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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쇼크 - 위대한 석학 25인이 말하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ㅣ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2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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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통섭'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영국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통섭을 직접 실천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1996년에 출범한 비공식 모임 '엣지 재단'이다. 엣지 재단은 오늘날 지적, 기술적, 과학적 경관의 핵심에 있는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 기술자, 사업가들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과학과 인문의 단절을 지양하고 여러 분야를 통합하여 새로운 지식과 사고방식을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회원으로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언어 본능>의 스티븐 핑커, <총, 균, 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 <생각의 지도>의 리처드 니스벳, <몰입의 즐거움>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생각에 관한 생각>의 대니얼 카너먼 등 저서와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엣지 재단은 출판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국내에는 스티븐 핑커 등이 참여한 <마음의 과학>에 이어 제레드 다이아몬드, 대니얼 데닛 등이 참여한 <컬처 쇼크>가 소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신간 <컬처 쇼크>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 등 인문학적 주제들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탐색한 신선한 내용의 책이다. 주제 자체는 의사 결정 방식, 예술의 성격, 문화 이론, 디지털 파워 등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각 주제를 자연과학, 수학, 공학 등으로 분석하는 방식은 확실히 신선했다. 사회과학 분야에 종사하면서 사회과학적 연구 방식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는 말 그대로 '컬처 쇼크'였다.
가령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총, 균, 쇠>의 저자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왜 어떤 사회는 재앙적 결정을 내리는가?'라는 글에서 정치학, 경제학, 행정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 다루는 전통적인 문제 중 하나인 의사결정 방식에 대해 진화생물학적 관점으로 분석했다. 또한 예술철학자 데니스 더턴은 인간의 예술적 본능과 예술의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심리학자 칼 융,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견해를 부정하고 진화생물학자인 다윈의 견해를 인용하여 주장을 펼쳤다. 예술철학 하면 보통 철학이나 심리학, 인류학 등 문과 계통의 학문 내에서 논의를 진행하는데, 진화생물학자인 다윈을 인용했다는 점이 신선하고 새로웠다. 그렇다면 정치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다윈을 비롯하여 자연과학 내 이론을 도입할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재미있는 접근법이다.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의 '사회 연결망 이론'도 흥미로웠다. 사회 연결망 이론은 "시야 밖에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 네트워크를 통해 퍼져나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다"(pp.148-9)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친구나 배우자, 형제자매 등의 체중 증가가 나의 체중에도 영향을 미치고, 그들이 달리면 나도 달리고 싶어지고, 그들이 담배를 끊으면 나도 끊게 되는 식으로 영향을 받는다. 가족이나 연인의 얼굴이나 체형, 스타일이 비슷해지는 건 그렇다 쳐도, 친구나 동료끼리 무의식적으로 닮아가는 현상은 놀라울 따름이다. 쉬운 예로 친구들을 만나면 약속한 것도 아니고 같이 산 것도 아닌데 옷이 비슷한 때가 종종 있다. TV, 인터넷 등 대중매체의 영향도 부정할 수 없지만, 다른 집단에 비해 친구나 직장 동료 등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경우 비슷한 정도가 더 높은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정치 참여에 미치는 영향, 인터넷이 사회문화에 미치는 영향 등 디지털 문화의 영향력에 대한 논의가 다수 제시되어 있다. 학술적인 논의가 대부분이라서 다소 어려운 감이 없지 않지만, 학계의 최전방에 있는 학자들이 현재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등을 관찰하면서 읽는다면 유익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학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학문을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다른 학문과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강력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