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사람이 아무리 달라도, 같은 병명이면 같은 약을 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병명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른 소향(素向)과 정황에 주의를 기울인다. 소향은 꾸준히 드러내는 중장기적 경향을 뜻한다. 정황은 그때그때 드러내는 단기적 상태를 뜻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병()이 아무리 같아도, 다른 사람이면 다른 약을 쓴다. 물론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은 아주 작다.

 

임상 편의에 맞추어 패턴을 가르고 동류로 간주할 수는 있다. 팔강(八綱), 육경(六經), 사상(四象), 형상(形象) 따위를 고안해 다름 가운데 같음을 구성하는 동북아시아 전통 의학이 그 예다. 이마저도 어디까지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정밀하게 들어가면 소소한 차이점은 차고 넘친다. 물론 최종적으로 어찌 처방할지는 다시 전체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 그 전체적 맥락을 소소한 단 하나 차이가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더는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체질이라 일컫는 바를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인정하지 않는다. 체질주의자에게 체질은 변하지 않는 무엇이다. 이제마 사상체질이 대표적인 예다. 일반적으로 그 말은 옳다. 체질에 순응해서 사는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체질을 바꾸려 들면 바꿀 수 있는가? 그렇다. 얼마나 바꾸면 체질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체 맥락을 좌우할 수 있는 아주 소소한 단 하나만 바꿔도 된다. 이 소소한 단 하나가 대관절 무엇일까?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완력 의학이다; 구조를 지탱하고 기능을 충실하게 하면 다 된다고 믿는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큰 사건·구조만을 가치로 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소식 의학이다; 무엇 때문에 어떤 경로를 따라 아프고 또 낫는지 소상히 알려주면 스스로 길을 찾는다고 믿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사람 소향·정황, 나아가 인생을 바꾸는 계기로 작동하는 각각 작은 소식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치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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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근본적으로 백인·성인·남성의학이다. 맨 앞에 친절한 덧붙임을 하자면 179cm, 90kg이다. 이 기준을 원칙으로 하고 필요하면 기계적으로 고려하는 정도가 유연성 전부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차이도 고려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서구,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USA 제국 기준으로 질병 여부가 결정되고 진단·치료 가이드가 제시될 뿐이다. 비서구 식민지 세계 전통 의학 인정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국민 건강·보건 체계 헤게모니가 록펠러-카네기 재벌이 합작해 만든 미제 백색의학 손에 있는 것은 대부분 같다. 이런 일극 집중구조 의료체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사회는 거의 없다. 예컨대 에단 와터스가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서 세계가 미쳐가는 방식을 균일화하고 있는” USA 제국 정신의학 마케팅을 통렬하게 고발했지만, 변방 사람·사회들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변화를 꾀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 적요 속에서 인간 하나하나, 인종, 어른과 아이, 남성과 여성 가름까지도 정중히 소상히 인지하는 의학을 틈낸다. 그 틈 의학을 우리는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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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제2 피부이자 제2 뇌로서 인간 생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요성에 비해 우리가 장에 가지는 관심과 지식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다. 장 존재 자체와 기능은 그나마 그런대로 괜찮다 치지만 장 신경은 상식 저 멀리 있다. 더군다나 장내에 거대한 미소 생명 생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의 신비에 해당한다.

 

100조 개체 미소 생명이 인간 체내에 따로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정확히 표현하면 장 점막 바깥에서 인간과 공생하며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경이로운 일이다. 인간 뇌와 장외 미소 생명 생태계는 상호 소통하며, 서로에게 정보를 주는 양이 1:9로 장외 미소 생명 생태계가 많다는 사실과 맞닥뜨리면 경이로움은 경악 수준에 도달한다. 경악할만한 이 생태계 주인공을 우리는 아직 장내세균이라고 부른다. 망언이다.

 

장내세균은 유익균과 유해균이 비대칭 대칭을 이루며 공존한다. 유해균은 없고 유익균만 있으면 좋을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둘 비율이 17:3이면 황금비다. 이 균형 파괴가 정신-신경-면역-내분비계 전방위 질병을 부른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안·우울장애, 심지어 자폐스펙트럼 같은 정신질환까지 그 영향 아래 있다고 한다.

 

장내세균균형을 깨뜨리는 중요 원인은 단백질과 지방을 많이 함유한, 특히 초가공 식품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좋지 않은 물질은 제국주의 초국적 제약회사가 만들고 백색의사가 처방 약으로 주는 백색 화학합성물질, 특히 항생제다. 항생제는 장내세균을 절멸 수준으로 살해한다. 그뿐만 아니라,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장을 차게 해서, 그러니까 생체진동수를 떨어뜨려서 장내세균총 균형 조건을 열악하게 만든다. 망동이다.

