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세뇌당해 이토록 야비한 악귀 부역 집단이 지배층 되었는데 100년쯤이었다면 말글은 물론 영혼까지 몽땅 뽑아내 민족 전체가 개돼지로 변해버렸을 테다. 3년 권력에 취해 이토록 황당한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는데 5년을 채웠다면 왜놈 황군 불러들여 남북 모두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테다. 이놈 저년 가릴 것 없이 자락자락 왜장독장치는 꼬락서니가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아간다. 슬픔이 끝도 없이 차올라서 진료 일찍 끝내고 휭하니 광장으로 간다.

 

165차는 촛불행동 전국 집중이라 사람이 많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 기어이 다시” “항쟁이 선언된다. 지난해에 이어서 또 겨울날들을 광장으로 채워야 하나보다. 이런 참여가 스러진다면 제국에 부역하며 호의호식하는 매국노 법비(法匪) 떨거지들 손에 나라가 난장판 되고 말 테니 달리 방도를 찾지 못한다. 특권층 부역자로 당당히 커밍아웃한 현직 판검사, 그 출신 변호사와 파면된 대통령 연놈들이 자행하는 협잡이 이루 다 형언하기 어려우니 퇴로도 없다.

 

본디 그렇게 한평생 살아온 작자들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쉽지 않은 작태들을 상상 초월로 쏟아낸다. 어떤 인간 집단이 한꺼번에 떼거리로 어떻게 쉽고 기막히게 망가지는지 다시없이 생생하게 자기 폭로해 주어 나쁘지만은 않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왜 윤리와 법을 만들었는지, 그래서 그 윤리와 법이 얼마나 속절없이 무용지물로 부서지는지 실팍하고도 허탈하게 깨닫고 만다. 오래전에 잡은 선약 때문에 좀 일찍 광장을 떠나면서 의문이 깊어진다.

 

인간은 정말 존엄한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구별이 과연 타당한가. 인간이 스스로 존엄하지 않다는 진실을 깨달아서 이런 말을 당위론으로 세우지 않았는가. 존엄이란 말을 입에 담지조차 않는 또는 못하는 비인간 생명, 나아가 비생명이 존엄하지 않은가. 아니, 존엄이란 개념 자체가 인간이 지닌 서사 구성 능력에 올라탄 과잉 또는 왜곡이 아닌가. 아니라 하더라도 존엄을 전제하지 말고 얌치있는지에 따라 인간 여부를 결정해야 하지 않는가.

 

쉽게 심지어 나쁜 뜻으로 쓰는 경향이 있지만 얌치는 웅숭깊은 말이다. 얌치는 존재 자체로 부끄러움을 아는 상태다. 내 생명을 다른 존재에 빚지고 있다는 겸손이다. 공존과 상생 팡이실이, 곧 네트워킹에 참여해야만 삶이라는 각성이다. 얌치 없는 세상을 만든 이 나라 지배층, 특히 오늘 우리 앞에 똬리 튼 법비(法匪) 떨거지들에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 힘든 까닭이 여기 있다. 약속한 사람들과 만나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이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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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명 공동체를 팔아먹은 매판 부역 특권층 인간 신경 회로에는 음모가 흐른다. 김명신 인간 부류에게 음모는 본성(HOMO LAQUEUS)이다. 그가 사악하고 우매한 음모로 종묘를 욕보이더니 이번에는 오세훈이다. 염치도 없고 기탄도 없는 야차 행렬이다. 그래. 오늘 종묘다. 너희는 종묘 신성한 전당을 토건으로 저주해 어제 역사와 오늘 공화국 모두 능욕하라. 나는 종묘 거룩한 숲을 정수로 축원해 너희 콩가루 지배 블록과 콘크리트 쇠말뚝 모두 녹여주마.

 

그 어느 때보다도 장중하고 치밀하게 걸어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추색 장엄한 숲에 경의를 표하고 준비한 정수 올려 예를 다한다. 딱 그 하늘빛 하늘을 우러를 때 내 영혼 웅숭깊이 잿빛 악귀들 녹아내리는 초저주파 음향이 들려온다. 오세훈이 아둔하고 뻔뻔한 오리발로 눙치지만, 종묘 앞 토건은 경희궁 공원 조성과 마찬가지로 미필적 고의를 숨기지 않은 야비한 고의 범죄다. 걸핏하면 지어내는 악어눈물과 질질 흘리는 썩은 웃음일랑 다시는 보지 말자.

 

오세훈이가 진정 이 생명 공동체에 티끌만 한 관심이라도 있다면 종묘 남쪽 애먼 땅 파 뒤집지 말고 동북쪽 서울대학병원 경내에 터만 남아 있는 경모궁을 복원해야 한다. 경모궁은 사도세자 사당으로서 창경궁 자경전, 월근문(月勤門)과 이어지는 애틋한 서사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그 뒤 변화 과정에 풍요로운 역사를 품고 있는 국가유산이다. 역사는 현재에서 기억되고 기려져야 한다. 둘을 갈라놓는 자들이 바로 김명신·오세훈과 같은 매판 부역 떨거지다.

