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얼 퍼거슨 위대한 퇴보 - 변혁의 시대에 읽는 서양 문명의 화두
니얼 퍼거슨 지음, 구세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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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수많은 나라들 중에 왜 어떤 나라는 경제적으로 더 부유하고, 어떤 나라는 빈곤한 것일까?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국제정치학자들은 패권을 예로 들었고, 지정학을 논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학자들은 계급과 자본주의의 폐단을 논했다.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한 사람이자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21세기 최고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어떻게 답할까? 그것을 알 수 있는 책이 바로 그가 2012년에 BBC 라디오4에서 '법치주의와 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신작 <위대한 퇴보>다.  



이 책에서 그는 국가들의 경제적 격차를 야기한 요인으로서 '제도'를 든다. 그는 나라마다 지리적 환경과 문화적 배경, 역사적 경로가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몇 백 년 동안 국가들의 - 특히 서양과 동양의 - 격차가 급격하게 커진 것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법치주의, 시민사회 같은 정치적, 경제적, 법적, 사회적 제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그는 영국의 명예혁명을 든다. 명예혁명은 영국의 의회가 세계 최초로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재산권을 보장받는 선례를 남긴 사건인데, 이를 통해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독립선언 같은 인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법치주의와 같은 제도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실제로 서양 - 정확히는 유럽 - 이 동양 - 정확히는 중국 - 을 경제적으로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17,8세기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전까지 서양은 동양에 비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으로도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17세기에 명예혁명을 비롯한 일련의 변혁이 발생하면서 부르주아의 성장과 함께 자본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었고,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서양의 경제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문제는 제도였던 것이다. 



비교 연구를 해보면 제도적 접근이 더욱 큰 설득력을 발휘한다. 여기에서 거론하고 있는 제도적 변화 중 그 어떤 것도 중국 명나라나 청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와 그의 관리들이 누리던 권력은 반자치적 기업이나 국민의 대표자로 구성된 입법기관 등의 제약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아시아에 상인은 있었을지 몰라도 기업은 없었다. 물론 의회는 말할 필요도 없다. (p.51)



영국 법 제도의 핵심 요소들을 중국에 수입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중국 제국은 국방, 기근 해소, 운하 같은 상업 기반 시설, 농업 지식 배포 등 온갖 종류의 공공재를 제공하려 노력했지만, 극도로 중앙집권화된 관료주의는 엄청난 인구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서양의 기준에 비해) 낮은 세금이 오랜 기간 동안 거의 변동 없이 유지되는 한 재산권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상업과 관련해서는 정해진 법규가 전혀 없었고, 지방관들은 법률이 아닌 문학과 철학 공부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법적 판결보다 타협'을 추구하느라 계약 집행을 민간 네트워크에 미루었다. (p.121)



그러나 이 책은 서양이 어떻게 동양을 앞지를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에서 그치지 않고, 제목 그대로, 그토록 위대했던 서양이 지금 왜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퇴보의 원인 역시 제도다. 민주주의는 다음 세대에게 부채를 이전하기 위한 책임 회피 수단으로 전락했고, 시장경제는 그 기능의 한계를 드러낸지 오래다. 법치주의는 변호사의 통치로 변질되었다. (이 부분에서 사법부는 물론이거니와 입법부에 속한 국회의원, 행정을 주관하는 선출직 공무원 다수가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인 우리나라 현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듯 어떤 국가가 정체 상태에 접어드는 것은 그들의 '법과 제도'가 쇠퇴하여 지대를 추구하는 특권층이 경제와 정치 과정을 모두 지배할 때다. (중략) 규제는 그 기능이 마비되어 경제체제의 취약성만 높이는 지경이 되었다. 역동적 사회에서라면 변화의 주도자 역할을 할 변호사들이 정체 상태 사회의 기생충이 되었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기업의 이해와 거대한 정부 사이의 무인 지대 같은 곳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p.194) 



특히 저자는 시민사회의 변질을 강도 높게 지적한다. 시민사회는 오래전 알렉시스 토크빌이 예찬한 바 있는 미국의 타운 미팅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당시 미국 사회는 시민들이 자치적으로 모임이나 클럽, 단체 등을 결성하여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일이 빈번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로터리 클럽, 보이 스카우트, 걸 스카우트 같은 활동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매우 낮다.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의 활동이 시민사회 활동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자는 회의적이다. "내 페이스북 친구들을 '찔러'대거나 새 페이스북 그룹을 만드는 것으로 해변을 청소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2007년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사는 곳이 멀어져 더 이상 정기적으로 만날 수 없는 기존 친구들과 연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페이스북을 쓰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대상이었던 학생들은 낯선 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하기(내가 해변을 청소하기 위해 썼던 바로 그 방법이다)보다 기존 친구들과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페이스북을 쓰는 경우가 2.5배 더 많았다." (p.160)  



