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비학 기치: 문제는 코다

 

코는 가장 처음부터, 가장 나중까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코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채 억눌려 있다가

인간이 파멸 위기로 내몰린 오늘 상황과 홀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만일 이 순간 코를 코이게 되살리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대로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

문제는 코다.

 

코는 호흡 관문이다.

하면 몸-생명 중심 아닌가.

코는 냄새를 맡는다.

하면 감각-생명 중심 아닌가.

코는 대뇌 기원이다.

하면 마음-생명 중심 아닌가.

코는 나와 남 면역 적합성을 알아차린다.

하면 코는 관계-생명 중심 아닌가.

그렇다.

문제는 코다.

 

코를 통해 느끼고

코를 통해 생각하고

코를 통해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학 깃발을 든다.

 

지금 여기서부터 코는 개체가 아니다.

전체다.

 

1. 코 인간학

 

(1) 몸은 코다

 

남자 사람 몸에는 입····미주알(항문오줌길(요도) 아홉 개 큰 구멍이 있다. 물론 여자 사람 경우는 질이 있으므로 한 개가 더 많다. 이 구멍들은 각기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뚫려 있는 게 아니다. 소화기관을 기축으로 해서 입···코는 위쪽에, 미주알·오줌길·질은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결국 몸은 대롱이다. 위쪽에 난 구멍은 외부에서 내부로 무엇인가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을 맺는다. 아래쪽에 난 구멍은 내부에서 외부로 내보내는 기능과 관련을 맺는다. 코와 질은 예외다.

 

코는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일을 쌍방향으로 한다. 하여, 교대이긴 하지만, 항상 열려 있다. 여닫음이 가능하거나 차단 막·근육을 지니는 다른 구멍과 차이가 있다. 부단한 소통을 위해 늘 자신을 비우는 허령(虛零)한 존재가 바로 코다.

 

코는 입··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이들과 모두 관계를 맺는다. 다만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통해 미각·시각·청각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후각 없이는 제대로 된 몸 소통이 어렵다. 늘 열려 있어 쌍방향 작용을 하는 코를 통해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함으로써만 몸은 살아 있는 몸이다. 코는 몸 소통 허브(hub). 코는 몸이다. 아니, 몸은 코다.

 

(2) 맘은 코다

 

인간 맘은 어디, 그러니까 몸 어느 부분에 깃들어 있을까? 서구의학은 당연히 뇌에 있다고 한다. 물론 아니다. 한의학은 심장에 있다, 즉 심주신명(心主神明)이라 한다. 물론, 아니다. 맘은 몸 뇌· 심장을 포함한 모든 장기와 조직, 나아가 세포 하나하나, 마침내 장 점막 바깥 미소 생명체가 서로 마주하는 가장자리에 있다. 좀 더 정확히는 이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즉 사건으로 존재한다.

 

맘이라는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뇌와 심장이라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동안 서구의학은 심장을 등한히 했다. 한의학은 뇌를 등한히 했다. 요즘은 심장-대뇌계라는 말로써 이 두 기관 융합을 나타낸다. 이 심장-대뇌계만큼이나 중요한 맘 장()이 둘 더 있다. 피부·소화기관[()]이다. 그리고 간····신의 5() 역시 맘 사건 중요한 계기다.

 

<6.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본말 전도다>에서 이미 태초 생명이 피부에서 시작하여 소화기관-5-뇌로 진화해 오는 과정을 밝혔다. 맘은 피부 생명 단계적 진화 과정이 빚어낸 정보·지식·사유·영성의 중층 시스템이다. 맘은 특정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생성되고, 저장되는 무엇(being)이 아니다. 생명 총체적 상호 운동(doing) 그 자체다. 맘이 비대칭 대칭을 본령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비대칭 대칭 자리, 그러니까 피부·소화기관·5·뇌가 상호 운동하기 위해 마주한 가장자리들이 겹친 시공에 코가 있다. 코는 피부 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그렇다. 맘은 코다.

 

(3) ·맘은 코다

 

몸은 몸이고 맘은 맘이다. 몸은 몸만의 몸이 아니다. 맘은 맘만의 맘이 아니다. 몸은 맘몸이다. 맘은 몸맘이다. 어느 찰나 몸은 맘이다. 어느 찰나 맘은 몸이다. 몸과 맘은 온전히 포개지지 않는다. 몸과 맘은 온전히 쪼개지지 않는다. 몸과 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몸과 맘은 서로 걸림 없이 넘나든다. 이 마주 가장자리에 바로 코가 있다. ·맘은 코다. 인간은 코다.

 

·맘이라는 표기는 몸과 맘을 한꺼번에 담아낼 수 있는 아래아 표기가 인식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쓴다.


2. 코 지정학

 

(1) 코는 코만의 코다

 

코는 특별하다. 사람이 앞을 향해 우뚝 섰을 때, 코는 맨 앞에 있다. 코는 향도며 그가 지닌 용기다.

 

사람이 누웠을 때, 코는 맨 위에 있다. 코는 스스로 느끼고(공감) 알아차리고(인정) 받아들이는(신뢰) 지고한 자리다.

 

코는 사람 얼굴 한가운데 있다. 코는 그 대칭성을 가르는 황금선이다. 코는 생명과 자아 출발점이자 기준이다.

 

코가 지닌 특별함이, 그래서, 장구한 시간 동안 시샘을 받는 까닭으로 작용하였다. 이제 그 은폐된 이야기를 돋을새김으로 드러내야 할 때가 왔다.

 

코는 생명 드날목-나들목은 잘못 만들어진 말이기에 바로잡음-이다.

 

생명 시작과 끝은 호흡이다. 이 호흡 절대 관문이 바로 코다. 코는 찰나마다 이어지는 생명 사건 특이점이다. 코를 통해 독립 생명체 폐호흡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숨결이 마지막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호흡은 생명에서 으뜸 관건 요소로 작용한다.

 

코호흡 작동 방식은 아주 특이하다. 콧구멍은 두 개다. 그러나 한꺼번에 두 개가 다 호흡에 참여하지 않는다. 1~5시간 간격을 주기로 교대하여 호흡한다. 아직 그 연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오른쪽 콧구멍으로 호흡할 때 능동적이고 외향적인 면이 두드러지며, 왼쪽 콧구멍으로 호흡할 때 수동적이고 내향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 결과를 의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생명 진화 방향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른바 교호 호흡이라는 호흡법이 있다. 먼저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오른쪽 콧구멍을 막고 왼쪽 콧구멍을 열어 숨을 내쉰다. 이어서 왼쪽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숨을 잠시 참는다. 다음에는 반대로 왼쪽 콧구멍을 막고 오른쪽 콧구멍을 열어서 숨을 내쉰다. 그 상태에서 다시 오른쪽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역시 숨을 잠시 참는다. 이 과정들을 되풀이하는 호흡법이다.

 

연구에 따르면 이 교호 호흡은 좌우뇌와 자율신경을 균형 있게 조절함으로써 생명 항상성 유지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 단순한 교호 호흡만으로 큰 깨달음에 이른 사람도 있다고 한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항상성은 조화로운 드나듦이기 때문이다. 조화로운 드나듦이 바로 생명 요체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 요체가 바로 코에 깃들어 있다. 교대로 구멍을 하나씩 열어 호흡을 빚는 비대칭 대칭 코 지혜가 생명 비밀인 셈이다.

 

코는 모든 감각을 낳은 어머니다.

