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과 평안을 벗 삼아 천천히 집을 나선다. 교보에 들러 쭉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는 책이 없다. 특히 인문 신간 책 제목들은 그 가소로움이 임계점에 도달한 듯 얼씬도 못 하고 눈 밖을 벗어난다, 과학 신간도 마찬가지다. 미련 없이 나와 육상궁으로 간다.

 

칠궁을 알아서 일부러 찾는 이는 거의 없다. 본디 육상궁이며 나머지 여섯 궁은 셋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없다. 그럼에도 육상궁만이 <육상묘>라는 현액을 걸고 있다. 모르긴 하되 분명히 어떤 야로가 있다. 볼 때마다 속이 상한다.

 

셋방에는 눈길 주지 않고 바로 육상궁으로 들어가 간절한 마음 한참 오롯이 하다 나온다. 경내 한 바퀴 돌고 꽂아둔 나무 지팡이를 확인한 뒤 절하고 물러난다. 최숙빈을 둘러싼 극적 서사에 역사적 근거가 없다 하지만 그 인류학적 반향에 나는 주의한다.

 

역사라는 무엇도 결국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병도와 신석호가 만든 견해를 맹하게 붙좇아 온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역사적 근거란 얼마나 주제넘은가. 제 삶은 협잡인데 역사에서 진실 따지는 지식인 위선보다 비원 담은 전승 민중 서사가 백번 낫다.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백악을 걷는다. 숲에 22대 총선 결과를 보고했는데 그 제목이 태산명동서이필(泰山鳴動鼠二匹)”이다. 여태 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설치류 둘을 들어 축사하고 숲을 나온다.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한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30대 중반 남자들이 총선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시종일관인데 육중한 사항은 한마디도 없다. 얄팍하다. 그들이 나가고 60대 중반 남자들이 들어온다. 총선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고향과 친구를 말하는데 돈독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다. 얄팍하다.

 

두 무리 모두 등산 뒤풀이 모임이다. 산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무슨 이야기였든 나는 궁금하지 않다. 산에서라고 달랐을까 싶으니 말이다. 산은 저들에게 고난도 트레드밀에 지나지 않는다. 운동기구 위에서 자기 영혼을 맑게 하는 인간이 있겠나.

 

요는 산이 아니라 숲이다; 산이 아니라 숲이 말한다. 숲이 하는 말을 들은 사람이라면 선거에 관해서도 고향과 친구에 관해서도 그리 말하지 않는다. 그 얄팍함은 인간 뇌가 지닌 진부함에서 나온다. 진부함은 참 팡이실이를 창조하지 못한다. 깊은 죄만 짓는다.

 

등산은 제국주의 부산물이다. 정착형 제국주의를 발명한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산을 처녀로 은유함으로써 등산은 정복이 되었다. 정복자가 피정복자 음성에 귀 기울일 리 없다. 정복된 산은 더 이상 숲이 아니다. 정조 의무에 결박된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정조에 결박된 여자 대표적 이름이 바로 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 안에 이미 살고 있던 모든 원주민은 멸절 대상일 수밖에 없다. 정조에 결박된 여자에게 다른 남자 접근은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제국 USA만이 아니고 다른 부역 국가 국립공원도 본질이 같다.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천하를 제패한 오늘 모든 국립공원, 아니 모든 산은 숲이 아니다. 그 숲은 모조리 살해당했다. 숲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아메리카 대륙 토착민을 비롯한 모든 식민지 주민도 그러하다. 권력과 재력에 죽임당한 모든 이도 그러하다.

 

내가 오늘 육상궁과 백악 숲, 그리고 삼청동 음식점에서 깨달은 진실은 결단코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평범한 일상에 내려앉은 비범한 죄악을 다시 한번 응시하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열 번째 맞는 4·16이다. 우린 여태 대체 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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