강연록을 바탕으로 한 책이라서 논지의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읽기 쉬웠지만, 좀 더 다양한 사례가 제시되고 치밀한 논증이 이루어졌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학자답게 폴 크루그먼이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규제 강화를 제안한 것에 대한 반박하기도 했는데, 폴 크루그먼의 논지가 정말 규제 강화인지 의문스럽고, 규제 강화말고 다른 대안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시민사회의 변질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립 대학을 비롯한 사교육 기관에서의 활동을 들었는데, 사교육 기관 내의 인적 네트워크(소위 학연)이 특권층의 지대 추구 현상을 고착화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하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영국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사립대학을 포함한 대학, 지역, 군대, 회사, 직업 등의 네트워크가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제도의 적용으로부터 면제되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예를 심심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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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지음, 안진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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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읽은 폴 크루그먼 책 중에 가장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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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지음, 안진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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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의 저서 중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경제학의 진실>,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에 이어 네 번째로 읽은 책이다. 원래는 <경제학의 진실>을 읽은 다음에 바로 읽었어야 순서가 맞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신간인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를 읽은 다음에 2008년에 나온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순서대로 읽는 편이 좋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불황의 경제학>은 2008년 미국 경제위기 당시에 나온 책으로, 그 때만 해도 미국 경제가 전세계로 전파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불황의 늪에서 빨리 빠져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알다시피 세계 경제는 아직도 휘청거리고 있고, 불황 역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보다 못한 폴 크루그먼이 쓴 책이 신간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인 것이다. (빨리 끝내라고!) 이러한 맥락을 알고 두 책을 읽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이 책의 원제는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이다. 해석하면 '불황 경제학의 복귀와 2008년의 위기'쯤 되겠다. 불황 경제학이라는 말이 학문적으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맥락으로 봤을 때 90년대 미 클린턴 행정부 당시 그린스펀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이 진두지휘한 미국의 호황 경제에 대비해 2008년 당시의 침체된 경제 상황에 필요한 경제학을 일컫는 말인 것으로 짐작된다. 불황경제학의 예로서 저자는 1930년대 대공황을 비롯하여 80년대 라틴 아메리카 위기, 90년대 일본의 침체, 아시아의 금융 위기 등을 든다. 각각의 사례를 통해 저자는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경제 상황이 펀더멘탈과는 무관한 흐름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비즈니스 사이클 상의 불황은 한 경제의 근본적인 강점이나 약점과는 거의 혹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튼튼한 경제에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p.30)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저자는 그 나라 정부와 정책에 대한 신뢰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 국가 브랜드 등 이미지, 트렌드 등 경제 외적인 요소 역시 비중있게 다룬다. 경제학자가 경제 외적인 요소를 강조한다는 게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가 유효수요가 중요하다고 보는 케인지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타당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신뢰도, 기대감, 이미지, 트렌드 모두 수요로 연결되는 변수들이기 때문이다.



불황을 타개하는 대책에 대해서도 저자는 케인지언답게 유효수요 증가가 답이라고 말한다. 통화를 팽창시키고, 정부지출을 늘리는 것 - 요즘 유행하는 말로 양적완화다. 이러한 주장은 신간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에서도 되풀이 된다. 약 5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 정부를 보며 폴 크루그먼이 얼마나 답답하고 애가 탔을지 상상이 간다. (오죽하면 제목을 그렇게 지었을까? 우리말 제목만 이렇게 강렬한 것이 아니라 원제 역시 'End this depression now!'다.) 비록 먼저 읽기는 했지만 <불황의 경제학>을 읽고나서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를 다시 읽으면 새롭게 발견하는 내용이 많을 것 같다. 마침 요즘 세계경제가 들썩들썩한데 조만간 꼭 다시 읽어봐야지.  



불황경제학은 공짜 점심이 있는 상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공짜 점심에 손을 대는 방법만 알아내면 된다. 사용할 수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케인스의 세계에서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자원이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미덕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해다.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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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늑대 스토리콜렉터 16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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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책이 드디어 나왔다! 작년 말에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 세 번째 책(시리즈 중에서는 세 번째 책이지만 한국 출간 순서는 다섯 번째)인 <깊은 상처>를 읽고 푹 빠져서 타우누스 시리즈 전권을 구입, 며칠에 걸쳐 읽어치운(!) 적이 있다. 그 때부터 나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팬이 되었고, 여섯 번째 책은 언제 나오나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대망의 여섯 번째 책 <사악한 늑대>가 나온 것이다. 