 

코는 냄새를 맡는 기관이다. 후각은 인간이 최초로 가지는 감각이다. 정자는 후각 수용체를 지니고 있다. 이 주화성에 힘입어 난자 쪽으로 이동해간다. 수정을 거쳐 태아가 되면 그때부터는 직접적인 후각 기능을 지닌다. 적어도 인간 생명 감각에 관한 한 태초에 후각이 있었다.”가 진리다. 이 감각 연대기는 신생아 때 수면 습관과 심리적 안정에서 시작하여 생애 마지막 회한까지 비가역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코가 지니는 통시적 유일성(diachronic uniqueness)이다.

 

코는 모든 감각과 지각이 수렴·발산하는 중심이다.

 

코는 얼굴 중심이다. ··입으로 둘러싸인 모든 감각 운동 허브다.

 

인간 생존 조건 중에 먹는 일, 그러니까 맛 문제만큼 전방위에 걸쳐 지속적 영향을 미치는 다른 무엇은 없다. 먹는 일을 통해 생명 운동에 필요한 영양물질과 에너지가 대부분 공급되기 때문이다. 이 맛 80~85%가 바로 후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코가 냄새 맡기로써 면역 적합성을 판별해낸다는 사실이다. 특히 여성은 순식간에 200여 가지 남성 체취를 판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성 코가 인류 향방을 결정한다. 코가 후각을 통해 형성하는 미시의식 또는 무의식에 비한다면 다른 감각을 통해 형성되는 대뇌 전두엽 거시의식은 빙산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코가 지니는 공시적 유일성(synchronic uniqueness)이다.

 

코는 관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뇌와 통한다.

 

시각은 각막, 청각은 고막이라는 관문을 거쳐 뇌에 전달되지만, 후각은 관문 없이 직통으로 뇌에 전달된다. 다른 감각과 달리 시상을 거치기 전에 후각 수용체가 자리 잡은 변연계부터 거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코는 최전방 뇌다. 후각은 뇌각(惱覺)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대뇌는 본디 후각세포가 부풀어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후각 특성은 아마도 시원적 경험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 맹수나 적이 눈에 띄지도 않고 소리 내지도 않고 다가올 때 공격하거나 도망치기 위해서는 후각을 통한 즉각적 반응 말고 다른 길이 없다. 후각은 생존을 위한 가장 은밀하고 빠른 정보 전달자이므로 냄새-공포반응을 코-변연계 감정 뇌 직접 연결로 시스템화했다. 일단 살고 나서 나중에 해석하고 평가하는 분별 절차가 진행된다. 코에서만 정석으로 인정되는 생명 수순이다.

 

코는 마음, 특히 감정 안테나다.

 

후각 수용체가 있는 대뇌변연계는 감정 중추다. 후각에 대한 즉각적 반응에서 인간 감정이 생겨나 다양한 감정 켜와 결로 분화하였다. 다양한 감정들은 거꾸로 코 느낌을 날카롭게 벼려 냄새로 그 상태를 드러내거나 조절하는 길을 열었다. 코와 대뇌변연계는 이런 상호작용으로 감정 현현과 감성 잠재력 선순환을 끌어낸다.

 

양자 사이에 악순환도 일어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감정 뇌에 이상이 생기면 코에 그 이상이 반영·증폭된다. 코에 이상이 생기면 감정 뇌에 그 이상이 반영·증폭된다. 예컨대 우울장애 환자가 비염이나 후각 이상을 동반하는 경우는 거의 필연에 해당하는 일이다. 비염이나 후각 이상은 우울증을 더욱 악화시킨다.

 

후각과 직결된 감정은 이성과 의지보다 먼저 발생한 마음 층위다. 그 에너지가 다른 마음을 압도한다. 인간 마음을 움직이려면 무엇보다 감정을 움직여야 한다. 인간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무엇보다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이 진실은 그리스 고전 수사학으로 증명된 바 있다. 그런데도 근대 철학 이후 심리학은 물론 정신의학조차 감정을 이성과 의지 아래 둔다. 비인간적이다. 진실에 반한다. 감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코로 되돌아가야 한다.

 

코점막은 발기조직이다.

 

우리 몸에는 발기조직이 있다. 성기(性器)가 그렇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다 아는 바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모르고 있는 중요한 발기조직이 있다. 바로 코점막이다.


일상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길이 있다. 달리기 같은 운동을 하면 코가 뚫려 상쾌하다. 같은(?) 운동인데 섹스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코가 막힌다. 보통 운동은 교감신경 자극 상태므로 혈관이 수축해 막힘이 풀린다. 섹스는 정반대로 부교감신경 자극 상태, 그러니까 충혈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운동이다. 그 현상이 곧 발기다. 코가 막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거의 늘 막힌 상태에 있는 신혼부부 코를 이비인후과 임상에서는 신혼여행 코 증후군(honeymoon nose syndrome)이라 부른다.

 

후각과 성호르몬 조절 부위는 발생학적 기원이 같다. 후각은 성 감각과 긍부(肯否) 양면으로 모두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후각 상실과 성 또는 생식능력 상실이 맞물리는 경우는 성폭행당해 이른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나 우울장애를 겪는 여성들에게서 실제로 확인되고 있다. 대기 오염을 포함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다양한 코 질환 환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는 반드시 성과 생식 문제로 이어진다.

 

성과 생식 문제는 인류 사활이 걸린 근본적인 문제다. 여기에는 후각이 개입해 있다. 코로 되돌아가야 할 마지막 또 다른 이유다.

 

(2) 코는 코 말고도 코다

 

코는 외부 조건과 생명 구조 마주 가장자리다.

 

생명 구조로서 인간이 외부 조건과 직접 마주하는 곳은 피부(를 포함한 다섯 가지 감각기관), 소화기관, 호흡기관이다. 피부는 외부 접촉 조건과 만나도록 노출된 생명 싸개, 좁은 의미에서 보는 바로 그 피부다. 소화기관은 외부 음식 조건과 만나는 동굴피부다. 허파는 외부 대기 조건과 만나는 또 다른 동굴피부다. 이들 피부 가족 연결고리가 바로 코다. 코는 이 네트워킹을 가능하게 하는 허브다.

 

코는 우선 호흡기관 드날목으로서 공기라는 외부 조건과 직접 만날 뿐만 아니라, 내부 공기를 최종 배출하는 곳이다. 코로 맡는 냄새는 입으로 먹는 음식에 대한 맛 느낌 거의 모두를 좌우하기 때문에 외부 조건인 음식은 식도, , 소장, 대장이 접하기 전에 먼저 코를 거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코는 냄새라는 외부 조건과 직접 만나는 피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명 사건은 피부로 둘러싸인 독립 공간 내부구조에 있지 않다. 그 밖 외부 조건에 있지도 않다. 마주 가장자리에 있다. 좀 더 정확히는 그 마주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운동이 생명 사건이다. 마주 가장자리 코가 지닌 독보적 위상은 마주 가장자리 운동으로 증명된다. 코는 코 아닌 모든 감각기 마주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운동 표지임으로써 우뚝해진다.

 

프랑스 탁월한 정신분석의 디디에 앙지외는 저서 피부자아에서 자아는 피부다.”라고 주장하였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가 주장한 피부는 좁은 의미 그러니까 제1피부다. 나는 여기에 제2, 3, 4 피부를 더한다. 그리고 이들 마주 가장자리 겹친 곳에 바로 코가 있다.

 

코는 몸과 맘 마주 가장자리다.

