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문학 부역은 서정주 같은 상징적 인물 이야기를 통해 익숙해졌다. 상식 수준을 넘어 문학 부역 전경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글을 인용한다. https://dklee.tistory.com <우리 안의 친일 문화>에 실린 문학평론가 홍기돈과 인터뷰한 글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로 전향한 문인들은 두 가지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선일체'에 동의했던 문학가들입니다. 근대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었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광수입니다. 193810월 중국 중경이 일본에 함락됐습니다. 이곳은 동방의 마드리드라고 불리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조선의용군도 싸웠던 곳이고요. 문인들은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 한창일 때 중국이 이기면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패하자 큰 충격에 휩싸인 지식인들은 중국을 비판하면서 친일로 들어섰습니다. 중국은 봉건이고 일본은 근대라고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면서요.

 

또 하나는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근대의 종말을 고했던 문인들입니다. 이 시기의 문인들은 근대를 비판하면서 근대 이후의 신체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에 소설가 채만식이 있습니다. 19403월 중국 혁명의 선도자 쑨원의 양 날개로 불리던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있었습니다. 장제스는 계속 싸우자고 주장했으나, 왕징웨이는 일본과 타협안을 내고 친일 정부를 세웠지요. 이때는 프랑스 파리가 나치에 의해 함락된 시기입니다. 이 사건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파리는 근대의 정서가 싹튼 곳이었거든요. 이에 지식인들은 또 한 번 큰 충격에 빠지고 친일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식민지에서 문학을 업으로 삼은 지식인이 왜 부역할 수밖에 없었는지 큰 맥락에서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 문학을 한다라고 하지 않고 업으로 삼았다라고 한 이유가 있다. 식민지에서 문학 하는일은 목숨 걸고 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 문학을 업으로 삼은자들은 이미 목숨이 아까워 부역하기로 작심한 거다. 저들이 종주국인 일본과 중국 성쇠를 기준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했다는 사실이 그 결정적 증거다. 저들은 조국이 처한 식민지 상태를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데 문학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고, 거꾸로 제국 일본 승리에 붙여진 의미를 좇아 문학(인으로서 삶)을 구성했다. 저들 각자마다 곡진한 사연이 있고 부역 스펙트럼도 단순하지 않겠지만, 일제 식민 통치 진경을 경험한 상태에서 하필 문학 행위를 삶으로 선택했다면 기본적 부역 고의를 차마 부인할 수 없다.

 

서정주 이야기는 극적이면서도 전형적이다.

 

서정주의 삶과 작품은 첫 번째 시집 화사와 두 번째 시집 귀촉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화사시집에서 서정주는 <랭보의 두개골>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랭보가 돌아다니다가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너는 신 존재를 믿느냐라고 물었던 일을 비판한 시입니다. 그는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 해도 랭보는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랭보 모더니즘은 실패했지만 자기만은 꼭 이뤄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서정주는 만주, 금강산, 해인사 말사가 있는 산속까지 방랑했습니다. 더럽고 추한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는 전 세계와 맞선 모더니스트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시절 시 <자화상>에 나온 나는 뉘우치지 않겠다라는 말은 친일을 뉘우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속물 같은 세계를 떠나 방랑 세계로 뛰어들었던 사실을 뉘우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서정주는 화사시집이 나온 이후 모더니즘과 결별하고 친일로 들어섰습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들었고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죠.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천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상대방을 이상화합니다. 눈에 콩깍지가 쓰인 듯 한 사람을 이상 자아의 자리에 가져다 놓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대상은 점점 중요한 무엇이 됩니다. 결국 자기 자아를 지워버리지요. 특별한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한 사람을 이상 자아 자리에 들어다 놓습니다. 이를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정주 경우에도 그 시절 그가 흠모했던 대상이 바로 일본 천황이었으며 친일 파시즘을 찬양합니다. 그에 의해 통제받고 지시받기를 원합니다. 화사에서 귀촉도로 넘어가면서 강렬했던 자아를 없애버린 셈이지요. 어떤 문인들은 삶과 문학을 분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정주 경우를 보더라도 삶과 문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정주는 해방이 되면서는 이승만을 다시 그 자리에 놓습니다. 파시즘 체제 심미적인 무엇, 문학, 사고체계 유형이 반복됐지요. 친일을 얘기하면서 단순하게 친일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그때 만들어진 유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함을 느낍니다. 친일 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서정주가 지운 자아 대신 영원성 자리에 가져다 놓은 표상은 전두환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런 행태를 놓고 예술에는 천재고 정치에는 천치라는 말로 그 순진무구를 찬양하는 자도 있다. 이런 논리는 오늘날 정명훈에까지 이어지며 예술계 전가 보도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하필 왜 예술인만은 정치 천치를 자랑할까. 사실은 그 말 자체가 순수예술론이 지껄이는 신념에 찬 동어반복이다. 정치를 모른다고, 몰라야 한다고 말하는 짓이 제국주의에 부역한다, 해야 한다고 말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저들은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 인식이 부역을 증강 재생산한다.

 

이런 상황에서 불어오는 탈식민주의 바람은 과연 무엇인가?

