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부역 서사

 


들어가며

 

종교, 참 어려운 문제다. 인간 정신을 최고 상태로 인도하는 고매한 가르침이자 운동이다가도 상상 너머 저열한 상태로 처박아버리는 야비한 꼬드김이자 중독이니 말이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비대칭 대칭 진리가 드러나는 한 양상일 뿐 특별히 더 심각하지는 않다. 문제는 종교와 그 신자가 스스로 거룩하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거룩함이 뒤엎어졌을 때 드러내는 추악함이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역겹고, 심지어 가소롭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개신교, 천주교, 불교는 어떤 상태일까? 왜 그럴까? 앞으로 어찌 될까?

 

내 시생대 10년은 외양으로 불교 영향 아래 있었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인근 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 어릴 때 여러 번 들은바 나는 할머니 월정사 치성으로 부처님이 점지해주셔서 태어났다. 내가 생후 6개월 만에 걸으며 영특해서 신동이란 소리가 들려오자 문수보살 가피 덕분이라 했다. 월정사가 문수 도량이라는 전설에 근거한 말이다. 상원사 방한암 선사 이야기도 쟁쟁하게 들었다. 물론 어린 내가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불교에 심취했을 리는 없으나, 오대산 월정사에 깃든 아우라가 빚어내는 서사 영향만큼은 분명히 받았으리라.

 

사실 불교보다 내가 내밀하게 느낀 종교적 영향은 무교, 그러니까 바리데기 신앙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 일로 기억한다. 백부가 사고를 당해 객사하자 할머니는 해원굿을 청했다. 그 굿이 진행되는 여러 날 동안 나는 오감이 열린 채 그 풍경 속에 잠겨 있었다. 천정에 가득 붙은 부적, 풍채 좋은 박수가 경 읽는 소리, 신기를 받아 팽팽히 곧추서는 지푸라기 신주, 다듬돌 위에서 스스로 돌아가는 물푸레나무 신목, 망자 영혼을 초대해 빙의 상태에서 만신이 망자 목소리로 가족들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커다란 떡 시루를 번쩍 들고 공중 뛰어나가던 만신, 망자 영혼을 달래 저승으로 보내준 뒤 돌아온 만신 발바닥에 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는 할머니 증언···나는 60년도 썩 지난 이 풍경을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 선연히 느낀다. 이른바 고등종교가 이 풍경을 뭐라 말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나는 고등종교에 천천히 깊숙이 들어간 먼 훗날, 그 어떤 순간에도 이 풍경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섬세하고 광범위하게 그 실재성을 감지한다. 식물 공부에서 시작해 숲으로 들어간 뒤부터다.

 

서울살이가 시작되면서 동네 교회를 이런저런 인연 따라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진심이지는 않았다. 스무 살 갓 넘었을 무렵, 실존적 고민 끝에 내 발로 걸어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결정적 고비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외부 힘이 작용해 내 희망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보다 큰 인격적 존재를 상정하니 가장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종교가 개신교였던 셈이다. 나는 현실 교회에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았다. 누군지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신학자들이 쓴 책을 읽으며 신앙 기조를 잡아갔다. 공부로 신앙 길을 닦아가는 구도자적 경향은 마침내 나를 신학대학원으로 이끌었다. 공부할수록 신앙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서구신학이 지닌 한계뿐만이 아니다. 현실 개신교회가 벌이고 있는 신앙 행위와 그 서사가 전혀 영적이지도 생명 윤리적이지도 사회정치적이지도 않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결별을 준비해야 했다. 안에서 바꾸려는 노력이 적어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은 순간 이미 나는 교회 울타리 바깥에 서 있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일과 신앙을 버리는 일은 같지 않다는 말로 알리바이를 댈 생각이 없다.

 

개신교 신앙에 절망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나는 가지 않았다. 내게 개종할 만한 진실과 가치를 지닌 다른 제도권 종교가 있을 리 없었다. 도긴개긴이니까. 서구 지성이 도달한 무신론도 내 길은 아니었다. 저들 한심한 무지와 뒤엉킬 까닭이 없으니까.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걸어간 길은 시생대에서 시작한 바로 그 길이었다. 되돌아가기 장엄한 출발점은 원효였다. 원효 사상은 제도권 불교 사상이 결코 아니다. 우리 생태공동체가 빚어낸 바리데기 사상을 원효 특유 화쟁 어법으로 풀어냈을 따름이다. 이 회향은 내 운명, 아니 천명이었다.

 

바리데기 사상은 지구 생태계 창발적 네트워킹 전체 사건을 신으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거대유일신론을 관통함은 물론 무신론도 관통한다. 이 두 극단이 공유하는 일극 집중체제, 인간(특히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중심주의, 그러니까 제국주의 부역 종교성을 관통한다. 이 반제국주의 참종교는 숲에서 발원했다. 내가 나무와 풀, 돌꽃, 곰팡이, , 버금 바리, 으뜸 바리, 비생명들을 공부하며 숲으로 걸어간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이 바리데기 반제국주의 녹색 종교 언어로 부역 종교, 그 가짜 뉴스진면모를 증언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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