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문학이 내게 다가온 사건은 다소 의외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시조나 번역 한시가 인쇄된 손바닥보다 작은 카드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나는 영문 모른 채 외워 나아갔다. 그 경험은 뒷날 산문보다 운문을 더 가까이하는 경향으로 자라나 지금까지도 그렇게 흘러간다. 이 경향에 세 가지 강화 요인이 더해졌다.
그 하나는 아버지 중학교 졸업 문집이다. 벗들이 남긴 친필 작품을 모아 만든 수제 문집이었는데 대개 유치한 사춘기 문학성이 뛰노는 시였다. 그들보다 더 유치했던 어린 나는 그 운문 리듬에 매료되었다.
다른 하나는 형이 끼친 감염이다. 세 살 위인 형은 나름 문학 소년으로 자작 풋 시를 써댔고, 김소월 시집을 통째로 외고 다녔다. 그가 읊조렸기에 아직도 내 귀에는 소월 시 여러 구절이 생생하게 남아 있을 정도다. 그 뒤 나는 닥치는 대로 시를 읽었다. 박인환, 신경림, 김남조, 도종환, 이생진, 이해인, 정호승, 박노해, 김기택, 이문재, 문태준, 그리고 내가 ‘천하 시인’이라 부르는 김선우···비교적 최근에는 이른바 뉴웨이브 젊은 시인들까지. 지나치게(?) 어려운 시들은 내가 공들일 데가 아니다 싶어 발길을 끊기까지 나는 옛 종로서적, 광화문 교보에 가면 가장 먼저 시 가판대 앞에 섰다. 이사할 때마다 버리고도 아직 서가에는 시집 백수십 권이 꽂혀 있다.
마지막 하나는 중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이다. 다른 부분에서도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선생님이 ‘문학의 밤’에서 자작시 <마음 가는 길목>을 낭송하던 모습은 내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시 전체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마지막 딱 한 구절이 남았다. 의성어였기 때문이다: “울릴리 불릴리”
“울릴리 불릴리” 선생님은 전복적 영향을 내게 끼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쓰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일이었다.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한 모작 콩트 수준이었지 싶다. 그 50여 년 뒤에 나는 숙의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숙의 의학 소설 77편을 썼다.
물론 나는 그동안 수없이 시와 소설 습작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문학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시와 소설 형식을 빌려 내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지금도 거의 쉼 없이 글을 쓰지만 거의 모두 ‘실용’에 가까운 글들이다. 거기에 아주 소소한 문학성이 깃들어 있도록 마음을 기울인다. 나는 문학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문학적인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술보다는 음악이, 음악보다는 문학이 내 삶에서 미학적 동인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문학적 삶에 자양분이 된 숱한 영감들이 이렇게 저렇게 친일 부역자들에게서 발원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서정주가 가슴에 있지 않은 한국 문학이 어디 가능하기는 한가. 문학인이 아닌 나 같은 무지렁이마저 문학 부역 서사 한 귀퉁이에 똬리 틀고 앉아 있으니, 아, 대체 우리는 얼마만큼 깊은 제국 심연에 빠져 있는가. 섬뜩하다. 아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