌통함이 있다면, 벗으로 삼는 거, 강권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붓다 브레인 - 행복.사랑.지혜를 계발하는 뇌과학
릭 핸슨 & 리처드 멘디우스 지음, 장현갑.장주영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서점가를 장기간 제압하고 있는 자기계발/치유 서적이나 실용 심리학 서적의 양대 특징으로 뇌과학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과 종교, 특히 불교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양인 저자들이 그 동안 기독교적 영향 혹은 반영향이란 주류에서 벗어나 불교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됩니다. 

뇌과학은 이미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중대 화두인 것이 사실입니다. 정신 관련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기반지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뇌과학이 이런 위치를 점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더듬어 보면 달라이 라마를 상징적 축으로 하는 불교계가 미친 영향을 빼놓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티벳 불교만이 아니지요. 이른바 초기불교 사상과 수행 또한 그 영향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2. <붓다 브레인>이란 책은 그 제목만으로도 어떤 틀에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쓰여진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세부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다음 그것을 넘어서 행복, 사랑, 지혜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쓰윽쓰윽 읽는대로 손에 그 졸가리가 잡히는 유형의 책이 아닙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다소 산만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장한 흐름이 포착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고통의 연원을 밝힐 때 (저자들이 이 용어를 쓴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삼특상(三特相)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스스로 외부 세계와 차단하기 위해 연결되어 있는 것들로부터 분리하려 할 때.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의 법을 따라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의 네트워크를 완전하게 떠난 자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여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합니다. 그럼에도 이 법에 저항하여 자아에 집착할 때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2) 내부 항상성을 좁은 범위 내에서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안정시키려 할 때.  

삼라만상은 모두 변합니다. 불변하는 실체, 영원한 자성(自性)은 없습니다. 모든 운동은 시작하면 끝이 있습니다. 하여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그럼에도 이 흐름에 저항하여 특정 상태를 고착시키려 할 때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3) 기회를 얻거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부질없는 쾌락에 탐닉하여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외면할 때.  

생명인 한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무상이고 무아인 이치를 거슬러 기회를 추구하나 완전한 성취도, 만족도 불가능하며 그 과정에서 무수히 다가오는 위협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그럼에도 한사코 고통을 피하려 할 때 구체적 고통이 생겨납니다. 즉 우리의 경험적 고통은 고통 자체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발생합니다. 

제법무아는 진실을 synchronic한 측면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제행무상은 진실을 diachronic한 측면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일체개고는 두 진실이 맞물리는 시공간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저자들이 이런 틀 또는 흐름을 책 전반에 적용하여 내용을 펼쳐 나아갔더라면 독자들이 훨씬 더 삽상한 기분으로 읽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행복, 사랑, 지혜라는 병렬적 주제가 느닷없이(?) 도입되면서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단 '헤쳐모여'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헤치기는 했는데 다시 모이는 힘이 모자라 어수선한 분위기가 끝내 수습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3. 아쉬운 것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우선, 뇌의 특정 영역, 신경전달물질의 작용 상태가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왜곡하는가, 설명하면서, 그럼 어떻게 그 특정 영역과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을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맞춤한 구체적 답변이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뇌과학적 근거와 그에 따른 실천이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부분 부분 연결시키고는 있지만 대부분 명상이나 그 연장선에 있는 수행에 맡겨진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영양학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한계를 증명해줍니다.  

둘째, 자율신경, 특히 교감신경(SNS)과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HPAA)과 그것에 길항하는 부교감신경(PNS)의 중요성이 도처에 언급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브레인' 문제가 아닙니다. 뇌, 즉 중추신경의 조절 대상이긴 하지만 분명히 독자적 신경 시스템입니다.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문제가 뇌 조절 문제와 단도직입으로 맞물릴 수는 없지요.  

마지막으로, 붓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통속한 긍정주의를 불식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을 억누르지 말라는 것이 처방이다. 부정적인 경험이 일어났다면 일어난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경험을 잡아두어서 영원히 우리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108쪽)

마지막 문장은 아무리 보아도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하기엔 이상하지요. 그뿐 아니라, 부정적인 경험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면 그러면 그 처리를 어찌 하라는 것인지 말하지 않은 채 바로 긍정적 경험의 처리로 넘어간 성급함도 붓다와 맞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평정심을 그토록 강조한 태도와도 조화되지 않습니다. 뇌과학에서는 몰라도 붓다의 가르침 부분에선 아직도 요체를 파악하지 못한 느낌이 듭니다. 

4.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이 책은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설혹 앞뒤가 안 맞는다 해도 그게 뭐 그리 대수랄 수 없는 측면도 있지요. 본디 세계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자기연민, 부교감신경 자극 방법, 강인함 느끼기 훈련 방법 등 곳곳에 참신한 지식과 관점이 보석처럼 박혀 있습니다. 가령, 기저휴식 상태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일종의 진화 유형이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으면 망상체에 내적 되먹임을 제공해주어 각성 상태를 강화한다, 입술에 부교감신경이 많이 분포되어 있으므로 입술을 만져주면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된다.......  

처음 한 번 읽고 실망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뭔 얘기를 하긴 많이 했는데 도무지 남는 게 없다, 이런 느낌 때문일 테지요. 하지만 잠시 두었다가 찬찬히 다시 읽으시면 입 안에서 작은 과일이 톡톡 터지면서 단 맛이 튀기는 상큼함을 여러 번 느끼실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