 

경모궁 터로 가려면 종묘 떠나 창경궁을 거친다. 창경궁도 참으로 여러 번 갔었는데 그동안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나무 분들이 오늘 뜻하지 않은 행로에서 나를 맞는다. 한 분은 회화나무다. 한 그루 노거수인데 속이 곯아 없어지고 마치 두 그루처럼 서 있다. 다른 두 분은 회화나무와 단풍나무 연리목이다. 200년가량 연령차를 극복한 사랑이 지극하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생명 묘리를 서로 달리 제시한 나무 슬기 앞에서 삼가 고개 숙인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넘어 경모궁 터에 이르면 말 그대로 황량한 살풍경이 펼쳐진다. 함춘문(含春門)과 석단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 방치된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깨진 기왓장, 박석(薄石) 무더기가 자닝스럽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다가 하릴없이 김상옥 의사 동상 있는 곳으로 향한다. 나라 망하는데 무력했던 자신이 미워 손을 뒤로 숨겼다는 그 모습이 처연하다. 종묘, 창경궁, 그리고 경모궁 터, 마침내 여기 이른 내 손은 과연 어디에 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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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가락 우울증세가 요 며칠 부쩍 불안과 갈마들며 심사를 쑤석거린다. 오늘은 그냥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다스운 국물 음식이나 먹으며 쉬고 싶다. 당최 그런 장소 그런 음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퇴근 준비 끝내고도 미적거리는 동안 생각이 사방팔방 흩어진다. 맥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무작정 일어선다. 어찌어찌 돌다가 결국 광장으로 가고 만다, 아이고! 집회는 이미 끝났다. 행진에 들어갔다. 함성을 좇아 일단 길 건너편에서 따라간다. 중년 여자 사람 하나가 종이 피켓 들고 나처럼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무슨 곡절 어떤 열정인지 모르는 채 나는 더럭 미안해진다. 그렇게 한참을 홀로 멀찌막이 따라 행진하다가 문득 시장기를 맹렬하게 느낀다. 가까운 데 눈에 띄는 음식점으로 불쑥 들어간다. 다행히 추어탕집이다. 소주부터 따라 꿀꺽꿀꺽 소리 내며 마신다. 비로소 긴 숨 내쉬어지니 심사가 조금은 홀가분하다.

 

잠시 뒤 종업원이 인사하는 느낌으로 보아 동네 사람인 80대 남자가 들어오며 익숙한 용어로 음식을 주문한다. 앉자마자 스마트폰 유튜브를 켠다. 묵음 아닌 상태다. 높은 주파수 음성이 빠르게 흘러들어 내 귀를 두드린 말은 곽종근이 허위 증언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고요히 고개 돌려 예의 갖추어 말한다. “, 선생님! 이어폰으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안한 식사에 방해가 됩니다.” 그는 말없이 아예 유튜브 자체를 꺼버린다. 지하철에서도 음식점에서도 저렇게 행동하는 늙은이가 드물지 않은데, 이의 제기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말은 대체로 거짓이고 대개는 비겁하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에 걸맞은 시민 정신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다. 극우 집회에 60대 후반 이상 엘리트가 많다는 사실과 맞닿은 서글픈 풍경이다. 소주잔 비워내는 속도가 자꾸만 빨라진다.

 

얼얼함에 얹혀서 지하철을 탄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70대 여자 사람이 눈에 띌 정도 동작으로 자꾸 다리를 주무른다. 눈여겨보니 심한 통증을 느끼는 듯하다. 나는 일어나 다가가 나부시 앉는다. “다리가 심하게 아프십니까?” 그가 표정으로 답한다. 나는 한의사임을 밝히고 스마트폰 속에 넣어 늘 가지고 다니는 침을 꺼내 든다. 딱 두 군데 자침한다. 그는 입을 딱 벌린다. “? 안 아파요!” 주위 사람들이 놀라 돌아본다. 나는 아무 일 없었던 듯 가방을 챙겨 들고 옆 칸으로 가 앉는다. 조금 있다가 그가 다른 한 사람을 이끌고 내게로 와 굳이 명함을 달라고 한다. 나는 명함을 건네주면서 당부한다. “너무 멀어 오기 힘드실 테니 가까운 한의원 가서 침 맞으세요.” 그동안 나는 수없이 길거리에서 이렇게 침 치료했다. 그들 가운데 다시 나를 찾은 이가 단 하나도 없음은 물론이다. 그리 기대하고 한 행동이 아니니까 당연하다.

 

다리 아픈 여자 사람도 소리 열고 유튜브 보던 남자 사람도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인 세상에 살면서 하는 내 개입과 쉬고 싶다하다가도 뭣에 홀린 듯 광장으로 향하는 내 발길은 맥락이 같다. 개인 차원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아닌 상황인데 그 경계 넘어 크고 작은 공동체 문제 속으로 내 삶을 번져가게 하는 선택이다. 남이 내게 느끼는 고마움도 고까움도 내 삶에 직접 손익 문제로 다가오지 않지만 더 긴 시간과 더 넓은 공간에서 보면 공동체 네트워킹을 구성하는 작은 결절점이 된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하지는 않아도 이런 일은 적잖이 일상 속 제의 또는 루틴으로 자리 잡는다. 그 제의 또는 루틴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건강한 영인(靈人)으로 키워낸다. 영인이 대거 스러진 사회가 드러내는 살풍경을 지금 우리는 너무나 송연하게 목도하고 있다. 부디 이 아픈 공동체가 건강 회복해 K-영성으로 지구 치유 향도하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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