 

코가 생명 구조, 그러니까 몸 최전선에서 외부 조건을 처음 마주하는 곳임은 이미 우리가 아는 바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일은 바로 여기서 맘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코는 몸과 외부 조건 마주 가장자리임을 넘어 몸과 맘 마주 가장자리다. 몸과 맘이 서로 가로지르는 역동적 시공이다. 코에서 몸과 맘은 하나가 되기도 하고 둘이 되기도 한다. 하나만도 아니고 둘만도 아닌 몸·맘 사건이 바로 코에서 일어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맘을 뇌 산물이라고 한다. 맘 자리가 뇌라고 한다. 아니 맘이 곧 뇌라고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뇌가 맘 사건 전체와 관련 있는 몸속 슈퍼터미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슈퍼터미널은 코라는 허브가 없으면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코는 장 신경-자율신경-대뇌변연계-대뇌 신피질로 이어지는 진화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코는 본능-감정-이성·의지 성장·확산 과정을 잇는 결절점이기 때문이다. 코는 마음 켜와 결 비밀을 쥐고 있는 열쇠다. 이 열쇠를 꽂아야 몸은 맘몸이고, 맘은 몸맘이라는 진실 문이 열린다.

 

코는 의식과 무의식 마주 가장자리다.

 

코가 몸과 맘 마주 가장자리임은 이미 우리가 아는 바다. 여기서 다시 한번 몸과 맘 문제를 생각해본다. 인간 생명은 몸 양상과 맘 양상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현상이다. 몸쪽으로 갈수록 질량(stock) 속성이 강해진다. 맘 쪽으로 갈수록 에너지(flow)의 속성이 강해진다. 이런 이치는 맘 내부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마치 자석을 쪼개면 다시 양극이 나타나 작은 자석이 되는 이치와 같다.

 

맘에도 질량 속성을 지닌 부분과 에너지 속성을 지닌 부분이 모순적으로 공존한다. 전자를 무의식이라 하고 후자를 의식이라 한다. 이를테면 무의식은 몸속으로 (깊이) 들어간 맘이고 의식은 몸의 표면이나 몸 밖으로 막 나와 있는 맘이다. 코는 몸 표면에서 그 출입과 상호작용 허브로 작동한다.

 

코는 감정과 이성·의지 마주 가장자리다.

 

코가 의식과 무의식 마주 가장자리임은 이미 우리가 아는 바다. 그런데 몸속으로 (깊이) 들어간 맘은 감정과 맞물린다. 몸 표면이나 몸 밖으로 막 나와 있는 맘은 이성·의지와 맞물린다. 코는 자연스럽게 감정과 이성·의지 마주 가장자리에서 그 모순적 공존 기울기를 조절한다. 물론 햇빛 아래서 역사가 되는 이성·의지보다 달빛 아래서 신화가 되는 감정 쪽으로 기우뚱한 채 말이다.

 

(3) 코는 자아다, 아니 자아는 코다

 

시인 김선우는 말한다.

 

후각은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에 가장 핍진하게 밀접해 있는 감각이며 가장 능동적으로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감각이다.”(김선우의 사물들130)

 

능동적인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도저한 생 감각은 무엇인가? 그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자체가 바로 자아다. 시인 김선우가 의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나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 말은 가장 문학적이자 가장 의학적인 진실 표현임이 분명하다.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는 트라우마 거처이며, 가장 예민한 감정 결이며, 인격적 사회적 본질이다. 그가 사람을 따라, 사건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간다. 그가 자아다. 자아는 그런 무엇이다.

 

요컨대 자아는 관계 맺는 존재로서 인간이 상처를 따라 그려 나아가는 신음과 치유 궤적이다. 신음은 반응(reaction)이며 치유는 감응(response)이다. 물론 감응은 반응 없이는 불가능하다. 반응 불을 댕기는 주체가 바로 후각이다. 냄새 맡지 못하면 결국 치유는 없다. 하여, 살아야 하는, 살아 내야만 하는, 생명은 끊임없이 큼큼대며 냄새를 좇아 흘러가는 법이다.

 

나를 가리키는 한자, 스스로 자()는 갑골문자 형태로 볼 때 코를 본떴다고 한다. 고대 극동아시아인은 왜 코로써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아를 제유(提喩)하였을까? 어떤 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얼굴 부위가 코라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불가시성 수평선에 희미하나마 홀연히 솟아오른 가시성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허나 그 솟아오름이 도리어 삶의 낮은 지대 어두움을 포착하는 더듬이일진대 생명을 향하여 양팔 벌린 생리학적 진실에 대한 직관이 낳은 결과일 터이다. 그렇다. 그리하여,

 

코는 자아다.

아니, 자아는 코다.

 

 

3. 코 의학-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중심으로-

 

생명 표면이자 심연, 중심이자 경계인 코. 그럼에도, 아니 그러니까 코도 병들 수 있다. 코가 병들면 어떻게 병들까? 코가 병들면 어떻게 치료할까? 이 문제가 의학이 코에 관해 할 수 있는 이야기 고갱이다.

 

흔히 겪는 일이니까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30대 중반에 혈관운동신경성비염에 걸려 15년 가까이 고생했다. 그때는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었으므로 몸살감기·축농증·전형적 알레르기비염 같은 잘못된 진단을 믿고 온갖 곳을 전전했다. 서구의학 방식은 수술 빼놓고는 다 해보았다. 코 질환 명의라고 책에 소개된 한의사도 세 사람이나 찾아가 치료받았다. 그 긴 세월 동안 내 코는 그야말로 콧대를 높이 세우고 아픈 상태에서 요지부동이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겉보기로는 알레르기비염과 비슷하다. 연거푸 나오는 재채기·엄청난 양의 맑은 콧물·코 막힘·코피·가려움·미열·두통·무기력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심한 경우 눈과 귀로 염증과 가려움이 번진다. 주의력·집중력·기억력도 떨어져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다. 오래 계속되면 수면장애가 뒤따른다. 심리적인 면에도 영향을 미쳐 불안이나 우울로 번진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병이지만, 겪는 당사자에게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편이 따른다. 40대 중반, 극에 달한 이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끌어안고 나는 한의대에 입학했다. 한의대에서도 이런저런 치료를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본과 2학년 어느 날이었다. 참고삼아 읽으려고 사두었던, 지정 교과서 아닌 양방 병리학책을 읽다가 벼락같은 한 문장을 만났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대개 슬픔·원망 같은 감정 요인이 작동하므로 심리치료 말고는 현재 의학 수준에서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그제야 나는 여태까지 했던 노력이 왜 부질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즉시 나는 실천에 옮겼다. 애써 다른 전문가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심리 상담을 진행했다. 칠흑 같은 밤 어두움 속에서 침묵과 절규를 가로지르며 극진히 자기 대화 나누기를 서너 시간, 이윽고 희붐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문득, 연거푸 나오는 재채기·엄청나게 흘러나오는 맑은 콧물·코 막힘·가려움·미열·두통·무기력 같은 증상들이 아침 해 뜨면 물안개 사라지듯 없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내 소름 돋는 느낌이 와락 달려들었다. “, 병은 이제 없구나!” 그렇다. 그로써 내 혈관운동신경성비염 긴 역사는 막을 내렸다.

 

임상 현실에서는 양의든 한의든 대부분 알레르기비염과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날카롭게 구별하지 않는다. 이는 의자(醫者)들이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혈관운동신경성비염에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의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내 경험을 토대로 진단 과정에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인가, 아닌가를 면밀하게 살핀다. 당연히 치료 방법도 달리한다.