먼저 넬레 노이하우스의 이력부터 소개해볼까. 그녀는 1967년 독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법학, 역사학, 독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소시지 공장을 경영하는 남편을 만나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살림을 하는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한 그녀는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과 주변의 이웃들을 소재로 틈틈이 미스터리 소설을 썼고, 급기야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자비로 출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명인 데다가 유명 출판사에서 마케팅을 하는 것도 아닌 그녀의 책이 처음부터 잘 팔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고 계속 소설을 냈고 조금씩 인기를 모으더니, 타우누스 시리즈의 네 번째 책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독일 베스트셀러 32주 1위의 대기록을 세우면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여성, 어린이, 동물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와 기득권층의 추악한 이면을 들춰내는 작품을 주로 써온 저자는 신작 <사악한 늑대>에서 소아성범죄, 아동학대에 대해 썼다. 민감한 문제를 소설로 그려낸다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여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만큼 소설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타우누스 시리즈를 이끌어가는 두 인물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이번 작품에서도 맹활약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을 볼 때마다 <CSI 라스베가스>의 길 그리섬 반장과 캐서린을 떠올린다. (물론 비주얼은 많이 다르겠지만......) 상사와 부하 관계이면서도 동료로서 신뢰가 두텁고, 남녀 사이인데도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 않고 우정을 나누는 점이 보기 좋다. 또한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사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고 인물 자체의 성격이 바뀌기도 하는 점이 재미있다. 이 때문에 미스터리 소설 팬도 아닌 내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작품만은 꾸준히 읽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작품은 저자 스스로 '지금까지 썼던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했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타우누스 시리즈 중에서도 초기작들은 길이도 짧거니와 인물 설정과 스토리 구성이 빈약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깊은 상처> 이후부터는 공통된 포맷과 시리즈 전체를 연결하는 스토리 라인은 지키되, 작품마다 변화와 개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프로가 쓴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이번 <사악한 늑대>에서는 기존 작품들의 특징과 장점만 응집되어 있어서 타우누스 시리즈를 집대성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령 '사악한 늑대'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빨간 모자'라는 유명한 동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점은 저자의 대표작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과 비슷하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점, 기득권층의 추악한 이면을 들춰낸다는 점 역시 기존 작품들과 유사하다. 이러한 넬레 노이하우스 작품만의 특징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번 작품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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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럴 땐 이렇게 - 분야별, 상황별, 주제별 영어 번역 강의 한영 번역, 이럴 땐 이렇게
조원미 지음 / 이다새(부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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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번역에 관심이 많다.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번역에 관심이 많은 것도 있지만,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고, 직업적으로도 필요해서 자연스럽게 번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대학교 때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번역이 외국어를 해석하는 것 이상의 고차원적인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도 보면 번역을 투잡이나 부업 정도로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번역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번역 자체도 힘든 작업이거니와, 요즘은 독자들의 외국어 실력이 많이 높아져서 유명 번역가들도 오역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일을 투잡이나 부업으로 해보겠다? 어림없는 소리다.



각설하고, 번역에 관심이 많고 직업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책을 한번쯤 진득하게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중에 있는 책을 살펴보았더니 어째 번역에 대한 책이라고는 통번역대학원에서 쓰는 것으로 보이는 정식 교재나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한 소개서 또는 번역가의 생활에 대해 쓴 에세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는 번역가가 될 것도 아니니 통번역대학원 교재는 볼 엄두가 안 났고, 그렇다고 그냥 영어 해석이나 독해 교재를 보자니 이건 번역이 아니다 싶었다. 그러던 중에 만난 책이 바로 <번역, 이럴 땐 이렇게>다. 고려대-맥콰리대 통번역 프로그램 교과과정 연구 전임을 지내고 있는 전문 번역가 조원미가 쓴 이 책은 나같은 초보자들도 알기 쉽게 구체적인 번역 기술과 사례가 정리되어 있고,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한 설명, 번역을 잘하는 방법 등 다양한 읽을거리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총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섹션은 주로 문장 차원에서 좋은 번역을 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모국어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어 통역사, 번역가로 활동한 바 있는 작가 요네하라 마리 역시 비슷한 의미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외국어(또는 모국어)로는 다양한 표현이 있을 수 있고 문맥에 따라 쓰는 표현이 따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번역가(또는 통역사)는 적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섹션은 보다 구체적인 번역 사례로서 정치, 경제, 문학, 과학 등의 장문을 번역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원문과 배경지식, 번역 강의, 학생번역, 관련설명, 수정번역 순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독학으로 공부하는 학습자에게도 유용할 것 같다. 이 부분은 첫번째 섹션을 충실하게 학습한 다음에 공부하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 세번째 섹션은 부록으로, 구체적인 번역에 대한 질문, 번역하면서 느낄 수 있는 어려움,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한 궁금증 등이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나는 번역기의 등장으로 인해 번역가 수요가 줄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번역기 때문에 번역물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시대에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구글 번역기 등이 있긴 하지만 번역기라는 기계는 문장의 구조를 바꿀 수도 없고, 특히 다의어를 그 문장에 맞는 적절한 뜻을 찾아 번역할 수 없습니다. (중략)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기 때문에 번역기가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p.260) 번역을 그저 기술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번역기의 번역이나 번역가의 번역이나 비슷비슷하게 보이겠지만, 번역을 또 하나의 창작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 둘이 결코 같아 보일 수 없다. 번역가 역시 이 사실에 유념하여 번역기가 대체할 수 없는 경지의, 완벽한 번역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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