 

장외 미소 생명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려면 백색 화학합성물질 중독에서 깨어나야 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에 무릎 꿇는 광신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색의사가 처방 약으로 죽이는 사람 수가 갱단이 죽이는 사람 수보다 많다. 백색 테러에서 사람을 구하려면 장부터 구해야 한다. 장을 구하려면 장외 미소 생명 생태계부터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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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어느 비건이 한 이 말을 <시사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2초 정도 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남이 모르거나 가닿지 못하는 진실을 혼자 알거나 가닿을 때 짓는 표정과 자신이 모르는 줄 모르면서 남이 아는 얘기를 할 때 짓는 표정은 아마도 같거나 적어도 비슷하지 싶다.‘

 

저 말은 얼굴이 대체 뭘까를 화자가 진지하게 생각해본 뒤에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육식하는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비범해 보이는 저 말도 피상적일 가능성이 작지 않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얼굴이 있고,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다는 통속한 상식만으로 비범해 보이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과연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을까? 동물이 지니는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면 딱 잘라 그렇다고 대답하는 데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대체로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하며 무엇에 쓰이는지 상식으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는 아무나 생각할 수 없어서 문제가 아연 어려워진다.

 

동물과 식물은 각각 다른 원리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동물은 기관 중심 시스템이다. 이동하는 생명체로서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에 비교 우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얼굴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은 모듈 분산 시스템이다. 이동하기 힘든 생명체로서 모든 조건을 견디며 생명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도 지니지 않는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얼굴 유무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동물 중심주의, 곧 얼굴 제국주의에 해당한다. 얼핏 들어도, 정색하고 들어도 얼굴 없는 생명체를 낮게 평가하는 배음이 들려온다. 진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무지 상태다. 전방위·전천후 생존 솔루션을 구축한 식물이 훨씬 더 고등한 생명체다. 모든 곳이 얼굴이니까.

 

여기에 반대할 수 있는 관용을 베푼다. 반박을 기대한다. 일단 다음 이야기를 더 하겠다. 얼굴이란 과연 무엇인가? 얼굴 전문가는 수없이 많다. 그 많은 전문가가 일제히 놓치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얼굴이 생식기라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놓친 실패 또한 종 편견에서 발원한다. 좁은 의미 생식기가 얼굴에서 멀찌막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물 생식기는 이와 다르다. 꽃은 인간 미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식을 위해 아름답게 핀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꽃이라 부르는 부위는 꽃잎, 암술, 수술, 꽃가루, (변형된) 꽃받침 모두를 포함한다. 이 통칭하는 꽃은 생식기와 얼굴을 함께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식물은 좁은 의미 얼굴도 지니고 있다. 그 얼굴은 곰팡이 얼굴 버섯에서 왔다.

 

버섯이라면 인간은 우선 식품으로 표상할 뿐 별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봐야 항암 효과 운운, 그리고 송로버섯 운운. 버섯은 곰팡이 생식기다. 곰팡이는 지구 생태계를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설계한 창조자다. 이 창조자에게서 버섯이 왔고, 식물 꽃이 왔고, 동물 얼굴과 성기가 왔다. 인간은 버섯이 인간 성기를 닮았다며 무식하게 킥킥댄다.

 

말이 나온 김에 끝까지 간다. 비건은 버섯을 먹는가? 버섯을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생각 없이 먹고 있음이 틀림없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곰팡이가 식물이 아니니 당연하다. 구태여 따진다면 버섯은 본성에서 동물 쪽으로 기울어진다. 생김새와 질감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 동물 본성이 여기서 발원한 진실에 무지해서 인간은 뒤집힌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마지막으로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고 있는 태도를 전복해야 한다. 먹는 행위는 자체로서 먹이가 되는 생명과 소통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제의란 인간 본성에 가닿는 행위다. 거룩하다. 거룩한 만큼 신난다. 얼굴 있네, 없네, 논의 따위가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아야 한다.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는 주제에 감히 동물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우월감은 참으로 가소롭다.

 

비건이 동물을 먹지 않아서 뭐라는 거 아니다. 식물과 식물 이전 생명을 함부로먹기 때문에 시비한다. 동물권을 말하려면 식물권이라는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고 다툰다. 동물 존중하는 일과 식물 성찰 없이 먹는 일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톺는다. 부분 지식은 오류다. 관통하는 지식이 지혜를 낳는다. 스러지는 순간까지 관통을 멈춰서는 안 된다.