 

거꾸로 접근하는 진료도 반드시 한다. 마음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진단할 때, 코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특히 우울장애일 경우는 이 진단을 빠뜨릴 수 없다. 문진과 경추압진(頸椎 壓診-목뼈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진단 방식)을 하면 거의 완벽하게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매우 높은 연관성을 지닌다. 아니,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혈통이 같은 병이다. 기억 속에 저장된 아픈 감정을 되살려내어 마음 장애를 유발·지속·증폭시키는 진원이 후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한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따로 생각하면서 시달려 온 전형적인 예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자기 상담으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치료한 일은 결국 우울장애 치료를 겸한 일이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과 우울장애 연관성 이야기를 지나치리만큼 자세히 언급한 이유는 이 문제가 코에 이끌리는 진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말고도 코를 둘러싼 의학 곡절은 가히 전방위적이라 할 수 있다. 코는 기왕에 말한 사실 외에 뇌와 척수 경막, 송과선, 접형골, 설골, 입 바닥 격막, 미주신경(부교감신경), 안면신경, 삼차신경, 턱관절, 횡격막, 부신, 요추 4, 회맹판, 후경골근, 엄지발가락, 발바닥 궁 등 별의별 부위와 직간접적으로 오지랖 넓은 관련을 맺고 있다. 코는 이렇게 정신-신경-면역-내분비계 전역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코가 병들면 생명 전체가 병든다.

 

치료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코를 잘 치료하면 생명 전체가 쾌적해진다. 건강해진 코로 숨 잘 쉬고 냄새 잘 맡는 일, 이보다 귀한 인프라가 어디 또 있겠는가. 이토록 중요한 코에, 호흡에, 후각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과연 무엇이 치료다운 치료인지 생각해보겠다.

 

코에 염증이 생겼을 때, 특히 알레르기질환일 때, 제국주의 백색의학에서 무조건 쓰는 화학합성약물이 항히스타민제다.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증상억제를 위한 차단제다. 기술 발전으로 부작용이 덜해지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방법이다. 우선 증상억제를 치료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물론 아니다. 이는 혈압강하제가 고혈압 치료 약이 아닌 이치와 같다. 그리고 차단제 문제다. 차단제는 혈액 스핀 작용을 방해한다. 결과적으로 생체진동수를 떨어뜨리게 한다. 생체진동수 저하는 곧 생명력 저하다. 치료는 하지 못하고 도리어 생명력만 저하하는 화학물질을 약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항히스타민제는 히스타민이 과도하게 활성화하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넘어가는 작용이므로 다음에 그런 환경이 조성되면 반드시 재발한다. 알레르기비염일 경우, 근본 원인이란 면역체계 이상을 말한다. 따라서 면역체계 이상을 조절해야 하는데 항히스타민제 따위로는 면역체계를 조절할 수 없다. 항히스타민제는 이를테면 응급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면역체계는 정신-신경-내분비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광범위한 조절이 필요하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정신-신경-내분비-면역계 전체의 협진이 필요하다. 우리 현실에서는 오직 길 하나가 열려 있다. 이런 통합적 관점을 지닌 녹색 의사.

 

그러면 제대로 된 관점을 지닌 녹색 의사는 어떻게 접근할까? 무엇보다 그는 염증이든 알레르기든 모든 증상을 그 자체로 병으로 여겨 무조건 쫓아내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불편해하는 여러 증상은 기본적으로 자연치유 반응이다. 자연치유 반응은 말 그대로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이다. 이를 쫓아내는 짓은 병을 은폐함으로써 결국 더 키우는 짓이다. 도와주는 일이 이치에 맞다.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체온을 올리는 일이다. 체온을 올리면 증상은 잠시 더 심해진다. 이 현상을 병 악화로 오해하기 때문에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근본 치료에 이르지 못한 채, 증상 억제제와 진통제로 일관한다. 그러나 체온이 높아지는 현상은 자연치유력이 강해지는 현상이다. 더한층 강해진 힘으로 치유 활동, 그러니까 전투하기 때문에 증상이 심해진다. 그런 과정을 거친 뒤에야, 이치를 따라 병이 물러간다. 따라서 증상억제와 진통을 일삼는 지식은 의학이 아니다.

 

이렇게 체온을 올려주는 일과 함께 전체 진단으로 면역체계 불균형 문제, 신경 특히 자율신경 실조 문제, 내분비 부조화 문제를 풀어주는 침과 한약을 쓴다. 침과 한약을 민간요법, 심지어 미신으로 폄훼하는 제국주의 백색의학에서 보면 황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게 황당하다면 5천 년에 걸친 극동아시아 문명 전체가 황당하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침과 한약은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가는 이런 길은 증상을 자연치유 반응으로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이 스스로 신뢰하고 문제를 풀어가도록 돕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가는 이런 길에서는 돈 받고 정답 파는 장사가 행해질 수 없다.

 

일상에서 흔히 겪는 코와 직접 관련된 문제 두 가지만 더 말하겠다. 비염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동반되지만 다른 이유로도 코는 막힌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코 막힘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혀로 입천장을 강하게 밀어주면서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눈썹 사이를 눌러준다. 이렇게 하면 서골(鋤骨), 즉 머리와 코가 연결된 공간을 가로지르는 코뼈가 앞뒤로 흔들리게 되면서 코 막힘이 풀린다.

 

코피가 날 때는 어찌할까?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코피를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있다. 코 바로 밑의 윗잇몸에 솜을 약간 끼우고 아주 세게 누르면 된다. 대부분 코피는 격막, 즉 코를 양쪽으로 나누는 연골 부분 앞쪽에서 나오므로 이 부분을 누르는 일이 코피를 멎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제 호흡을 치유하는 문제에 관해 말하겠다. 코 지정학에서 코가 호흡하는 근본 방식과 이를 역으로 이용한 교호 호흡을 이야기했다.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이야기이므로 다시 치유 관점에서 말하도록 하겠다. 교호 호흡은 그 자체로 치유다. 치유 본질은 다름 아닌 알아차림이다. 호흡 근본 방식은 물론 그 이전에 호흡 자체를 알아차린 상태에서, 그러니까 유심히호흡하는 일이 바로 치유 요체라는 말이다. “유심히하는 상태가 되는 순간, 호흡은 깊어지고 길어진다. 깊고 긴 호흡이 치유된 호흡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기왕에 알아차린 상태에서 깊고 길게 호흡할 양이면, 꼭 복식호흡을 해야 한다. 들여 마실 때는 배꼽 아래 배를 한껏 부풀리고, 내쉴 때는 반대로 배꼽 아래 배를 한껏 등 쪽으로 오그려 붙이는 방식으로 하는 호흡법이다. 이렇게 해야 횡격막과 복근이 긴장·이완을 교차적으로 반복하면서 호흡다운 호흡, 건강한 호흡이 이루어진다.

 

코 냄새 맡는 능력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찌해야 할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맞닥뜨리는 감기, 부비동 질환, 알레르기비염, 물혹과 같은 원인에 따른 호흡성 후각 장애일 경우 당연히 그 원인 질환을 치료하면 된다. 그 이치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유전질환이나 사고에 따른 비가역적 뇌(신경) 손상을 입은 경우, 현재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보면서 귀중한 시사를 받을 수 있다. 가령 후각 상실이 나타나는 대표적 유전질환인 칼만 증후군(Kallman syndrome-시상하부 성선을 자극하는 호르몬 생산 기관이 손상된 병으로서 정자· 난자·생성도 불가능하다. 사춘기·성장 지체·무월경·불임이 나타난다.-)을 통해 성· 생식 기능과 후각 기능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여성 경우 후각 기능 이상이 나타날 때 성적 학대-성폭행은 물론 지속적인 gender 억압- 여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확인되면 심리치료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정신장애가 후각 이상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후각이 정서와 직결된 만큼, 다른 감각보다 훨씬 더 이 문제에 관한 한 주의·집중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코 의학 이야기 주제는 코를 통한 치료다. 먼저 호흡을 통한 치료다. 앞서 말한 교호 호흡은 호흡 자체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그 치유된 호흡을 통해 인간 심신 전반을 치료할 수 있다. 교호 호흡 말고도 수많은 호흡법이 있는데, 특수한 기능 강화를 목표로 한 호흡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치료 지향적이다. 심장 박동 조절을 필두로 자율신경 실조를 치료한다. 자율신경 실조가 치료되면 면역계와 내분비계, 나아가 정신계 치료도 가능하다.