 

요즘 문학계에는 민족적인 것을 버리자는 탈식민주의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탈식민주의는 종군위안부들이 돈을 받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와 같은 것입니다. 한국을 말살했던 일본의 군대와 일제에 대항했던 의병을 싸잡아서 '사람을 죽인 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자기중심적이었던 이들이 민족적인 것을 탈피하겠다고 해서 우리가 덩달아 그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친일인명사전만드는 일을 국회에서 막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뿌리부터 세워야 하는 법인데, 이런 것을 막는 세력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민족의 근간까지 흔들고 있지 않습니까. 구체적인 사실관계조차 규명하지 않고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구체적인 실증자료 만드는 작업이 선행된 후 논의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탈식민주의라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나는 스스로 부역자임을 고백하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저 뜨르르한 특권층 부역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지렁이 부역자지만 저들을 언급하면서도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또 다른 검열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탈식민주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일단 이 문제를 짚고 간다.

 

내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주의하는 일이 과연 적절한가? 탈식민주의와 내가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보다 훨씬 더 배타적이며 잔혹한 제국주의와 부역 권력 자국 식민주의가 나날이 증강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생각은 제국주의 앞에서 과연 무엇인가?

 

문학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탈식민주의 내용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문인들이 누구며 어떤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민족적인 것을 버리자.’라는 표현을 보면서 내 생각을 분명하게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던 중에 선문대 교수 손종업이 쓴 글 <친일의 정신분석-친일문학의 해석 문제->를 읽었다.

 

손종업은 친일 논의가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되면 도리어 교묘한 제국 논리에 말려들 우려가 있으므로 청산 이전에 정치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성찰이 없으면 우리 안에 키워온 민족국가의 형태를 띤 또 하나의 제국또는 우리 안에 간직된 제국적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그러면 제국 또는 제국적 고리는 무엇인가?

 

손종업은 식민지지배를 위한 일제 전략을 분할통치로 요약한다. 분할통치는 일제 특유 전략이 아니라 고대 로마 때부터 있어 온 고전적 통치술이다. 그런데도 손종업이 구태여 이렇게 요약한 뜻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제국 또는 제국적 고리를 정확히 아는 데 제국 권력을 단일한 것으로 추상화하는 일은 독이 된다. 식민지인을 갈라쳐 각각 다른 방식으로 통치해 복잡한 굴절을 일으키려면 제국 자체가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수천 개의 가면을 쓴 괴이한 존재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거기 빙의된 식민지인이 부역하는 양상도 단일화할 수 없는 복잡한 굴절을 그리게 된다. 부역이 지닌 이 복잡한 굴절을 구체적으로 읽어내지 못하면 제대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부역을 청산할 수 없다.

 

복잡한 굴절을 구체적으로 읽어내면 끝인가? 물론 아니다. 그다음은 무엇이고, 그러려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귀띔조차 하지 않은 채 손종업 글은 끝난다. 내가 손종업에게 품었던 의구심은 이 사실에서 비롯했다. 기존 친일 논의가 민족주의나 또 다른 제국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비판하고, ‘이효석에게도 저항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읽어 진짜 섬세하게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발톱을 숨기는 전술 아닐까, 운운. 물론 글 전체 맥락은 그렇지 않다고 시사한다.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렇든 아니든 나는 이제 내 말을 해야겠다.

 

손종업 같은 읽기 아닌 다른 많은 읽기 모두를 전선에 세워야 한다. 이분법적 외과적 읽기도 필수 불가결하다. 서정주가 그런 시를 쓰고 있을 때 어느 항일무장투쟁 전사는 제국 군대와 싸우다 총탄에 스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한 사람을 말하면서 항일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누락시키는 일은 그 자체로 고의적 친일 부역이다. 더군다나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강고한 제국과 부역 권력 시스템이 작동해 복잡한 굴절을 계속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닌 현재 부역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내 말 자체가 부역 언어가 아닌지 칼같이 살피려면 칼 들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을 직시해야 한다.

 

원효 어법으로 말한다: 친일에 관해 말하는 한 모두 맞다[皆是]. 진리 전경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모두 틀리다[皆非]. 그러므로 쟁[]을 세워야 한다[立諍]. 옹골차게 입쟁하고야 쟁이 다한다[破諍]. 화쟁[和諍]이다. 화쟁을 현대 제국 언어로 Networking이라 한다. Networking이야말로 제국주의 반대말이다. 정치적 용어로 번역하면 통일전선이다.

 

진정한 통일전선은 각성한 부역자, 그러니까 제국이라는 절대 조건을 삶에서 도려낼 수 없다는 진실을 뼈에 새기고 기어이 저항 틈을 내는 역설 주체가 평등한 연대를 이룰 때 형성된다. 평등 연대를 이룬 각성한 부역자 입에서 탈식민주의라는 말이 나올 리 없다. “유행처럼 번지고있다니 상당한 힘을 받는 모양인데 나는 이 논자들은 물론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한국 문학계 전반을 신뢰하지 않는다. 416을 대하는 자세와 글쓰기를 보고서 굳힌 생각이다. 이들 이름을 아래 식민지 시대 부역 문인 명단과 나란히 놓아야 하지 싶다.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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