 

정색하고 다시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얼굴이 있다. 얼굴은 생식기니까. 생식은 생명 궁극 본성이니까. 궁극 본성을 펼쳐내는 지성소를 두고 동물 중심주의가 자랑스레 지절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화급하다. 이렇게나마 외친다면 귀엽게 봐주기로 한다: 식물과 그 이전 생명을 위해 우리 동물 먹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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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무 위에 가지와 잎이 많이 달린 부분을 수관(tree crown)이라고 한다. 포유류 중 이 수관이라는 서식지를 니치(niche)로 삼은 종이 나타났다. 우리 조상인 원숭이다.

 

나무 위를 니치로 선택한 원숭이류에는 여느 포유류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눈 위치다···육식동물과 마찬가지로 눈이 정면을 향해 있다.

  두 번째는 손 변화다···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보고 있어 나뭇가지나 먹이를 잡을 수 있다···손톱을 납작한 모양인 편조(扁爪)로 바꾸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 감각으로 가지를 잡게 되었다.”(이나가키 히데히로패자의 생명사203~204)

 

나는 이 대목에서 아주 긴박한 시간, 매우 날카로운 의식으로 머무른다. 어느 찰나 직립보행으로, 소뇌로, 신체 뇌 개념으로, 다중 기원 뇌 발생 가설로, 마침내 네트워킹 원리 재구축으로 단도직입 달려간다.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계속 걷는다.

 

무엇보다 먼저,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손으로 잡고 이동하며 살아가는 풍경부터 상상한다. 수관이 인간 진화 발원지라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나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정색하고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나무에 기댄 삶 덕분으로 인간은 특별한 눈, 특별한 손을 지니게 되었다. 그 눈, 그 손 덕분에 인간은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눈은 직립 시 균형감각에 필수적이다. 손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 직립은 필수적이다.

 

이 눈, 이 손 모두가 가장 중요하게 연결된 곳이 다름 아닌 소뇌다. 소뇌를 빼놓고 직립보행을 말할 수 없다. 직립보행을 빼놓고 인간을 말할 수 없다. 인간을 말하는 데에 그동안 소뇌가 너무 소외되어오지 않았던가. 대부분 운동과 균형, 뭐 이 정도 알고 넘어갔다. 소뇌 소외를 전복하지 않는 한 인류가 파멸을 피할 길은 없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 운명은 무엇이 갈랐을까. 작지만 호모사피엔스 뇌는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기 위한 소뇌가 발달했다. 약한 자는 무리를 짓는다. 힘이 약한 호모사피엔스는 집단을 만들어 살았다. 그리고···자기 힘을 보충하기 위해 도구를 발달시켰다···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즉각 공유했다.”(같은 책 222)

 

공동체 소통에 소뇌라니? 나는 독서를 멈춘다. 대뜸 소뇌를 찾아 나선다. 나만 무식하지는 않구나. 소뇌 연구한 단행본 한 권이 없다. 조각 정보로 떠도는 숱한 이야기 가운데 대다수는 운동에 관한 내용이다. 틈새로 흘러 다니면서 중요한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들을 되작거리고 집적거리고 끼적거리면서 이리저리 덤빈다. 변방 사람이 공부하는 기본 방식이다. 어디로 어디까지 갈지 나는 모른다.

 

2. 마음병을 치유하면서 내가 아픈 사람에게 빠짐없이 해온 얘기가 있다. “치유는 접히거나 구겨진 마음을 펴거나 펼치는 일이다.” 어디 마음에서 그치겠나. 마음에 병든 사람은 걷기도 접히거나 구겨져 있기 마련이다. 모진 우울증에 시달리며 스스로 그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걸음을 펴거나 펼치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한쪽 발로 제법 오래 서 있는 동작을 취할 때였다. 우연히 잠깐 눈을 감았는데, 그 즉시 심하게 흔들리며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치와 기전은 모른 채, 시각과 몸 평형감각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구나, 깨달았다. 둘 사이에 소뇌가 있다는 사실을 요 며칠 사이 비로소 접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뇌가 시각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해야 맞다. 내 무식 행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시각뿐이 아니다. 소뇌는 속귀에 있는 평형 조절기관에서 정보를 받는다. 청각과 평형감각은 어떤 이치로 결합하는가.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평형감각이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 정보에 의존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청각 의존도가 가장 높다는 주장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성은 작지 않다. 실제로 청각 기능 떨어진 노인들은 낙상 위험이 크고, 낙상하면 50% 정도가 1년 안에 사망한다. 이즈음에서 생각한다: 소뇌라는 이름 자체에 이미 무지와 편견이 담겨 있지 않은가.