 

냄새 맡기를 통한 치료로써 코 의학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다름 아닌 향기치료다. 이미 많은 사람이 전문지식을 갖추고 실제 임상 실천을 하고 있다. 향기치료는 향기를 맡게 하여 대뇌변연계를 직접 자극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한다. 대뇌변연계는 감정뿐만 아니라 자율신경, 면역, 내분비를 조절하는 곳이므로 치료 능력을 지닌 향기를 맡게 하면 심신 전체에 신속하고도 근원적인 치료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원적인 치료는 각자마다 지닌 영혼 냄새 또는 향기를 찾아 맡는 일이다.

 

 

4. 코 문화철학

 

인간 사유는 언어적 표현 안에서만 가능하다. 언어적 표현을 통해 사유가 이끌려 나오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반 현상은 사유 결과가 언어적 표현을 통해 나오는 형태다. 일반적으로 쓰는 언어적 표현을 보면 주의하고자 하는 대상에 관한 그 시대 사유를 알아차릴 수 있다.

 

코에 대한 매우 친숙한 언어적 표현에 개 코란 말이 있다. 냄새를 아주 잘 맡는다는 뜻으로 쓰는데 이 말이 주는 어감은 애당초 그리 좋지 않다. 나중에는 욕설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코에 대한 부정 언어학은 비단 이뿐 아니다. 코 묻은 돈. 코 빠뜨리다. 코 꿰이다. 코가 석 자다. 코 떼어 주머니에 넣는다. 코 아니 흘리고 유복하랴. 콧구멍 같은 집에 밑구멍 같은 나그네 온다.···다른 감각기관에 비해서 긍정적 표현이 현저하게 적다.

 

코에 대한 이런 인식은 아마도 냄새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냄새, 또는 냄새 맡는 기능이나 행위에 대한 평가가 그대로 코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냄새란 말 자체가 이미 좋지 않은 느낌을 간직한 채 사회문화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향기라는 한자어와 기능이 수직 분화되어 정착된 현상을 보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냄새난다라는 표현도 당연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향기롭다와 대조하면 대뜸 알 수 있다. “냄새 맡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범죄자들의 직감을 표현하는 비유로 동원한다. 이처럼 냄새는 좋은 수식어, 예컨대 엄마가 붙지 않으면 좀처럼 좋은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는 순우리말에 대한 우리 사회에 특유한 자학 현상만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냄새 자체에 대한 사회문화적 태도가 반영됐다는 말이다. 우리말을 보면 들어보다, 맛보다, 만져보다, 맡아보다, 와 같이 모든 다른 감각 위에 시각이 있다. 우리 사회문화적 전통은 시각만 못 하지만 청각 역시 매우 중요한 감각으로 인식해왔다. 경청이란 표현도 그렇고, “귀가 보배다.”라는 속담도 그렇다.

 

물론 우리보다 서구사회가, 근대 이전보다 이후가 훨씬 더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 독재시공간이기 때문이다. 18c 이후 이성은 감성-감성은 감정을 퍼텐셜 측면에서 이해한 표현으로 여기서는 감정과 동의어로 씀-을 계몽 대상으로 발아래 둔다. 감성은 동물적, 원시적, 여성적 본능 영역으로 비하된다. 여기서 이성에 속하는 감각은 시각, 청각, 촉각이다. 감성에 속하는 감각은, 당연히 후각과 미각이다. 그런데 미각 80% 이상이 후각이므로, 결국 이성 독재 시공간에서 희생양이 된 감각은, 실질적으로 오직 후각, 그러니까 코다.

 

후각 폄훼 철학적 흐름 선두에, 정상에 섰던 사람이 바로 칸트다.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은 객관적 능동적 감각이고, 후각(따라서 미각)은 주관적 피동적 감각이라고 구분 지었다. 전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고, 후자는 강요되어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후자는 혐오 대상이다. 주체로서 이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그에게 이 구분은 너무나 당연했다.

 

물론 오류 무아지경, 무지 삼매경 맞다. 그러나 칸트는 절대군주였다. 칸트가 구축한 이런 강박적 이성 독재는 헤겔 중립화와 포이어바흐 복권을 거쳐, 니체 돋을새김이 있기까지 전 유럽을 지배했다. 니체는 후각이야말로 진정한 쾌락 전령이며 공감, 직관적 통찰, 자비심, 윤리 의식, 자기성찰 기원이라고 갈파했다. 그러나 아직도 니체가 행한 칸트 해체는 비주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서양 철학사에서 그리 새롭지 않다. 아폴론 전통과 디오니소스 전통 사이 대칭성, 그 대칭성 파괴를 둘러싼 오래된 에피소드 근대 버전일 뿐이다. 이성 독재 길고 긴 세월 동안 코는 그야말로 숨 쉬는 도구로, 그러니까 당연히 있는, 배경 같은 존재로, 더군다나 텅 빈 구멍으로 인식되어왔음이 사실이다. 후각, 그러니까 감성을 쌍것취급하는 전통의 결과다.

 

이런 관성은 진화론적 뇌 과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파충류 뇌에서 포유류 뇌로, 그리고 영장류 뇌로 진화하면서 본능-감성-이성·의지 계층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뇌 과학 이론 말이다.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을 이해하지 못할 바 없다. 하지만 나중에 생긴 생명이 고등한 생명이라는 식 발상은 동의할 수 없다. 진화라는 표현 자체에 이미 선형적 발전 인식론이 전제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변화가 다 발전이지는 않다. 달라진 삶 조건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는 양상일 따름인 변화를 모두 진화·발전으로 보는 일은 서구 직선적 또는 종말론적 시간관 투영이 아닐까 싶다.

 

이런 프레임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거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생명에서 가장 본질적인 무엇이 생긴 뒤, 생명현상을 더욱 유연하고 풍요롭게 하려고 비본질적, 부차적 기능들이 생겨났다고 말이다. 비본질적, 부차적인 기능이 인간 특징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여기는 생각을 딱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무엇을 혐오 대상으로 삼는 생각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건강할 때든, 병들었을 때든, 치료할 때든, 감성, 곧 후각은 그 어떤 감각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과 감성이 극단적·순간적으로 맞물릴 때, 감성이 이성을 제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감성은 자연이고, 자연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당위이고, 당위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근대 정신이 이성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왕 정체가 드러났다. 그 왕은 당나귀 귀를 가졌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인간 생명은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끝난다. 인간 모든 정신 현상 중심과 경계에는 감성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말하는 감정은 감지(感知)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이성은 이지(理智)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의지는 지향(志向) 감성이다.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 아니 참된 왕이 귀환했다.

 

 

5. 코 교육학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은 세 명 중 한 명 이상이 각종 비염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는 아마도 절반가량이 그럴 터이다. 그리고 비염은 단순히 비염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많은 경우 틱 장애, 아토피 피부염, 천식, 과민성장증후군, 그리고 우울장애와 결합해 나타난다. 무엇보다 흔히 전형적인 알레르기비염으로 오해받고 있는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이 문제인데, 이것은 우울장애와 직결되어 있다. 우울장애 또한 비염과 비슷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어린이·청소년을 괴롭히고 있는 질병이다. 이런 역학(疫學사회의학적 진실 연장선에 어린이·청소년 자살률 1위 국가라는 비극이 존재한다.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의 비염 문제는 교육 문제, 아니 양육 전반에 걸친 부조리 문제다. 물론 환경오염이나 즉석식품 같은 요인이 없지는 않겠지만 심리적·정신적 요인을 관건으로 보아야 한다. 오직 돈 잘 버는 기계-인간으로 콧대를 세우기 위해 어려서부터 학원·경시대회·연수·봉사를 돌며 점수와 스펙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아이들 인격-인간의 콧대는 무자비하게 꺾이고 만다. 이렇게 콧대꺾인 가 온전할 리 없다. 아마도 염증은 저 심층 자긍심에서부터 생겼으리라. 거기서 솟아올라 급기야 염증은 표층 코에까지 번졌으리라.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 말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아이 자라 어른 된다. 지금 무참히 꺾인 콧대를 지닌 채, 저 아이가 어른이 되면 우리 사회는 대체 어찌 될까? 이른바 대박 난 극소수 아이와 당연히 그럴 수 없는 절대다수 아이가 주종관계에 놓이는 신노예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 사회는 그런 단계로 진입하였다. 미래에는 더욱 확실해질 전망이다. 확실해지는 만큼 참혹한 지옥이 될 터이다. 이 흐름을 누가 얼마나 어떻게 거부하느냐에 따라 희망과 절망이 갈릴 텐데,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아이 교육, 아니 양육 전반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개판민국으로 틀림없이 변질된다.

아이를 건강하고 바르고 아름답게 키우려면, 그 무엇보다도 한 인격으로 절대 존중해주어야 한다. 인간 콧대를 세워주어야만 한다. 아이라고 해서 인격이 어른 반만큼이지는 않다. 아이라고 해서 인간 콧대가 꺾일 때, 멀뚱멀뚱한 채 지나가지는 않는다. 아이도 온전한 인격체다. 아이도 콧대가 꺾일 때, 인간성 파괴를 통렬하게 느낀다.

 

그럼에도 아이는 아이다. 덩치 작은 어른이 아니다. 아이 몸과 마음이 자라 성숙한 생물학적·사회적 인간이 될 때까지 어른들은 자상하게 보살피고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에는 시간만 요구되지는 않는다. 아이 삶이 다채로운 갈래로 펼쳐질 수 있도록 입체적인 가치, 풍요로운 장()을 열어놓아야 한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의로움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숭고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돈이 신이고, 권력이 종교인 자기 삶을 그대로 물려주기 위해 혈안인 우리 사회 어른한테 이 말이 얼마나 물색없는 소리인지 모르지 않는다. 알기 때문에 곡진히 말한다. 지금 괴물인 어른이 아이마저 그렇게 키운다면, 아이는 틀림없이 악귀가 된다. 이 말은 그러므로 경고다.

 

 

6. 코 정치학

 

일본 교토에는 코 무덤(鼻塚)이 있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령에 따라 승전 기념품으로 조선인 코를 베어 가져다 만든 기괴한 무덤이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12만이 넘는다고 하니 당시 인구를 고려할 때, 실로 엄청난 숫자다. 물론 처음에는 수급(首級), 그러니까 목을 베어 오라 했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그 일부로 코를 택했을 듯하다. , 하필 코일까?

 

아마도 코가 인간 존재 자체 상징이라는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가령, “콧대를 세우다”, “콧대가 꺾이다따위 표현에서 나타나는 바와 마찬가지로 코가 한 인간이 지닌 사회적 존재 의의를 좌우하는 표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을 법하다. 그러므로 조선 패망 상징으로서 그 백성 코를 베어 땅에 묻고, 그 영혼 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돌탑으로 찍어 누른 무덤을 만들었던 셈이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도 칼날 같은 사회정치적 퍼포먼스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

 

이 짓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 대접을 받으며 금칠한 사당에 누워 있는데, 코 하나로 남은 조선 백성 원혼은 조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수백 년 동안 잡초 무성한 무덤 위를 떠돌고 있다. 지금이라도 미련 없이 그 버리고 제 나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겉 이름만 대한민국이지 속 알맹이는 아직도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구천을 헤매는 동안 조선은 특권층 부역 집단 서인 노론 손에 농락당하다가 결국 그들을 죽인 제국주의 일본에 팔려버렸다. 유례없이 악독한 통치로 착취·살해를 자행하던 일제가 36년 만에 패망했지만, 일제 패망이 곧 조선 광복은 아니었다. 점령군인 미군이 통치를 시작했다. 군정은 식민지 체제 기본을 그대로 유지하고 특권층 부역 집단을 그대로 재사용해 전체 구조를 미 제국 이익에 맞게 개편했다.

 

단 한 번도 조선 독립을 입에 담지조차 않았던, 미 제국 유학생 출신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서 대한민국은 중첩 부역 국가로 심화하기 시작했다. 부역 집단이 정권은 물론 사회 전 영역을 장악하고 자주민주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죽임으로써 반공주의가 김춘추 일당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동원했던 통일신라서사를 재현해갔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축출되었으나, 박정희가 쿠데타로 부역 국가를 다시 건져냈다. 독립군 잡는 만주군 장교였던 그는 반공, 영남 패권 극대화로 부역 세력을 더욱 강고하게 결집했다. ‘통일신라서사가 완벽하게 재현됐다.

 

박정희는 18년 독재 끝에 김재규가 쏜 총탄에 스러졌다. 자주민주 꿈이 되살아나려는 순간 그가 키운 정치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 노태우가 이어간 부역 군부 통치는 이 땅을 더 지저분한 부역 구덩이로 처박았다. 천신만고 끝에 김대중과 노무현은 진정한 정치, 민주주의를 일부나마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야말로 잠시 숨통만 텄을 뿐이었다. 강고한 부역 집단 기득권 체제를 깨뜨리지 못했다. 일천오백 년에 십 년은 금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뼛속까지 미·일제 부역자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이명박은 단군 이래 최악 수탈통치를 감행했다. 공적 권력을 철저히 사적 이익 추구 수단으로 악용했다. 부역 재벌 마름에서 출발하여 당당히 상속자로 화려하게 끝맺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박정희 딸이 일천오백 년 매판 역사 정점에 등장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먹고 살아야 한다며 부추겼다. 부역이면 어떻고 독재면 어떠냐고 속삭였다. 콧대를 팔아 배를 두드리라고 꼬드겼다. 대중이 지닌 공포, 탐욕, 무지를 극대화했다, 그 아비처럼.

 

박근혜는 그렇게 국정을 농단하다가 민중 손에 쫓겨났다. 박근혜를 벤 자리에 자주와 민주, 그리고 통일 꽃이 피어났던가? 촛불 정부라는 문재인 정권이 부역 세력에게 조리돌림당했던 기억은 참담하다. 무능한 부역 2중대민주당은 자중지란까지 연출하며 권력을 다시 부역 집단에 헌납하고 말았다. 일제 문부성 국비장학생 1호 부역자 아들로서, 스스로 민영화한 대통령으로서 윤석열은 부역 통치 임계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기탄없는 부역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코 무덤 위를 떠도는 원혼이 돌아올 조국은 여전히 없다. 돌아오면 다시 한번 그 코를 베일 텐데, 어찌 돌아오겠는가. 더더욱 수치스럽게 이번에는 부역자 칼에 베일 텐데, 어찌 돌아오겠는가. 살아 있는 사람 콧대를 꺾어버려 자살자가 OECD 국가 가운데 1위인 식민지 조국에 돌아와 그 원한이 어찌 풀리겠는가.