 

3. 소뇌는 물론 대뇌보다 작다. 하지만 뉴런 80%가 소뇌에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많은 뉴런이 쓰일 만한 곳에서 쓰일 수 있도록 거기 있지 않겠나. 대뇌가 명령하면 소뇌가 움직인다는 일방적 설명 역시 무지와 편견이 아닌지 의심한다. 이 의심은 뇌가 장내 미세 생명에게 보내는 정보와 그 반대 방향 정보가 1:9라는 전복적 사실을 연상시킨다. 이 전복이 마음을 뇌라 하는 망발의 종말이듯 두고 보면 머지않아 대뇌 제국주의 종말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그 단서를 찾아본다. 소뇌 평형감각이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 정보에 의존한다는 사실에서 다시 출발한다. 시각, 청각, 촉각 정보를 소뇌가 받아들여 오직 균형 잡기만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무래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 시각, 청각, 촉각 정보는 그 감각을 일으키는 대상에 감응하고 감수하고 감동함으로써 다른 감정을 일으켜 새로이 관계 맺는 변화 과정 전체와 연관 지어야 한다. 이 과정은 당연히 다양한 인지 작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대상이 사람일 경우에는 사회적 차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치를 담은 진실이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기 위한 소뇌”(같은 책 222).

 

그렇다. 소뇌는 인간 정서(두려움, 쾌락)와 인식(주의, 언어), 사회적 행동을 조절한다. 대뇌가 일방적으로 내리는 명령에 따르는 단순 하급 기관이 아니다. 둘은 일정 정도 상호작용한다. 향후 연구에 따라 기축이 역전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대뇌 제국이 무너지고 소뇌가 일으키는 팡이실이가 복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와 각별하게 마주한다.

 

4. “분류해서 분리한다.”(같은 책 233)

 

인간 뇌 주특기다. 물론 대뇌 중심 사실이다. 대뇌 대극에 소뇌를 놓을 수 있다면, 소뇌는 종합과 통합을 주특기로 하는가? 현대 뇌 과학이 아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으므로 내가 지닌 비대칭 대칭 사상에 터 잡아 연역추리를 한다. 뇌 구조·운동 또한 비대칭 대칭으로 이루어진다고 전제할 때, 소뇌 주특기는 종합과 통합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생명으로서 살아가지 못한다. 이 비대칭 대칭을 다시 다른 결로 표현한다: 소뇌는 몸 극, 대뇌는 마음 극. 몸 극으로 기울수록 종합·통합은 융해에 가까워지고, 마음 극 쪽으로 기울수록 분류·분리는 해체에 가까워진다. 후자를 문명이라 하고, 인류는 이 길을 맹렬히 좇아왔다. 마침내 대뇌 제국주의가 인류를 제6 대멸종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오늘,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명료하다: 반제국주의 소뇌 혁명.

 

5. 반제국주의 저항으로서 소뇌 혁명은 간단명료하다: 걷기.

 

La marche est spiritualité, elle nous connecte à l’univers.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연속과 단절, 역설적 본성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연속과 단절, 역설적 조화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몸짓 녹색의학-걷기를 종지 삼다>에서 말하는 걷기 존재론이다. 걷기가 존재론적 차원임을 셰인 오마라걷기의 세계도 인정한다.

 

걷기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다.”(167)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 걷는 인민(populus ambultus)을 경험할 때, 혁명이 된다. 사회가 문화가 뒤집힌다. 정치가 경제가 엎어진다.”

 

<몸짓 녹색의학-걷기를 자세히 말하다>에서 말하는 사회정치적 걷기다. 셰인 오마라도 <사회적 걷기>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걷기는 개인적 운동성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한다. 바로 사회적 상호작용 원동력이 되는 일이다···걷기가···뚜렷한 사회적 목적을 지니고 진화했다는 사실은 걷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지만 쉽게 간과된다.”(232)

 

나나 그나 걷기가 지닌 누락 불가 진실에 닿아 있다. 그런데 둘 다 가 닿지 못한 지성소가 있다: 존재론적이며 사회정치적인 걷기 인텔리전트터미널은 소뇌다. 그런데 그가 지성소 소뇌에 가 닿지 못한 일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그는 뇌 과학자다. 걷기의 세계그 어디에도 소뇌는 언급되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소뇌 혁명, 정확히 소뇌 인식 혁명이 필요하다. 기존 소뇌 인식을 혁파해야 걷기에 대한 인식 실재에 도달한다. 실재로서 걷기는 그 자체로 팡이실이다. 팡이실이는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선다.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서는 사건을 영이라 한다. 영은 공생을 무궁토록 일으키는 통렬한 운동이다. 이 통렬 운동으로만이 대뇌 제국주의 일극 집중 음모를 끌어안아 본디 비대칭 대칭 세계를 재건할 수 있다. 재건 본진이 다름 아닌 소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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