 

오늘 우리가 각자 부역으로 얼룩진 삶을 각성하고 고백하고 혁파해야만 코 무덤 속 저 원혼들이 시공을 가로질러 돌아올 수 있다. 역사를 지배한 저 뻔뻔한 부역 정치 진실을 밝혀 이제라도 자주·민주·통일 길을 열어갈 때, 산 자 콧대와 죽은 자 콧대가 한 시간 한 공간에서 어울려 대동(大同)을 이룰 수 있다.

 

 

7. 코 경제학

 

특권층 부역 갑부 갑질행패는 우리 사회 수준을 가리키는 정확하고 수치스러운 표지다. 저들 천박한 유세 떨기는 그들이 가진 게 돈밖에 없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내 준다. 저들은 근본 없는 것들 콧대 꺾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자기 근본을 돈에 둘 수밖에 없는 것들이야말로 천하에 근본 없는 것들이다. 적어도 근본을 말하려면 이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물론 끝까지 저들은 여기에 의도적 무지를 드러낸다. 아는 순간 곧 파멸이라는 진실만큼은 야차 감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이 휘몰아치고 언론이 떠들어 그나마 법이 들이닥치면 마지못해 저들은 콧대를 90도 가까이 꺾어서 위기를 넘긴다. 물론 이 또한 비즈니스, 정확히는 멍키 비즈니스, 그러니까 협잡(monkey business)이다. 나중에 더 높은 각도로 콧대를 쳐들기 위한 전술이다. 콧대를 꺾는 그 순간에도 저들은 나중에 다시 더 높이 쳐들 쪽을 향해 눈은 치켜뜨고 있다. 부역 자본이 지닌 힘이다. 수탈 경제가 지닌 힘이다. 저들은 이렇게 하여 2013년 통계로 스위스 비밀금고에 980, 조세 회피처에 870조 이상을 쌓아 놓을 수 있었다. 이 돈은 2014년 기준 노인·장애인 복지 본예산을 두 배로 늘려 100년 이상 집행할 수 있는 규모다.

 

저들에게 그 많은 돈을 털린 을들은 어찌 살아가고 있을까? 아무런 잘못도 없이 늘 콧대가 꺾인 채 살아가고 있다. 갑 앞에서만이 아니다. 친구 앞에서도 그렇다. 가족 앞에서도 그렇다. 자기 인생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울 변두리 가난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활용품 실은 유모차를 밀고 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 모습이다. 그 허리는 거의 90도로 굽어 있다. 따라서 정면을 보기 위해서는 반대로 90도 고개를 들어야만 한다.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콧대 각도는 지면과 0도를 유지한다.

 

꽤 오래전 논란거리가 되었던 폴더 할머니가 있다. 폴더라는 표현처럼 상체와 하체가 앞으로 거의 완전하게 접혀 있다. 그 상태로 지하철을 전전하며 재활용품을 모으고 있다. 집이 여러 채라는 둥, 아들이 자가용 몰고 와서 실어 간다는 둥, 악의적 소문과는 달리 집은 옛날에 소유했던 기록뿐이고, 아들은 알코올중독인 일용직 노동자라 한다. 그분 콧대는 당연히 지면과 거꾸로, 그러니까 갑들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90도를 이룬다. 처지가 비슷한 을들 언어폭력 때문에 그분 콧대는 더욱 무겁게 거꾸로 90도로 매달려 있다.

 

참으로 무서운 사회가 아닌가. 갑들 갑질을 당한 을들이 더 못한 을들에게 갑질을 흉내 내어 저지르니 말이다. 갑들이야 처음부터 그렇다 치고, 갑들 갑질을 내면화한 을들 참담한 마음 병이 사회 전반에 검푸르게 번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스톡홀름증후군이라는 서양식 표현도 있거니와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와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 비극이 우리 사회를 이 꼴로 만들었으며 악화일로로 치달아 간다.

 

제국 자본주의가 유일한 이데올로기이자 종교인 세계에서, 그 복마전을 극단화한 식민지 부역 국가에서 을들이 최소한 인간다움으로 콧대를 꺾지 않고도 살아가려면 경제 주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근원에서 재검토해야만 한다. 돈 앞에서 내리는 정치적 결단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8. 코 종교학

 

(1)

 

시각 포르노 시대 신은 거대 유일신이다. 거대 유일신은 이미지 장엄이어서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이므로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소미(小微) 팡이실이 신은 은밀 장엄이어서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므로 냄새를 풍긴다. 냄새나는, 냄새나서 냄새 맡는, ‘큼큼쟁이신이야말로 참 신이다. 코 신이다.

 

(2) 인간

 

스스로 크다고 여겨 거대 장엄을 제유한 거대 유일신 만들어 아바타로 삼았지만 결국 인간은 착취하는 인간(homo rapiens)이 되고 말았다. 착취하는 인간보다 더 알량한 존재가 어디 있으랴. 착취를 포기해야만 인간은 참 신 세계 일원일 수 있다. 참 신 세계 일원은 작아도 알량하지 않다. 작아도 알량하지 않은 인간은 무한한 냄새 결과 겹 속에 살면서 후각을 따라 흐른다. 코 인간이다.

 

(3) 구원

 

거대 유일신은 눈 신이다. 눈 신은 시각 포르노에 중독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시각 포르노에 중독된 인간을 구원할 신은 소미 팡이실이 신, 그러니까 코 신이다. 코 신은 지각조차 되지 않는 생명 후각으로 스며들어 시각 포르노에 중독된 인간과 그 인간에게 착취당한 모든 존재를 구원한다. 구원은 전지전능 허장성세로 하지 않는다. 작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조그만 냄새를 풍기고 맡음으로써 구원한다. 코 구원이다.

 

 

00. 비학 선언: 코가 답이다

 

코는 가장 처음부터 가장 나중까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채 억눌려 있다가

인간이 파멸 위기로 내몰린 상황과 홀연히 마주하게 된

오늘 이 순간 마침내 코의 코임을 되살려

인간이 인간다움으로 구원받게 하는 길을 연다.

그렇다.

코가 답이다.

 

코는 호흡 관문이다.

하여 몸-생명 중심이다.

코는 냄새를 맡는다.

하여 감각-생명 중심이다.

코는 감정 뇌와 직결된다.

하여 마음-생명 중심이다.

코는 나와 남 면역 적합성을 알아차린다.

하여 코는 관계-생명 중심이다.

그렇다.

코가 답이다.

 

코에 치유와 건강으로 가는 길이 있다.

코에 참 인간이 가는 길이 있다.

코에 미래로 가는 길이 있다.

코에 자주·민주·통일, 그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가는 길이 있다.

코에 평등·평화로 가는 길이 있다.

코에 지구 생태계를 살리는 네트워킹 신이 가는 길이 있다.

그렇다.

코가 답이다.

 

코로 느끼고

코로 생각하고

코로 실천하는 비학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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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이 후진 대접을 받아온 까닭은 후미진 틈바구니까지 스며드는 소미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짐승, 아니, 아니 그래서 여자감각으로 치부하여, 앞에서는 아득히 경원하지만, 뒤에서는 드잡이판 벌이는 가부장 제국 압제·수탈 대상이 다름 아닌 후각이다.

 

후각 복권은 그 어떤 반제국주의 혁명보다 근원·급진적이다. 냄새를 맡는 사건은 대체, 얼마나 반-문명이며, -교양이며, -품위며, -인간인가 말이다. 큼큼대다니. 그러나 그래서 큼큼대라. 큼큼대야 생명 근원에는 냄새가 있다는 진리를 깨친다. 그 냄새가, 바로, 녹색 냄새다.

 

반제국주의 녹색 냄새는 비리꼬리하다.

 

반제국주의 녹색 냄새를 맡아 들이는비리꼬리 후각 감각은, 그러면 어디서 날까? 스스로 냄새 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맡아도 들이지 못한다. 반제국주의 녹색 후각은 공명이며 공감이다. 자신이 근원적으로 비리꼬리하지 않으면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제국주의 녹색 후각을 지닌 인간은 반제국주의 녹색 체취를 풍긴다. 반제국주의 녹색 체취 풍기는 인간은 자신을 소미심심 생태계로 유지한다. 소미심심 생태계로 유지되는 인간에게서만 후각은 진정한 해방을 맞는다.

 

후각 해방을 위해 코를 우뚝 깃발로 세운다. 코는 대체 인간에게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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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백색문명에서는 의학도 상식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근원적 경계 사건이 혀와 미주알(항문)서 일어난다. 비대칭 대칭 원리는 그러니까 여기부터다. 혀 감각은 증강된 상태로 작동한다. 미주알 감각은 감약된 상태로 작동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소화·흡수가 끝나면 싸는 행동은 자연이자 당위다. 먹을 때는 주의해서 조금 먹어야 한다. 쌀 때는 놓아버리듯 한껏 많이 싸야 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는 최소한으로 한다. 밖으로 나가는 바는 최대한으로 한다.

 

주의해서 조금 먹는 까닭은 인간이 먹는 음식 대부분이 생명체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그러니까 죽여야 살 수 있기에 그 생명에 절대적 감사를 표해야 한다. 반대로 그 생명체가 자신을 지키려 품은 방어 물질은 삼가야만 산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먹는 일은 다만 죽이는 일이 아니고 공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먹는 음식 전부가 내 일부를 이루지는 않는다. 일부는 내 몸 바깥에서 나와 공생한다. 먹는 일은 결국 생식, 그러니까 성() 행동이다. 거룩한 일이다.

 

먹는 대상은 도구가 아니다. 함께 생명을 향유하고 삶을 영위하는 또 다른 주체다. 다른 주체이므로 한껏 높인 객체로 대우해야 한다. 함부로 잔혹하게 다루고 부리면 안 된다. 식물과 그 이전 생명에 대한 예의를 특히 깍듯이 지켜야만 한다.

 

놓아버리듯 한껏 많이 싸는 까닭은 함부로 많이 먹는 일이 나쁜 이상으로 움츠려 조금 싸는 일이 대단히 나쁘기 때문이다. 극명한 예를 들어 대비한다. 40일 먹지 않으면 영적 세계가 열리지만, 40일 싸지 않으면 영 못 돌아올 세계가 열린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싸는 일은 다만 내버리는 일이 아니고 공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싸는 똥 전부가 폐기물이 되지는 않는다. 일부는 나와 다른 생명에 들어가 공생한다. 싸는 일도 결국 생식, 그러니까 성() 행동이다. 거룩한 일이다.

 

이 비대칭 대칭은 근원적 인간 윤리를 제시해준다. 남에게서 받는 일은 너무 많다고 여겨 최소한으로 하라. 남에게 주는 일은 너무 적다고 여겨 최대한으로 하라. 황금률은 공자, 세존, 기독 말씀 이전부터 인간 몸에 더 야물게 깃들어 있었다.

 

궁극에 닿는다. 근원적 인간 윤리는 산 인간 사이에서 빚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죽인 존재, 죽임당함으로써 살아 있는 존재에 터 하여 구성되었다. 이 진실 품은 혀와 미주알에서 우주와 생명이 발원했다. 여기가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지성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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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재 너머 상도동 들머리에서 과꽃을 본다.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다. 꽃을 향한 중심 시선 때문에 미처 사람을 보지 못한 탓에 가볍게 놀란다. 80대 여성 한 분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꽃 보는 내게 건네는 아침 인사다. "꽃이 벌써 피었네요." 나도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꽃이 벌써 피었네요."


바로 다음 순간 질문 하나가 솟아 오른다. "내가 꽃에 눈길을 주지 않고 여느 행인처럼 서로 본 듯 못 본 듯 마주쳤다면 그가 과연 인사를 건넸을까?" 아니다. 내가 꽃을 보고 있으니 꽃에 관심 두는 '꽃 사람'이 반가워 소정 없이 인사를 건넨 거다. 여기까지는 어제 나가 주는 답이다. 이제 나는 이렇게 답한다. "꽃이 건넨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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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필드(W. G. Penfield)의 호문쿨루스(homunculus)에 따르면 가히 촉각 중추라 할 만한 신체 부위는 손과 입술(과 혀를 포함한 입 주위)이다. 그중 단연 손이다.

 

피부접촉 가운데 대부분을 손으로 한다. 닿기(대기), 만지기, 쥐기, 쓰다듬기, 다독이기, 도닥이기, 문지르기, 비비기, 잡기, 닦기, 씻기, 두드리기, 때리기, 긁기, 간질이기, 누르기, 받치기(받들기), 주무르기, 접기, 펴기, 벌리기, 찌르기, 짜기, 조르기···.

 

여기서 생사가 나뉘고, 애증이 교차한다. 여기서 성장과 퇴행이 엇갈리고, 상처와 치유가 자맥질한다. 여기서 웃음과 울음 쌍곡선이 그려지고, 이별과 상봉 운명이 결정된다. 여기서 한 생이 시작되고 한 생이 끝난다. 여기서 문명이 일어나고 문명이 스러진다. 여기서 지구가 안식하고 지구가 요동친다.

 

제국 백색 손은 소외와 격리를 극단화한다. 제국 백색 손은 기술과 돈을 극대화한다. 하여, 죽음과 증오, 퇴행과 상처, 울음과 이별이 비즈니스 전략으로 둔갑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더 이상 손으로 진단하고 치료하지 않는다. 기계와 화학합성물질이 모든 짓을 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에게 아픈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고장 난 기계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손 의학이다. 손으로 진단하고 손으로 치료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코도 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입도 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귀도 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눈도 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약도 손이다. 의자와 환자가 서로 마주 닿고(대고), 만지고, 쥐고, 쓰다듬고, 다독이고, 도닥이고, 문지르고, 비비고, 잡고, 닦고, 씻고, 두드리고, 긁고, 간질이고, 누르고, 받치고(받들고), 주무르고, 접고, 펴고, 벌리고, 찌르고, 짜면서 생명을 지켜간다.

 

나는 신학 하다가 40대 중반에 의학으로 돌아섰다. 입 쓰는 사람에서 손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이 손 쓰는 사람을 근원에서 요청하는 의학이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다. 치료하는 손을 기다리는 생명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제국주의 기계와 화학합성물질이 일으킨 살상으로 신음하는 숲도 간절하고 화급하게 겸손한 인간 손을 기다린다. 참회와 감사와 흠숭을 실천할 손, 그 두 손을 모으고 나는 오늘도 숲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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